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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원 / dongwon@riseup.net

한국 정보문화의 역사(1980년대의 개인용 컴퓨터 및 컴퓨터 통신의 도입, 정보화사회 추진, 정보산업 부상, 저작권 강화, 그리고 초기 이용자의 해킹문화 등에 대한 연구, 관련 박사 학위 논문을 쓰는 중.
호주 울롱공대학(University of Wollongong)의 연구프로젝트 “인터넷 문화사 비교연구”(한국 담당: 이광석 서울과기대 교수)의 연구보조원으로 참여 중.
정보공유연대에서 활동 중.

 

질문:


초기 PC 문화

* 1979년에 처음으로 PC를 시작하셨는데,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초반의 컴퓨터문화가 궁금합니다.

- 컴퓨터 문화랄 만한 것이 없었습니다. 대형 컴퓨터는 일반인들에게 너무 멀고, PC는 1976년에 미국의 애플(8비트 CPU)로 시작된 것이며, 1980년에 미국의 IBM PC(16비트 CPU)가 발표된 것이기 때문에 한글 타자기조차 많이 보급되지 않은 한국에서 컴퓨터 문화를 논하기에는 너무나도 이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전 당시 세계대학총장회(IAUP) 사무국의 일을 하면서 탠디 래디오색 모델 II(8비트/64K 램, 3개의 8인치 IBM 3840 포맷 디스크, TRS 데이지 휠 프린터)를 사용했는데 이게 당시 가격이 1,800만 원이었고, 이것은 50평짜리 단독 주택 가격에 해당했습니다.

이의 설명서는 작은 책장 하나를 채울 만큼 많았고, 워드프로세서, 데이터베이스, 스프레드쉿, 통계, 프로그램과 베이직 언어 팩이 제공되었습니다.

사실, 컴퓨터가 대중화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이라고 많이들 기억하고 있고 대부분의 문헌에서도 그렇게 나옵니다. 그렇다면, 1980년대 초반에 개인용 컴퓨터라고 하는 컴퓨터 대중 소비시장이 열리기는 했지만, 그것은 대체로 소수 중산층 10대(와 20대) 남성 중심의 하위문화라고 해야할런지요?

1980년 초반의 개인용 컴퓨터 문화는 우리나라에 존재하지 않았다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1980년대 초반에 이르러 청계천을 중심으로 한 애플 복제품이나 일본 샤프 제품의 복제품이 나타났고, 이것이 일부 PC 매니아들에 의해 구매되고 사용되었을 뿐입니다. 삼보 컴퓨터의 SE-8001이란 8비트 PC가 1981년에 개발되고, 1983년에 Trigem 20XT 최초의 16비트 PC로, 그리고 1984년에 Trigem-88이란 IBM PC의 복제본으로 등장했고, 그것이 대중에게 퍼지기 시작한 것은 1980년대 후반입니다. 이 때 청계천의 PC 복제본들도 많이 등장했습니다.

1983년에 창간된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지가 PC를 소개하고 PC 문화가 논해질 만큼의 시기는 그로부터 5~6년 후 몇 개의 PC 활용지들이 나타남으로써 비로소 컴퓨터 문화(대형 컴퓨터의 문화는 우리나라에 없었으므로 이 용어는 PC 문화를 지칭하는 것)가 태동하기 시작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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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PC통신" 문화의 형성


- 1987년에 PC 통신을 시작(이라기보다는 거의 개척)하셨는데, 제일 처음 등장한 컴퓨터통신 이용자(집단)는 누구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정보화사회를 생각하는 사랑방'이 처음 만들어질 때 관여하셨는지요, 어떤 분들로 구성이 되어있었습니까? 그리고 그 모임이  어떻게 엠팔로 이어졌는지요?

최초의 컴퓨터 통신 이용자는 소위 “한강 사랑방”으로 불리던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전자 사랑방”이었고, 그 인원은 27명이었습니다. 이 모임을 주창한 분은 당시 데이콤의 연구위원 두 분 중 한 분이었던 유경희 연구위원이었고, 저는 그 모임의 가장 나이어린 회원(1953년생)으로 참여했습니다. 이 모임은 당시에 유경희 위원의 주도로 현 무주리조트(부영 덕유산리조트) 사장이자 당시의 데이콤 엔지니어인 황규석 씨 등에 의해 개발된 H-Mail(한메일을 줄여서 이렇게 부름)을 사용하는, 데이콤 주도의 모임이었습니다.(PC와 모뎀을 데이콤에서 제공)

이용태 데이콤 회장, 양승택 전자통신연구원장(후에 정통부 장관), 교육심리학자 김재은 이화여대교수, 서울대 조순 교수(후에 경제부총리), 성락도 데이콤 연구위원, 대통령 주치의 서울의대 고창순 교수, 전 서울대 총장 고병익 박사, 서정욱 KT품질보증단장(후 정통부 차관), 이화여대 시청각교육과 김영수 교수, 과학기술원 김진형 교수, 최영호 검사, 고대 물리학과 강주상 교수, 과학칼럼니스트 고대 물리학과 김정흠 교수, 현원복 과학칼럼니스트, 신경정신과 교수 이시형 박사, 소설가 한수산 등이 그 회원이었습니다.

이 중 가장 나이 어리고, PC 경험이 많은 박순백이 유경의 위원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H-Mail의 대중화였고, 그 때문에 박순백은 상용화된 H-Mail의 초창기 사용자 약 200명을 회원으로 하는 엠팔(EMPAL/Electronic Mail PAL)이란 한국 최초의 통신 클럽을 만들고 회장을 하면서 당시에 출간되던 PC 활용지 4~5개에 박순백 칼럼이란 기명 칼럼을 개설하고 PC 및 통신 문화 전파를 시작했습니다.

* 정부는 초기의 사설 전자게시판을 전기통신기본법에 따라 불법 통신망으로 간주했다고 나오는데, 그래서 실제로 사설BBS가 금지되거나 규제를 받은 적이 있었는지요?

당시는 남북이 대치하는 상황에서 무엇이든 국익을 우선하는 시기였고, 모뎀을 개인이 이용하는 것이나 PC 통신 등 국가의 승인을 받지 않은 사설 시스템에 의한 의견 교환이 국익을 해칠 수 있다고 보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1988년에 통신클럽인 엠팔에 의해 만들어진 EMPAL BBS가 KT(청량리 전화국)에 의해 전화선을 끊겨 서비스를 못 하는 등의 규제를 받은 일이 있습니다.

* "PC 통신"이라는 말을 만드셨다고 들었는데, 그 경위와 의미가 궁금합니다. (이에 대한 칼럼을 쓰신 것 같은데, 제가 찾지를 못했습니다.)

PC가 등장한 후에도 이의 잠재력을 저평가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통신은 대형 컴퓨터를 통한 싱크로너스(동기) 통신만이 컴퓨터 통신으로 인정받던 시절이었습니다. PC를 이용한 통신은 대중과는 유리된 대형 컴퓨터 통신과 달리 대중을 위한 비동기 통신이고, 그것이 세상의 미래를 바꿀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와 함께 엠팔 게시판을 만들고, 한국 최초의 공개 소프트웨어를 만든 묵현상 당시 KT 엔지니어(전 삼보컴퓨터 USA 사장, 한국 엡손 부사장, 현 신약개발업체인 메디프론 대표이사)와 의논하여 만든 용어가 PC 통신입니다.(전 세계 어느 나라에서도 PC를 이용한 통신을 그렇게 호칭하는 나라가 없습니다.) 우리 두 사람은 그 용어를 당시의 여러 컴퓨터 활용지에 기고할 때 쓰고, 강연을 할 때 쓰면서 의도적으로 퍼뜨렸습니다.

