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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욱 칼럼(Who's Phillip Yoon?), 조용훈 칼럼, [PC-Fi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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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욱 칼럼
2008.04.05 13:59

[윤세욱] 흰 레코드 검은 레코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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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3535 좋아요 608 댓글 2
글쓴이 윤세욱
글쓴 날짜 1999/2/19, 17:56:46
제 목 흰 레코드 검은 레코드

LP레코드로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무척 성가신 일이었다.

온도에 습도에 심지어 판 보관하는 위치까지 다 신경 써주어야 했다. 원 재질이 비닐로 만든 물건이라 조금만 무신경하게 관리하면 긁히고 휘어지며 허옇게 먼지가 들러붙어 재생할 때마다 "때각 때각" 젓가락으로 창호지 뚫는 소리가 스피커에서 들리기 시작하는데 이럴 때면 머리 속도 젓가락으로 꼭꼭 찔리는 느낌이 들면서 음악을 듣는 게 아니라 전쟁을 치르는 기분이 되었다. 물론 그렇지 않은 사람도 부지기수였겠지만 자칭 타칭 오디오 매니아라는 별명이 붙게 되면서부터는 먼지와 그 먼지가 일으키는 잡음에 노이로제가 걸릴 지경에 이르렀다.

해서 소리가 좋아진다는 혹은 먼지가 끼지 않는다는 오만가지 절차는 다 해보았다. 판에 코팅제를 바르고 물걸레로 훔치고 세척제를 사들이고...결국 나중엔 이런 절차를 생략한다는 것 자체가 사람 신경을 거스르는 일이 되었고 소리가 좋아진다는 별스런 악세사리들을 다 사들이면서 정말이지 이 먼지와 정전기가 일으키는 표면 잡음만은 나랏님이라도 나서서 어떻게 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한 두 번 들었던 게 아니었다.

물론 포기해버리면 된다. 하지만 이렇게 저렇게 하면 잡음 없이 소리가 좋아진다는데 한없이 얇은 귀에 꼭 하라는 대로 해주어야 베토벤이 달빛(月光)을 벗삼아 산책을 나갈 것 같고 왼쪽에 앉아 있어야할 현악기 주자들이 오른쪽으로 단체로 소풍가버리는 일이 없을 것 같았으며 비싼 돈주고 산 전축판과 오디오 기기가 천수를 누리실 것이라는 굳센 믿음을 갖고 살았기 때문에 바늘 끝이 갈라져 행여 전축판의 소리골이 패이지나 않을까 바늘 무게는 너무 무겁지 않을까 턴테이블 시트 때문에 음색이 변하지는 않을까 등 등 등 온갖 부산을 다 떨어가며 음악을 들었다.

어쩔 땐 내가 너무 심한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를 한쪽귀로 흘려버리고 대충 듣자니 여태 해오던 신경과민성 행동증후군을 하루아침에 버릴 수도 없고 또 하던 버릇을 계속하자니 아까 말했듯 음악을 듣는 건지 기계에 휘둘리는 건지 도시 당최 어지럽기 짝이 없었던 참이라 죽지 못해 산다고 그럭저럭 흘러 간 것이다.

그런데 드디어 CD가 나왔다. 기술의 혜택이란 정말 눈부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의 마음이 간사하기 짝이 없다는 것은 햇빛보다 더 밝은 것이다. 해서 금방 말한 온갖 요란을 떨 필요 없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는 점이 환상적으로 아름답게 보이는 바람에 결국 귀와 손이 분발하여 덜컥 할부로 CD플레이어를 들여놓고 말았으며 이 과정에는 CD와 완벽은 동치관계라고 주장하는 전자 기술자의 말과 여기저기 마구마구 그어주면 팔운동이 잘된다는 신용카드 회사의 격려와 성원도 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어쨌든 음악이건 심지어 그림이건 "디지털" 세 글자만 붙이면 요술적으로 좋아질 것이라는 굳센 신념 속에 살아온 현대인의 자격으로써 CD 플레이어가 갓 출시되자마자 곁에 두고 멀쩡한 비닐레코드 플레이어와 함께 여태 한 지붕 두 살림을 꾸려왔다. 시대를 거스를 수는 없는 법이라는 핑계를 대면서...

