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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세욱 칼럼(Who's Phillip Yoon?), 조용훈 칼럼, [PC-Fi 가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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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1) 제목 : [오디오 잡설] 니퍼 이야기 - 아홉 번째(프란시스 바로와 니퍼-최.. / 윤세욱 - 2003-02-20 17:43:24   

베를리너는 유럽에서도 그라모폰의 특허를 획득했다고 말씀드린 적이 있습니다.
니퍼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 이것과 관련이 많습니다.
계속 말씀드리지요.

1887년 독일과 영국에서, 그리고 이태 후인 1889년엔 이태리, 프랑스, 벨기에
그리고 오스트리아에서도 그라모폰의 특허를 받는데 성공한 베를리너는
획득한 특허를 근간으로 1890년대 중반부터 사업의 영역을
유럽으로 확대하기 시작했습니다.
일단 특허부터 받아 놓고 사업을 벌인 겁니다.
물론 그때는 미국에서의 법률 분쟁이 벌어지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특허는 미국보다 유럽에서 먼저 받았다고 지난 번 말씀드렸습니다.

베를리너는 1897년 내셔널 그라모폰 컴퍼니에서 일하던
"윌리엄 베리 오웬(Willam Barry Owen)"을 영국으로 파견합니다.
오웬은 1898년 4월 일련의 영국인 투자자들과 함께
런던에 베를리너 그라모폰 컴퍼니의 영국 지사를 세웁니다.
베를리너는 똑 같은 방법으로 조셉 센더즈(Joseph Sanders)와
프레드 게이스버그(Fred Gaisberg)를 독일로 보내 독일지사도 세웠습니다.
이윽고 러시아를 포함한 유럽의 대부분의 큰 나라에 그
라모폰 지사가 다 들어섭니다.

별것 아닌 이야기입니다만 지나는 길에 한 말씀 더.
독일지사는 하노버에 위치했는데 베를리너의 고향이 하노버였기 때문이랍니다.
어디든 지역색이 문제로군요^^.
”도이치 베를리너 그라모폰“의 하노버 공장 건물이
현재의 ”폴리그램"의 컴팩트 디스크 프레스 공장입니다.
몬트리얼 지사는 베를리너의 아들 ”허버트(Herbert)"와 에드가(Edgar)" 에 의해
1899년 세워졌습니다.
여기서 나중 “Gram-O-phone"이 나오게 되고요.

보셨듯 모든 회사 및 지사의 이름엔 베를리너의 이름이 들어가 있었는데
1900년 컬럼비아 사와의 법률분쟁에서 패한 후
회사명에서 ”베를리너“가 사라집니다.
그래서 런던 지사의 이름은 단순히 ”그라모폰 컴퍼니“
독일 지사 이름은 ”도이치 그라모폰 게젤샤프트“가 됩니다.
도이치 그라마폰 게젤샤프트(Deutsche Grammophon Gesellschaft)의 머리말이
”DGG"로서 그 유명한 “도이치 그라모폰”의 원전이 바로 이것입니다.
지금은 DGG가 폴리그램의 산하 레이블이 되어 있습니다.

회사명에서 베를리너의 이름이 빠진 뒤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벨/테인터의 그라포폰과 마찬가지로 그라모폰이라는 단어는
미국 사람의 뇌리 속에서 사라지고 맙니다.
남은 것은 포노그라프.
그래서 베를리너 그라모폰은 “Grammy" 상(償)의 어원으로만 살아남고
미국 영어에서 축음기를 지칭하는 단어는 “포노그라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유럽 쪽은 사정이 달랐습니다.
비록 사람 이름 “베를리너”는 잊혀져갔지만
기계 “그라모폰”은 계속 잘 팔렸습니다.
상대적으로 에디슨 식 실린더 축음기 포노그라프가 퇴조된 것은 미국과 마찬가지이고요.
결국 에디슨 축음기는 경쟁력을 잃고
에디슨은 1929년 공식적으로 포노그라프의 생산 중단을 선언합니다.
이름을 잃어버린 베를리너 그라마폰이
미국 사람의 머릿속에서 사라진 것처럼
제품이 사라진 포노그라프 역시 유럽 사람의 관심에서 벗어나버려
유럽에서 포노그라프라고 말하면 에디슨 식 실린더 축음기만을 의미할 뿐입니다.
벨/테인터의 그라포폰은 1908년 일찌감치 서거하는 바람에
가죽은커녕 이름도 못 남겼습니다.

