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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사람
2013.10.17 21:22

남해 금산 보리암에서 마음 내려놓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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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을 세우면 불 밝힐 초를 시주하라 손 내미는 것 같아 마음 쓰여

 

 

23호 태풍 비토가 5일쯤 남해안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예보를 보며 남해군를 찾았다. 그러나 태풍은 동해상의 차가운 공기를 만나 중국으로 방향을 틀어 낮게 해무(海霧)만 깔렸을 뿐 하늘은 비교적 청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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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무도 시나브로 언제 그랬느냐 시치미 뚝 때고 잠시 뒤엔 여지없이 따가운 햇살을 비추겠지만 아침식사를 마치고 금산산장을 나선 시간엔 선선한 산바람이 한기를 느끼게 만든다.


쌍홍문을 지나 보리암으로 가는 길과 나뉘는 곳 못 미쳐 보리암을 촬영하기 좋은 장소가 있다. 등산로에서 살짝 비껴선 위치라 사진 촬영을 할 생각이 없는 이들은 오르지 않는 야트막한 둔덕 정도의 바위를 올라 보리암을 담아 본다. 새벽부터 내내 불만스러운 일은 왜 하필이면 그동안 잘 가지고 다니던 PL필터를 차에서 가져오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늘빛이며 바다의 물빛을 도드라질 정도로 말끔히 보여줄 수 있는데… 주머니에 넣기만 해도 될 일을 서둘 일도 없는데 놓고 왔으니 후회막심이다.

여리게 스미는 햇살 한 조각 소홀히 할 일 없음이 사진을 촬영하는 도리인 것을.

 

쌍홍문을 통과해 보리암으로 가는 길과, 곧장 바위의 경사면으로 질러가는 길 중 잠시 망설였으나 허리의 통증을 핑계로 오르내려야 하는 쌍홍문을 포기하고 곧장 보리암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차피 일행들 대부분 쌍홍문을 통과하는 길을 지나며 사진을 담을 일이니 몇 사람 정도는 또 다른 길에 대해 풀어 놓음도 좋은 일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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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에 상주은모래비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선대교로 들어 온 차량들은 이곳을 통과해야 앵강만이나 가천 다랭이마을을 갈 수 있다. 구불구불한 도로가 계단식 논과 밭 사이를 통과하고, 방풍림 너머로 쉼 없이 얕은 파도는 해안을 향해 밀려든다.

시선을 거두고 다시 발걸음을 옮긴다.

잘 가꾸어 놓은 분재를 만난 것 같은 마음으로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나무들을 보며 보리암 경내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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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리암전 3층석탑(菩提庵前 三層石塔)은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74호로 지정되어 있다.

대게의 탑들이 사찰의 경내 대웅전 앞에 위치하는 것과는 달리 대웅전이나 극락보전 등 사찰의 중심건물 바로 앞마당에 배치하지 않았다. 지형적 여건 때문일 수 있으나 사찰의 중심이 아닌 사찰에서 조금 떨어진 바위위에 별도로 위치시켰다. 땅의 나쁜 기운을 누르고 약한 기운을 보충해 좋은 작용을 하도로 세우는 비보의 성격이 담겼다는 내용으로 미루어 보리암 건립초기부터 어떤 불상사가 있어 이 위치로 자리하도록 하였던 모양이다.

 

이 탑에는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하는데 모두 수로왕의 왕비인 허태후와 관련이 있다.

하나는 허태후가 인도를 다녀오는 길에 풍랑을 만나 배의 균형을 잡기 위해 실었던 파사석(婆娑石)을 금산에 옮겨 두었다가 훗날 탑을 조성했다는 설이다.

또 다른 하나는 허태후가 인도에서 가져 온 부처의 진신사리를 이곳에 안치하기 위해 탑을 조성했다는 이야기인데, 탑은 금산에 흔히 보이는 화강암으로 만들어졌다. 탑의 양식도 원효대사가 처음 금산에 절을 세웠던 시기의 형태가 아니라 고려 초기의 형태로 위의 두 가지 이야기와는 거리가 있다. 물론 후자의 부처의 진신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탑을 조성했다면 이야기는 된다. 진신사리를 부처를 대신하여 법당에 봉안했다 훗날 별도로 부처를 모시게 되자 사리를 봉안할 탑을 조성할 수는 있는 일이다.