그리고 그렇게 한 10년쯤 지내며 좌우를 둘러보니 음악 듣기에는 더없이 편리한 시대가 되었다.

한쪽 면 연주에 기껏 해봐야 30분 남짓밖에 되질 않아서 판 올리고 돌아서 소파에 몸을 묻고 엉덩이가 축 처지기 시작하자마자 3악장 들으려고 판 뒤집으러 가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이 무지개 빛 신 매체로 말하자면 70분 이상 사람을 귀찮게 하지 않는 것이 수두룩하고 리모콘이란 부속품을 사용하면 연주 트랙 바꾸려고 의자에서 일어날 필요조차 없을뿐더러 조금만 신경 쓰면 원하는 부분만을 골라가며 (주)한국전력에서 정전시킬 때까지 음악을 들려주었다. 더구나 관리의 관대함에 대해서는 비길 물건이 없었다. 얼굴이 좀 긁히기로서니 무슨 상관인가! 전혀 여드름에 지장 없이 티끌 하나 없는 깨끗한 소리를 수백 번을 되풀이 연주시켜도 똑 같이 들려주는 게 너무 너무 기특했다.

해서 비록 몇 장 안 되는 디스코그라피일 망정 명반의 반열에 올릴 수 있는 숫자가 CD보다는 LP가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30센티 맷방석 대신 12센티 도넛 만한 CD판을 트레이 위에 올려놓고 시커먼 혓바닥이 허연 레코드를 날름 삼키듯 하는 모습을 바라보며 단추 하나 누르는 걸로 음악 듣는 모든 절차를 얼씨구나 "땡"쳐버리고 마는 포즈로 음악 듣는 양상을 바꾸게 되었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세상일이란 정말로 요상한 것이 레코드 음악을 듣는 것이 여반장(如反掌)처럼 되면서부터 뭔가 나사가 하나 풀려버린 듯 한 느낌이 들었다.

사실 예전에는 죽기살기로 들었다. 판 한 장 고르는 것에 대한 성의는 차치하고라도 판 아끼길 마누라 아끼기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로 덜함이 없었다. 예전의 레코드 음악 듣는 행위로 말하자면 먼지가 들어갈세라 "꽁꽁" 봉해 놓았던 재킷에서 "조심조심" 판을 꺼내 "꼭꼭" 짜낸 물걸레로 "박박" 표면을 닦은 후 "훅훅" 불어서 물기를 말리고 "살금살금" 바늘을 내려놓던 일련의 의전(儀典)이었으니 글로 써놓은 비닐레코드 향수(享受) 행위를 통해 우리 나라 말이 형용사만 많은 것이 아니라 부사도 꽤 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거니와 어쨌든 비닐레코드로 음악 듣는 것이 제사 지내는 것과 한편으로는 통했던 것 같기도 하다.

사실 꽁꽁 봉해 놓았던 위패를 꺼내고 꼭꼭 짜낸 물걸레로 정성스럽게 제기를 닦아서 제주를 담아 향불 위에서 조심조심 돌린 후 제상에 살그머니 내려놓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정신 세계에서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졌던 것이 생각하면 할수록 검은색 비닐레코드 사용하는 것과 제사의식이 서로 비슷한 것 아니냐 말이다.

"이 판 좀 빌려 다구!"
"안돼! 대신 마누라 빌려 줄께"

판 자체를 아끼다못해 황혼 이혼 영순위 예약 표를 끊을만한 말을 서슴없이 내뱉었으며 앰프 위에 올려놓아 휘어져버린 판을 펴보겠다고 온갖 법석을 다 떨었으니 숏다리에 동그랗게 휘어진 내 다리를 펴보려 그렇게 노력했을까!

그런데 요즘은 그런 신경을 쓸 필요가 전혀 없다. 아무나 빌려주고 누구 것이라도 집어온다. 판이 잘 닦인다고 사슴 가죽까지 구하는 요란을 떨었었지만 요즘이야 그런 부산은 떨 여유도 떨 필요도 없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잘된 일인지 못된 일인지는 나로서는 아직도 확실한 판단이 서지 않는다. 아까도 이야기했듯 뭔가 빠진 것 같기 때문이다.