“이거 니퍼 이야기 맞습니까?”
“애고! 이제 니퍼 나갑니다.^^“

“윌리엄 베리 오웬”이 영국지사를 세웠다고 말씀드렸는데
이 사람을 주목해주십시오.
그가 없었으면 제 졸낙(졸라 못쓰는 낙서) “니퍼 이야기”도 없었을 겁니다.

불테리어를 아버지로 두고 폭스테리어를 어머니 쪽으로 두었던
-혹은 반대일 수도 있던 잡종 개 “니퍼(Nipper)"는
1884년 영국 서부 글로스터 지방의 항구도시 브리스톨에서 태어나
브리스톨 극장의 영화 간판을 그리던 가난한 화가 ”마크 바로우(Mark Barr명)“ 집에서
왈왈 대며 살았습니다.
마크가 개의 이름은 니퍼라고 한 까닭은
찾아온 손님의 뒤꿈치를 깨무는 버릇이 있어서였다고 합니다.
사전을 찾아보니 니퍼는 집게라는 의미가 있군요.
혹시 꼬리를 잘 흔들었으면(swing) 스윙어(swinger)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아! Swinger! 이는 듣기만 하여도 가슴이 설레는 말입니다.”
“세욱아! 스윙어라면 어떤 쪽을 의미하는 거냐?”
“으흐흐 형님...! 잘 아심시롱...^^”

유일하게 남아 있는 니퍼의 사진입니다.



테리어 종의 특기인 싸움에 소질을 지닌 이 개는
어떤 개가 으르렁 거려도 절대 물러서지 않는 독종인데다가
장난기가 아주 심해 쥐를 잡으면 고양이처럼 얼러가며 가지고 놀고
동네의 새란 새는 보기만 하면 모조리 쫓아버려
리치몬드 공원의 꿩들은 니퍼만 나타나면 치를 떨었다고 합니다.
1887년 주인 ”마크“가 빈곤 속에서 죽자
니퍼는 랭커셔 지방의 리버풀에 살고 있던
마크의 동생 ”프란시스 바로(Francis Barraud)"의 집에 맡겨져서
바로와 몇 년 같이 지내다가 “마크”의 미망인에게 다시 돌아갔는데
그 후 1895년 9월에 죽어서
런던 써리 지역 테임즈 강 템스강변의 킹스톤에 묻혔습니다.
(써리에 밑줄 그으세요. 스왕자 윤세욱이 사는 곳이 써리입니다.
물론 밴쿠버 광역시에서 제일 가난한 곳입니다.^^)

여기까지가 “니퍼의 일생”입니다.
개 팔자로서야 이름에 비해 별 볼일 없던 팔자입니다.

하지만 이 개를 잠시 맡아 길렀던 니퍼의 의붓아버지 “프란시스 바로”로선
이야기가 많이 달랐습니다.
바로는 이 평범하다면 한 없이 평범한 개새끼 한 마리 덕에
평생 연금을 타서 잘 먹고 잘 살다가
죽은 후에도 이역만리 한국의 “붓 가는 대로”에도 출연하는
유명한 사람이 됩니다.

사족 한 말씀 더.
어느 유력한 조간신문 문화 란에 바로의 이름을
친절하게도 “버라드”라고 적어놓았던데
이것은 유식이 흘러 넘쳐 과역불급이 된 좋은 예입니다.
“바로”가 맞습니다.
영국 화가라는 말에 기자의 현란한 영어실력을 뽐내느라
“바로”가 오타이고 “버라드”가 맞을 것이라고 생각해서
그렇게 적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프란시스 바로”의 홈랜드는 프랑스입니다.
기자는 그것까지는 모르고 기사를 썼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이럴 수도 있겠군요.
제가 초등학교 다닐 때 “임진왜란”이라는 라디오 다큐멘터리 드라마가 있었는데
일본군 장수 “고시니 유키나가”를 “소서행장”이라고 발음했습니다.
뭐 중국의 “주은래”를 “추언라이”라고 본토 식으로 발음한 것 역시
몇 년 되지 않은 일이지요.
그래서 기자도 영국식으로 읽어준 것 아닐까요. 아님 말고요.