PC 통신이라는 용어는 PC의 잠재력이 크다는 것과 그것이 미래를 새로이 규정할 새로운 매체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들어 낸 것이라 하겠습니다.

* "님"으로 호칭하기 운동도 처음 시작하셨다고 하는데, 어떤 계기로 어떻게 시작된 것입니까?

- 1988년 초, 엠팔 클럽의 활동 시에 나이 어린 회원과 중년의 회원이 온라인에서 큰 언쟁이 있었습니다. 결국은 “너 몇 살이고 뭐하는 놈이냐?”의 흔한 싸움으로 종결되었는데, 제가 그 싸움을 보면서 상대가 안 보이는 온라인 통신의 한계와 익명성(당시 미국의 컴퓨서브나 데이콤 H-Mail의 아이디는 일련번호였고, 현재와 같은 아이디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BBS는 엠팔 BBS임.)이 주는 폐단이 있음에 생각이 미쳤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온라인에서 만나는 상대를 “선생님”으로 부르자는 캠페인을 했었고, 나이어린 사람을 선생님으로 부르는 건 어폐가 있다는 의견이 있어서 다시 그걸 “님”으로 부르자는 캠페인으로 전개시킨 것입니다. 그런 운동이 나중에 케텔(하이텔의 전신)로 퍼져 나간 것이지요.

* 당시 책을 보니 ‘서울바이러스연합'이 있었고 이미 한글전자사서함(H-Mail)에 나타나 위협하기도 했다고 나오는데, 혹시 ‘서울바이러스연합'의 실체에 대해서 기억나시는 것이 있으신지요?

- 그건 헛소문인 듯합니다. 최초의 컴퓨터 바이러스가 등장한 것이 1986년의 c)Brain이라는 것이었고, 안철수 교수에 앞서서 그 걸 분석하고 처음으로 대안을 내 놨던 (숨은) 공로자가 최철용이란 당시 “한글도깨비”라는 외국 소프트웨어 내에서 그래픽 한글을 구현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분이었습니다.(당시의 마이크로소프트웨어 지에 관련 기사가 있습니다.)

서울바이러스연합이 최초로 등장한 것은 1989년으로 케텔의 호스트 컴퓨터를 파괴하겠다는 위협을 한 적이 있으나 이를 실행하지는 않았고, 1991년에는 처단자 등 3종의 바이러스를 유포했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나타난 것이 1994년이지요. 그러므로 서바연과 H-Mail은 관계가 없다고 봅니다.

공개 소프트웨어

* 선생님 당시 칼럼을 모은 책을 보면, 공개 소프트웨어를 퍼블릭 도메인 소프트웨어(public domain software)라고 여러 차례 언급을 하셨습니다. 당시 퍼블릭 도메인 소프트웨어의 뜻은 무엇이었는지요? 혹시 리차드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free software)는 당시 엠팔 분들에게 충분히 소개가 되어 있는 상태는 아니었습니까?(혹시 소개가 되어 있었다면) 퍼블릭도메인 소프트웨어와 자유 소프트웨어를 어떻게 구분하셨는지요?

- 퍼블릭 도메인 소프트웨어는 말 그대로 공개 소프트웨어입니다. 아무 대가 없이 공중의 이익을 위하여 소프트웨어를 개발하고, 그걸 배포하는 것입니다. 저작권은 개발자에게 있습니다. 개발자에게 고마움의 뜻으로 기부를 하는 쉐어웨어(shareware)와도 다른 개념이고, 리차드 스톨만의 자유 소프트웨어와도 다릅니다.

엠팔의 탄생 시점을 보면 그들이 리차드 스톨만의 영향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것을 짐작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저와 같은 해(1953년)에 태어난 스톨만은 1985년에 GNU 선언문을 발표하고, 카피레프트의 개념을 적용한 것은 1989년입니다. 1987년에 엠팔이 조직되었고, 엠팔 BBS가 1988년에 만들어졌는데, 그 바탕에 1988년 중반에 만들어진 “엠팔의 반란(Revolt of the Empals)"이라는 당시의 개념으로는 반란에 가까운 공개 소프트웨어가 있었던 것입니다. 스톨만의 카피 레프트 개념 탄생 이전의 일입니다.

* 엠팔의 반란을 비롯해 여러 전자 게시판의 호스트나 클라이언트 프로그램의 개발이 풀뿌리 차원에서 있었는데, 당시 정부나 기업이 아니라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던 이유나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http://old.drspark.co.kr/cgi-bin/zero/view.php?desc=asc&divpage=1&id=talk&no=4029&page=1&sc=off&select_arrange=headnum&sn=off&sn1=&ss=on

1980년대 말에는 엠팔 BBS나 호롱불, The First, 달구벌네트 등의 BBS 호스트 프로그램이나 “엠팔의 반란“을 필두로 나타난 이야기, 메디넷, 한토크, 컴토크 등 많은 공개 소프트웨어들이 나타났습니다. 그 이유는 당시에 PC 통신용의 에뮬레이터 가격이 30만 원에서 50만 원 정도했었고, BBS 프로그램처럼 덩치가 큰 것은 대기업들이 개발해서 공개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당시는 우리나라의 PC 제작사들이 통일되지 않은 한글 코드를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금성 조합형 한글, 삼성 조합형 한글, 삼보 조합형 한글 등 각사마다 코드가 모두 달라서 이를 일시에 지원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지요. 그런 문제를 해결한다고 우리 말을 다 표현하지도 못 하는 완성형 한글을 들고 나온 정부의 태도는 한심하기 그지 없었구요. 그러니 이런 문제를 해결하려면 풀뿌리 민간 운동이 아니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1987년 당시 1,200BPS 모뎀 가격이 30만 원이었고, 2,400BPS 모뎀은 70만 원이었습니다. 게다가 대기업이 생산한 PC의 가격은 200만 원이고, 청계천 조립 제품은 70~80만 원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통신을 하려면 필수적으로 써야하는 통신 소프트웨어인 에뮬레이터를 30~50만 원을 주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지요. 그래서 이걸 매니아 레벨에서 해결해야 했고, 그래서 제가 뛰어난 엔지니어인 묵현상 당시 엠팔 회원을 설득하여 만들도록 한 것입니다.

* 이 때, 말씀하셨던 공개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유 방식이 중요했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이후에는 왜 이러한 공개 소프트웨어 개발과 공유 문화가 지속되지 못했다고 보시는지요?

앞의 질문에 대한 답은 이미 드렸고, 그 이후에도 수 많은 공개 소프트웨어들이 개발되고, 공유되었습니다. 그런 예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지 않았을 뿐이지요. 인터넷이 보편화된 이후에는 오히려 그런 일이 더 많아졌음을 웹에서 발견하는 숱한 공유 소프트웨어들을 통해서 볼 수 있습니다.

