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profile
조회 수 2578 좋아요 284 댓글 0
   보낸날짜 2007/08/20 22:00:12   [GMT+09:00]   
   보낸이 문화관광부 <woollim@mctletter.com> 
   받는이 박순백 <spark@dreamwiz.com> 
   제목 [아침울림] "그 여자는 화가인데, 그림을 못 그려." - 안정숙   



최근 어느 모임에서 ‘나의 성장에 가장 장애가 되었던 믿음’을
털어놓는 자리가 있었다. 둘씩 짝을 지어,
상대방에게 그 ‘믿음’을 이야기하는 방식이었다.
그걸 드러내놓고 나서, 극복하자는 일종의 심리 치료 같은 프로그램이었던 셈이다.

글쎄, 그런 믿음이 도대체 무엇일까.
내게 고민의 시간은 아주 짧았다.
아, 이것! 기억 속에서 10대 시절 나를 좌절하게 한 글귀 하나가 반짝 떠올랐다.
루이제 린저의 <생의 한가운데>의 한 대목.
여주인공 니나는 남편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걸 알게 된다.
니나의 여자에 대한 평가는 날카롭고 단순하다.
“그 여자는 화가인데, 그림을 못 그려.” 다른 어떤 부정보다 강한 부정.
재능도 없는데 그림을 그려서 보는 이들을 불편하게 만든다는 이 평가는
책을 읽는 나까지도 떨게 하였다.
나는 혹시, 그 여자처럼 내가 재능도 없는 일을 하려고 욕심을 내는 건 아닐까?

충격은 겹으로 왔다. 다시 책이다. 이번에는 <인간의 굴레>의 남자주인공.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집을 뛰쳐나간 주인공은 화실을 전전하다가
이렇게 말하는 선생을 만난다.
“너는 B급 화가는 될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아니다.”
하도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문장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대충 그런 뜻이었다. “너 자신을 알라”는 이 말들은 10대의 나를,
그 뒤 바짝 쫓아온 20대 초반의 나를 움츠러들게 했다.
너는 정말 글쓰기에 재능이 있는 거니? 미대에 가고 싶다고?
정말 제대로 그림을 그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니? 나는 내게 묻고 또 물었다.

시간이 지나고,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때
내가 이 일을 정말 잘할 수 있을 것인가,
또는 이 일로 성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묻지 않게 되었다.
과정이 즐거우면 된다,
일을 하는 순간이 즐거우면 된다고 생각할 만큼 나는 ‘뻔뻔해졌다.’
1급 민완기자가 아니면 어떤가.
세상을 만나고 기록하고 전파하는 일에 희열을 느낄 수 있으면 되지.
뛰어난 영화감독이 되지 못하면 또 어떤가.
영화의 아름다움과 진실에 공명할 수 있으면 족하지.
10대의 그 돌발적 독서경험에서 자유로워진 것이 언제였는지,
무엇이 계기가 된 것인지, 계기가 있기는 있었는지 나는 아직 분석해보지 않았다.

나는 나의 짝에게 말했다. “금서가 있기는 있어야겠네요.”
물론 진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부분적 오독을 한 뒤 전전긍긍한 건 전적으로 내 소심함 때문이었으니까.
다만, 희망과 용기가 미래 진단보다 중요하다는 아주 평범한 사실을
오랜만에 확인했다는 게 내 여름 이야기의 끝이다.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 안정숙
제3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는 안정숙님은 한국일보와 한겨레신문 기자를 거쳐 영화전문잡지 ‘씨네21’ 편집장을 지냈으며 제1기 영화진흥위원회 위원을 역임했고, 현재 여성영화인모임 이사, 한국영화평론가협회 회원으로도 활발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아침울림이란? | 친구에게 추천하기 | 정기구독신청 | 수신정보수정 |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좋아요
110 문화 그렇게 홍보하던 '친절한 금자씨', 친절하지 않았음. 14 이재형 2005.07.29 3315 246
109 문화 [The Miracle Makers] 스트라디바리, 과르네리 15대를 모아 올리베이라가 연주한 음반 10 방형웅 2008.07.02 2922 246
108 문화 그녀가 나의 심금(心琴)을 울렸다. 8 박순백 2006.10.10 2613 250
107 문화 다음 아고라에 올라온 이순신 장군에 대한 글입니다 1 정구정 2005.09.12 2437 258
106 문화 올팍 소마미술관의 "페이퍼테이너 뮤지엄" 4 박순백 2006.09.26 1997 258
105 문화 '킹덤 오브 헤븐', 가장 '이질적인' 헐리우드 영화 4 박순백 2005.10.13 2600 260
104 문화 뭉크 3 박순백 2006.10.04 2264 260
103 문화 왕의 남자 19 박재영 2006.07.22 2453 262
102 문화 원곡과 편곡을 함께 비교해서 들어보면... 5 박순백 2006.08.22 2814 262
101 문화 반디앤루니스 장선희 선생 공연과 팬플륫 이야기 2 정덕수 2006.08.10 2201 266
100 문화 이 좋은 재즈 곡들을 6,000냥에 두고두고 들을 수 있다는 게... 20 박순백 2008.05.21 4372 266
99 문화 자화상.......................... 5 박지운 2005.11.12 1973 275
98 문화 마이클 잭슨 사망 소식 1 이진우 2009.06.26 2943 277
97 문화 심형래 감독의 영화 "The War" 11 신준범 2006.10.21 2952 278
96 문화 걱정말아라! 1 정덕수 2006.08.09 1863 280
» 문화 [아침울림] "그 여자는 화가인데, 그림을 못 그려." - 안정숙 박순백 2007.08.21 2578 284
94 문화 [김훈 에세이] 자전거 여행 박순백 2007.08.29 2421 287
93 문화 루브르박물관展 10월 24일부터~ 국립중앙박물관 5 황인규 2006.10.11 2053 288
92 문화 [책 이야기] 피드백 이야기 1 지민구 2007.05.11 2593 291
91 문화 므첸스크의 레이디 맥베스를 만난 후... file 안중찬 2006.09.26 1832 298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2 3 4 5 6 7 Next
/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