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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7/29(금) 아침 일찍 집사람의 진료를 위해 경희의료원에 왔다. 집사람을 의료원 입구에서 내려주고 주차를 한 후에 바로 옆에 있는 경희대학교로 갔다. 4년 전(2018-06-02, 토) 경희대 유네스코학생회(KUSA) 동문들(푸르나 모임)과 부근의 홍릉수목원 탐방을 한 후에 잠깐 모교에 들른 일이 있다. 정말 오랜만의 방문이었는데 학교의 모습이 너무 많이 변해서 어리둥절할 정도였다. 당시엔 시간이 많지 않아 정문에서 본관까지만 가보고 말았을 뿐인데도...

내가 변했다고 표현하는 건 내 학창생활 기간인 1970년대 이후를 얘기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희대를 떠난 1994년 이후의 변화를 얘기하는 것인데도 그렇다. 나는 경희학원의 일부인 경희고등학교 출신으로서 1960년대 말부터 이 캠퍼스에서 생활했다. 1970년대에 경희대를 다녔으며, 대학, 대학원 석박사를 마친 후에 모교에 남아 1994년까지 경희대 설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의 곁에서 일했었고, 제3캠퍼스인 평화복지대학원에서 강의했기에 남들보다는 이 학교에 대해 많이 아는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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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대 정문 안 주차관리실 부근에서 본 경희의료원(우). 이젠 자동화된 주차관리기만 있을 뿐, 전에 우릴 반겨주며 인사를 해주시던 수위 아저씨들이 사라졌고, 정문 수위실도 폐쇄됐다. 의료원 왼편에 새로운 건물이 들어서있다. "후마니타스 경희대학교 암병원"이라 쓰여있다.

 

그래서 이번엔 경희 캠퍼스 전체를 돌아보기로 했다. 변화된 모습을 촬영키 위해 소니(Sony) α7R MIII 미러리스 카메라까지 들고왔다. 체감 31.4도의 높은 온도에서 가방 두 개를 메고, 카메라를 들고 그 넓은 30만 평의 캠퍼스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려니 이게 보통 일이 아니었다. 세 시간 정도를 돌아다니며 촬영을 한 후 탈진하여 지금은 정문과 가까운 청운관의 등나무 휴게실에서 트레비 라임 소다수 두 병을 사다 마시며 글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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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운관 앞 휴게실. 더운 날 세 시간 정도 따가운 햇살을 받아가며 돌아다니다보니 얼굴이고 팔이고 다 검게 타버렸다.

 

오늘 모교에 들르니 우선 정문부터 바뀌었음을 알게 된다. 정문인 등용문(登龍門)은 경희대의 전신 신흥대학의 종합대학 승격을 기념하여 1955년에 세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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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용문의 모습이 뭔가 어색한 느낌이고, 그 왼편이 허전한 게 추억이 잘려나간 느낌을 준다. 그리고 오른편에 전에 없던 큰 건물이 들어섰다. 치과병원과 치과대학이다. 원래 치과병원은 의료원내에 있었다. 

 

등용문의 왼편은 나무들이 가득한 작은 숲이었고, 그 숲 안쪽엔 작은 천이 흐르고 있었다. 나무들은 사라지고, 작은 천이 복개되어 길이 났으니 매우 낯선 변화이다. 70년대부터 90년대 초까지는 등용문 왼편이 막혀있었다. 전에 없던 마을버스가 경희의료원을 목적지로 개설되어 문 왼편이 마을버스의 진입로로 바뀌어 버렸다. 전엔 학교로 진입하려면 꼭 통과해야 하는 게 등용문이란 생각이 들었는데 이젠 아니다. 문이 아니라도 들어갈 수 있는 도로가 왼편에 나있으니... 그래서 등용문은 이제 서대문의 독립문처럼 도로상의 유적인양 서있다. 왼편의 상황이 그런데다 오른편 뒤로 들어선 큰 건물로 그쪽은 시선이 봉쇄되니 뭔가 언밸런스한, 문이 오른편으로 기운 느낌이다. 

 

등용문은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성문 형태였던 홍예문(虹蜺門)식 석축의 건축미를 가진 문이다. 물고기가 중국 황허강 상류의 급류 용문(龍門)을 오르면(登) 용(龍)이 된다는 고사에서 지어진 이름이 등용문이다. 이 문을 지나는 학생들이 사회에 나가 어려운 관문을 뚫고 출세하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원래는 아래 사진처럼 중간의 큰 문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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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때는 문 왼편엔 한자로 신흥대학교, 오른편엔 신흥대학교대학원이라 쓰여있다. 단과의 신흥대학(新興大學)에서 종합대학으로 변신한 것이다. 실제로 등용문은 종합대학으로의 승격을 기념하여 건립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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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중에 오른쪽 날개가 추가되어 두 입구의 역할이 분담되었다. 중간은 차량을 위한 문, 작은 문은 사람들이 출입하는 문으로... 그리고 이 때는 학교 이름 표기가 경희대학교로 바뀌었다. 1960년 3월에 학교명이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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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등용문 안쪽으로 들어섰다. 이 어디 문다운 느낌이 있는가? 여기서보아 오른편이 터져있으니... 

오른편 위로 Humanitas라 쓰인 경희대 암병원 건물이 들어섰다. 2000년대에 들어서 경희대가 인문교육을 중시하며 내세우는 기치 중의 하나가 "후마니타스"이다. 이는 "고대 라틴어로서 인간, 인류를 지칭함과 동시에 인간을 만드는 규범과 행동을 포함한다. 이의 의미는 대체로 세 가지 범주로 나뉠 수 있다. 휴머니즘, 인간, 인류, 인류애, 인도, 인도주의, 인문정신 / 문화, 문명, 양육 / 친절, 은혜, 예절." 경희대의 후마니타스 인문교육은 현대화되고, 보다 조직화된 교양교육으로 자리잡았으며 교육계에 신선한 화두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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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문을 들어서면 편의점, 카페 등이 들어서있는 노란 건물이 보인다. 90년대 중반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알고보니 이 건물은 대학교에 속한 것이 아니라 의료원의 일부란다. 물론 모든 사람들이 이용할 수 있다. 그 뒤로 보이는 흰건물은 경희대 청운관(靑雲館)이다. 전에 골프연습장이 들어서 있어서 길 건너편에 있던 체육대학 학생들이 골프 실습을 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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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시탑("문화세계의 창조" 탑)을 정면으로 보고 길 중간에서 찍은 사진이다. 오른편에 핑크빛 건물이 보인다. 아주 오래전엔 체육대학과 체육관이 있던 곳인데 지금은 체육대학이 제2캠퍼스인 국제캠퍼스(전 수원캠퍼스)로 옮겨갔고, 다른 건물이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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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로 이 건물이다. 건물의 이름은 아래 사진에서 볼 수 있는 바처럼 "네오 르네상스(Neo Renaissance)관"이다. 이는 1980년대에 경희대의 창립자인 고 조영식 박사의 저서 "오토피아(Oughtopia)"에서 다룬 2nd Renaissance를 달리 부르는 용어이다. 새로운(neo) 르네상스를 일으켜 문명의 종말적 위기를 향해 치닫는 인류사회를 재건하자는 거창한 취지에서 만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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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경희대 창업보육센터, 입학처, 경희사이버대학교 및 대학원이 들어서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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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네오 르네상스관 맞은 편의 청운관(靑雲館)이다. 청운관엔 식당, 서점, 헬스장 등 학생들을 위한 복지시설들이 들어서있다. 우리나라의 수많은 대학들에 흔한 것이 청운관이란 건물이다.^^ 청운의 뜻을 품은 젊은이들의 요람에 있음직한 건물 이름이다. 마침 맑은 날이라 푸른 하늘에 구름이 떠있어서 청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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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5년에 건립된 교시탑이다. 한국전쟁 직전에 경희대학교가 창립되었다. 그게 1949년 5월 18일이다. 나중에 5.18 광주 민주항쟁과 겹쳐지는 날이 되어 창립일의 의미가 퇴색되긴 했지만 그 날짜이다. 그래서 1980년 이전엔 대내외적인 대학 창립일 행사들이 거행되곤 했는데, 그 이후 90년대초까지는 그런 행사들이 대폭 축소되어버렸다.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다. 경희대 창립 직후 한국전쟁이 일어났고, 오랫동안 한국은 지독한 경제난, 정치난을 겪었다. 그런데 경희대가 그 당시에 교시를 "문화세계의 창조"로 정했다는 건 놀라운 일이다. 그런 상황에서 "문화"를 논하다니? 사실상 이 당시의 "문화"란 단어는 상아탑 안에서나 쓰일 말이지 일상생활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고 한다. 이 탑의 맨 꼭대기엔 대학의 교표(emblem)가 자리하고 있다. 맨아래의 네 개의 축은 럭비선수들이 스크럼을 하는 자세를 닮게 디자인한 것으로 단결과 일치를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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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5년, 나와 캠퍼스 커플이던 집사람(고성애)이 대학 3학년 때의 사진이다. 이 땐 지금과 달리 교시탑 잔디밭 주위를 막는 흰색의 차단용 설치물이 없어서 이렇게 교시탑 위 잔디에 앉아 사진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당시엔 학교에서 인정하는 공식 사진사 한 분이 교시탑 주위에 있다가 원하는 사람들의 사진을 (유료로) 찍어줬다.(당시엔 자신의 카메라를 가진 사람들이 거의 없던 시절이어서 대개 프로 사진사들에게 사진을 부탁해야했다. 칼라 사진이 등장한 것도 70년대 초반이다. 오래된 사진이라 색상이 바랬는데 희한하게 붉은 색조가 많은 사진이 되어 버렸다. 원래는 붉은 색이 가장 빨리 날아가 버리는데...) 그러고 보니 집사람 뒤에 있었던 영산홍(映山紅)은 지금은 없어졌다.