단지 그런 문화가 지속되지 못 한 것으로 보이는 이유를 들라면, 그 이후에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한글과컴퓨터나 한메 타자교사를 만든 한메소프트웨어 등에서 비롯한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시작되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유료 소프트웨어의 시대가 시작된 것이지요. 하지만 점차로 마이크로소프트의 힘이 막강해 짐에 따라서 공유 소프트웨어건 유료 소프트웨어건을 막론하고 소프트웨어 산업 자체가 쇠퇴해 버린

1980년대 컴퓨터 - 정보기술의 발전과 해킹

* 한국에서 처음 해킹이나 해커의 개념이 쓰인 것이 언제인지 기억하시는지요?

http://old.drspark.co.kr/cgi-bin/fabbsview.cgi?section=sparketc&start=0&pos=3

http://old.drspark.co.kr/cgi-bin/zero/view.php?id=jia_warehouse&page=1&sn1=&divpage=1&sn=off&ss=on&sc=off&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1372

http://old.drspark.co.kr/cgi-bin/zero/view.php?id=jia_warehouse&page=2&sn1=&divpage=1&sn=on&ss=off&sc=on&select_arrange=subject&desc=desc&no=464

위 링크에 보시면 관련 얘기들이 간단히 있습니다. 당시 해커라는 말은 우리나라에서 사용되지 않았습니다. 엠팔의 회원이었던 정재훈 씨(당시 대학생)가 데이콤의 전산망에 접속하여 거기 있는 각종 데이터들을 일부 엠팔 회원들에게 보여준 것을 계기로 제가 한강 사랑방의 제2회 강연회에서 “해커들의 뒷 얘기”이라는 강연을 하고, 그에 관한 글을 당시의 소프트웨어 지에 기고한 것이 처음입니다. http://www.mediamob.co.kr/infoland/frmView.aspx?id=12425 1988년 10월 소프트월드 창간호에 실린 글이 “해커들의 뒷 얘기”입니다. 근데 링크의 글엔 내용의 일부밖에 없네요.-_-(1989년에 나온 제 책 PC 문화론에 바로 그 “해커(Hacker)들의 뒷 얘기”란 글의 전문이 실려있습니다.)

제가 개인적으로 당시에 해커란 말을 좋아했습니다. 정통 해커들은 최초의 그 말에 대한 정의에서도 정의한들이었죠. 돈을 바라고 악의를 가진 짓을 하고, 남을 괴롭히는 컴퓨터 엔지니어를 가리키는 나쁜 의미의 해커는 나중에 나타난 것이고요. 제가 당시에 좋아한 해커들은 1983년에 최초의 BBS인 RBBS를 만들어 공개한 탐 맥이었고, PC를 통해 파일을 주고 받게 한 XMODEM 프로토콜의 개발자인 와드 크리스텐센이었으며, 멋진 소프트웨어 유틸리티를 만든 피터 노튼도 거기 끼어있었고, 최초의 PC를 만들기 전에 많은 선의적인 해킹 활동으로 우리 매니아들에게 많은 얘기꺼리를 제공한 애플을 만든 스티븐 워즈니악도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 애초 1960년대 미국 MIT의 정통 해커·해킹의 개념을 적용하자면, 한국에도 1980년대에 정보기술을 혁신하는데 공헌한 정통파 해커들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정부 기관이나 기업이 아닌 민간 시민사회 차원에서 발전시킨) IT 문화가 어느 정도였고, 어떤 의미가 있었다고 생각하시는지 말씀을 듣고 싶습니다. 특히, 앞서 질문 드린, 1980년대에는 아직 소수의 컴퓨터 초기 이용자문화가 1990년대 컴퓨터의 대중화, 그리고 오늘의 인터넷문화에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을지요? 즉, 1980년대 초반의 컴퓨터문화의 중요성을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정통적인 해커들이 묵현상, 최철용, 안철수, 양왕성(현 한컴 전무, DKBB 개발자), 강태진(한글 2000 개발자), 김성수(한메 타자교사) 등이었고, PC 통신으로 관련 정보가 폭발하게 된 이후에 민간 차원에서 엄청난 IT 문화의 확산이 있었으며, 일본보다 앞서 갔던 PC 통신의 문화가 현재의 인터넷 세상에서도 대중에게 편만한 기술의 보급이라는 의미에서 훨씬 더 우리의 IT 문화가 일본을 앞서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그 시작은 1980년대 말에 비롯된 것이지요.

일본은 당시 IBM PC 호환기가 아닌 워드 프로세서 전용기에 함몰해 있어서 PC 문화가 늦게 태동했으며, 초창기에 PC 통신에서 뒤진 이후, 인터넷 시대에 이를 때까지 이를 극복하지 못 했습니다. 그리고 PC 통신이 혁명적으로 발달했던 우리나라에서의 모뎀을 통한 비동기통신은 인터넷 시대에도 ISDN을 추구했던 일본과 달리 가가호호에 연결된 전화망을 통한 비동기 인터넷 통신(인터넷 모뎀)을 통해 인터넷 강국으로 부상하게 된 것입니다.

해킹·해커에 대한 인식의 변화

* 한국에 1980년대 처음 도입된 해킹이나 해커의 개념이 이후 어떻게 달라져왔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만약 1980년대 컴퓨터 - 정보기술의 발전에 해킹이 크게 기여했다고 생각하신다면, 그 이후 어떤 과정을 거쳐서 오늘날의 컴퓨터 범죄와 같은 이미지로, 해킹·해커에 대한 인식이 정반대로 바뀌게 된 것이라고 보시는지요?

좋은 의미의 해킹과 현재의 부정적인 의미의 해킹은 그 본질이 다르기 때문에 이를 연결시켜 생각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컴퓨터는 도구이고, 그래서 그것은 사용하는 사람의 심성에 의해 달리 사용될 수 있습니다. 정보 기술 발전의 초창기에는 많은 매니아들이 그 잠재력을 모르는 우매한(?) 대중들을 위해 희생적인 봉사를 통해 컴퓨터와 그 문화를 보급하려 하지만, 컴퓨터 문화가 보편화됨에 따라서 그 대중을 상대로 돈벌이를 하려는 악의적인 해커들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니 그건 일반 사회나 컴퓨터 사회나 별 다를 바가 없다고 할 것입니다. 컴퓨터 문화도 일반 문화의 연장일 뿐이고...

추천, 자료

이 연구에 도움 말씀을 주실 수 있는 예전에 알던 분이나 관련된 일을 하시는 분을 추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1980년대 컴퓨터 및 컴퓨터 통신과 관련해서 자세한 말씀을 해주실만한 분을 소개시켜 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인터뷰를 통해 해주신 말씀과 관련해서 참고하면 좋을 책, 자료(집), 웹사이트, 혹은 회사, 단체, 특정 장소 등을 추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 가장 좋은 것은 큰 도서관에서 당시의 컴퓨터 활용지나 전문지를 찾아 목차를 살펴보고, 자료를 찾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 당시의 일들은 인터넷이 시작되기 훨씬 전의 일이어서 인터넷에 정리된 것이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김중태 문화원의 자료를 살펴보시고, 김중태 선생을 만나 보시는 것도 좋을 듯합니.

추가 질문들

* 1980년 IBM PC 16비트
"1980년에 미국의 IBM PC(16비트 CPU)가 발표된 것"이라고 하셨는데, IBM PC(16비트)는 1980년이나 1983년에 바로 국내에 들어온 것은 아닌데 기억하시기로 언제부터 IBM PC(16비트)가 국내의 대중 소비시장에 퍼졌는지요?(국내의 본격적인 PC 이용자 인구의 증가와 PC문화의 형성이 이와 관련이 있을 듯해서 그렇습니다.)

