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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2001.08.03 08:10

잊으려는 노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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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제목 : 잊으려는 노력으로... / 박순백 - 2001-08-03 08:10:29  조회 : 1683


잊으려는 노력으로...

휴가철에도 휴가 갈 생각을 않고 있었다.
왠지 있어야 할 사람 하나가 없는
그런 휴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아서,
그런 휴가가
가족들에게 슬픔을 줄 것 같아서...

감히 휴가에 대해서는
얘기조차 꺼내지 않았었다.
하지만 그게 더 어색한 일일 듯 하여
뜬금없이, 아주 갑작스레
집사람에게 휴가를 가자고 했다.
어떤 일이
지연이에 대한 추억을 불러일으킨다는 걸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게 우린 감연히 그 슬픔들과 맞닥뜨려
그걸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각오로 떠나니 한결 슬픔이 덜했다.
추억 어린 그런 길들을 달리면서도
난 지난번처럼 많이 슬퍼하지 않았다.

가슴을 저미는 아픈 슬픔들이
세월의 흐름으로 자연히 치유되는 게 아님을,
그런 슬픔들을 이기려는 노력으로만
극복해 낼 수 있는 것임을 알아가면서
그냥 부딪히는 게 답이란 걸 알았다.

피하면 안 된다.
슬픔에 감연히 맞서,
그걸 이겨내야 한다.
그걸 극복해야 한다.

다시 한계령을 향하면서
다시 지난번의 여행길과 동일한 길을 달리면서
난 어쩌다 한 번
지연이의 영상을 떠올렸을 뿐이다.
잊으려 하면 잊혀지는 것.
이렇게 잊으려고
인위적인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게
슬플 뿐이다.
그게 기막힐 뿐이다.

그 오랜 세월을 함께 했던 아이를
내 스스로
기억 속에서 지우려 한다는 게,
그 아이에게
무척이나 미안한 일이다.

하지만 그렇게 잊으려 함이
그 애를 잊으려는 게 아니고,
그 애로 인한
슬픔을 잊으려 하는 것임을
그 앤 이해해 주리라.
그렇게 믿으면서,
난 잊기로 했다.

가슴 한 편에 그 애에 대한
미안함을 간직한 채로...

그 아이와 함께 한 기나긴 20년.
어찌 보면, 무척이나 짧은 스무 해.
나이 드니 10년도 잠깐인데,
그 앤 10년 전에 겨우 초등학생이었고,
그 몇 년 전엔 세상 모르는 유아였었다.

그런 10년을 몇 번 지나는 게 인생.
그 많은 사람들이 태어났어도
유한한 인생 앞에 굴복하지 않은 이가 없다.
아무도 영원히 살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 많은 사람들 만큼,
그렇게 숱한 슬픔들이 있었을 거다.
겨우 그 중의 하나.
우린 겨우 그 슬픔의 하나를 겪을 뿐이다.

그렇게 당연히 떠날 인생.
어차피 떠날 인생.
조금 더 슬픔을 견디다 보면
다시 만날,
질긴 가족의 인연.
굳이 슬퍼하지 않고,
슬픔을 안고 살지 말고,
그렇게 견디다
웃음으로 다시 만나길...

휴가 길에서 만나는 사람들 중,
연이 또래의 아이들만 보면
왜 그 앤 즐거운 저들처럼
이 세상에 없는 지,
세월 따라
하루가 다르게 변해 가는
새로움으로 가득 찬 이 세상에
왜 그 애만 없는 지
그런 게 아쉬웠다.

지연이의 어린 모습 같은
작은 여자 애들을 보면,
괜한 안타까움,
괜한 걱정.
'너의 앞날엔
그런 불행이 없어야 한다.'는
그런 기도.
그들과 함께 하는 부모들을 보면,
'당신들은 그런 불행을 겪지 말라.'는
그런 기도.

점심 먹으러 들어간 식당.
우리 아이들처럼
서너 살 차이의 남매를 본다.
누나가 먼저 들어오며
뒤돌아보는데,
그 팔굽에 동생의 얼굴이 맞았다.
동생이 울음을 터뜨리니
누나가 무척이나 미안해한다.
누나가 달래고,
엄마가 달래고,
아빠는 거짓으로 누나를 야단치고...
누난 미안하다며
머쓱한 얼굴로
동생의 엉덩이를 두드리고...

그런 광경을 줄곧 지켜보며,
'넌 좋겠다.
그런 누나도 있고...'
혼자 남은 현근이 생각에
눈물이 솟는다.
현근인 뒤돌아 앉아
점심 먹기에 바쁜데...
그런 생각들을 들킬까 봐
나오는 눈물을 억지로 참는다.

앞으로도 지연이를 연상시킬
수많은 일들이 있을 거다.
하지만 난 그 때마다 슬퍼하지는 않을 거다.
이제 새로이 당하는 그런 광경들은
단 한 번 슬퍼하고,
그 다음엔 덜 슬퍼하다가
결국은 극복하고 말 거다.

그렇게,
잊으려는 노력으로...
난 이 한없는 슬픔을
극복해 나가고 싶고,
또 그래야만 한다.

단지 그런 노력이
슬픔과 함께
지연이까지 잊게 한다면
난 차라리 슬프고 싶다.

 



다시 오색에서...
오색의 아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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