경희대학교의 이름 “경희(慶熙)”는 종로구 신문로(새문안로)의 경희궁(慶熙宮)에서 따온 것이다. 경희궁 자리가 예전 서울고등학교가 있던 곳인데 경희대 설립자 조영식 박사께서 한동안 그 학교의 체육교사(송구부 담당)로 근무하신 바가 있다. 그래서  그곳에 있던 궁의 이름 "경희"의 뜻에 대해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 한다. 조 박사께서는 조선시대 영정조 시대의 정궁 경희궁과 그 배경 시기인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의 두 왕에 의한 문예 부흥 운동에 큰 관심을 보였다.(그래서 그분의 책에 "2nd 르네상스"에 관한 언급이 있는 것이다. 네오 르네상스관이란 건물은 그것의 보다 적극적인 표현이다.) 

 

재미있는 것은 그 서울고등학교 교사 시절에 만난 분들 중 박노식(당시 지리교사-예전 그 유명한 중고교의 '지리 부도'를 만드신 분), 조병화 시인(당시 국어 교사-물리학과 출신의 동경유학 시인), 양병택 박사(당시 영어 교사, 허먼 멜빌의 백경을 처음 번역한 분으로 영문학계에서 잘 알려지신 분) 등을 경희대 교수로 나중에 초빙하셨다는 것이다. 이분들은 나중에 각각 부총장, 문리대학장/음악대학장, 그리고 사범대학장을 역임하였다. 심지어 당시 견실하고도 책임있는 서울고 송구부 주장이던 제자 주성완은 창립자의 조카사위가 되고, 정치외교학과의 교수가 되었으며, 재단을 책임지는 사무국장도 겸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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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를 형상화한 둥근 판 위에 대학의 교표가 붙어있는데, 이는 유엔(UN) 엠블럼의 디자인 위에 한자로 대학이라 쓴 것이다. 이는 경희대학교의 전신인 신흥대학 시절부터 교표로 사용되어 온 것이다. 신흥대학은 애국지사인 이회영, 이시영 선생의 일가가 독립운동을 할 젊은 지도자들을 양성키 위해 만주에 세운 신흥무관학교의 후신이었다. 이 대학이 재정위기에 처했을 때 이를 약관 28세의 청년이 인수했고, 그가 경희대 설립자 고 조영식 박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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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1년에 제정한 경희대 교표. 유엔 정신을 상징하는 올리브 나무가 세계지도를 둘러싸고 있는 도안 위에 신흥무관학교와 신흥초급대학의 교표인 '대학'(大學)이라는 문자를 올려놓은 것이다. 중간에 세계 지도가 있고, 그걸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잎사귀가 감싸고 있다. "평화로운 세계"를 갈망하는 인류의 뜻이 담겨있다.

하지만 현재는 경희대 교표가 변경되었다. 아래의 다소 복잡하지만 나름 멋진 것이 새 교표이다. 이것은 경희대의 제3캠퍼스인 우리나라 최초의 국제대학원, 평화복지대학원(광릉) 로비에 설치된 부조상을 원본으로 제작한 것이라 알려져 있다.(이는 한 때 평화복지대학원의 엠블럼이기도 했다.) 그런데 그 부조상은 어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란 말인가?^^; 원래 그 디자인은 조영식 박사께서 당시 경희대 미술교육과의 양규희 교수에게 의뢰하여 만든 것이다.(그 내용에 대해 상의하는 자리에 내가 함께 있었기에 이에 대해 잘 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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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교표가 추구하는 바도 전의 것과 다르지 않다. 좌우의 배경이 학문과 책을 상징하는 양피지인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이와 함께 하는 인류(후마니타스)는 휴머니즘에 근거하여 남자는 글로벌 패밀리즘(global familism/四海一家 사상)에 기반을 둔 Global Cooperation Society(조 박사가 생전에 펼친 GCS 운동)를 상징하고 있고, 여자는 비둘기와 올리브 잎사귀를 통해 평화를 지향하고 있다. 이런 기치를 높이 들자는 의미에서 중간에 횃불이 있고, 그 아래 양옆으로 다시 평화를 상징하는 올리브 리쓰(wreath)가 있다. 그리고 그 맨 아래 중간에 있는 것은 경희대의 상징목인 목련의 꽃이다. 

 

목련이 상징하는 바는 우리의 유명 가곡 목련화(조영식 작사, 김동진 작곡)에 그대로 그려져 있다. 이 시는 1974년 경희대 25주년 행사를 앞두고 조 박사께서 대서양을 횡단하는 비행기 안에서 지으셨다. 당시 음대학장이었던 가곡 "가고파"를 작곡한 김동진 교수가 이 시를 위한 작곡을 했고, 그 결과가 "불후의 한국가곡" 목련화였다. 이 노래는 학교창립 25주년 기념 공연, 경희 칸타타에서 당시 음대의 엄정행(경희대 졸업생) 강사에 의해 불려졌다.(이 때의 공연 내용은 데카레코드에서 LP로 제작했다.)  

 

목련화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희~고 순결한 그대 모~습 / 봄~에 온 가인과 같고

추운~ 겨울 헤치고 온 / 봄 길~잡이 목련화~는

새 시대의 선구자~요 / 배달~의 얼~이로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순결하고 / 그대처럼 강인하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 나 아름답게 살아가리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내일을 바라보~면~서 / 하늘보고 웃음짓~고

함께 피고 함께 지니 / 인~생의~ 귀감이로다

그대 맑고 향긋한 향기 / 온누~리 적~~시네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그대처럼 우아하게 / 그대처럼 향기롭게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 나 값~있게 살~아가리

오 내 사랑 목련화~야 / 그대 내 사랑 목련화~야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 / 나 값~있게 살아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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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집에 보관하고 있는, 세계적인 유명 레이블 데카(Decca)레코드에서 출시한 경희 칸타타의 LP이다. 오른편에 핑크 박스를 그린 곳에 한자로 목련화라 쓰여있다.

 

경희대의 교화(校花)가 목련으로 정해진 것 역시 창립자의 뜻이었다. 본인으로부터 직접 전해들은 바로는 목련이 조 박사의 모친인 강국수 여사께서 가장 좋아하던 꽃이자, 자신에게는 모친을 상징하는 꽃이라 한다. 이 노래 목련화가 대중들에게 알려진 가곡이 된 계기는 경희대 동문으로서 70년대의 TBC(동양방송)의 드라마 PD였던 분이 당시 이 방송국에 특채된 탤런트 장미희가 출연하는 인기 드라마의 주제곡으로 사용했던 것이다. 흰 목련은 순결, 무구, 정직을 상징하며, 이는 일찍이 공산주의자들에게 남편을 잃고 조 박사를 홀로 키운 강국수 여사의 이미지이기도 하다. 그 드라마에서 장미희가 그렇게 그려졌으며, 그녀가 화면에 등장할 때 배경음악으로 엄정행 교수가 부르는 목련화가 흘러 나왔다. 매스 미디어의 힘은 강하다. 

 

교표의 중앙에 쓰여있는 문구는 창립자 조영식 박사의 책 오토피아(Oughtopia, "당연히 지양해야할 미래사회"의 의미) 영문판(1981, Pergamon Press, UK)에 수록된 문장에서 발췌한 것이다. 
 

"The World is a Global Village and the Peoples of the World are One Human Family. May We Strive for Peace and Humanity with the Spirit of Global Cooperation Society." 즉, "세계는 지구촌이며 세상 사람들은 하나의 인간 가족이다. 지구협동사회의 정신으로 평화와 인류애를 달성키 위해 힘쓰자."는 내용이다. 