- 위에 이미 답이 있습니다.^^ 미국의 IBM PC가 직접 우리나라에 진출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호환기종으로 우리나라에 진출했습니다. 1984년에 삼보에 의해서, 그리고 그 시기에 청계천의 많은 복제 PC를 통해서...

* 1980년대 초반의 PC 도입과 컴퓨터 문화
컴퓨터문화, PC문화라고 할만한 것은 1980년대 후반(1987-8년) 즈음이라고 하셨는데요, 1983년이 '정보산업의 해'로 지정되고, 경진대회가 개최되고, 전시장이나 대리점들이 생겨나고, 마이크로소프트웨어 말고도 컴퓨터학습, KBS 컴퓨터, 컴퓨터비전 등의 잡지가 생겨나면서 PC 열풍이 있었던 것에 대해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하게 평가할 시기는 아니라고 보시는지요?

- 컴퓨터를 문화 현상으로 본 것은 제가 먼저입니다. 제가 저의 칼럼집 한 개의 제목을 [PC 문화론]이라 붙인 것은 그런 이유입니다. 전 하나의 현상이 보편화되고, 편만화한 것을 가리켜 문화 현상으로 보았고, PC가 대중적으로 보급되어 이를 이용하는 몇 가지의 뚜렷한 대중 현상이 나타날 것을 미리 "컴퓨터 문화"로 미리 정의한 후에 컴퓨터 칼럼 집필 활동을 시작했던 것입니다. 마이크로소프트웨어가 기타 잡지들이 나타난 것은 다가올 컴퓨터 세계에 대비한 것이었으나 초창기에는 8비트용 컴퓨터의 활용에 대한 기사가 주를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실제로 PC 열풍에 연결된 것은 IBM PC 호환기종이 많이 팔리기 시작한 1980년대 중반에서 말까지의 기간이었다고 봅니다.

* 세운상가
1980년대 내내 청계천 세운상가가 국내의 PC 도입, PC 통신 확산 등에 어떤 역할을 했다고 평가하시는지요?

- 다른 어느 것에 비교할 수 없는,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이 세운상가입니다. 사실은 우리 PC 산업을 태동시킨 삼보컴퓨터마저도 최초에는 세운상가의 골방에서 자본금 1,000만 원으로 설립된 삼보전자엔지니어링(1980.07.02)에서 기원합니다.

*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전자 사랑방”
“한강 사랑방”으로 불리던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전자 사랑방”이라고 하셨는데, 여기서 한강은 어떻게 생긴 별칭인지요?

- 당시에 이 전자 사랑방을 태동케 한 데이콤의 건물이 한강 바로 옆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강(변) 사랑방"의 의미로 그런 별칭을 가지게 된 것이지요. 실은 한강 사랑방이 먼저고,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전자 사랑방"은 매체 홍보를 위해 다시 지어진 이름입니다.

* H-Mail(한메일)을 이용한 “정보화 사회를 생각하는 전자 사랑방”의 당시 소통 - 이메일 자료가 아카이브가 되어 있는지요?

거의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 중 일부를 H-Mail 초창기 멤버들이 캡춰해 놓은 것이 있기는 합니다. @hangulo 혹은 계원대 이기성 교수 등이 그런 자료를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 "사랑방"이 데이콤 주도의 모임이었고, PC와 모뎀을 데이콤에서 제공했다고 하셨는데, 데이콤에서는 당시 왜 이와 같은 이용자 모임을 조직했는지요? 아마도 최초의 공중 데이터통신 사업을 하면서 소비자-이용자 시범사업(조사) 차원이었던 것이었는지요?

- 맞습니다. 사회명사들을 동원한 한강 사랑방은 매체 홍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것이었고, 한강 사랑방 멤버를 제외한 초창기의 H-Mail 사용자들도 거의 대부분이 H-Mail 시범 사업을 위하여 무료 사용자로 지역에 따라 선발된 사람들이었습니다.

* 초기 인터넷
1980년대 중후반 당시, 사랑방 및 엠팔 활동을 하실 때, 서울대 공대 및 한국과학기술원(카이스트)을 포함한 연구기관들이 인터넷 연결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셨는지요? 만약 그렇다면, 혹시 인터넷 쪽과의 정보도 공유되고 있었는지요?

-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의 인터넷은 학술 및 군사 목적으로만 사용되던 시절이었고, 미국의 경우도 컴퓨서브(CompuServe)가 주된 PC 통신 서비스였으며, America Online이 태동하는 때(1985년)였습니다. 그마저도 인터넷 서비스가 아니었지요. 인터넷을 이용한 일반인 대상의 서비스는 당시 미국에서도 그리 주목되지 않던 시절입니다.

* 엠팔
EMPAL BBS가 KT(청량리 전화국)에 의해 전화선을 끊기는 일을 당했던 일에 대한 (당시 법적 근거를 포함한) 문헌 상의 기록이 있는지요?
엠팔 비비에스의 당시 소통 - 이메일 자료가 아카이브가 되어 있는지요?

- 문헌 상의 기록은 그 일에 관한 에피소드를 다룬 당시의 저의 컴퓨터 칼럼에 포함된 것이 전부일 듯합니다. 법적인 근거는 공중 통신망에 인가되지 않은 통신 장치를 부착할 수 없다는 당시의 전기통신법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 아이디의 사용
"당시 미국의 컴퓨서브나 데이콤 H-Mail의 아이디는 일련번호였고, 현재와 같은 아이디를 사용한 최초의 BBS는 엠팔 BBS"라고 한다면, 전세계적으로 현재와 같이 이용자가 자유롭게 자신의 아이디를 정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1988년의 엠팔 게시판부터라고 할 수 있는지요?

- 엠팔들이 자신들의 편리를 도모하고자 아이디를 본격적으로 도입한 것입니다. H-Mail에서 최초에 일련번호로 제게 주어진 번호는 나중에 유경희 위원님이 저를 위해서 sbpark이라고 바꿔주셨다가 제가 글을 쓰면 스파크가 튀는 것 같으니 "b"를 빼고 Spark라고 하자며, 최초의 아이디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후에 일부 사용자들의 아이디를 leeks(이기성), hsmook(묵현상)처럼 바꿔주는 일도 생겼지요. 하지만, 아이디를 전면적으로 도입한 것은 엠팔 BBS가 최초였습니다.

* 일련번호는 가입한 순번 같은 식으로 만들어졌던 것인지요?

- 그런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 혹시 미국에서 1969년대 이후 나타난 아르파넷, 1970년대 말의 전자게시판들, 그 네트워크로서의 피도넷 등이 모두 이용자 아이디를 일련번호로 사용했는지요?

- 일련번호나 난수로 발생된 숫자를 사용했습니다.

* 한메일, 엠팔 게시판 상의 해킹, 바이러스, 서울바이러스연합
H-Mail 시기에는 서울바이러스연합이 없었다고 하셨는데, 한메일에 서바연은 아니더라도 바이러스적인, 장난 같은 혹은 악의적인 활동이나 행위는 전혀 없었는지요? 이것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는데, 사랑방이나 엠팔의 정당한 특정 이용 활동이 데이콤의 입장에서는 악의적인 것으로 비춰질 수도 있을 것이고, 그런 사례가 궁금합니다.

- 저의 "해커들의 뒷 얘기" 강연이 있은 후에 데이콤이 보안을 강화하고, 기존의 허술한 보안체계를 바로 잡은 것은 사실입니다. 그 이전에는 유닉스를 잘 아는 프로그래머에게는 얼마든지 뚫릴 수 있는 구조로 운영되고 있었습니다.  

