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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2002.02.28 20:09

지천명(知天命)

조회 수 3816 좋아요 0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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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 제목 : 50, 지천명(知天命) / 박순백 - 2002-02-28 20:09:54  조회 : 3644 


내 홈 페이지에는 나만 들어갈 수 있는 낙서장이 하나 있다.
거긴 쓰다 만 글들이 있기도 하고,
밖에 내 보이기 싫은 글들도 있고,
몇 장의 공개되지 않은 사진들에 대한 링크만 있기도 하다.
오늘 그 낙서장을 들추다가 작년 8월에 쓴 글 하나가 있음을 발견했다.
8월 20일에 쓴 글이다.
지연이가 떠난 게 6월 13일이니,
그 참혹한 일을 겪은 지 두 달 정도 지난 때.
그 때의 나의 심상을 돌이켜 보게 하는 글이다.

 



글쓴 날짜 2001/8/20, 09:10:02
제 목 50, 지천명(知天命)

내 나이 이제 50에 가깝다.
50, 지천명(知天命).
흔들림 없이 살라는 불혹(不惑)의 나이,
40줄을 지나,
하늘의 뜻을 스스로 깨달아야 하는 때이다.
하늘이 내게 명하는 바를 알고,
바르게 살아야 할 때이다.
지연이를 잃은 것은,
지연이를 잃게 된 것은
하늘이 내게 무엇을 알게 하기 위함인가?
난 아직 그걸 알지 못 한다.

지연이가 떠나고 나니
기쁠 때나, 슬플 때나,
그 애 생각이 난다.
아니 기쁠 때와 슬플 때를 포함한 언제나
그 애 생각만 난다.
시작은 어떤 것이든,
모든 게 그 애를 향하게 된다.
그 애가 집안의 중심이었던 적은 없다.
나서지 않고 조용하던 애라,
언제나 제 자리에서
제 할 일만 하던 애다.
이제 지연이 중심적인 생활 속에서
느껴지는 건,
가족의 소중함이다.
가족 중 어느 누구의 비중이
그만 못 하랴.
모두가 소중하고
모두가 중심인 거다.
우리 모두는 네 귀퉁이의 한 가정의
한 축이었던 것을...
아이 떠나기 전에 그 걸 알았어야 했다.
아이 떠난 후에 남은 가족들의
귀중함을 깨닫게 되었으나,
떠난 아이에 대한 아쉬움으로
남은 이를 더 잘 돌보지 못함은 아닌가 걱정된다.

주말 저녁,
한참을 말이 없던 집사람.
"왜 그러니?" 물음에
"뭘 해도 신이 안 나."하며
울기 시작한 아내.
뭐라 해 줄 말이 없었다.
위로의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설득력있는 말로 우지 말라
말리기 힘들었다.
나 또한 그러하기에
그 얘길 들은 순간,
'너도 그랬구나.' 느낄 뿐,
뭐라 딱히 해 줄 말이 없었다.

뭘 해도 신이 안 난다.
뭘 해야 할 지도 잘 모르겠다.
어떤 일을 관성적으로 하면서도
'왜 이걸 해야 하지?'라는 생각이 들면,
거기서부터는 답을 찾지 못 한다.
온몸의 힘이 빠져옴을 느낀다.

'해야겠지... 하던 일이니...
계속하는 게 답일 거다.
전에 이렇게 살면서 만족했었으니,
전에 옳다고 생각하고 했던 일이니,
이렇게 사는 게 답일 거다.'
그런 생각으로 나 자신에게조차
확신을 주지 못 하는 그런 행동을
기계적으로 계속 할 뿐이다.
뭘 해도 신이 나는 삶은
영원히 우리 곁을 떠났는 지도 모른다.
항상 마음 한 편에 아쉬움을 안고,
그렇게 살아가야 할 지도 모른다.

단지 하나의 구원은
인간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것.
잊고 살다가,
잊고 신나게 살다가
어느 한 순간 기억하고,
떠난 아이에 대한 죄책감으로
가슴 아파하다가
그걸 또다시 잊고 사는...
그런 삶이어야 할 것이다.

뭘 해도 신이 안 나니
뭘 해야겠다는 계획을 세울 수 없다.
이런 고통이 빨리 지나길 빌 뿐이다.
내 의지 대로가 아니라
세월에 기대어 수동적으로 살아야 하니
그게 아쉬울 뿐이다.

 

 

 

 

 

 

정정숙 외국에 오래 나와 살다보니 지천명은 몇 살인지 잘 몰라 검색을 했다가 님의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벌써 5년전의 글이네요. 따님이 떠난 날은 제가 오래전 태어난 날이고 이름이 저의 딸과 흡사합니다. 지금쯤 따님을 잃은 슬픔에서 많이 벗어나 고요한 일상으로 돌아가셨길 바랍니다. 그래야 따님도 좋아할 것 같네요. 2007/01/22 05:51:23
208.120.30.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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