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11-23(일) 여주 계림리의 밀양박씨 정승공파 시제
우리 집안은 매우 고리타분한(?) 집안이다. 조상을 위해야 자손이 잘 된다는 소릴 어릴 때부터 꽤 많이 듣고 자랐다. 특히 우리 아버님이 우리 일가에서 그런 캠페인을 가장 열심히 하셨던 분이다. 그래서 가문에서는 아버님이 돌아가시기도 전에 아버님에 대한 공적비를 종중 묘역에 세워 그 공을 기리기도 했다.
이제 아버님이 돌아가신 지 몇 해가 지났다. 그래도 그 정신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그런 증거 중의 하나가 이번 경기도 여주, 계림리에 세워진 밀양박씨 정승공파의 재실이고, 새로 조성되고 있는 묘역이다.
- 이 날 시제의 하일라이트는 재실 준공식.
이 날 아침 아들 현근이는 자기가 경영하는 레스토랑의 일이 바빠서 나와 함께 가지 못 했다.(요즘 아르바이트생을 쓰면 시도 때도 없이, 가끔은 사전 통보조차 없이 그만 두는 바람에 속을 썩고 있다고...) 그래서 난 경기도 퇴촌의 동생 집으로 가서 조카와 셋이 그리로 갔다.
원래 우리 밀양박씨 정승공파의 400년 된 종산은 경기도 하남시 풍산동의 황산이다. 그리고 그 일대에 일가친척들이 모여살아서 박씨 동족부락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다 일부 일가들은 서울 등지로 이사를 했지만, 그래도 많은 일가들이 황산에 머물러있었다.
그러다 우리 고향 황산이 미사강변도시 개발 지역에 속하게 버렸다. 그래서 그곳이 보금자리 주택지로 수용이 되어 버린 것이다. 토지개발공사에서는 종산 및 종중 토지에 대한 보상을 해주고 그곳의 묘역을 이장하는 비용을 대주기는 했다. 그리고 우리 밀양박씨 정승공파가 400년이 넘게 살아온 땅과 묘역 중 한 자리에 그곳에 한 때 우리 일가들이 살았었고, 그곳이 400여년의 종산이오, 묘역이었음을 알리는 비석을 하나를 LH에서 남겨주겠노라고 했단다.-_-(이거 민주주의 사회가 맞는지???)
그래서 할 수 없이 우린 묘역을 옮겨야했고 그렇게 정한 곳이 여주의 계림리였다. 양평에서 경기도 이포보까지 간 삼거리에서 왼편으로 4km를 더 들어간 곳의 계림리 야산이다.
- 계림리 묘역 조성지로 향하고 있다.
- 저 앞에 이번에 지은 종중의 재실이 보인다.
- 재실 앞 임시 등록대에서 출석 체크 중이다.^^
- 이렇게 주소록이 만들어져 있고, 온 사람은 거기 싸인을 한다. 이건 새로운 주소나 연락처 파악의 목적과 함께 교통비를 내주는 용도로 사용된다.
- 재실은 묘역을 관리하고, 종중의 일가들이 시제 등의 행사 때 모임을 갖는 곳이다.
- 고향 황산에서 이장해 온 묘들이다. 아직 잔디도 자라지 않아 붉은 황토색이다. 이건 재실 위쪽으로 돌아올라가면 보이는 묘들이다.
- 고향 황산 묘역에 다섯 개의 독립된 단으로 멋지게 조성되어 있던 것이 저 탑 하나로 통합(?)되었다. 매우 아쉬운 일이다. 너무 살벌한 모양의 탑이다.-_- 전엔 인간미 넘치고, 정취가 있는 멋진 한식 담 앞에 여러 개의 단들이 마련되어 있어서 고전적인 모습이기도 했는데... (동생과 사촌형이 그 앞에 있다. 비온 다음 날의 제사라 절을 할 때 바지가 젖지 않도록 돗자리 등을 깔기 위해 임시로 젖은 땅을 덮어놓은 것이다.)
- 이 탑도 비가 많이 와서 비가 잠시 그친 전날에야 세워졌다고 한다.
- 이런 석등은 아직 세워지지도 못 하고 나뒹굴고 있었고...
- 단 뒤에는 제사 지낼 때 미리 지신에게 신고(?)를 하는 산신대가 조그맣게 만들어져 있었다.
- 뒤에서 본 비.
- 맨 위의 단은 이북에 묘가 있는 저 윗대 조상님들을 위한 것이고, 그 아래엔 조선 중기의 조상님들 묘가 조성되어 있다.