* 혹시, 이진 파일 전송기능을 가진 커밋(Kermit) 프로토콜 관련 사건이 그런 것 중의 하나인 것인지요?

- 커밋(Kermit)은 엠팔 BBS가 Xmodem을 채용하기 전까지 데이콤의 H-Mail 시스템에서 사용자들이 데이콤 시스템에 공개되어 있는 (의도적인 공개가 아니고, 보안 의식이 없어서 드러나 있던) 커밋을 자의적으로 사용하면서 생긴 사건입니다. 사용자들이 그들 간의 파일 전송을 위해 잘 쓰고 있던 커밋을 막자 그에 반발했던 것이지요. 그 사건 이후에 H-Mail은 사양화되고, 데이콤은 하이텔 이후에 공개한 천리안 PC 통신(천리안이란 작명을 한 분이 한강 사랑방을 주도한 유경희 연구위원) 시스템입니다.

* 또, 해킹 관련하며 말씀해 주신 것 중에 "엠팔의 회원이었던 정재훈 씨(당시 대학생)가 데이콤의 전산망에 접속하여 거기 있는 각종 데이터들을 일부 엠팔 회원들에게 보여준 것"이 계기가 되어 "해커들의 뒷 얘기"라는 강연을 하셨는데, 정재훈씨의 일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요?

- 정재훈 씨는 당시 데이콤 시스템 전체를 뒤져서 거기 있는 데이터의 상당 부분을 봤습니다. "데이콤 직원 식당의 다음 주 메뉴를 알려드릴까요?" "이용태 회장님 스케줄도 알고 싶으세요?"하는 등의 농담을 우리에게 많이 했었고, 루트로 들어가 당시 엠팔과 약간의 트러블을 일으키고 있던 데이콤 H-Mail Sysop의 시솝 레벨을 바꾸는 등의 (약간의 악의도 있는?^^;) 장난을 치기도 했었습니다.

* 서울바이러스연합이 총 세 번에 걸쳐 출몰했다고 하셨는데, 혹시 서울바이러스연합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알 수 있는 길은 없을지요?

- 자세한 정보는 모르겠습니다. 밖으로 드러난 것이 상기한 세 번일 뿐이고, 그 실체는 불분명하며, IT 업계에서는 세 번에 걸친 출현의 배후가 같다고 여기지도 않는 경향입니다.

* 공개 소프트웨어
당시 엠팔의 반란과 같은 공개 소프트웨어(public domain software)가 스톨만의 자유소프트웨어와 관련이 없다면, 공개 소프트웨어(public domain software)는 엠팔 독자적으로 그 개념을 성립시킨 용어라고 할 수 있는지요? 하지만, 그것을 영어로 퍼블릭 도메인이라고 당시에 영어로 명기하셨던 것은 어디를 출처로 한 것이었는지요?

- 아닙니다. 당시에 이미 그런 영어 용어가 있었습니다. 이미 당시의 [Byte]나 [Personal Computing] 같은 미국 컴퓨터 잡지에 그런 용어가 많이 사용되었었습니다.

* 유료 소프트웨어의 시대
아래아한글과 한메타자교실 등으로부터 우리나라의 소프트웨어 산업이 시작되었다고 하셨는데, 그렇다면 그 전에는 소프트웨어 산업이라고 할 것이 없었는지요? 주로 미국이나 일본의 소프트웨어를 곧바로 복제해서 쓴 것이기는 했지만, 대기업이나 중소기업에서 수입하고 변형해서(지역화하여) 판매하며 소프트웨어 상품화를 통한 사업이 있지 않았는지요?
말하자면, 1980년대 초반에 등장한 삼보, 큐닉스, 쌍용컴퓨터 등의 컴퓨터업체와 1980년대 후반에 등장한 소프트웨어하우스-스타기업 간의 차이는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후자는 말씀하신대로 정통 해커의 전통과도 맞닿아있다고 할 수 있는데, 전자는 1980년 초반에 어떤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을지요?  
소프트웨어 산업이 (1990년 전후) 당시에 시작되었다고 하셨을 때 그것은 '소프트웨어 패키지' 형태의 개발·판매를 뜻하시는 듯 한데, 그것의 핵심(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 할 근거)을 무엇으로 보시는지요?

- 제가 얘기한 유료 소프트웨어는 PC용의 범용 패키지를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 이전의 소프트웨어들은 시스템 통합(SI) 수준에서의 대규모 소프트웨어 기업들이 정부나 기관, 재벌기업 등을 상대로 만드는 맞춤형 소프트웨어이거나 특정 컴퓨터에서만 사용될 수 있는 범용성이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컴퓨터 문화의 보편화로 개인들이 구입할 수 있는 소프트웨어의 시작이라는 면에서 아래아 한글의 출현이 가진 의미가 크다는 것이지요.

 

 


 


* 역사적 기억, 기록
당시의 일들을 비교적 소상히 답변하실 수 있는, 어떤 기억·기록의 기술을 가지고 계시는지요?

- 기억력이 좋은 편입니다. 하지만 중요한 것들은 제 사이트 내에 어떤 형태로든 기록이 남아 있기도 합니다.  

* 컴퓨터에 대한 문화적 접근
"컴퓨터를 문화 현상으로 본 것은 제가 먼저입니다. 제가 저의 칼럼집 한 개의 제목을 [PC 문화론]으로..." 말씀하신 것에 대해,
컴퓨터를 문화 현상으로 접근해야겠다고 하셨던 것은, 당시 (주류적 시각에서) 컴퓨터를 무엇으로 보았던 것에 대한 대응이었습니까? 그래서 컴퓨터를 문화로 본다는 것은 1980년대의 맥락에서 어떤 의미와 의의를 갖는 것이었는지요? (제가 [PC 문화론]을 구해 읽어보았습니다만... )

- 당시 사람들에게 컴퓨터는 단순한 도구였고, 그것이 문화 창달은 커녕 인간을 소외시킬 수 있는 무서운 기계였던 것입니다. 전 컴퓨터가 새로운 인간 관계를 창조해 나가고 (PC 통신을 통해) 인간을 잇는 끈이 될 것으로 보고 그에 의해 창조되는 문화를 얘기했던 것입니다.

* 아이디
자유로운 아이디의 선택과 사용에 있어서 엠팔BBS가 세계적으로 최초라고 할 수 있는지요?

- 제가 아는 한 당시까지 숫자가 아닌 아이디를 기본으로 강요한 유일한 BBS라 생각됩니다만, 제가 일천한 경험으로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으니 더 알아보십시오. 엠팔 게시판 이후 우리나라의 모든 PC 통신 시스템들은 다 아이디를 채택했습니다. 최초의 대형 시스템인 케텔 등은 엠팔 이후에 출현한 것입니다.

* 공개, 오픈 소스코드, 유료, 패키지
공개, 오픈 소스코드, 유료, 패키지 등의 소프트웨어 관련 개념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싶어서 드리는 질문인데요,
말씀하신 유료 소프트웨어 (산업)의 시작은 곧 패키지 소프트웨어와 일치하는 것인지요?

- 그렇습니다. 패키지의 다양한 하드웨어에서 운용될 수 있는 범용 소프트웨어란 의미에서...

* 그와 별도로, 패키지 소프트웨어의 개념은 개인들이 구입할 수 있는 (따라서 범용의) 소프트웨어 상품 형태를 말하는 것인지요?