 

등용문에서 쳐다볼 때 그 맨 끝에 보이는 것은 본관이 아니고 목련나무가 좌우에 배치된 교시탑이다. 4월이면 교시탑 주위엔 목련화 흰꽃이 만발한 가운데 아주 화려한, 붉은 듯 주홍색을 띄는 홍철쭉과 비슷한 영산홍들이 서있었다. 조 박사는 이것이 의도적인 배치라고 하셨었다. 희고 순결한 꽃 옆에 정열적인 젊음을 상징하는 영산홍을 배치하신 것이라고... 그리고 처음엔 교시탑 뒤로 본관의 웅장한 석조 건물이 보이도록 설계하려다가 길을 왼쪽으로 살짝 비틀어 그 뒤가 보이지 않도록 하신 것이라는 말씀도 하셨었다. 등용문에서부터 멀리에 있는 본관이 직접 보이면 재미(?)가 없다는 것이다. 오히려 뒤의 녹색의 큰 나무들을 배경으로 한 교시탑까지는 그걸 보며 걷고, 거길 지나 길 양옆의 큰 나무들 사이로 조금씩 본관이 보이도록 한 것이라는 것. 그러다 본관 분수대 앞에 이르렀을 때 고딕 양식의 웅장한 본관 건물 전체의 모습과 그 중앙에 버티고 선 도리아식의 높은 석조 기둥이 보는 사람을 압도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로써 본관을 보는 사람들이 저절로 감탄사를 내뱉도록 하고자... 영화 기생충 식으로 표현하자면 "그분은 다 뜻이 있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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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시탑 오른편 길. 중간에 있던 대운동장으로 향하는 선승문(善勝門)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지만 뒤에 엄청난 규모의 건물들이 가까이 들어선 바람에 선승문이 주던 위엄은 온데간데 없다. "이겨도 정정당당히, 선하게 이기자"는 의미로 지은 이름 선승문. 이젠 살짝 초라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 문도 결코 작지는 않다. 사진의 선승문 기둥 옆을 걸어가는 한 사람의 크기와 비교해 보면 잘 알 수 있다. 개선문은 싸움에서 이기고 돌아옴을 축하하는 문이지만 이 문은 전투가 아닌 스포츠에서조차 선하게 이기라는 교훈을 담은 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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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승문에 이르기 직전에 예전 대운동장이 있던 곳으로 뚫린 도로가 있고, 거기엔 위와 같은 건물이 보인다. 대운동장의 주빈석(본부석)이 있던 자리에 들어선 건물이다. 시계탑이 있는 저 건물은 아름원(행복기숙사)이다. 지어진 지 오래지 않은(2017년 건립) 이 건물의 시계탑을 보니 생각나는 게 있었다. 


이게 대운동장의 모습이라니?^^; 황당할 지경이다. 오래전(Circa 1979)에 대운동장에서 경희학원 내의 온가족이 함께 모여 대운동회를 하던 때의 사진을 하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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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집사람과 연애하던 당시에 대운동장의 북쪽 스탠드 코너에서 찍은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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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원의 시계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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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진은 미국 커네티컷주 뉴브리튼시에 소재한 경희대의 자매교 센트럴 커네티컷 주립대학교(Central Connecticut State University)의 건물 중 하나이다. 현재는 University이지만 내가 조 박사님과 함께 이 대학을 방문한 1990년대 초만해도 이 대학은 College에서 승급하지 오래지 않은 때였다. 당시에 조 박사님께서 건물 위의 시계탑을 보시고 "저런 시계탑을 우리 학교에 하나 만들어야겠다."는 말씀을 하셨었다. 아름원 옥상의 시계탑을 보는 순간 그 기억이 떠올라 난 잠깐 미소를 지었다. CCSU의 시계탑과 아름원의 것이 똑같지는 않지만 여기서 받은 좋은 인상에 의해 아름원의 시계탑이 서게 된 것이리라. 작은 생각이 실현되는 데도 30년 가까운 간극이 생긴다. 경희 캠퍼스의 많은 창조물들이 그렇듯 결국은 이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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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대운동장 안으로 들어가 봤다. 애처롭게 잘려진 관중석의 모습이 중간과 오른쪽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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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름원 바로 오른편의 건물은 전의 그대로이다. 현재도 의과대학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그 오른편의 새 건물은 치과대학이다. 다시 그 오른편의 벽돌 건물이 역시 새로 지어진 치과병원인 것이다. 언젠가는 예전 대운동장의 흔적인 낡은 관중석도 다 철거되리라는 생각이 든다. 한 때는 경희학원의 각급학교 인원들 모두가 모여 축제를 열던 곳이다.(상기 사진 참조) 이젠 기억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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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려져나간 대운동장 관중석에 올라가서 찍은 이 사진에서 오른편의 건물은 이과대학이다. 멀리 왼편에 보이는 건물은 평화의 전당(대강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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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승문으로 향하는 길에서 올려다보고 찍은 이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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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승문 언덕(2000년대에 재학했던 허약한 후배들이 이를 "헐떡고개"라 부르기 시작했단다.)을 올라서면 저 앞에 문리대 건물이 보인다. 그리고 왼편 배롱나무꽃 아래 길로 올라가면... 예전에는 거기 양호실이라기엔 꽤 컸던 의국 건물이 있었다. 현재는 그 건물이 안 보이기에 궁금해서 올라가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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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호실 의국 건물 자리가 이렇게 변했다. 옛 흔적은 왼편 상단의 기둥과 다른 한 켠의 같은 모양의 기둥 뿐이다. 누군가가 벤치에 앉아있는 형태의 동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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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식 양복을 입은 비교적 젊은 얼굴인데? 오른편에 뭔가 쓰여진 오석(烏石)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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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 인혁당(인민혁명당) 사건, 그 날조된 사건으로 희생 당한 이수병 선생을 추모하는 동상이다.-_- 아래의 설명문의 내용은 "Google Lens" 기능을 이용하여 이 사진에서 텍스트를 추출했다.(Thanks Google!)

고령(苦嶺) 이수병 선생 추모동상

 

1936. 12. 3 (음력) 경남 의령 부림면 출생

1959. 3. 정경대 경제학과 편입

1960. 11. 경희대학교 민족통일연구회 결성

1961. 2. 민족일보 입사 

1961. 5.13 남북학생회담 <환영> 및 민족통일추진궐기대회에서 연설

1975. 4.9 인혁당 재건위 사건으로 사형

2007. 1.23 재심으로 대법원 무죄판결

2007 2.21 경희대 명예졸업장 수여

 

경희 총민주동문회·이수병 선생 기념사업회 

여는날 2015년 11월 7일 

조각 강성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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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상이 들고 있는 책에 쓰인 글을 보자. 이런 얘기를 하면 경찰이나 중앙정보부(KCIA)에 잡혀가던 시절이다. 근데 그것도 모자라 엉터리 재판으로 죄없는 이를 사형에 처했다니...ㅜ.ㅜ 그 시절은 무단정치의 암흑기였다. 

 

양호실 건물이 있던 곳 한 켠에 아래 사진과 같은 비가 있었다. 문인 주요섭을 위한 문학비이다.(비 뒤에 예전 건물의 기둥 하나가 더 보인다.) 그는 주요한 시인의 친동생으로서 잘 알려진, 단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를 쓴 문인이다.(이 제목에서 배우 김진규, 최은희, 전영선 등의 이름이 생각나는 분은 노친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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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때 경희대에서 교편을 잡았던 주요섭 선생의 문학비이다. 비의 내용은 역시 구글 렌즈(Google Lens)를 이용, 사진에서 텍스트로 추출했다. 

음력으로 보름께나 되어서 날같이 밝은데 은빛 같은 흰 달빛이 방안 절반 가득히 차있었읍니다. 나는 그 흰옷을 입은 어머니가 풍금 앞에 앉아서 고요히 풍금을 타는 것을 보았읍니다.

 

어머니는 돌아가신 아버지의 옷들을 하나씩 하나씩 쓸어보고는 장롱에 넣었읍니다. 그 옷을 다 넣은 때 장롱문을 달고 쇠를 채우고 나를 안고 자리로 돌아왔읍니다.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없이 가만히 서계십니다. 사르르 바람이 와서 어머니 모시치맛자락을 산들산들 흔들어주었읍니다. 그렇게 산 위에 가만히 서있는 어머니는 다른 때보다도 더 한층 이쁘게 보였읍니다.
 

단편 "사랑방 손님과 머머니" 중에서

 

여심 주요섭 짓고

일중 김충현 쓰다

 

1984년 4월 29일에 세우다.