바로가 니퍼를 데려다 키울 당시의 이야기입니다.
바로는 자기 스튜디오에 에디슨 식 축음기를 갖고 있었는데
어느 날 축음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니퍼가 고개를 쫑긋하며 듣고 있더랍니다.

“주인님. 도대체 어디서 소리가 나오는 것이에요? 멍멍!”

이 장면에 대한 프란시스 바로의 회상이 아래 글입니다.

"형님. 원문을 실어드릴 터이니 한번 음미해보시겠습니까?^^“

“"It is difficult to say how the idea came to me beyond the fact that it suddenly occurred to me that to have my dog listening to the phonograph with an intelligent and rather puzzled expression would make an excellent subject... It would certainly be he happiest thought I ever had."

"썩을 놈. 실력이 없어서 해석을 못하니까 별 꾀를 다 내는구나.^^”
"흐흐흐. 알면 짜십니다요^^”

니퍼가 죽고 난 후,
의아한 듯 축음기를 바라보고 있던 니퍼의 모습이 바로의 머릿속에 떠오르자
그는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보고 싶다는 강력한 충동을 느낍니다.
그래서 음악이 나오던 포노그라프 앞에 고개를 한쪽으로 갸우뚱한 채
포노그라프의 혼을 들여다보던 니퍼의 모습을 바로는 그림으로 그립니다.
아래의 그림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그림은 요즘 우리가 흔히 보는 니퍼 그림이 아닙니다.
가격을 매기는 것이 아예 불가능한 원조 오리지널 니퍼 그림입니다.
호가가 불가능한 이유는 조금 있다가 나옵니다.

1898년 니퍼의 그림을 완성한 바로는 1899년 2월 11일
“축음기를 듣는 개(Dog Looking at and listening to a Phonograph)"라는 이름으로
그림을 등록(?)합니다.
그리고 이름을 ”His Master's Voice"라고 바꾼 뒤
영국의 “로열 아카데미(한국의 미술협회 쯤 되려나요?)”에 전시를 신청했으나
퇴짜를 맞았습니다.
이유는 단순했습니다.

“개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지 아는 사람이 어디 있나?”

로열 아카데미 이후 찾아간 잡지사에서도
비슷한 이유로 게재를 거절당했다고 합니다.
돈줄이 궁해진 바로는 이제 영국의 에디슨 포노그라프 지사인
“에디슨 벨 컴퍼니(Edison Bell Company)"를 찾아가
지사장 ”제임스 하우(James Hough)"와 면담하고
그림을 구입해 줄 것을 부탁합니다.
그러나 하우의 답변도 마찬가지

“개는 축음기를 듣지 않습니다.”
어쩌면 그는 속으로 이렇게 말을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군요.
“이 따위를 그리다니! 혹시 정신 나간 넘 아녀?”

그러나 정말 정신 나간 사람은 나중 하우로 판명됩니다.
왜냐면 바로에게 이런 도움말까지 주면서도 그 막상 그림을 사진 않았으니까요.

“그림이 좀 거무튀튀 우중충한데 말이오.
그거 혼(horn)을 황금색으로 칠하면 좀 나아보일 것 같구먼.”

연거푸 낙심한 바로는 1899년 여름
이번엔 런던의 “메이든 레인(Maiden Lane) 31번가”에 위치한
베를리너 그라모폰 컴퍼니를 찾아가 지사장 “윌리엄 베리 오웬”에게
이 그림의 “사진”을 보여주며 그림을 개작(改作)하기 위한
베를리너 축음기의 대출을 부탁합니다.
오웬은 비록 저처럼 미국 장거리 전화회사 “MCI"에서
”커스토머 서비스 리프리젠테이티브“로 일한 경력은 없었지만
누구처럼 훌륭하기는 마찬가지였던 것 같습니다.