- 그렇습니다.

* 어떤 자료를 보면, 시스템 통합 등의 맞춤형 소프트웨어 개발과 다르게 패키지 소프트웨어는 소스코드를 비공개로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역시 본격적인 소프트웨어 산업의 시작이라고 할 근거라고 할 수 있겠는지요?

- 그렇습니다. 실행 파일로 만들어 파는...

* 엠팔 프로그램이 공개 소프트웨어(public domain)라고 하셨을 때 저작권은 엠팔 개발자가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하셨는데, 퍼블릭 도메인은 저작권 보호 기간이 만료되어 저작권보호의 제한 없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정보(영역)을 뜻하는 것이 맞다면, '공개' 소프트웨어의 의미는 무료 배포이고, 퍼블릭 도메인이 아닌 것은 아닌지요? (당시의 개념 사용은 달랐던 것인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 당시의 개념은 전자입니다. 당시에는 이런 자유 소프트웨어에 대한 스톨만의 개념이 미국에서는 일부 통할 수 있었을지 모르나 그런 개념이 전세계적으로 퍼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이를 저작권 만료 소프트웨어의 개념을 확대 적용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만들어진 지 얼마 안 된 소프트웨어에 대한 명칭이었기 때문에 그것은 "저작권 만료"란 개념보다는 "저작권 무료"의 개념이 더 강하게 쓰인 셈이지요.

* 공개 소프트웨어(public domain)로 나온 엠팔 프로그램은 왜 소스 코드를 비공개로 한 형태였는지요? 저작권은 소스코드를 공개해도 유지될 수 있는데 말입니다. (이 역시 당시 엠팔 프로그램의 소스코드 비공개 원칙은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 이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소스가 공개 되면 이의 저작권 표시를 고치고, 소스 일부나 소프트웨어 내의 메시지만 바꿔서 상용인 듯 판매할 소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 전자카페
홍대 안상수 선생이 열었다는 카페인데, 통신이 되는 PC가 있었던 것인지, 키오스크와 같은 형태의 공용 컴퓨터가 있었던 것을 뜻하는 것인지요?

- 당시 e-Cafe에는 2400BPS 모뎀을 장착한 PC AT 기종이 놓여있었습니다.

* PC통신, 인터넷, 국가기간통신망
사랑방, 엠팔 등의 PC통신 흐름과 인터넷 쪽 흐름(전길남 선생 등) 간에는 연관이 없었다면,
정부가 추진했던 국가기간통신망(1980년대에는 행정전산망 중심)과는 어떠했는지요, 연관이 없으셨습니까?

- 전혀 관련이 없습니다.

* 사랑방과 엠팔 각각에서 정부의 국가기간통신망에 대한 입장을 갖는다거나 토론을 하신 적이 있으신지요?

- 이 역시 전혀 없습니다.

* 세운상가
사랑방, 엠팔의 이용자들이 세운상가를 많이 이용했는지요?

- 아주 많이... 홍익전자, 석영전자 등의 호환기 복사판을 만들던 샵 등과 친하게 지낸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래아 한글의 판매도 청계천 러블리 소프트웨어가 총판이었습니다.

* 세운상가의 (당시 표현으로는) "기능공" 혹은 기술자, 개발자들이 사랑방, 엠팔 등에 참여하지는 않았는지요?

- 제가 인터뷰에서 사용한 엔지니어의 의미는 기능공도 기술자도 아닌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즉 프로그래머"의 의미입니다.

* 세운상가 - 컴퓨터상가의 (가장 큰) 특징(들)은 무엇으로 꼽으시는지요? 왜, 이 독특하고 잠재력이 컸던 세운상가가 1980년대 중후반에 - 이제 정보산업과 정보문화가 꽃피려는 시점에 - 쇠락했다고 생각하시는지요?

- 최초의 전자상가로서 컴퓨터 초창기에 PC 호환기와 오락기 산업을 일으킨 곳이고, 이제는 정보 산업과는 멀어진 감이 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영세성 때문입니다.

- 정부의 역할
1980년대, 컴퓨터문화(PC와 PC통신 등의 제반 정보문화)의 형성과 발전에 있어서 당시 정부의 역할에 대하서는 어떻게 평가하시는지요?

- 예나 지금이나 정부는 항상 정보 산업 규제를 위해 힘쓰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IT의 일선이 처한 상황에는 무감각한, 대개는 첨단 정보에 뒤진 집단이라 생각됩니다. 정부의 규제 일변도의 정책이 아니었던들 우릐의 정보 산업은 훨씬 더 발전했을 거란 생각입니다.

 

 

 

 

 


 


* 컴퓨터 문화
대중화되기 전의 컴퓨터가 일반 사람들에게 소외를 야기시키는 공포의 기계였던 것 같습니다. 1980년대를 지나면서 어떤 변화를 거쳐 1990년대부터 점차 오늘날같이 생활의 필수품이 된 것인데, 그래서 1980년대에 관심을 갖고 그 컴퓨터의 문화적 변화를 추적하고 있습니다.
1980년대까지도 컴퓨터의 지배적인 이미지의 하나였던, 컴퓨터가 만들어낸다던 인간 소외의 공포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는지요? (예를 들어, 실업에 대한 공포는 어느 정도 컸는지요? 혹은 오늘날 주류적인 의미에서의 해킹과 같은 일에 대한 공포도 있었는지요?)

- 1980년대는 1970년대의 데이빗 리즈맨이 "군중 속의 고독"을 이야기한 이래 많은 사회현상들이 인간의 소외를 초래했었고, 과학문명이 급속히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기계나 전자장치에 대한 SF적인 공포나 소외를 걱정하게 된 것이지요. 공포란 것은 구체성이 있을 때는 공포가 되지 않습니다. 실체가 불명확하고, 미신적인 것이어야 공포의 대상이 되는 것이니까요. 그런 공포는 지금까지 전혀 보지 못 했던 신 매체인 컴퓨터는 대중의 관심에서 먼 것이었고, 또 그 가격이 쉽게 접근하기 힘든 것이었기 때문에 그에 대한 무지가 빗어낸 공포였습니다.
실업에 대한 공포는 러다이트 운동으로 상징되는 산업혁명기에도 있었던 것이니 그건 새로운 것이 아니고, 그 역시 컴퓨터가 인간을 대신할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지요. 해킹에 대한 공포는 있을 리가 없었습니다. 컴퓨터에 대한 무지가 편만한 세상에서 해킹은 관심의 대상도 아니었지요. 그리고 그런 해킹은 오히려 당시에 그 폐혜가 잘 안 알려진 것이기에 영웅담이 대부분이었습니다.

* 또, 선생님께서 컴퓨터를 통해 새로운 인간 관계의 창조와 그를 통해 나타나는 문화를 전망하셨을 때, 그것은 당시의 맥락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상(이미지)였을지요?