 

뒷면엔 주요섭 선생의 삶이 정리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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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심 주요섭 선생은 1902년 11월 24일 평양 서문밖의 신양리에서 주공삼 목사님의 둘째아들로(형은 주요한 시인) 태어나 1972년 11월 14일 이 세상을 떠나셨다. 선생은 일찌기 숭실중학 일본 청산학원대학을 수업하시고 중국 상해 호강대학 및 미국 스탠퍼드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으셨다. 선생은 1921년 매일신보 신춘문예에 단편 "깨어진 항아리"가 당선되어 문단에 나오신 후 50년간 단편 40여편과 장편 10여 편을 남기셨다. 선생의 작품세계는 초기의 저항의식과 중기의 휴머니즘 사상과 후기의 현실 고발을 잘 그려낸 특출한 작가이셨다. 또는 선생은 투철한 애국애족정신으로 3.1운동에 가담하여 옥고를 치루신 적도 있으시며 직선적이고 진실한 대학자이셨다는. 선생은 여류수필가 김자혜 여사와 결혼하시어 큰아들 북명, 둘째 아들 동명과 딸 승희를 두셨고 그간 단편집 "북소리 둥둥" 등 다수의 창작집을 가지셨다. 오늘 선생이 타계하신 지 12주기를 맞이하여 제자 후학 문인들의 정성으로 경기도 파주군 금촌기독교공원묘지에 선생의 문학비를 세우다.

 

1984년 4월 29일

 

여심 주요섭 선생 문학비 건립위원회

위원장: 백철

부회장: 전숙희, 조경희, 서정범

간사: 유승규, 최진우, 진용우

문하생 김해성 짓고, 서강 정덕채 쓰다.

 

이 비를 세운 분들 중 부회장 두 분의 이름을 보니 감회가 새롭다. 내가 1990년대 초에 "한국수필" 지를 통해 수필가로 등단할 때 심사를 하셨던 분들이다.(당시 조경희 여사가 한국수필 지의 주간이셨다.) 주요섭 선생이 경희대 국문과에서 교수로 계실 때 서정범 교수가 그의 제자 중 한 분이셨다고 들었다. 주요섭 선생은 미국 스탠퍼드대학교의 교육학 석사이기도 하여 영문학과에서 강의하신 일도 있는데 그 당시의 대학원 제자 중 한 분이 이 비를 세울 때 간사로 일한 영문과의 진용우 교수이다. 전에 가까이서 뵈었던 세 분은 이제 다 고인이 되셨다. 
 

양호실지(址)에서 나오며 앞을 보니 잘살기운동 및 밝은사회운동 탑 두 개가 보인다. 잘살기운동은 전후의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한 운동으로서 새마을운동과 비슷한 운동이고, 밝은사회운동은 1980년대의 먹고 살기는 좋아졌으나 정신적으로 피폐해지는 현대인들이 보다 밝고도 보람있는 삶을 살게 하기 위해 벌인 운동이다. 배롱나무(목백일홍) 꽃에 가린 탑의 모습이 멋지다. 물론 이 배롱나무도 우리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엔 없던 것이다. 그 땐 대전 이남에만 이 나무가 있었고 지구온난화 덕분(?)에 이젠 서울에도 흔해졌다. 원래는 능소화처럼 고궁의 담이나 양반가의 마당에나 있던 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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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롱나무는 꽃이 안 핀 상태에서도 관상수로 그만한 것이 없다. 근데 꽃까지 피어있으면 그건 overki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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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 탑 중간의 가교처럼 여러 마리의 사슴들이 있고, 중간에 밝은사회 엠블럼(emblem)이 보인다. 지구의 위쪽에 "밝은사회"라 쓰여있고, 그 아래 GCS란 글자가 달려있다. Global Cooperation Society, 지구협동사회를 가리키는 단어이다. 국내적으로는 밝은사회운동이 있었고, 이게 국제적으로 퍼지면서 GCS Movement가 되었다.(이 운동은 여러 나라에 로우컬 챕터들을 가진 국제클럽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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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밝은사회운동 탑의 측면에 상형문자를 흉내낸 한글이 쓰여있다. 탑 뒤로 왼편은 한의과대학, 오른편은 이과대학이다. 

 

밝은 사회 운동탑

 

앞을 보고 살아가자 내일위해 살아가자

창조로 길을 열고 노력으로 살림세워 

조국번영 위해 모두 함께 나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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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 옆의 큰 플라타너스는 경희의 Old Boy들은 본 적이 있는 나무일 것이다. 여기에 예전 "돌다방"이 있었다. 석주 네 개가 서 있고, 등나무 넝쿨이 그늘을 만들어주던 돌(아니고 실은 일본어 '도끼다시'로 불리던 시멘트 인조대리석)로 만든 테이블과 의자(stool의 형태)가 있던 곳. 지금은 흔적이 없다. 거기 약간은 낯선, 너무 많이 자라서 마치 처음 보는 듯한 플라타너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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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두 탑은 경희학원 창립 30주년을 기해 만들어졌다. 밝은사회운동이 1966년 5월 7일에 시작되었음을 알리는 표시도 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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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편 한의과대학과 중간의 아름원 기숙사 건물 옆으로 난 길은 예전 대운동장 윗쪽의 길이다. 의과대학으로 향하는 길이다. OB들에겐 낯선 풍경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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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극장(이었던 곳)이다. 주위에 낯선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반은 주차장이 되었다. 80-90년대에 아스팔트 테니스 코트로 쓰였었는데, 지금은 반을 막고 두 면만 테니스 코트로 사용하는 모양이다. 노천극장은 음악공연 등을 위해 아치형의 멋드러진 무대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오래전에 철거되었다.(너무 낡아 안전문제로 어쩔 수 없이 철거했다고 한다.) 전엔 영어 안내판에 Kyung Hee University's Amphitheatre라고 쓰여있었는데, 앰피씨어터는 "원형경기장"의 의미이다. 그러고 보니 노천극장은 그와 닮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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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사 중인 1950년대 말의 노천극장(1959년 완공). 뒤쪽 오른편 멀리 보이는 산이 용마산으로서 더 오른편의 아차산과 연결되어 있다. 용마산 왼편에 망우리고개가 있는데 거길 넘어가면 교문리가 나온다. 이문동과 회기동이 거의 허허벌판이고, 중랑천변에도 집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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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0년대 후반의 경희대학교 노천극장과 아스팔트 테니스 코트. 캠퍼스 커플이었던 당시의 내 여자친구(이며 지금은 내 안사람) 고성애의 모습이다. 집사람 역시 고고학 전공으로 석박사 학위를 모교에서 받았다. 이때는 우리가 로드 레이버, 존 뉴캄,  크리스 에버트, 이본느 굴라공 등의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들에 반해 이 운동에만 전념하던 시절이다. 그 열정은 나브라틸로바와 빌리 진 킹의 전성기에 집사람의 테니스 엘보우로 어쩔 수 없이 사라졌다. 저 아스팔트 코트에서 당시의 국가대표 테니스 선수인 이덕희 씨의 지도를 받기도 했는데, 그건 이 선수가 우리와 함께 경희대 대학원에 다니고 있던 덕분이었다. 내가 그녀의 석사논문 영문 초록을 번역해 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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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리대 건물(1958년 건립). 예전 모습과 같으나 왼쪽 벽면 전체가 80년대 혼란기의 열혈청년들에 의해 민중화(民衆畫)로 꾸며졌다. 현재는 문과/이과대학 건물이다.(결국 '문리' 아닌가? 하여간 표기를 전과 달리하고 있다. 써있는 걸로 봐서는 문과대학이라고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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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그림의 제목은 "청년"으로 굳어졌지만 한 때는 "해방"이었는데, 백두산을 배경으로 민중의 건강한 삶의 모습을 담은 것이라 한다. 1989년 6월 29일에 경희대의 그림패 "쪽빛"이 70일간의 작업 끝에 완성시킨 가로 17m, 세로 11m의 민중화이다. 이 그림은 한 때 흰 페인트나 아스팔트용 타르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훼손되었고, 이후에 복원이 이루어진 것이다. "6월 민주항쟁 30주년을 기념"하여 2017년 3월에 재복원한 것이 지금의 벽화이다. 

 

OB들에게 기억되는 문리대의 왼쪽벽은 1988년에 찍은 아래 사진과 같은 형태일 것이다. 그 흰벽에 1980년대라는 거친 한 시대를 살아온 청년들이 한국사회의 대표적인 민주화운동 유산으로 벽화를 남긴 것이다. 저 벽화작업하는 걸 직접 보면서 청년들의 치기(稚氣)의 발로라 생각하며 탐탁지 않았는데, 그게 우리 민중 역사의 중요한 일부가 되었다. 보수적인 학교측의 입장에서 저 벽화를 보던 나의 안목이 짧았나보다. 다행히(?) 이 벽화에 대한 배경 얘기가 담긴 글에는 당시에 학교, 노조, 학생 등 모두가 일치된 마음으로 이 벽화를 그리고, 완성하는 일에 매진했다고 미화(!!!)되어 있다. 누구라도 잘 생각해 보면 학교측이 이런 걸 용납했을 리가 없다. 학생들이 밀어부쳤던 것이고, 그 때는 성난 학생들이 뭐든 다 했었다. 