탑을 조성하는 방식도 다른 사찰에서 만나는 탑과는 많이 다르다.

대체로 석탑은 기단부부터 네 개의 돌을 이용해 우주(隅柱)라 하는 기둥석을 세우고 면석을 그 사이에 끼어 맞추며 네 개의 판석을 각 방위별로 얹은 뒤, 그 위에 같은 방식으로 네 개의 돌로 기둥석을 세우고 면석으로 마감한 뒤 하나의 지붕돌을 얹어 한 층을 이루도록 한다. 보리암전 3층석탑은 지대석과 하대석을 하나로 통일해 상층기단의 역할을 하는 받침을 삼았으며, 상층기단(上層基壇) 또한 하나의 돌을 이용했는데 모서리부분을 기둥으로 보이도록 새김질을 했다. 건물의 칸 나눔 역할을 하는 탱주(撐柱) 또한 볼 수 없다.

모서리기둥으로 보이도록 한 기단 그 위에 네 개의 돌로 갑석을 얹었다. 대체로 탑은 하대갑석과 상대갑석으로 나누어 기단부를 형성하고 그 조형적 방식도 일반적인 건축양식을 따르는 게 상례지만 이 탑은 단 세 개의 돌을 이용해 기단부를 세운 것이다.

탑신부를 살펴보면 탑신석은 예의 우주를 새김질만으로 마쳤으며, 옥개석(屋蓋石) 만큼은 지붕의 경사면에 해당하는 낙수면(落水面)과 전각(轉角)을 살리고 옥개받침까지 온전히 조성했다.

3층 지붕돌(옥개석) 위 상륜부(相輪部)에 구슬 형태의 보주(寶珠)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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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등이었을까?

어느 스님의 사리를 모신 부도일까?

소용이 무엇인지, 왜 조성했는지를 알 수 없는 그리 크지 않은 기둥 하나만 덩그러니 연화받침 위에 얹혀 있다.

이 위치라면 한 밤 탑으로 기도를 나온 보살의 발걸음을 돕기 위해 석등(石燈) 하나 있었음직 하다. 형태로 보아 팔각 간주석 위로 앙련을 얹고 화창을 판 화사석을 세운 뒤 그 위에 지붕돌과 상륜까지 제대로 조성해둠직 한데… 부도라기엔 그 형태가 너무도 초라하고, 석등이라기엔 남겨진 부분들이 턱없이 모자라니 그저 마음으로 어느 스님께서 탑을 찾는 보살을 살펴 석등 하나 세웠으리라 싶다. 야심한 한밤중 발걸음 옮길 때 아득한 허공을 향해 나서는 두려움 느껴보면 안다. 한 줄기 여린 불빛의 감사함을…

마음 좋은 스님이라면 석등 세우는 불사도 여간 고심이 아니었겠다.

공연히 불사한다고 보살들에게 부담 지우는 일이나 아닐까 노심초사했겠고, 석등을 세우면 불 밝힐 초를 시주하라 손 내미는 것 같아 마음 쓰여 그것도 어렵겠다.

어질고 어진 어느 보살이 석공 은근히 불러 석등 조성해 시주했다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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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내를 거쳐 발걸음 옮기려는데 산죽 너머로 올망졸망 섬들이 편하다.

‘잠만 자도 도 닦여지는 명당’을 새벽바람에 둘러 본 덕일까?

지난 밤 세 시간 남짓 눈을 붙였고, 그 전날도 딱 그만큼 잠을 잔 탓인지 몸은 허방다리에 발걸음 옮기듯 휘청거리건만 마음 편하니 말이다.

 

가을 깊어 금산에 비단물결 일면 탄성 절로 일 모습 그려보며 남해의 또 다른 보물을 찾아 걸음을 재촉한다.

사는 동안 또 다른 행복 없달 손 없으나 이 기억 제법 오래 간직될 것이다. 갯벌에서 후릿그물도 당겨보고, 독일마을에서 독일식 맥주와 소시지로 적당히 취해도 보았지만 역시 앵강만과 상주은모래비치를 굽어보며 금산을 올라 보리암을 둘러 본 기억만큼 가장 달콤한 건 없으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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