- 이 돌은 꽤 오래 돼서 희한한 이끼가 끼어있다.
- 고향 동산에서 가장 오래된 비석이 이것인 듯 싶다. 아버님이 어릴 때 비산숲(비석이 많이 서있는 산의 숲의 미미로 고향 사람들이 부르던 이름)에 있던 이 비석의 내용이 무척 궁금하셨었다고 한다. 그래서 금석학을 스스로 깨우치셨고, 그걸 통해 조상들의 가르침을 받게 되시는 바람에 우리 종중의 역사가 빛을 보게 되었었다.
- 단 비석 등이 있는 묘역 옆에도 작은 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이건 제수 음식을 준비하는 곳이다. 그 앞에도 미처 세워놓지 못 한 비석들이 많이 흩어져 있었다.
- 앞서의 오래된 조상님들의 묘역에서 왼편으로 좀 걸어올라가면 두 번째의 묘역이 나타난다. 여긴 우리로부터 몇 대 위의 비교적 가까운 조상님들을 모신 곳이다. 안타까운 것은 저 곳에도 우리가 전통적인 형태로 묻힐 곳은 없을 것이라는 점.ㅋ
- 이곳은 일부 묘만 조성되고 계속 이장되어 온 묘들을 조성하는 중이다.
- 우리 부모님 묘는 이장한 지 오래지 않아 이곳 어디에...
- 동생(박순관)이 서 있는 곳 바로 앞의 봉분 자리가 우리 부모님이 합장된 곳이란다.
- 저 쪽엔 또 다른 미처 작업이 진행되지 않은 비석들이 몇 무더기가 있다.
- 묘역을 옮겨 올 때 함께 온, 이장을 위한 분묘 표식이다.
- 풍산동. 내 고향의 이름인데...
우리가 어린 시절의 그곳은 거칠 황 자의 황산(荒山)이었다. 거친 산. 그래서 순수한 우리 말로 거칠메(뫼)라 불렸다. 근데 그곳의 동네 이름을 한자어로 누군가가 바꿔서 지적부에 등재한 것이 풍산동. 황산의 반대 개념이다. 풍요로운 산이 되기를 바라는 우리 조상님들의 기원이 담겨있는 이름인 것 같은데, 일설은 그와 다르다.
국토지리원 고위직의 책에 나온 얘기를 덧붙여 동생이 내게 이렇게 알려주었다. "우리 선산 지명이 거칠메(뫼)였는데 일본의 문화말살 정책의 하나로서 한국의 전통성이 강한 동네 지명을 없애기 위해서는 거칠메란 동네 이름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바로 옆 동네인 덕풍동에서 "풍" 자를 황산의 "산"자를 합하여 [풍요로운 산 풍산동]으로 바꾼 거에요. 아주 그럴듯 하지요."
- 묘역을 둘러보고 있는 동안에 재실 준공식이 거행된다고 하여 재실 쪽으로 내려왔다. 재실 옆에 임시로 세워진 텐트 아래에서는 음식들이 준비되고 있었다.
- 집안의 아저씨(내게)들이 재실 준공을 위한 테이프 커팅을 하실 참이다. 이제 내가 나이가 드니 내 위로는 아저씨 뻘인 분들이 고작이다.-_- 오래지 않아 내가 그 서열에 오르게 될 것이다.
- 우리 일가들은 조선시대에 걸쳐 황산에서 시작하여 원주, 가흥, 서산 등지로 큰 줄기가 뻗어나갔다. 시제엔 물론 그곳에 사는 후손들도 올라온다. 우리 집안이 맏이쪽이라 우리 집안에서 시제를 준비하는 것이다. 집안 행사에 대한 참여도는 꽤 높은 편인데, 사람들은 그게 다 종중 재산이 수백억 원대에 달하다보니 그런 것이라고 농반진반의 얘기를 하며 웃곤 한다.
- 드디어 테입 커팅이 끝났다.
- 종중회장께서 재실을 짓는데 수고한 분들에게 감사패를 드리고 있다.
- 재실 준공식을 마친 후에 묘역으로 올라가고 있다. 시제를 지내기 위함이다.
- 종중 묘역 관계자와 종중회의 임원을 제외한 일가분들은 모두 나처럼 처음 와 보는 것이다.
- 아까는 없던 것인데, 그 사이에 토지신에게 올릴 제수가 마련되어 있다.
- 단비 앞에도 제수가 준비되고 있고...
- 계속 준비 중이다.