 

한 때 경희대 법대생이었던 문재인은  이런저런 이유로 데모를 주동한 골치꺼리이기도 했다. 학교 밖, 사회를 향한 불만을 토하는 듯하면서 그걸 기화로 학교에 대한 강한 불만을 표출하는 학생들을 보며 속상하기도 했다. 그 혼란하던 시기에 세계 최초로 총장실을 점거하고 상당기간 데모만하던 소위 "데모꾼" 학생들이 출현하기도  했기에 당시 총장 비서실장으로 일하던 내겐 그들이 웬수 같았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진짜 우국의 정신으로 학생운동을 하던 일부가 있기는 했지만 대개는 공부하기 싫어하는 우중(愚衆)들인 게 안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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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네오룩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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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대앞 돌다방. 밝은사회운동 탑 옆에 있던 것과 같은 형태로서 오래전부터 이 자리를 지키는 것이다. 지금도 전의 모습 그대로 좋은 휴게실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니 반가웠다. 맨 왼편 기둥 아래 쌓인 음료수병 쓰레기만 봐도 이 휴게실의 활용도가 큼을 알 수 있다.^^ 휴게실 옆에 음료수 자판기가 있는데 분리수거를 중시하는 지금은 그 옆에 쓰레기통을 놓지 않아서 저렇게 쓰레기가 방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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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극장 건너편에서 본 이과대학(우)과 한의대(좌) 건물. 두 건물의 전면이 마치 그리스 신전 같은 형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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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이과 대학 건물.(이젠 문리대 건물이라 하지 않는다.) 정문 출입구 위에 LCD 전광판이 다양한 뉴스를 전하고 있었다. 시대의 흐름, 디지털화의 경향을 잘 보여준다. 오래된 건물이라 가끔 영화 촬영장소로 사용된다. 대표적으로는 배수지, 이제훈, 한가인, 엄태웅 등이 출연한 영화 "건축학개론(2012)"을 들 수 있다. "국민 첫사랑(이 된) 수지"가 저 낡은 건물 앞을 나와 걸어가는 모습이 우리들 뇌리에 남아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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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과/이과대 건물 앞을 지나 정면에 보이는 경영대학(오비스홀). Orbis Hall의 오비스는 명칭 공모의 당선작인데, 라틴어로 원(circle)이나 world를 의미한다. 이는 그 안에서 경희인이 함께하며 건설적으로 협동하자는 의미와 세계로 함께 뻗어나가자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전엔 이 건물이 있는 곳에 외국어대학교쪽으로 향하는 길이 있었다. 그 길은 유치원과 교수 테니스장을 좌우에 두고 외대 뒷담까지 이어져있었다. 시야가 확 트이던 언덕을 건물이 막고 있으니 Oldies are goodies란 생각이...ㅜ.ㅜ 하지만 더 많은 건물의 수요를 감당키 위해 어쩔 수 없이 그곳에 오비스홀을 지었을 것이다.

