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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08.05.27 10:25

술 못먹는 유전자

조회 수 6657 좋아요 756 댓글 0
나는 친구가 없는데 그 이유는 술을 못 먹어서이다.
"술 못 먹는 거와 친구가 무슨 상관이냐?"고
묻는 바보들을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대한민국 남자들의 문화와 친교는
거의 술자리를 통해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네 성정이 못 되어서..."라고 반론을 제기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 얘기는 이 주제를 위해 잠시 접어두자.

또 '술을 빌어서야 진심을 말 할 수 있다.'고 믿는,
그리고 "술 먹고 하는 말이야 말로 취중진담으로
진심이 틀림없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카테킨 Catechin의 그윽한 향기 감도는 뜨거운 차 한잔을 마시며
말짱한 정신으로 대낮에 진지하게 얘기하는 것이야말로
그 사람의 진실이라는 사실을 말해 주고 싶다.

하지만 사실이야 어쨌건 덕분에 나는 친구가 없다.
그런데 덩치가 山만한 나는 왜 술을 잘 먹지 못 하는 것일까?
더구나 내 부친은 별명이 ‘주태백’ 일 정도로
고향에서는 술꾼으로 이름깨나 날리신 양반이다.
자고로 안씨하면 여자까지도 술 못 먹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술에는 타고난 유전자(?)를 가졌다고 알려져 왔다.

그럼 나는 돌연변이란 말인가?
술을 먹지 못 하는 유전자라도 있는 것일까?
몸에서 흡수한 중성지방이나 LDL 콜레스테롤을 잘 분해하지 못 해서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사람들이 꽤 많이 발견되는 데
그건 다름아닌 유전자 탓이다.

그 때문에 정상인에 비해 수배 혹은 수십 배에 달하는
위험인자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유감스럽게도 이런 불량 유전자를 가진 사람은
아무리 운동을 열심히 하고 지방섭취를 절제해도
정상치를 밑도는 수치를 가질 수 없다.

그렇다면 술을 못 먹는 유전자는 불량 유전자일까 우량 유전자일까?

그건 관점에 따라 다르다.
친구를 만들지 못 하는 이 유전자의 사회학적인 결론은
물론 불량 유전자이다.

“컨버터블을 소유하면 삶의 질이 달라진다.”
라고 제레미 도킨스가 얘기 했듯이
주정뱅이(앗! 죄송)에게는 취하는 순간,
전혀 새로운 신세계가 열리는 것이므로
인생이 다채롭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가상세계와 현실세계 2개의 삶을
스테레오처럼 오가며 살 수 있다고 믿는 술꾼들의 눈에는
단 하나의 엄혹한 현실세계에 집착하며 아등바등 사는
술 못 먹는 친구들이 불쌍해 보일 수밖에 없고  
이는 사실이다.

사람은 누구나 힘들 때 안식처가 필요한 법인데
술꾼들의 세계는 안식처가 늘 지척에 있는 셈이 된다.

하지만 생물학적으로는 술을 못 먹는 유전자가 더 장수한다.
물론 간이 훨씬 더 건강하기 때문이다.
술 때문에 혹사 당하는 간도 휴식이 필요한데
술 권하는 사회인 대한민국에 사는 술꾼들의 간은 휴가가 없다.

그렇다면 술 잘 먹는 부친을 가진 술 못 먹는 내 유전자는 어떻게 된 것일까?
혹시 술 못 먹는 모친의 유전자가 관계되는 것일까?

사람이 술을 먹으면
술은 일단 알코올탈수소효소(ADH)에 의해 알데히드로 바뀐다.
그리고 아세트 알데히드는 알데히드 탈수소효소(ALDH)에 의해
아세트산으로 바뀌면서
최종적으로 분해가 되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ADH 효소는 문제가 없다.
문제는 ALDH이다.
술 먹고 머리가 아프거나 구역질이 나거나 심장이 뛰고
호흡이 가빠지는 이른바 숙취는 모두 독성을 띤 알데히드 때문이다.

ALDH는 2가지가 있는데 ALDH1은 세포질에 있고
(세포질은 세포에서 핵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
ALDH2는 미토콘드리아에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알데히드를 분해하는 효소는
두 번째인 ALDH2이다.
나는 ALDH2효소의 활성이 좋지 않아서
알데히드를 잘 분해하지 못 한다.
이 단백질을 구성하는 487번째의 아미노산의
염기서열이 정상인과 달라서이다.

그런데 알다시피 나의 미토콘드리아는
어머니의 것을 그대로 물려 받았다.
아버지의 미토콘드리아 유전자는 내게 전해지지 못 한다.
그것들은 정자의 꼬리운동 에너지로 소모되고 수정 직후 소멸된다.
따라서 아무리 부친이 주태백이라도 나의 알데히드 탈수소효소는
박카스 한 병 마시고 얼굴이 벌개지는 어머니의 것이고
이 유전자는 우성형질이므로
어머니의 유전자 중 대립 유전자가 하나라도 문제가 있다면
나는 술 못 먹는 인간이 된다.

나와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나라에는 약 20% 정도가 되는데
일본은 44%, 중국은 41% 정도 된다.
놀라운 것은 백인들은 이 유전자를 아무도 갖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백인들은 태생적으로 술을 잘 못 마시는 유전자라는 것이 없다. 여자라도!
백인들에게 알코올 중독자가 많은 이유가 되겠다.
아시아인 중에서는 태국 사람들만이 이 유전자가 10% 정도로 적어
유전적으로 술 잘 먹는 민족이 되었다. 만세!

목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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