- 전 기본적으로 얼리 어답터였고, 새로운 문물을 받아들이는데 능하거나 관대했으며, 신 매체를 일찍 받아들이고 그에 대해 전파하는 걸 사명으로 하던 리뷰어로서의 칼럼니스트였습니다.(PC에서 시작된 이 리뷰 기질은 나중에 스키, 인라인 스케이팅, 자동차, 현재의 자전거 리뷰어로의 일로 연결되고 있음.) 그러므로 전 PC를 이기로 생각하고, 그걸 잘 활용하여 미래를 개척해 나가야한다고 주장했고, 그게 단순한 도구라는 것, 하지만 그 영향력이 막강하므로 빨리, 잘 배워서, 일상에서 활용해야 한다는 것, 그게 통신과 결합하면 인간을 소외시키기는 커녕 끊어진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끈이 될 것이라는 걸 알리는 일에 열중했었지요. 그로 인한 문화는 구체적으로 통신으로 사회가 통합되는 지금은 실패한 모델인 ISDN 모델이었습니다.(당시 인터넷은 보편적이지 않았고, 속도도 느렸으며, 용도가 한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 엠팔의 정보문화
엠팔 이전에도 컴퓨터 네트워크 상에서 이용자를 식별하기 위해 '아이디'(I.D.) 라는 용어가 있기는 했을 듯 합니다(?). 그것을 기계적으로 생성되는 숫자 대신 각 이용자의 고유한 의미를 담는 문자(알파벳) 형태로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큰 변화일 텐데, 그런 차원에서 (그리고 님 호칭 캠페인 등을 함께 고려할 때) 엠팔은 정보공간(사이버 공간)에서의 이용자를 이전의 현실세계 등과 다르게 구성하려고 하신 듯 한데, 그러한 의식적 작업(통신의 이용자 개념화)이 실제로 있으셨습니까?
(엠팔의 여러가지 의의 중에서 이러한 문화적 차원의 것들을 특별히 정리하신 문헌(칼럼)이 있으신지요?)
- 이용자 식별 아이디는 공식적으로 알려진 대형 시스템 상에서는 없었습니다. 탐 맥이 만든 최초의 BBS이며, 공개된 시스템인 RBBS(Remote BBS)를 이용한 사설 BBS들에서는 사용되었을지 모르지요. 하지만 RBBS는 멀티용이 아니었습니다. 멀티 시스템으로는 엠팔 BBS가 최초일 가능성이 많습니다.

* 이른바 "대형BBS" 혹은 기업의 PC통신망 보다 이전에 엠팔이 등장하고 활동했는데, 숫자가 아닌 아이디의 사용 (및 님 호칭) 이외에도 엠팔이 이후 통신 운용과 이용에 미친 영향은 또 어떤 것들이 있는지요?

- 엠팔 BBS 이후에 나타난 케텔(하이텔의 전신), 천리안, 나우누리, 유니텔 등은 엠팔 활동을 하던 회원들이 새로운 대형 시스템에 진출하여 각 동호회의 시삽 등으로 활약하면서 그 문화를 파생시키고, 연장시킨 것입니다. 그게 가장 큰 영향이지요. 엠팔 회원들은 그런 시스템으로의 진출 시에 이미 많은 통신 경험을 지닌 이밴절리스트였던 것입니다.

- 문화 관련해서 1980년대 말과 1990년대 초에 무지 열심히 일하던 단체가 하나 있었습니다. 한국정보문화센터(ICC)입니다. 정보문화란 용어를 센터의 이름으로 했으니 당시 정통부의 후원으로 운영되던 이 기관이 정보문화 창달을 위해서 큰 기여를 하지 않았겠는가? 제 생각으로 이 기관은 컴퓨터 보급과 활용법 전파에 대단한 기여를 했다고 생각됩니다. 정부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풍부한 자금과 인력을 바탕으로 그런 일을 해 냈지요.
하지만 그게 정보문화 창달 그 자체는 아닐 것입니다. 이 기관이 PC 통신의 보급까지는 못 한 걸 보면 컴퓨터와 통신의 결합에 의해 펼쳐지는 미래 세상에 대해서는 크게 주목하지 못 했던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리고 엠팔이 한 활동 중에는 통신예절의 전파나 불법 복제 금지 등 정보 윤리에 대한 캠페인도 많았습니다. 이것이야 말로 엠팔이 PC 통신 문화에 대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당시의 이런 캠페인의 성격은 제가 칼럼을 통해 정리하고 컴퓨터 활용지를 통해 발표한 네티켓/Netiquette의 여러 항목에서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제가 정통부에서 만든 정보통신윤리위원회의 전신으로 먼저 설립된 "정보통신윤리실행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추대되고, 활동하게 된 것일 겁니다. 아니면 당시에는 컴퓨터 업계나 통신 관련 기관에 소속된 것도 아닌 순수한 민간인 자격의 제게 그런 업무가 맡겨질 수 없었겠지요.

* 그런데, 엠팔은 왜 지속되지 못 했는지요?

- H-Mail을 사용하면서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을 스스로 해결하려는 노력으로 생긴 것이 대형 BBS들입니다. 그리고 그 서비스들은 만족할 만했기 때문에 일부 회원들의 주머니 돈을 각출해서 유지되던 시스템을 지속시킬 필요성이 크지 않았지요.

* 소프트웨어 공유
네, 그렇다면, 영어 병기를 public domain 대신 free 로 하지 않으셨던 것이 궁금해집니다. 또, "공개 소프트웨어"라고 용어를 채택하신 것은, 그 직전에는 비공개적인 소프트웨어가 주류였다는 것을 동시에 말하는 듯 한데, 엠팔의 "공개 소프트웨어"가 무료 배포의 의미였다면, 엠팔의 반란의 대상이 된 것은 비공개(소스코드 등)가 문제라기보다 고가의 유료 배포가 문제였다고 볼 수 있겠습니까?

- 말 그대로 Free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았습니다.(스톨만의 개념은 없던 시절이구요. 없다기보다는 우리에게 소개되지 않은 시점.) 공익적인 목적에서의 자유로운 소프트웨어라는 개념이 변질되어 소프트웨어를 무조건 공짜로 쓸 수 있다는 잘못된 사상이 생길까봐 오히려 그걸 염려했던 것입니다. 공개 소프트웨어의 공개는 공중(대중)들에게 무료로 개방된 소프트웨어로서 비상업적 소프트웨어라는 의미입니다. 일반적인 의미의 공개, 비공개와는 다릅니다.  

* 그런데, 당시에 혹시 게시판 프로그램이 비싼 것 뿐만 아니라, 그 보다 더 근본적으로 소스코드를 비공개로 배포한 것을 문제삼고 그에 대한 반란이나 대안으로 소스코드를 배포하는 식으로 "엠팔의 반란"의 소프트웨어 형식을 취하자는 의견이나 토론은 없었는지요?
(소스코드 공개는, 비싼 가격 때문에 접근성이 떨어지는 문제를 해결할 뿐더러 더 많고 다양한 게시판을 확산시킬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는 논리적으로 그렇고, 그렇게 하지 않으신 당시의 역사적 맥락이 궁금합니다.)

- 위에서 잠시 설명했지만, 공개 소프트웨어의 개념이 스톨만의 것과는 다릅니다. 소스 코드 배포는 처음부터 의도적으로 배제키로 하고 시작된 일입니다. 엠팔 회원들은 관련 분야의 직업을 가진, 소프트웨어가 가진 가치를 인정하는 그룹이었고, 소프트웨어를 공짜라고 생각하던 시절에 소프트웨어를 비싼 돈을 주고 사서 쓴 사람들이 많습니다. 저의 경우도 당시 400불이나 하던 워드스타(WordStar) 워드 프로세서, 역시 비슷한 가격의 비지캘크(VisiCalc - 후에 로터스나 엑셀을 탄생케 한 소프트웨어)를 어렵게 미국에서까지 구입해서 사용했고, 지금도 그 패키지 두 개를 기념으로 보관하고 있습니다.(그 두 소프트웨어와 헤이즈 9600BPS 모뎀, 그리고 탠디 래디오색 모델 II의 키보드를 더 기념으로 보관 중입니다.)