사람이 건물을 짓지만 나중엔 그 건물이 사람과의 상호작용을 통해 사람을 키운다. 영국의 수상 윈스턴 처칠은 의사당 건물을 중건하면서 "지금은 우리가 이 건물을 짓지만, 나중엔 이 건물이 우리를 만들 것입니다.(We shape our buildings and afterwards our buildings shape us.)"라고 했다. 같은 얘기다. 상징성과 역사성을 지닌 경희 캠퍼스의 모든 건물들이 우리 동문들을 잘 키워냈고, 키워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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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극장 관중석 끝의 배롱나무꽃. 오른편 아래는 무용학부와 경영대학의 주차장으로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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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극장 관중석, 배롱나무 앞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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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천극장의 큰 무지개형 아치 무대가 있던 곳 바로 뒤에 세워진 무용학부 건물. 이젠 체대의 일부로서의 무용과가 아닌 무용학부이다. 경희대 무용과의 전설 김백봉 교수(88올림픽 안무 담당)의 따님(안병주 교수)이 무용학부에서 후학들을 양성하고 있다. 현재 무용학부장이기도 한 안병주 교수는 모친에 이어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회식의 안무(장구춤 퍼포먼스 예술감독)를 담당하기도 했다. 무용학부관은 2011년 제29회 서울시건축상 최우수상을 수상한 건축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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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학부 정문 앞에서 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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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용학부에서 오른편으로 난 길을 걸어올라가면 한 때 음악대학과 그 연주장을 겸했던 크라운관으로 향하게 된다. 현재는 크라운관이 음대의 연주장으로만 쓰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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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운관은 건물이 낡기는 했지만 전엔 대단히 획기적인 디자인의 건물이었다. 지금 봐도 멋지다. 그 오른편엔 학생회관이 있다. 마치 우유방울이 떨어질 때 나타나는 왕관현상(crown splash)의 흔적인 밀크 크라운(milk crown)을 닮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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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라운관 앞의 멋진 정원. 저 정원은 경희대 출신의 재일교포 사업가 전인현 씨가 1980년대 초에 기증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몇 번 만나본 그분의 일본 이름도 기억난다. Mr. Motozo Tanak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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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회관 오른편 길인데 내리막이다. 내가 다닌 경희고등학교로 향하는 길이다. 앞에 보이는 것이 경희고의 인조잔디 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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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른편이 경희중고등학교 건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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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고 운동장을 가로 지른 곳에 언제인가 약학대학 건물이 들어섰다. 그 건물 바로 왼쪽에 왕년의 영화배우 박노식 씨(아들이 영화배우 박준규)의 집이었다. 박준규는 경희국, 경희중, 경희고를 졸업했기에 가수 배철수처럼 내 경희고 후배이다.(원로배우 허장강 씨의 집도 그 부근에 있었다. 그 아들 허준호와 박준규는 같은 해에 태어난 친구 사이이다.) 물론 배철수는 1년 후배이지만, 박준규는 64년생이라서 11년 후배이다. 70년대의 하이틴 영화를 평정한 영화배우 이덕화 씨는 당시의 원로배우 이예춘 씨의 아들이었는데, 역시 경희고 출신이었고, 내 1년 선배이다. 그러고 보니 3년 선배로 영화배우 이영하 씨도 있다. 희한하게 경희중, 경희고에 연예인들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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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고의 인조잔디 운동장이다. 축구부가 인조잔디 구장을 많이 쓰는 듯하다. 내가 재학시절에 대대장(교련 시엔 연대장)을 했기에 일주일마다 저 단상 아래에서 목청을 돋우며 "전체 차렷!" 등의 구령을 했었다. 내 어린 시절의 꿈을 담은 운동장과 교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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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축구장 옆 농구장 담장에 걸린 배너들을 보니 운동부들이 뭘 좀 하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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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농구장 옆 휴게실. 흰 무궁화가 피어있어서 보기 좋았다. 퇴촌의 경희대 실습농장에 엄청나게 다양하고도 많은 무궁화 나무들이 있는데 이것도 거기서 왔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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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등학교에서 다시 크라운관 앞으로 올라오면서 건너편의 경영대학 건물을 보니 그것만 해도 규모가 꽤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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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대학 건물이다. 내가 신문방송학과(현재는 언론학과) 출신인데 그게 정경대 소속이었다. 지금은 언론학부가 따로 있다던데... 대학 재학시에 말없이 열심히 공부만하던 우리 과의 모범생 후배가 하나 있었다. 학교의 모범생은 사회의 낙제생인가 뭐라고 하는 통설이 있는데, 그 모범생은 나중에 뭐가 됐을까? 이름이 한균태였다. 그는 현재 4년 임기 중 1년을 남긴 경희대 총장이다.^^ 위의 통설은 대체로 틀린다. 그건 아마도 나 같은 "놀새"들의 변명거리로 만들어진 말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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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경대 건물도 많이 변했다. 지금은 전혀 달라졌지만 가만 보면 뼈대는 전과 같다. 현재 알루미늄 창틀로 틈새 하나 없이 막은 저 복도는 예전엔 완전히 트여있었다. 그리고 아래층엔 큰 기둥 사이가 빈 공간으로 오픈된 휴게실이었다. 겨울이면 정말 추운 건물이었는데, 1960년대에 창립자 조영식 박사께서 미국의 자매교 마이애미대학교(당시 Henry King Stanford 총장)를 방문하신 후에 이 건물을 지으셨다고 한다. 그 무더운 플로리다 주의 중심도시에 있는 대학이었기에 시원하게 건물을 지은 것인데, 그 건물 디자인을 본땄었다고 하니 정경대 건물이 겨울에 추운 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었다.^^ 참고로 새까만 후배 하나가 나무위키 웹 사전에 정경대를 "교내에서 가장 괴상한 구조의 건물"이라고 평해놨다. 안목이 있는 친구이다. 지금은 북방의 건축물답게 바람들어갈 틈이 없이 리노베이션이 된 걸 보면 그 친구는 정경대에 마이애미대학교의 흔적이 남아있을 때 재학한 OB임을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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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산업대학이 있던 자리이다. 그리고 한 때는 한의과대학에서 무단으로(?) 밀고 들어와 자리를 차지했던 건물이기도 하다. 저 안에 들어서면 왼쪽에서부터 법학전문대학원(제1법학관), 제2법학관, 자연사박물관 등이 보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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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사박물관 벽의 경희의 역사 벽화(타일 모자익). 경희대의 각 건물이나 경희대가 행한 캠페인 등이 모자익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 벽화엔 1980년까지의 역사만 그려져 있다. 이유는 그 때 자연사박물관을 개설했기 때문이다. 그 아래는 그로부터 20년 후인 2000년이 쓰여있고 그 오른편에 "Annuit Coeptis"란 라틴어가 쓰여있다. "아누이트 코엡티스"는 로마의 시인 바질(Vasil)의 시에 나오는 말로 “신은 우리가 하는 일을 돌보신다”라는 의미이다. 매우 상징성을 담은 표현이다. 근데 자연사박물관이 개관할 당시 2000년은 너무 멀어서 과연 '그 해, 밀레니엄이 올까?'하는 생각까지 했었다. 그런데 난 그 밀레니엄에서도 22년이 지난 날, 이 벽 앞에 다시 섰다. 감개무량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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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연사박물관 앞 정원 가운데 있는 경희대창립 40주년 기념 사자상. 사자는 경희대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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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보이는 흰 건물은 90년대까지만 해도 삼의원이라 불리던 장학사(기숙사)였다. 하지만 지금은 이 건물이 제2법학관으로 변경되었다. 삼의원은 자연사박물관 뒤쪽의 새 건물로 이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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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법학관 부근의 이정표이다. 천장산로라 되어 있다. 경희대 뒷산은 고황산(高凰山)으로 불리는데, 그건 경희대가 설립된 이후에 붙인 이름이다. 이는 학생들에게 "봉황의 높은 뜻"을 가지라는 의미에서 붙인 이름이다. 경희대학교의 교지 이름이 "고황"이고, 학교재단의 이름이 "고황재단"이다. 원래 이 산의 이름은  천장산(天藏山)으로 "하늘이 보관하고 있는 산"의 의미였다. 이 산이 풍수지리적으로 뭔가 좋은 게 있는지 이 산 주변에 왕실의 홍릉이 있고, 산 건너편의 전 안기부 자리에는 다른 능이 있다. 안기부는 초창기에 중앙정보부라 불렸는데 초대 중정부장이었던 김종필 씨가 택한 중정청사 터는 조선 20대 왕 경종과 계비 선의왕후 어씨의 릉을 모신 곳이다. 그래서 지금도 그 자리엔 의릉 사적지 표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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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2법학관 왼편 길로 언덕을 올라가면 경희대 본관에서 오른편 길로 올라가 만나게 되는 4,500석 규모의 대강당이자 음악당인 "평화의 전당"이 있다. 이 웅장한 고딕양식의 건물은 벨지움의 생 미쉘 대성당(Saint Michael Cathedral)을 본따 만든 것이다. 전에 조영식 박사님이 아들(조정원 박사, 전 경희대 총장, 현 세계태권도연맹 총재, 전 대한체육회 부회장)이 유학하고 있는 벨지움의 캐톨릭 루벵대를 방문한 기회에 브뤼셀의 그 성당 건물을 보신 후에 그처럼 멋진 건물을 짓고 싶다고 하셨다. 조 박사님은 불도저 같아서 나중에 실제로 그 생각을 실현하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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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건물은 양쪽에 네모진 탑이 하나씩 올라가 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면 이게 산 위에 있는 건물이라 높아서 인천 앞바다가 보일 정도이다. 그런데 이 쌍동이 탑에서 산 건너편으로 안기부 건물이 내려다보인다는 이유로 안기부에서 그 부위를 잘라내라고 했고, 할 수 없이 그걸 잘라냈던 적이 있다. 참으로 황당한 일이지만 그 당시엔 그랬다. 결국 1978년에 공사를 시작한 이 건물은 1980년대 중반에 잘라진 탑을 그대로 둔 채 공사가 중단되었고, 1999년에야 그걸 다시 세우고 건물을 완성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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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벨지움 브뤼셀의 생 미쉘 대성당 모습. 정말 경희대의 평화의 전당과 비슷하다. 그도 그럴 것이 경희대의 건축 담당자들(건축과 교수와 건축실 직원들)이 여길 직접 방문하고 사진 촬영을 하고, 측량도 하는 등 벤치마킹을 했던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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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평화의 전당에서 걸어내려오면 보이는 경희대 중앙도서관. 역시 고딕 양식의 멋진 건물이다. 워낙 멋진 건물이라 여기서 수많은 영화가 촬영된 바 있다. 대표적으로는 조인성, 손예진, 조승우가 주연한 명화 "클래식(2003)"이 있다. 경희대의 이런 건물들은 경희대 창립 초기에 이웃한 안암동의 고려대 도서관에서 영향을 받아 지은 것이다. 심지어는 고려대의 한 켠을 장식했을 귀한 옥향(玉香)나무들이 이미 오래전에 경희대 본관 건물 앞 분수대 주변에 심어졌다.(그 옥향나무의 가격이 1970년대 초에 한 그루에  100여 만원 정도했다고 한다. 당시의 대학등록금이 대략 10만 원 정도했으니 고려대를 발족시킨 인촌 선생의 수목원에서 키운 이 나무들은 얼마나 귀한 것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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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6년에 지어져 현재 국가문화재 741호로 등록된 경희대 본관(나중에 이어붙인 양날개 건물은 국가문화재에서 제외). 고전시대의 양식을 표방한 것이 본관 건물이고, 대강당인 평화의 전당은 중세를 대표하는 고딕 양식으로 지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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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열주들의 틈새를 통해 보는 본관 분수대. 이 분수대를 빙둘러 심은 나무가 옥향나무이다. 이 나무의 숫자를 세고, 가격을 계산하는 이들은 문화인이 아니다.^^; 속물근성에 찌든 분들이다. 예술은 예술로 두고 그냥 감상하고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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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주 옆에서 바라본 중앙도서관(자꾸 옥향나무가 눈에 들어오면 안 된다.-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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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 옆에서 본 경희대 본관. 중앙과 우측 날개 중간에 평화의 전당의 쌍동이 탑이 보인다. 둥글게 단장한 옥향나무들이 또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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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 정문 앞에서 오른쪽으로 내려가면 보이는 작은 정원. 중간에 예쁜 소나무가 있고, 그 오른편 뒤에 무슨 나무인지는 모르지만 나무 하나가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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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뒷편의 나무이다. 이 나무에는 아무 표식이 없어서 아무도 이게 무슨 나무인지 모른다. 당연히 난 이 나무의 유래를 기억하는데, 이건 미국의 George Washington University의 총장 로이드 엘리엇(Lloyd Eliott) 씨가 방문하면서 미국에서 가져온 것이다. 경희대 방문 기념으로 식수한 것이고, 1980년대 초에 그 일이 있었다. 실은 조영식 박사의 사위인 LG그룹 창업고문 구태회 씨의 아들 구자명 씨가 그 대학의 법과대학원을 졸업했는데 그 당시 그의 지도교수인 필립 그룹(Phillip Grup) 씨를 초청하고, 동시에 그 대학 총장을 초청하여 자매결연을 맺으면서 기념식수를 했던 것이다. 세월은 가고, 사람 역시 가도 나무는 자리를 조금 옮겨 서 있다. 나중에 이런 사연은 다 잊혀지고 그 나무는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기억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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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데 작은 비석이 서 있는 이 소나무는 뭘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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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6년 당시 유엔사무총장(6대, 1992-1996)인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씨가 경희대를 방문하여 1986년 UN 세계평화의 해 10주년을 기려 기념식수한 것이다. 

 

His Excellency Boutros Boutros Ghali Secretary-General of the United Nations planted this Peace Tree in commemoration of the 10th Anniversary of the UN International Year of Peace

 

March 29, 1996

 

왜 유엔 사무총장이 경희대를 방문했을까? 조영식 박사는 1981년(당시 한국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다.)에 세계대학총장회(IAUP: International Association of University Presidents) 회장으로서 그 3년차 회의가 열린 나라인 코스타리카의 로드리고 까라조 오디오(Rodrigo Carazo Odio) 대통령을 움직여, 자신을 대신하여 세계평화의 날(UN International Day of Peace, 매년 9월 셋 째주 화요일)과 1986년 세계평화의 해 제정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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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로부터 IAUP의 엠블럼(배지), 경희대학교의 구 교표가 새겨진 엠블럼, 그리고 제4차 IAUP 테헤란 컨퍼런스의 엠블럼.