나중 베를리너는 “스탠다드 매거진(Standard Magazine)"지(紙)에
그때의 일을 이렇게 말합니다.

“오웬 사장을 만났더니‘만약 우리가 요즘 만들고 있는 그라모폰을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려주면 기꺼이 사겠다’고 이야기하더군.
나야 뭐 땡큐였지.
그래서 그라모폰을 잠시 빌려주면
그걸 모델로 해서 개작을 해오마고 얼른 대답 했어.
그렇잖아도 축음기를 빌리러 갔던 판인데 말이야.”

바로는 축음기를 빌려 간 후 1898년 그림을 완성합니다.
저 위의 글에서 오웬에게 그림의 “사진”을 보여주었다고 말씀드리면서
사진에 따옴표를 친 까닭은 포노그라프를 모델로 한 원작 니퍼 그림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료 그림은 바로가 오웬에게 들고 갔던 사진을 찍은 것입니다.
원작이 없는 이유는 가난한 화가 바로가
베를리너 축음기를 모델로 해서 그림을 그리면서
재료값이 없어서 포노그라프 모델의 원작 위에 바로 덧칠해 그림을 그려버려서 그렇습니다.
결국 최초의 니퍼 그림은 이렇게 흑백 사진으로만 남았고,
없는 물건에 값을 매길 수는 없는 것은 당연한 이치.
이게 포노그라프를 모델로 한 니퍼 그림에 값을 매기지 못하는 이유입니다.

신사(紳士) 오웬은 1899년 9월 15일 바로에게
그림 값으로 50파운드. 그리고 그림의 저작권을 갖는 조건으로
50파운드를 추가 지불하겠다는 공식 오퍼를 제시한 후
오퍼를 수락하면 즉시 그림을 구입하겠다는 편지를 보냅니다.
바로는 오퍼를 수락했습니다.
그 당시의 50파운드는 지금 약 500만원 정도가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그게 정확한 비율이라고 자신할 수 없습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 가운데
당시의 영국 물가를 비교할 수 있는 자료를 갖고 계신 분이 계시면
제게 보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내주신 분의 성함과 보내주신 자료를 여기에 추가 해 놓겠습니다.
독자 제위의 넓은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라모폰 컴퍼니 관계자는 바로가 고쳐 그려온 니퍼의 그림을
1899년 10월 4일에서야 처음으로 보았다고 합니다.
아래의 사진이 바로 그 그림입니다.



지금 그 그림은 영국 EMI사의 본부 벽에 걸려있습니다.
이것도 값은 묻지 마십시오.
물론 이유는 좀 더 다른 데에 있습니다.
바로는 나중에 빅터사의 주문으로
이 그림의 정교한 복사판 그림을 24장 더 그려내는데
원본이 아닌 복사된 그림 값도 몇백만 파운드 가량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값은 6-70년대 기준이니 요즘에야 얼마나 할 것인지는
저도 가늠이 안섭니다.
하물며 복사본이 그럴진대 원본은 어떻겠습니까.
값을 매길 수 없답니다.
이야기가 앞서 나가는데 이 “니퍼”는 이십세기 10대 상표 가운데 하나입니다.
금액만을 놓고 단순비교하면 지금의 코카콜라나 소니가 훨씬 가격이 높겠지만
영화가 나오기 전까지 그 당시 유일한 엔터테인먼트 산업이
축음기와 레코드였던 것을 생각하면,
그리고 당시의 산업화 수준과 물가를 비교하면
“니퍼”야 말로 10대 상표가 아니라 이십세기 최대 상표라고 해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겁니다.

이 그림은 1900년 봄 그라모폰의 광고에 처음으로 대중에게 모습을 나타낸 후
나중 그라모폰 광고의 핵심 아이템으로 자리 잡습니다만
실제 “His Master's Voice"라는 이름이 그라모폰 사의 편지지의 헤딩에 나타난 것은
1907년 이후의 일입니다.
그림과 ”His Master's Voice“라는 타이틀이 트레이드마크로 등록된 것은
몇 년 뒤인 1910년의 일이었고
1900년 처음 이 그림이 나왔을 당시의 그림 제목은
”개와 트럼펫(Dog and Trumpet)"이라는
“말표 운동화” 만큼 촌스런 상표였습니다.