언젠가 버튼 하나로 브루크너를 우리 집 거실에 초대하는 모든 절차를 해결해버린 뒤 두 손을 맞잡고 시간 여를 멍하니 시커먼 스피커만 쳐다보고 있으려니 음악을 듣는다는 의미심장한 절차를 심부름 센터에 "턴키 베이스"로 맡겨 버린 게 아닌가하는 자괴심과 더불어 작곡가가 힘들여 만든 곡에 대해 너무 성의 없이 대하는 것 아닌가 하는 미안한 마음이 불현듯 일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 생각이 한 번 들자마자 조강지처 생각나듯 마음속에 예전 비닐 레코드를 걸던 한편 번거롭고 한편 진지하던 그때 일들이 떠올라 묘한 감상을 불러일으켰다.

"한없이 편해지니까 호강에 초 쳤군!"하고 내 자신에 대해 속으로 혀를 끌끌 차보기도 했지만 발버둥쳐봐야 아닌 것은 아닌 것이다. 번거롭다는 것은 진지해져야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하는 이야기이다. 그리고 진지하다는 것은 성심성의를 다한다는 이야기와 비슷한 맥락이니 음악에 집중하는 맛이야 요즘이 옛날보다 나을 이유가 별로 없다. 어차피 생 연주를 로얄석에서 듣지 못할 바에야 음질로 치자면 그것이 그것일 터이고 카세트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에 감동 받았다는 사람이 부지기수인 걸 보면 결국 좋아졌다는 것은 절차 뿐이요 실제 음악 듣는 즐거움은 오히려 줄은 게 아닌가 싶다. 어쩌면 예전에 속 썩이던 것이 가슴 속 앙금으로 남아 정으로 승화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랑도 상대방이 날 좋아했던 것보다는 내가 상대방 때문에 가슴 아팠던 것이 더 아련하지 않은가.

"비닐 레코드로 돌아가면 될 것 아닌가?" 책하시겠지만 다시 한 번 더 웃기는 것은 이것이 배짱에 안 맞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예전 진지함으로 - 혹은 불편함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것이다. 다시 말해 편리함에 대한 아포리즘은 "간사한 자여! 그대의 이름은 사람이니라!"인 모양이다.

어쨌든 세상의 법칙이란 여건이 좋아질수록 성의가 없어지는 것이다. 예전에는 음악이 주요 나머지는 종이던 것이 요즘은 집중하려고 잔뜩 노력하지 않으면 음악은 배경이요 책 읽는 것이나 주전부리하는 것이 주가 되어버렸다.

취미란 것이 으레 그렇듯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는 것은 일종의 몰두이다. 아울러 예술의 여러 장르 중에서 현실 세계와 가장 유리(遊離)된 것이 음악이라 하거니와 그렇기 때문에 집중하거나 몰두하지 않으면 핵심에 접근하기 어려운 것이 음악이 아닌 듯 싶다. 원래 청각 신경이란 것은 뇌 세포 제일 깊숙한 곳에 자리잡고 있으며 유전적으로 보아도 가장 원시적인 부분이라고 한다. 결국 음악을 -특히 대중음악에 비해 화끈한 양념이 부족한 클래식 음악을 듣는다함은 될 수 있는 대로 외부와 단절된 상태에서 모든 마음을 집중하여 이쪽에서 접근하기 전에는 저쪽에서 다가서 주는 법은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물론 초심자에 대한 이야기는 아니다. 만약 이쪽에서 다가서지 않으면 절대 못 듣는다면 클래식 음악을 모르는 사람은 평생 클래식 못 듣는다는 이야기밖에 되질 않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봐야 요 며칠 연휴 기간에 비닐레코드를 플래터에 올린 숫자가 서 너 장도 채 되질 않는다. CD는 잔뜩 내 키 절반만큼 쌓아놓고 즐겼으면서도 그 바늘 올리고 내리는 것이 귀찮아 LP는 내친 자식 취급했으니 결론을 토로하자면 아무리 보아도 내가 게으름뱅이는 될 수 있을지언정 음악 애호가는 죽어도 못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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