* "당시에는 저작권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는 상태여서 소스가 공개 되면 이의 저작권 표시를 고치고 소스 일부나 메시지만 바꿔서 상요인 듯 판매할 소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라고 하신 것에 대해: 바로 위의 추가 질문에 대한 일정한 답을 여기에 미리 해주신 것이기도 한데, 소스코드를 공개할 때 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쉽게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이 아니었다고 할 때,
(스톨만은 바로 그런 차원에서 GPL이라는 독특한 이용허락[license] 방식을 고안[법적인 해킹]해서 해결했던 반면) 엠팔에서는 소스코드를 공개하지는 않는 대신 (퍼블릭 도메인이라기보다) 무료 배포하는 식으로 대응하신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당시 다양한 풀뿌리 게시판(사설BBS)이 확산되는데 있어서, 엠팔 혹은 국내외의 여러 소스코드 공개된 게시판 프로그램들이 돌아다닌 것(공유)이 크게 기여를 한 것이 아니었는지요?  

- 당시의 우리나라에서 개발된 에뮬레이터나 BBS 프로그램 중에서 소스를 공개한 프로그램은 단 한 개도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다 실행 모듈이었습니다. 공개된 것은 미국에서 개발되어 소스가 공개된 RBBS나 CBBS 등이었지요.

* 그런데, 사설BBS라는 말은 어떻게 나온 것인지요? 대형BBS가 나온 이후에 가능한 용어인 듯한데, 엠팔은 대형이 나오기전에 존재했기 때문에 적어도 엠팔을 사설BBS라고 부르는 것은 부당한 듯 합니다? (저는, 기업의 통신망 이전에 풀뿌리 컴퓨터 네트워크가 기술문화적으로는 어떤 독특한 특성을 지니며 나타났던 것인지가 기본적으로 궁금해서 그렇습니다.)

- 이미 영어에서 Private BBS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었고, 그게 컴퓨서브 같은 대형 BBS에 대응하는 용어였습니다. 그래서 엠팔은 대형 BBS가 없는 상황이나 사설 BBS로 칭한 것입니다. 엠팔은 유료 BBS도 아니었고요.

* 세운상가
그렇다면, 세운상가에는 일부의 업체에서나마 "소프트웨어 엔지니어, 즉 프로그래머"가 있었다고 보시는지요?
그 분들 중에 사랑방, 엠팔 등에 참여하신 분도 있었는지요?

- 당시 세운상가에는 훌륭한 소프트웨어 엔지니어들이 엄청나게 많았습니다. 일부는 샵 소속이나 대다수는 따로 직업을 가진 분들을 아르바이트로 고용하여 활용하는 형태였습니다. 엠팔 중 많은 사람들이 그런 아르바이트를 하기도 했습니다. 현재 마이크로소프트의 이사인 안대혁 박사(현 미국 거주)는 당시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에 청계천의 샵들을 위해 많은 조언이나 개발을 하기도 했었습니다.

* 다르게 질문드리면, 세운상가와 용산전자상가가 어떻게 다르다고 생각하시는지요? (전자는 1980년대, 후자는 1990년대 이후를 일정하게 대표하는 전자상가이자 정보문화의 한 공간이라는 의미에서 말입니다.)

- 현재의 세운상가와 용산전자상가는 비슷합니다. 전자가 쇠락한 후자의 모습이라는 정도의 차이밖에는 없습니다. 하지만 1980년대에는 대기업들이 눈을 돌리지 않은 분야에서 살 길을 찾는 벤처 마인드를 가진 샵들로 가득한 벤처 컴플렉스였고, 카이스트나 포스텍, 혹은 대형 전산실을 갖춘 공적인 기관들과는 다른 민간차원에서의 정보문화의 산실이었습니다.

* 정부와 정보산업·정보문화
혹시, 1980년대만 놓고 볼 때 정부의 정보산업의 규제 중에서 가장 불행했던 사례는 어떤 것이 있을지요? 무엇이 더 발전하지 못하게 했던 정책이었던 것이었는지요?

- 개인들이 모뎀 등의 통신 기기를 마음 대로 사용할 수 없도록 한 뒤떨어진 전기통신법 등이 한심한 법이었지요. 유연성이 전혀 없이 법이 운용된 것은 불행이었구요. 그게 바람직한 전기통신진흥법의 형태였더라면 좋았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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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7 컴퓨터/통신/인터넷 [중앙일보] 88년, 국내 PC보급 5백 만, 통신인구 50만 급속확산 4 file 박순백 2016.10.25 619 0
76 컴퓨터/통신/인터넷 처음 당해 본 모바일 소액 사기 결제 5 file 박순백 2013.11.08 1949 0
75 컴퓨터/통신/인터넷 [September 29, 1992] 키보드에 관하여... file 박순백 2013.08.13 2223 0
74 컴퓨터/통신/인터넷 자동차 전문기자로 알게 된 분인 줄 알았는데... 3 file 박순백 2013.05.31 1314 0
73 컴퓨터/통신/인터넷 설마 하고 마우스 포인터를 가져다 댔는데... file 박순백 2013.04.12 1261 0
72 컴퓨터/통신/인터넷 백두산 스키와 트위터 포스팅 file 박순백 2012.12.03 872 16
71 컴퓨터/통신/인터넷 그 이창원 file 박순백 2012.02.01 1491 53
» 컴퓨터/통신/인터넷 초기 PC 문화, 해킹/해커, 공개 소프트웨어, 정보기술의 발전과 해킹 등에 관한 인터뷰 file 박순백 2011.09.05 2773 54
69 컴퓨터/통신/인터넷 애플 아이폰, 아이패드 독(dock)이 추가된 익스트리머 DivX 플레이어 3 박순백 2011.04.07 2438 143
68 컴퓨터/통신/인터넷 200 필요하세요? 3 file 박순백 2011.02.08 1619 154
67 컴퓨터/통신/인터넷 10/12/21(화) 대전 군수사령부 강연 - "아이폰이 가져온 모바일 혁명" 2 file 박순백 2010.12.22 2576 221
66 컴퓨터/통신/인터넷 시분제 유감 박순백 2010.12.08 1891 125
65 컴퓨터/통신/인터넷 97년의 사진 한 장 file 박순백 2010.09.01 1629 231
64 컴퓨터/통신/인터넷 [중립적인 입장] 한 블로거의 SKT 비판과 그에 대한 개인적인 반론 하나, 그리고 저의 실수 박순백 2010.07.30 2012 159
63 컴퓨터/통신/인터넷 [Lotte Card VIP Magazine / Impression 5월호] 세상을 바꾸는 이기(利器), 아이폰 박순백 2010.03.19 3855 249
62 컴퓨터/통신/인터넷 5790th file 박순백 2010.01.07 1955 295
61 컴퓨터/통신/인터넷 10월 24일(토)에 찍은 엠팔 사진 4 박순백 2009.10.27 3634 516
60 컴퓨터/통신/인터넷 어떻게 이런 글도??? file 박순백 2009.09.02 3462 343
59 컴퓨터/통신/인터넷 [바른 우리말]의 카테고리와 글쓰기 시의 "당부의 말씀" 박순백 2009.08.24 2304 359
58 컴퓨터/통신/인터넷 트위터 사용 통계 사이트 file 박순백 2009.07.31 2551 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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