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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는 얘기
2009.10.16 16:24

인문학강좌 수업후기-(9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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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009년 9월17일 목요일, 아침 9시 20분, 분당 이매동 성남아트센타 인문학장좌 강의실로 향하는 계단에서

'탈렌트 이영애만 대학원 수업들으란 법있냐? 나도 대학원 수준 육박하는 수업들으러 간다. 축하 문자 날려주셈"


2.

가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하늘마저 하염없이 푸르기만 했던 그날, 나는 남편에게, 지인에게 문자를 날렸다.

올라가야할 계단은 아직 높은데 축하 유도 문자를 주고 받느라 9센치나 되는 내 하이힐이 불안한 상태인줄도 전혀 몰랐다. 나 말고도 수십명의 학생들이, 주부들이, 어른들이 그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런데 나만 불량학생 차림이다. 킬힐에, 어께 넓은 뽕 자켓, 흰바지에 그리고 송혜교 백스타일의 커다란 가방에, 나는 분명 이 전당에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임에 틀림 없었다. 그러나 나는  이날 아침 아무런 플래쉬 세례도 받질 못 했다.누구나 아는 사실이지만, 오늘 아침 영애가 한양대 대학원 입학한 후  강의실 근처에서 인터뷰한 것과, 나, 마흔 둘 주부 아줌마가 문화센터 강의들어간 것과는 엄청나게 다른 차원이니 말이다. 그러나 나는 축하 문자를 받고 싶었다. 그만큼 그날 첫 강의실로의 진입이 설레고 흥분되었다.

3.

우연히, 그것은 우연이였다. 인터넷 기사에 <인문학 강좌 >라는 그 선명한 문구가 내게 다가온 그날은 이 강좌가 오픈되기 3주일 전, 강좌 오픈을 클릭했건만 정원 50명인데 벌써 마감이란다. 전화해서 물어본 즉, 담당자 김혜전 씨가 내 연락처를 물어본 뒤, 가능성이 전혀 없진 않다며 만약  자리가 난다면 우선순위로 알려주겠다했다. 그 말을 듣고는, 왜 그리 아쉽고, 그러면서도 희망의 불빛이 보였던 건지.

4.


우리동네 사는 은영 씨라는 내 친구와 상의를 했다. 그녀는 서울 신사동에 인문학 강좌가 있다는데 그 먼 데까지 갈까말까 고민 중이라해했다. 그녀와 나, 우리가 사는 곳은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이다. 분당의 경계선 자락 마을이라, 우리는 늘 우리가 사는 고개넘어 이 동네를  오포가 아닌 분당 쪽이라고 명명하고는, 우리의 지역적인 경계선상 정체성을 두고, 늘 같은 고민과 핀잔과 자책과 그리고 분당이 아니라 분당쪽이라고 명시했으므로 이상무~ 라는 식으로 서로의 말에 흡족해하며 동조했다. 우리는 동네친구로, 아니 동갑친구로, 아니 마음과 뜻이 지남철처럼 서로를 끌어당기는 그런 절친한 친구로, 인문학 수업에 대한 은근한 희망을 나누고 있을 때., 드디어 김혜전 씨의 전화를 동시에 받은 것이다.

5.


"수업이 오픈되었습니다."

클래스는 대략 60명 정원이고,  모두 9개의 구룹이며. 내가 속한 구룹의 이름은가칭  "인문학을 사랑하는 모임" 이며 <인사모>의 팀장을 맡아주십시오라는 제안도 해왔다. 팀장이 되어  무슨 일을 하던, 앞으로 13주동안 무슨 수고를 감당해야 하던, 인문학 수업에 나를 참석시켜 준다는 그 이유만으로 내가 고사할 리 만무다.

6.