그런데 오웬만 있었다면 이 상표가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을 수도 있었고
제가 “니퍼 이야기”를 쓰면서 “베를리너”나 “테인터”를 언급할 필요 역시
없었을 겁니다.

그라모폰을 발명한 베를리너는 1900년 5월 영국지사를 방문했다가
(어떤 자료엔 1899년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1900년이 더 신빙성 있어 보입니다)
회사 벽에 걸린 니퍼 그림을 발견 합니다.
베를리너는 그림의 사용에 대해 바로의 허락을 얻은 다음
복사본 그림 한 장을 얻어 “니퍼와 그라모폰(Nipper and Gramophone)"이라는
제목으로 상표로 사용합니다.
그리고 1900년 5월 26일 미국에서도 상표를 등록해
6월 10일 상표 허가를 획득한 후 곧 이어 캐나다에도 상표로 등록합니다.
그런데 베를리너가 컬럼비아 사와의 법률분쟁에서 진 것은
그해 10월의 일이었습니다.
상표 등록을 해 놨지만 이미 베를리너의 마음엔 축음기가 떠나있었던 겁니다.
결국 그는 그의 축음기와 관련된 상당 부분의 재산 및 권리를
스프링모터를 만들어 공급하던 ”엘드리지 존슨“에게 양도하고
자기는 아들 둘에게 축음기 회사의 경영을 맡긴 채 여기서 손을 뗍니다.
물론 이 과정에서 엘드리지 존슨의 떳떳치 못한 행위도 좀 있습니다만
그 부분은 그냥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존슨이 양도 받은 권리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이 니퍼의 그림과
상표 ”His Master's Voice"입니다.
존슨은 이 그림과 상표를 그의 디스크 카탈로그에 사용하다가
나중엔 디스크의 레이블에까지 그림을 붙입니다.
물론 니퍼의 원조 영국의 그라마폰과 독일의 DGG가 이것을 사용했던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요.

1924년 베를리너의 캐나다 공장을 흡수한 엘드리지 존슨의 “빅터 토킹 머신”사는
그 자신 역시 1929년 RCA에 사에 병합되어 버리고
이름도 “RCA 빅터”로 이름이 바뀝니다.
요즘 여러분께서 가끔 보시는 RCA 빅터 전축판과 빅터롤라 따위의 유성기는
이렇게 수많은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탄생되었습니다.
요즘도 제 레코드 서가엔 이 개가 몇마리 떠억하니 자리잡고 있습니다.



말이 나온 김에 아예 EMI와의 역사도 정리해버리겠습니다.
현재 이 귀한 니퍼 그림의 원본은 영국 EMI 본사에 걸려있습니다.
그런데 좀 이상하지요?
빅터의 상징이 니퍼인데 요즘 레코드는 EMI에선 천사 그림만 나오잖습니까.
이것은 영국 그라모폰 컴퍼니가 나중 이 니퍼가 유명해지자
이름을 “HMV(His Master's Voice)"로 바꾸고
HMV는 나중 EMI에 흡수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레코드 회사와 레이블의 변천사 역시 축음기 초기 역사만큼 복잡다난합니다.
언젠가는(개구리 수염 나거나 토끼 뿔 돋기 전에) 만들어질 제 홈페이지에
여기에 대해서도 정리를 해보고 싶은데
이건 확보된 자료가 워낙 부족해서 자신이 없습니다.
아무래도 단기간엔 어려울 것 같습니다.
양해를 부탁 올립니다.
독일 DGG는 지금 폴리그램이 되어있습니다.

마지막 써비스로 이 니퍼 그림 한 말씀만 더 드리고 저 이제 그만 퇴장하겠습니다.
애고 힘들어라.

영국 글로스터 EMI 본사에 걸려있는 이 그 니퍼의 오리지널 그림은
오른쪽에서 조명 쪽에서 바라보면
덧칠되어 있는 포노그라프 밑바탕 그림이 살짝 보인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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