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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자동차 여행 VIII] 셋째 날(5/30, 일)
이탈리아의 최고의 명문 가문이라면 메디치가(家)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밀라노의 비스콘티가(家)와 스포르차가(家), 파르마의 파르네세가(Farnese家), 르네상스 예술의 이름 높은 후원자였던 이사벨라 곤차가의 친정가문인 페라라의 데스테(d'Este, 영어로 Este)가문 등 명가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자주 보이는, 그리고 경찰차로도 이용되는 알파 로메오(Alfa Romeo)의 엠블럼은 밀라노의 명문가,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의 창시자가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여 사라센 병사를 사살한 뒤 이 병사의 문장에서 “뱀이 사람을 삼키는" 것을 보고 이것을 가족의 문장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뱀’은 비스콘티 가문을 상징하고, ‘사람’은 적을 상징하므로 뱀은 언제나 사람을 입안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 알파 로메오의 엠블렘 중 왼쪽의 붉은 십자가는 밀라노의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 밀라노의 자치성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방패 모양의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입니다.
이 가문의 문장은 바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내용입니다. 보통은 사악한 뱀은 적이나 나쁜 쪽으로 치부되기 마련인데, 여기선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쪽으로 택하고, 사람을 적으로 용감하게 설정했으니 말이지요. 아, 그런 좋지 않은 의미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뱀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얹어 놓았던 것일까요?
- 스포르차가의 문장입니다.<자료: Wikimedia>
- 군인들을 보호하는 신인 St. Giovanni Nepucemo의 조각상 밑에도 똑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요.(저작권 문제로 인해, 제가 찍어 온 사진 중 원본에서 해당 부분만 오려내어 사진의 질이 좋지 않네요.)
하지만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가보다 스포르차가가 더 유명합니다. 두오모 지역에서 나와 단테의 거리(Via Dante)를 따라 걷다 보면 스포르차 가문의 살아 있는 역사인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과 만나게 됩니다. 두오모를 중심으로 보면 북서쪽에 위치해 있고 두오모에서 걸어서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접근성이 뛰어난 유적입니다.(보통은 두오모에서 걸어서 10분 이상 20분이 소요된다고 하던데 우린 단 5분만에 주파. 사실 우린 걸음이 엄청 빨라 시간을 많이 세이브 할 수 있었습니다.)
- 밀라노의 옛 지도입니다. 1550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중앙의 좀 진한 부분이 두오모이고 정북쪽의 사각형모양이 스포르체스코 성입니다. 정남으로 진한 부분은 Porto Romana입니다.,
- 단테의 거리에는 마침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지요. 저 멀리 스포르체스코 성의 필라레테 탑(Torre del Filarete, