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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2001.07.27 10:30

지연이에게/To Ja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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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제목 : 지연이에게/To Jane, / 박순백 - 2001-07-27 10:30:39  조회 : 2149 聆求?

"단상"란에 올린 지연이에 관한 글. October 31, 1989에 쓰여진 글.

지연이에게 얘기하는 투로 쓰인 글이라 "To Jane,"
"지연이에게," 바로 그런 제목.

Jenny는 Jane, Jean, Jennifer
세 이름의 약자.

난 제인이란 이름이 좋았는데,
지연인 항상 흔한 제인보다
제니(Jenny)를 좋아했었다.

My Lovely Jenny.



To Jane,

Spark
October 31, 1989

하루살일 죽이는
다섯 살 바기를

세살 더 먹은
누이가 나무란다

그러지마
걘 하루밖에 못살아

좀 더 살았다고
생을 논한다

남이 그러면 지나칠 일
제 새끼라 대견하다

지연아
넌 커서 글을 쓰면 좋겠다

항상
죽음을 옆에 두고 살렴

언제나 하루살이처럼
그날 네 생이 끝난다고 생각하면서

이 길고도 긴 인생
이 짧고도 짧은 인생

길게 길게
짧게 짧게

그렇게
살아라

하루를 살고자 하면
관대해 지고

쓰는 글은
네가 되어 길게 산다

 



To Jane,

지연인 이제 만으로 8살. 국민학교 3학년에 다니는 여자애다. 무지하게 내성적이어
서 맘속에 가진 생각을 남에게는 물론 아빠에게도 표현치 못하는 애다. 친구들이 많지 않아
서 엄마 속을 썩이는 애다. 친구들과 어울리지 않고, 노는 시간에 교실에 앉아서 책을 읽는
그런 문제아다.
그런 문제 외에는 아주 평범한 어린애다. 친구들과 어울려 놀지 않는다고는 하지만
일요일에 혹은 집안에 일이 있어서 할아버지 댁에 가면, 제 사촌이나 고종 사촌들을 만나서
떠들썩하게 웃고, 놀고, 싸우는 애다. 그걸 보면 제 엄마나 내가 '잘 못된 애가 아닌가?'하고
크게 걱정하지는 않아도 좋을 그런 애다.
제 딸이어서 가질 수 있는 편견 때문에 입밖에 내진 않지만 내 생각으로는 꽤나 생
각이 깊은 애고, 단지 마음을 드러내기 힘들어하는 애일 뿐이다. 국민학교 1학년 때 피아노
학원을 다녀오면서 아주 커다란 플라타너스의 낙엽을 들고 왔다. "왜 그걸 주워 왔니?" 물
으니 "그걸 보니 왠지 모르게 눈물이 나서 갖고 왔어요."라고 대답하여 제 엄마의 말문을
막은 애다.(그 플라타너스의 잎은 아직도 우리 집 안방 경대 위에 매달려 있다). 무척 감성
적인 애가 아닌가?
어느 날 밥상머리에 날아다니던 하루살이를 다섯 살 바기 동생이 잡겠다고 난리를
친 모양이다. 그걸 보다가 지연이가 말했단다. "현근아 그러지 마. 걘 그냥 둬도 하루밖에
못사는데 왜 죽이니?" 나중에 이 얘길 집사람에게 들으니 느껴지는 게 많았다. '얘가 가을
타는 것마저 애비를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심지어는 죽음에 관한 상념도 애비를 닮은 게
아닌가 하는 전율(?)같은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딸은 아빠를 닮고 아들은 엄마를 닮는다고 한다. 이게 유전 과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고는 전혀 생각지 않지만 내 경우에는 꼭 맞는 말 같다. 아들 녀석은 아주 대담
하고, 처음 보는 사람과도 쉽게 친하고, 남들 앞에 나가서도 조금도 흔들림이 없이 제 의견
을 말한다. 뭘 했다 하면 꽤 잘하는 편이다. 그런데 우리 딸내민 그렇지 않다. 항상 수줍고,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으면 피하고, 남들 앞엔 나서려 하지 않고, 제 의견이 있어도 그걸 내
세우지 못한다. 그리고 특별나게 뭘 잘한다는 느낌을 주지 않고 평범할 뿐이다. 집사람은 이
런 지연이에게 대해서 많은 불만을 가지고 있다. 가끔 그런 일로 화가 나면 '이게 누굴 닮
아 이 모양인지 모르겠어! 난 어릴 때 그래 본 일이 없다!'며 아이를 쥐어박으려 하는 것이
다. 그럴 때마다 난 속이 뜨끔했다. 이 아이가 하는 짓이 나 어릴 때 하던 짓과 조금도 다름
이 없으니 그게 모두 내 피를 받은 때문이라고 생각이 되었던 때문이다. 집사람은 나를 커
서 만났고, 내가 커 가면서 조금씩 성격이며 하는 일이 달라진 것을 보지 못했다. 단지 지금
의 나만 보면서 '애비도 안 그렇고, 나도 안 그런데 왜 얜 이럴까?'하는 생각을 하는 모양
이다. 이 불쌍한 딸내미는 그래서 툭하면 주눅이 들었던 것이다. 나도 그걸 고쳐 주기 위해
동료 의식(?)을 갖고 여러 번 설득을 시도했지만 "왜 그러냐?"는 내 질문에도 딸애가 대답
을 않으니 속만 터졌던 것이다. 나중에 보다 못한 내가 털어놓고 내 어린 시절의 얘길 했다.
지연이도 있는 자리에서...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는 집사람의 그런 꾸지람이 좀 덜해졌다. 집
안의 내력이라는 데야 제가 어찌하겠는가? 그리고 그 후 딸내미의 나에 대한 동료 의식이
한층 강화된 것으로 느껴진다. 아들에 대한 집사람의 동료 의식이 강화된 것도 다름 아닌
그 이유였던 것이다.
누구라고 안 그렇겠는가 만은 특히 내성적인 성향이 강한 아이들은 부모의 속을 썩
이기 마련이다. 친구들이 와서 노래라도 시킬라치면 어색해 하다가 끝내 울음을 터치고 마
니 부모들의 낯이 서질 않는 것이다. 어릴 땐 내가 왜 그랬나 싶지만 하여간 그랬고, 그 일
을 이제 딸내미가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내가 만화에 미쳐 학교에 오가는 길에 만화가게에
정기적으로 들리던 것 이상으로 이 아이는 만화를 방영하는 시간이면 다른 일 다 젖히고 들
어앉는다.(일요일에도 새벽같이 일어나 혼자서 만화를 본다. 말을 알아들을 수 없는 AFKN
의 만화까지 본다.) 그리고 내가 동화에 미쳐 내가 다닌 국민학교 도서관의 책을 다 읽었던
것처럼 제 어미의 극성으로 갖가지 학원에 다니느라 힘이 들텐데도 자주 틈을 내어 온갖 책
을 다 읽고 있다.
이솝 이야기에 나오는 하루살이의 얘길 읽어서 그런 것인지, 그림으로 풀어 설명한
자연 도감에 나오는 하루살이의 일생에 관해서 읽어서 그런 것인지, 그 하잘 것 없는 생명
에 대한 외경심까지 가지게 되었으니 애비로선 그게 참으로 대견한 것이다. 남의 자식이 그
러더란 소릴 들었더라면 '거 별 희한한 놈 다 있네?'하고 넘어갈 일이겠는데 그 게 남 아닌
딸애에 관련된 일이니 어찌나 그 놈이 대견하고 사랑스러운지 몰랐다. 내가 보기에 아주 평
범한 이 애도 한 가지 잘하는 일은 있는 것 같다. 그건 글쓰는 재주이다. 이 녀석이 학교에
들어가서 일기를 쓰기 시작한 이후에 알게 된 일이다. 이 녀석의 글은 언제나 읽어봐도 괜
찮은 느낌이 있었다. 혹시나 애비의 눈에만 그렇게 보이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런 소릴 남
에게 해서 불출이 소릴 듣지 않으려고 혼자서만 그렇게 생각을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이
녀석의 일기를 매일 보는 1학년 담임 선생님이 그걸 짚어서 칭찬을 하고(혹시 이 놈이 워낙
평범한 아이여서 선생님에게 남긴 인상 중에는 그것밖에는 없었는지도 모른다.), 2학년 담임
선생님은 방학 때 써 보낸 편지를 받고 "너 이 담에 소설가가 되면 좋겠다."고 답장을 써
온 것을 보면서 남들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3학년 담임 선생님마저
도 이 애의 일기를 보면서 그런 말씀을 하시더란다.
꼭 소설가가 될 필요는 없는 것이겠으나 나도 이 애가 커서 글을 쓰면 좋겠다고 생
각한다. 그런 직업을 가질 필요는 전혀 없다. 그저 평범하게 살면서 자신의 주변에서 일어난
일들을 그냥 흘려 버리는 것이 아니라 기록하면서, 지나온 생을 정리하면서, 그리고 미리 앞
을 보면서 살아가게 되길 바라는 것이다. 언제나 우리의 생이 죽음을 생각할 때에만 아름답
다는 것을 알고, 그렇게 하루살이가 살듯 짧게 살면 좋겠다. 물론 미물 하루살이들은 자신들
의 생이 하루란 -- 인간의 삶에 비하여 -- 짧은 시간임을 모른다. 여기에 그들의 비극이
있다. 하지만 그보다 길게 사는 인간들이 그들의 삶의 길이를 하루로 치부해 놓고 산다면
언제나 하루하루가 보람될 수 있지 않겠는가? 내일 보지 못할 것 같은 주위 사람들에 대한
짙은 사랑으로 살고, 가능한 한 후회 없이 살려고 노력하고, 오늘 보는 코스모스가 생에서
마지막 보는 코스모스일 수도 있다는 것을 되새기면서 그것에 대한 애틋한 사랑을 하게 되는
그런 여자로 크길 바라는 것이다. 그렇게 관대한 마음으로 우주를 관조하는 흔치 않은 여자
가 되길 바라는 것이다. 흔치 않은 일은 항상 너무나도 평범한 것 속에 내재하고 있어서 그
걸 찾기 힘든 것이니까...
최근에 낸 책을 그 아이에게 주면서 조그만 종이에 간단한 내용을 워드 프로세싱하
고 그걸 오려 풀로 붙여 주었다. 지금의 그 아이가 봐서는 이해하지 못할 내용이다. 그 내용
을 그대로는 기억하지 못하지만 대체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아빠 딸 지연에게,
지연이는 아빠가 책 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빤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지연
이에게 주고 싶다. 이 담에 아빠가 죽고 나면 이 책은 아빠와 함께 살던 때를 생각나
게 해주는 좋은 기념품이 될 거다. 좋은 글을 쓰려면 남들이 쓴 많은 글들을 읽어 둬야 한
다.

1989년 11월 아빠가"

난 훗날 성인이 된 이 아빠의 딸이 죽은 제 애비의 책을 뒤지다 우연히 발견한 위
의 짧은 글을 읽으며, 우리가 함께 살던 때, 지연이가 어린 시절, 아빠가 비교적 젊던 그 시
절에, 미래의 딸에게 뭘 전하려 했는가를 생각하며 눈물지을 것을 상상한다. 그 일은 단지
다 큰딸을 울리기 위한 일만은 아닌 것이다. 우리의 삶이 어떤 것인가에 대해서 내가 가졌
던 느낌을 단지 전하고 싶은 것일 뿐이다.
이 글 역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지연이가 어떤 책 중에서 발견할 것이다. 내가
날 닮은 딸을 얼마나 사랑했는지, 그리고 이 글을 쓰면서 나중에 이 글을 읽으며 울 내 딸
을 생각하며 왜 아빠의 눈에 눈물이 돌고 있는지를 지연이가 알게 되리라.
내게 태어나 준 것이 고맙고, 날 아빠로 사랑해 준 것이 고맙고, 특히 날 닮아 나의
생을 연장시켜 준 것이 고마운 내 딸아...
-----
Spark's notes on August 1, 1997

-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란 글이 이 글과 같은 소재로 쓰인 글이다. 그 글 중에서 기억을
더듬어 지연이에게 준 책에 쓰인 내용을 적어 본 게 있는데, 그 것은 아래와 같았다.

"지연인 아빠의 책받는 걸 좋아해서 아빤 책이 나오면 네 생각부터 한다. 이 책은 이 담
에 아빠가 죽고 나면, 아빠와 함께 살던 때를 기억나게 해주겠지. 열심히 살아라."

바로 위의 글귀가 이 글 중에서는 아래와 같이 변형되었다.

아빠 딸 지연에게,
지연이는 아빠가 책내는 것을 좋아하기 때문에 아빤 책이 나오면 제일 먼저 지연이
에게 주고 싶다. 이 담에 아빠가 죽고 나면 이 책은 아빠와 함께 살던 때를 생각나게 해주
는 좋은 기념품이 될 거다. 좋은 글을 쓰려면 남들이 쓴 많은 글들을 읽어 둬야 한다.

1989년 11월 아빠가
-----

그래서 나중에 실제로 지연이에게 준 책에 쓰인 내용을 보니 세 개의 글이 뜻은 같은 뜻
이되, 표현은 모두 조금씩 달랐다. 원래의 글은 이 글 중에 나온 것과 아주 유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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