이 캠페인에는 나중에 제7대 유엔 사무총장이 된 당시 반기문 외무부 유엔과장도 함께 참여했었다. 나도 그 일에 몇 년간 관여했고, 그 때문에 UN도 방문했었다. 결국 36차 유엔총회(당시 의장 Ismat T. Kittani)는 이 날과 해를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그 후 까라조 대통령은 경희대 초청으로 한국에 와서 경희대의 명예박사학위를 수여했다. 그리고 36차 유엔총회 직후의 유엔 사무총장(5대, 1982-1991)은 하비엘 페레즈 데 케야르(Javier Perez de Cuellar) 씨였는데 평화의 날과 해와 관련한 그의 어록을 남겼고, 그것이 경희대 제3캠퍼스인 평화복지대학원(광릉) 로비 벽에 새겨져있다. 갈리 총장의 방문은 그런 시리즈의 일과 관련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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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관에서 내려오다 오른편으로 난 신문방송국과 4.19 기념탑으로 향하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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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년 4월이면 누군가가 잊지 않고 이 탑 아래 꽃을 가져다 놓는 걸 봤다. 경희대에 있는 동안 그게 누군가 꼭 만나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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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숲속에 만들어져 있는 임간교실.(1959년 건립) 여기서는 연극이나 노래 등 발표회가 많이 열렸으며, 과별 신입생 환영회도 많이 열렸다. 이곳은 야외수업 장소이기도 했다. 앞의 계단식 관중석은 70년대엔 없었던 것이고, 그 후에 만들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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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앞에 보이는 건물은 전에 호텔경영전문대학 건물이었는데, 지금은 대학명이 호텔관광대학으로 개칭되었다. 경희대는 항상 앞서 갔다. 1949년에 개학을 했는데 당시 먹고 살기도 힘든데 우리나라 최초의 체육대학을 만들었다. 사람들이 조 총장님을 다 미쳤다고 했다한다. 하지만 1988년 서울올림픽을 개최하게 되었을 때 이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게 만든 당시 한체대 박철빈 학장을 비롯한 올림픽 준비 및 실행 관련 인사들의 절반 이상이 경희대 체대 출신이었다. 원래 이 대학의 전신인 호텔경영전문대도 우리나라에 5성급 호텔이 생기기 시작하던 때에 맞춰 1975년에 설립한 것이다. 그래서 80년대에 조 총장님을 모시고 여러 5성급 호텔에 가면 객실이며 주방, 로비의 지배인(매니저)들이 다 호전 출신이라 모교의 총장님이 오셨다고 극진히 대접해주었다. 그 덕을 크게 봤고, 그와 관련해서는 좋은 기억들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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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호텔관광대 바로 옆 건물엔 이디야 커피가 입점해 있다. 요즘은 프랜차이즈 카페가 대학 구내로 들어오기도 하는 걸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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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AV센터이다. 지금은 국제교육원으로 바뀌었다. 오래전에 이곳은 신문방송학과의 놀이터였다. 라디오나 TV를 위한 모든 실습실이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다. 난 모래시계 드라마의 PD인 김종학과 신방과 동기동창이었기에 그와 함께 이근삼 씨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여러 연극에 출연하거나 스탭으로 일하기도 했다. 추억의 놀이터이다. 당시는 전자적인 디머(dimmer-밝은 조명이 점차로 흐리게 변하다가 꺼지도록 하는 기계)가 없어서 독에 소금을 진하게 풀고, 거기 조명과 연결된 두 개의 전극을 들이댔다. 그럼 전기분해가 일어나면서 저항이 강해져서 조명의 밝기가 줄어들다가 결국은 그게 꺼졌다. 요즘은 연극인들조차 과거에 디머 대신 소금독이란 장비가 있었다는 걸 모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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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희여중고와 사범대로 갈리는 삼거리 앞의 선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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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편 건물이 예전엔 경희여자중고등학교였는데... 내 딸이 이곳 여중고를 졸업했다. 지금은 여중 만의 건물이다. 그럼 여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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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고 건물은 그 오른편에 신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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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동호, 인공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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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단잉어들이 많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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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동호 왼편엔 경희초등학교가 있다. 내 딸과 아들이 다닌 초등학교이다. 아이들의 안전을 위해 외부인 출입금지를 해놓아서 더 들어가 보지 못 했다. 

 

그런데 경희초등학교 표기 밑에 흥미로운 구호가 하나 보인다. "평화는 개선보다 귀하다." 이는 경희학원 창립자 조영식 박사의 1981년 제6차 세계대학총장회의 총회의 기조연설 제목이기도 하고, 저서명이기도 하다. 코스타리카의 산호세 회의장에서 행한 이 연설은 당연히 영문으로 쓰여진 것으로서 그 영어 제목은 "Peace is more precious than Triumph( https://www.drspark.net/jia_warehouse/5170196 )"였다. 

 

이제 마지막으로 들를 곳은 사범대학이다. 경희초에서 되돌아나와 많이 걸어올라가야 한다. 전엔 사범대 학생들의 다리가 경희대에서 제일 굵다는 얘기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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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전 사범대 쪽으로 향한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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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깊이 들어온 곳이라서인지 비상벨까지 설치되어 있다. 주간에야 별 문제가 없겠지만 야간에 혹 사고가 날까하여 설치한 것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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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범대 가는 길이라 생각하고 올라갔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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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젠 명칭이 달라졌다. 사범대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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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술대학 건물로 바뀌어 있었다. 경희대가 여러 캠퍼스로 분교를 만들면서 체제를 많이 바꿨는데 그 일환으로 이런 변화가 생긴 듯하다. 여기 오니 현 경희대의 엠블럼을 처음 디자인하신 양규희 당시 미교과 교수님이 생각난다. 디자인 문제로 조 총장님과 내가 무척 많이 괴롭혔던 분이다. "박 선생 또야?" 내가 전화를 걸면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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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앞엔 이런 철조각상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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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캠퍼스 탐방을 마치고 청운관 앞 휴게실이 보이는 곳까지 왔다. 

원래 이곳은 녹원(緑苑)이라 불리던, 1956년에 건립된 등나무 쉼터와 작은 정원이 있던 곳이다. 아래 두 흑백 사진에 보이는 쉼터와 그 부근의 정원이 녹원이다. 원래 녹원이란 단어는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쓰이고 일본에서 주로 쓰이는 단어인데 어쨌든 이곳은 그렇게 불렸었다. 한자로는 "푸른(녹색) 동산"을 의미한다. 아래 왼편 사진을 보면 1957년에 건립된 체육대학관의 상부가 등나무 쉼터 왼편 위로 보인다. 그러므로 이 사진은 1950년대 말의 사진인데 학생들이 야외수업을 받고 있는 듯하다. 1959년, 녹원에 4개의 기둥을 가진 흰색 종탑이 들어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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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생 복지시설인 청운관 건물이 뒤에 있고 옛 녹원 자리에 등나무 휴게실과 "청운의 탑"으로 이름이 바뀐 옛 종탑이 서있다.(최상부에 종이 달려있어서 종탑이다.) 탑 아래 이의 유래를 적은 네모난 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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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타깝게도 녹원과 종탑의 유래에 관한 설명문이 잘 안 보인다. 개교7주년을 기념하여 경희학원 창립자인 조영식 박사의 모친 강국수 여사께서 기증한 시설이라는 얘기가 포함되어 있다. 1956년 8월 31일에 기증한 것이라는 것은 탑 상단에 쓰여있다. 

* 처음엔 위의 캡션 정도로만 지나갔는데 글을 쓴 지 사흘 째 된 08/02(화)에 이 설명문의 내용이 궁금해서 묘안을 하나 찾아냈다. 그냥 위의 사진을 보아서는 지워진 글자가 안 보이나 이걸 찍을 때 사진 프로페셔널들이 사용하는 풀 사이즈 CCD의 큰 카메라를 사용했기에 사진 원본에서는 글씨가 보일 것이란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역시 4,200만 화소의 원본에서 보니 페인트는 사라졌지만 음각으로 파인 흔적이 보여서 설명문 전체의 내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원본으로 보니 아래와 같이 보였던 것이다. 이렇게 읽어내어 그 텍스트를 아래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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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설명문의 전체 내용은 이런 것이었다. 내용을 보니 아주 오래 전에 쓰인 글이 아닌데 왜 페인트가 지워졌는지 모르겠다.

"'청운의 탑', 경희 역사와 함께 한 아고라

1956년 개교 7주년을 기념해 조성. 초창기에는 게시판으로 활용

 

'청운의 탑'이 자리잡은 상록원은 창학 초기 경희인의 만남의 장소였다. 이 탑과 녹지는 설립자 고 미원 조영식 박사(1921~2012)의 모친 고 강국수 여사께서 1956년 개교 7주년을 기념해 기증한 것으로 1955년 건립된 교시탑과 등용문에 이어 서울캠퍼스에서 가장 오래된 조형물로 꼽힌다. 본관 중심부가 1956년 준공됐고, 이어 체육대학관(1957) 본관 중앙분수와 문리대학관(1958) 노천극장과 임간교실(1959)이 세워졌으니 이 탑과 녹지가 갖는 역사적 의미는 각별하지 않을 수 없다.

 

한때 '종탑'으로도 불렸던 이 탑은 초창기 경희인의 '아고라'이자 사색의 숲이었다. 입체 게시판(키오스크)에 각종 소식이 나붙었다. 사진이나 포스터가 전시되기도 했다. 녹원은 2001년 조영식 학원장의 기부로 종합강의동(청운관)이 완공되면서 새롭게 단장됐다. 이때 녹원이 '상록원'으로 종탑이 '청운의 탑'으로 새 이름을 얻었다. 이와 함께 탑 게시판 8면에 '경희정신'을 아로새겼다. 2015년 9월 캠퍼스종합개발사업 'Space 21'의 일환으로 탑과 녹지를 새로 꾸미고 보행 환경을 개선했다."

 

위의 설명을 보니 예전의 녹원이란 이름은 이제 "상록원"으로 개칭된 것을 알 수 있다. "늘 푸른 동산"이란 의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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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국수, 바로 그 목련의 상징인 조영식 박사 모친의 성함이다. 

 

청운의 탑엔 8개의 금언이 새겨져있다. 이 사상은 조영식 박사의 초기 저서 "문화세계의 창조"와 1975년에 발간한 "인류사회의 재건" 그리고 1981년에 출간한 오토피아 등에 실려있는 내용들이기도 하다. 조영식 박사가 주창한 화생론에 의거한 몇몇 문구가 보인다.(이를 "경희정신"으로 호칭한다.) 대개 불교 등에서는 화생론이라 할 때 한자로 "化生論"이라 쓰는데, 조 총장님의 화생론은 조화(調和)를 중시하는 "和生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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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글이 8면에 적혀있는데, 역시 이 글들을 "구글 렌즈" 기능으로 텍스트로 추출하고, 한자를 풀어썼다. 

 

1. 삼정행(三正行)하라 그 속에 모든 답이 있다 

정지(正知), 정판(正判), 정행(正行)하면 불가지불가해(不可知不可解)는 없다

그러기에 하면 된다 해야한다 해 내야만 한다

 

2. 우주(宇宙)의 본질과 현상변화는 어떤 것인가

나는 누구이기에 어디서 왔다 어디로 가고 있는가 

운명(運命)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성(生成)되어지는 것이다

 

3. 인간(人間)은 역사문명의 주체(主體)요 개척자이다

그러기에 나에게는 꿈이 있다 고민이 있다

인류역사 되돌아보며 참다운 삶의 길 열자

 

4. 젊은이들이여 낭만과 사랑, 마음이 넓어지면 世上도 밝아진다

꿈과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아는가

대인(大人)은 진리를 말하고 소인(小人)은 득실을 따진다

 

5. 화합하려거든 시비(是非)를 논하지 말라

대성(大成)하려거든 고난에 도전하라

신뢰와 협동(協同) 속에 모두의 번영이 있다

 

6. 우의와 신의(信義)를 저버릴 때 사회는 어두워진다

부모(父母)의 은혜를 모르는 자(者)와는 상종하지 말라

가정이 해체될 때 이 세상에는 종말(終末)이 온다

 

7. 물질문명 인간을 경시(輕視)하고, 과학기술 문명

인간을 소외(疏外)한다

인간의 정신문화(精神文化) 물질문명 조화(調和)시켜서

아름답고 풍요하고 보람있는 사회(社會) 이루자

 

8. 새 천년(千年) 바라보며 Neo-Renaissance 횃불들자 21세기 인류사회의 선도자되어 유엔 중심의

인간적 인간사회 문화적 복지사회,

보편적 민주사회, 지구공동사회(地球共同社會) 이루어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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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을 픽업하려고 다시 경희의료원으로 가는 중에 학교 앞을 좀 둘러보았다. 건물들 사이의 도로는 1968년까지는 하천이었다. 그런데, 그 해에 경희대에서 열린 제2회 세계대학총장회(IAUP)의 3년차 회의에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참가하여 키노트 스피치(keynote speech)를 하게 되었다. 그 결정이 이뤄지자마자 동대문 구청에서 뛰어와 하천을 살펴보고는 득달 같이 포장한 것이다.(권력이 좋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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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곳 2층은 항상 뭔가 좀 운치있는 식당이나 카페가 들어서곤 했는데 지금도 그런 듯하다. 경희대에서 일하던 시절에 가끔 들렀던 곳인데, 지금은 이탈리아 식당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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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가 커피(Mega Coffee)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선 저곳은 경희대 앞의 명소이다. 70년대에 "그린 하우스"란 이름의 빵집이 있던 곳. 당시엔 이대 앞에도 같은 이름의 빵집이 있었다. 언니는 경희대 앞에, 동생은 이대 앞에 같은 이름의 빵집을 열었던 것이다. 반으로 자른 식빵 위에 버터크림을 수북히 얹어주는 것이 전부였던 버터크림빵이 그린 하우스의 대표 메뉴였고, 난 아직도 그게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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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모교인 경희대 캠퍼스는 꿈결에서나 볼 수 있을 만큼 아름다운 수목들과 건물들이 자리한 곳이다. 지금은 너무 많은 건물들이 들어서서 80-90년대의 보다 spacious한 여유있는 공간 배치에서 벗어났다. 그게 아쉽기는 하지만 그래도 경희대학교는 여전히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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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현재의 건물 배치도
 

내가 학교를 떠난 후 캠퍼스가 많이 변했다고 생각한 건 잠시. 그간의 세월이 얼만데 그게 당연한 일이 아니냐고 자신을 일깨우게 됐다. 그러다가 알았다. 세상에서 가장 보수적이면서도 전통지향적인 기관이 대학교라서 그나마 덜 변한 것이라는 걸. 또한 몇 개의 자매 캠퍼스들이 생김에 따라 서울캠퍼스가 더 복잡해지지 않을 수 있었다는 것을... 나아가 들판을 고층 아파트로 덮어버리는 상전벽해(桑田碧海)의 현실에도 불구하고 내가 거닐던 캠퍼스의 뼈대는 전과 같아 길이라도 쉽게 찾을 수 있었다는 사실까지... 다행히 거긴 많은 시간들이 박제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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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종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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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6'
  • ?
    mellany 2022.07.31 01:30

    저도 1994년 졸업생인데 몇년 전 딸아이와 함께 가보고 깜짝 놀랐던 기억이 납니다. ^^ 크게 자랑스럽다 느끼진 않았어도 아름다웠던 학교가 군데 군데 새로운 건물로 들어차서 빈공간 하나 없이 여유로운 느낌이 없어졌더라구요. 학생들에게 유용한 많은 공간들이 생긴 것은 다행이겠지만요. 그래도 아이와 함께 엄마가 다녔던 학교를 돌아보며 즐거웠었지요. 사진 잘 보았습니다. ^^  

  • profile
    Dr.Spark 2022.07.31 06:41

    말씀하신 대로 너무 빼곡한 건물들로 여유롭던 공간이 사라진 게 좀 아쉬웠습니다. 특히 대운동장과 노천극장이 사라진 건 상실의 아픔까지 느껴지더군요. 

  • ?
    Ranie 2024.04.09 20:55

    장문의 댓글 달기 전에 먼저 감사합니다. 간만에 두 번째 벚꽃놀이 겸 세 번째 대학투어로 경대 투어를 했고 찍은 사진들이 많아 모르는 게 많이 있었는데 이 글덕에 도움 많이 됐습니다! 아주 훌륭한 레퍼런스가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 profile
    Dr.Spark 2024.04.09 22:11
    아, 경희대 동문이시군요.^^ 봄이면 그야말로 꽃대궐이 되는 게 경희캠퍼스이지요. 전 경희대 부근에 워낙 오래 살기도 했었기에 봄마다 생각이 나곤하는데 일부러 거기까지 가게 되지는 않더군요.^^ 내년엔 일부러라도 한 번 가봐야겠어요.
  • ?
    tube 2024.04.10 11:25

    진짜 많이 변했네요..

    팔뚝이 그림..돌다방.. 사자상.. 헐떡 고개.. 마징가 탑, 크라운관, 노천 극장.. 평화의 전당.. 사대 올라 가는 길... 새록새록 하네요.. 

    이제 슬슬 중간고사 기간이겠죠.. 항상 중간 고사 기간에 벚꽃들이 피크였는데..

     

     

  • profile
    Dr.Spark 2024.04.10 18:15
    세월은 정말 많은 것들을 변화시켰죠. 사진을 보니까 올해는 그저께가 경희학원 벚꽃의 피크였던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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