김희애를 닮은 은영 씨 말고 우리동네 재선 씨란 친구가 한 명 더 있다. 세 아이 엄마로 총명한 눈웃음이 작품인 이 친구는 우리처럼 광주시민이 아니라 그야말로 분당 이매동에 사는 완벽한 성남시민이다. 우리 셋은 서현역이라는 같은 역을 이용하며 살면서도 시골 오포 사람 그리고 신도시 분당 사람으로 스스로를 따로 규정짓고,  그 묘한 단어를 스스로 애써 흘려가며, 농담까지 서로 잘 받아낸 마음가까운 친구 사이다. 특히 재선씨와 은영 씨는 내가 부러워하는 "역사를 지닌" 사이다. 재선 씨는 87학번으로 은영씨는 86학번으로 같은 학교 간호학과 일년 선후배 사이며 동아리 KUSA 일년 선후배 사이로, 은영씨는  재선이란 후배가 분당 산다는 그 이유를 시발점으로, 분당 근처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고, 재선 씨는 은영 씨 남편을 형부~형부라 칭하는, 그야말로 20년 넘은 절친한 선후배 사이다. 이들 사이를 뒤늦게 파고든 나는, 은근한 질투와 부러움으로 그리고 배려로,  이 동네로 서로 이사를 온 후로 최근 몇 년간 그들 사이를 파고 든 사람이다. 그래도 나는 그 두 사람이 가질 수 없는 한 가지 독특한 점을 갖고 있다. 나는 은영 씨처럼 86학번인 적도 있고 그리고 재선 씨처럼  87학번으로 졸업 했기 때문에 그들이 나에게는 선후배가 아니라, 재선이기도 하고 은영이기도 하다. 같은 동기라고 할수 있다.  안 그러면 어떠랴... 나이들면  어느 순간 어느 지점에서는 다 같은 청춘이고 같은 중년이고 그리고 같은 노년이될 테니 말이다.


7.


인문학 수업이 허락된 후. 우리 셋이 무슨 일을 도모했을까?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놓고 우리는  인문학 수업을 어떻게 뒤쳐지지 않고 잘 따라 할 것인가, 그 문제를 놓고 고민하던 끝에 우리는 대학생이 된 기분으로, 아니 대학원생이  되는 기분으로, 분당 정자동에 있는 도서관에서 1차 모음을 가졌다. 그날 우리의 흔적은 비록 대학생다운 차림이 아니고 이마트 장바구니를 핸드백에 숨긴 채, 그럼에도 여전히 킬힐을 마다않는 나이가 마흔을 넘어버린 아줌마들의 집합체였지만, 인문학을 사랑하기 위해 다시 캠퍼스로 돌아가기 위한 그 첫 발자국이었던 것이다. 첫 강의는 "도시공간의 예술화 "라는 제목으로 고려대학교 김성도 교수님이 오신다고 수업계획표에 써 있었다.


8.


김희애를 닮은 은영 씨는, 김성도 교수님께서 참고자료로 읽어오면 좋다는 책을 도서관 모퉁이에서 찾아냈고, 재선 씨가 복사를 했다. 우리 것만이 아니라 인문학을 사랑하는 모임 8명명 몫까지 도서관밖 복사실까지 달려가 수고를 도맡았다. 뜨끈뜨근한 열기운이 남아있는 우리의 참고 자료, 아 이 얼마나 가슴 뿌듯한가. 이 아줌마들이 겁없이 논문 자료를 출력해서 그것을 받아들고 좋아하다니.우리는 수내동에서 그유 명하다는 코다리 찜 식당 테이블 앞에서 그것을 살피고 또 살폈다. 그래봤자 모교 교수님이 아니냐는 그런 심리가 작용했던 걸까? "두번 째 읽으닌깐 대강 무슨 말 인지 감이 오긴하네.. " 독서모임에 7년째 참여 중이라는 재선 씨! 그녀다운 발언이었다. 진중하기 짝이 없는 "내 친구 김희애"는 조용히 웃기만 한다. 내심 흡족한 미소를 내 지으며.

나는 그때 그 논문을 읽으며 어떤 표정을 지었던가. 안경을 안 가져와서라는 침묵어린 표정말고 뭐라고, 무슨 말을 남겼던가.

9.


식탁에서 거실소파에서 그리고 침대 위에서 나는 <건축함과 사유함>이라는 논문을 읽기 시작했다. 어렵다고 투덜댔고, 아니 내 자신을 자랑스러워했고 남편은 이런 나를 두고 흡족한 미소로 답했다. 같이 놀아달라는 그 말을 그 시간만큼은 자제한 채.


10.