- 묘역 끝에서 저 멀리 보이는 것이 계림리의 민가들이다. 논들은 가을걷이가 끝나 있다.
- 묘역 끝에서 재실이 내려다 보인다.
- 이런 모양이다. 아직 주변 정리는 다 끝나지 않은 상태.
- 이제 시제가 시작될 참이다.
- 이런 동자상도 보이고...
- 이런 대신상도 보이고...
- 몽골로이드의 특성이 반영된 얼굴인가?^^;
- 토지신에게 고한다.
- 시제가 시작되었다. 돗자리 위에서 절을...
- 묘역은 공사 중.
- 작은 재실 내에서도 제사 음식 준비가 한창 진행 중이다.
- 한창 조성 중인 묘역으로 이동했다.
- 여기서도 이미 조성된 봉분 앞에서 시제를...
- 이렇게 일차적으로 시제를 마치고...
- 재실로 돌아와 식사를 하기로 했다. 식사 후에는 종중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다.
- 식사 후에 종중회가 개최되었다.
- 회의 자료를 배부하고 나서 웬 새마을금고 봉투가 하나씩...
- 봉투엔 교통비 5만 원씩이 들어있다. 어린 아이들은 시제에 오면 이렇게 용돈(???)받는다고 좋아하는데, 이번엔 아이들이 많이 참석지 않아서 유감이다.
- 나는 68세손의 "순" 자 돌림에 속해서 이름이 순백이다. 위에 써 있듯이 황산종산에 있던 묘역에는 나로부터 22대에 걸친 조상님들의 묘가 다 만들어져 있었던 것이고, 그것이 여주 계림리로 옮겨온 것이다. 얼마 전에 큰 댁의 손녀애가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나와 같은 순 자 돌림은 그 기 자 돌림 아이의 증조 할아버지가 된 것이다.(말도 안 돼.-_-)
- 이런 타울과 함께 다른 기념품 하나도 배부됐다. 위의 것은 집에 가서 보니 치약 상자이다.
- 종중회가 끝나고 지방에서 올라온 친척들이 다 돌아가신 후에 우리 황산 집안의 시제가 다시 시작되었다.
- 여긴 제주가 망건 등도 안 쓰고 간략히 치른다.^^;
- 조카와 손자 중 한 부자.
- 이렇게 아빠를 따라와 절을 하면서 배워간다.
- 이건 뭐 해도해도 끝이 없다.-_-
한 가지 재미난 일은 황산 묘역에 있던 기존 재실의 정문 위에 목재 패널에 "밀성재"라 한자로 크게 새겨진 현판이 도난을 당한 일과 관련된 것이다. 미사강변도시 조성을 위한 공사가 진행되면서 그 부근이 LH공사에 의해 폐쇄되고 이장 작업이 서서히 이뤄지고 있는 동안에 그런 일이 생긴 것이다.
근데 가끔 전시회나 박물관 방문, 황학동이나 양평의 골동상 등을 돌아보는 동생이 그 현판을 동묘앞 골동상에서 발견했다는 것이다. 도난을 당한 물건이나 골동상들이 고물상 허가를 받아놓고 있기에 그들은 죄가 없고, 그걸 찾아오기 위해서는 소송을 해야한다. 그래서 그 일에 대해 종중회에 보고하니 소송은 귀찮으니 그걸 되 사오자고 의결했다고 한다.-_- 뭐 이런 일이... 멀쩡히 눈뜨고 재실의 현판을 도둑맞다니... 이건 LH공사의 책임 아닌가?
- Spark: 위의 두 문단을 동생이 보고 아래와 같은 카톡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버님이 중중회장 시절에 종중회관을 2층으로 새로 지으신 때가 제가 종로의 목조각학원에 다닐 때인데,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인 "온고지신"을 제가 나무판에 멋지게 새긴 걸 보시고 아버님이 재실 밀성재의 현판을 만들어 보라고 하신 겁니다. 아버지가 밀성재라 한자로 쓴 글씨를 페인트로 쓴 두꺼운 대추나무 판을 주시고는 그 글씨를 조각해 달라셔서 직접 제가 조각하여 달았던 겁니다. 대추나무가 워낙 단단한 재질이라 그걸 조각하느라고 죽을 뻔..."
이렇게 시제를 마친 것이 세 시 반. 거기서 퇴촌에 잠시 들러 동생의 도예공방 "거칠메"에서 말차 한 잔을 마시고 집으로 오니 저녁 시간이 다 되었다. 아침 8시에 시작해서 그 시각까지 꽤 오래 그곳에서 시간을 보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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