다음날, 나는 도서관에 가서 김성도 교수님이 쓴 다른 책을 실피기 시작했다. 기호학 전공이시다. 단어도  이해하기 힘든 기호학이다. 내가 대학교 4학년때 D학점을 받게 되자 재시험을 컨닝해서 겨우 B학점 받은 그 무시무시한 과목이 바로 기호학 아니던가? 내 나이 서른 다섯에 들어간 대학원에서, 선수과목을 듣기 위해 대학교 3학년학생과 낯뜨겁게 같이 수업을 들어야했던 그 과목도 기호학이고, 그리고 전공 비평시간에 주로 다뤄진 과목도 기호학이 아니었던가. <씨니피에, 씨니피앙> 이런 단어들... 내 머리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나로서는 가장 고난이도로 여겨졌던  과목이 바로 기호학수업이었는데 인문학 강좌 첫 수업이 바로 기호학자님이라니... 그래도 괜찮다. 나는 주부기에 학점도 필요없고 그렇다고 질문과 대답을 필히 해야하는 그런 수업이 아니지 않는가.

11.


김성도 교수님이 쓴 논문을 뒤졌다. 찾아냈다. 어려운 부분은 넘어가고 내가 언젠가 들어봤던 단어 앞에서는 눈동자를 멈추는 식으로 한장 한장 넘기려할 때 어머나~ <이어령>이라는 단어가 나타났다. 그리고 <음식의 기호학> 이라는 단어가 그 이름 근처에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호기심을 잔뜩 갖고, 이어령 교수님의 글을 인용한 그 부분... 그부분을  집중해서 읽었다.

음식의 기호학을 설명하자면 서양사람은 포크와 나이프를 사용하기에  배척과 방어의 음식기호로  풀이되고, 반면 우리나라 음식은 수저를 사용해서 아우름이라는 기호가 작용된다.

대강 이런  그런 내용이었다. 나는 그 문장 앞에서 긴 호흡을 했고,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졌다. 학점과는 완전히 멀어진 아줌마가 되어 읽어서일까. 풀어헤쳐진 기호학! 이제는 기호학이 쉬워지나보다.  내가 이렇게 당당해지다니. 아줌마되어 주부되어 그리고 생존을 위한 작업을 갖지않는 까닭에 일부러 머리 아픈 귀절에 감사하고 가슴 찌릇해 하다니... 나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구나... 지금 이렇게 주부로 사는 이 모습이 말이다.

뭔지 모를, 이것을 지적인 층만감이라고 해나하나 지적 허영심이라 해야하나 아니면 지적 긴장감이라고 해야 하나. 가슴뿌듯함을 안고 그날 도서관을 나왔고, 재선 씨가 복사해준 논문을 집에 와서 읽기 시작했다. 그러나 역시나 어렵다.


12.



플라톤의 철학을 주로 인용하며 " 거주함이란 하늘, 땅, 죽은자, 신, 이런 사방의 사중적인 보살핌이며... 거주함은 그 어떤 경우에도 건축함에 앞서 있는 목적일 것이다(p185 ). 건축함은 본래 거주함이다. 거주함이란 죽은자들이 이땅 위에 존재하는 방식이다. 거주함으로써의 건축함은 성장을 돌본다는 의미에서의 Brauen으로, 또 건축물을 건립한다는 의미에서의 Breun으로 전개된다. (p189)

"모르겠으면 다시 읽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소리내어 읽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노트에 요약 적어라.

내가 아들녀석에게 늘 했던 말이다.


13.


그날 밤 식탁에 조명등을 켜고, 남편은 티비보게 하고, 방해말라고 윽박지르곤, 간만에 손글씨를 써봤다. 신용카드에 사인을 하는 것 외엔, 장시간 펜을 든 적 없던 나의 나날들은 그날밤으로 물러가고 대학노트에, 나는 거주함과 사유함이란 단어를 시작으로 서너 장 넘게  필기를 했다.


14.

도시공간의 예술화

거주함과 사유함.


.......


2009년, 날씨 화창함, 9월 17일, 아침 9시 20분, 첫 수업시작 40분 전,
분당 이매동 성남아트센터에서 이영애와 송혜교 그리고 앙드레김 이미지가 조합된 한 주부가
필기구를 한 손에 들고는  계단을 올라서며,  문자를 보내는 중이었다.

인문학 첫 수 업을 축하해주셈~

이렇게!! 말이다.

...수업후기를 적어 내라는 담당자 김혜전 씨의 말을 무시하다가
미국 보스턴에 와서야 적게 되다. 1월16일 금요일 새벽 2시 4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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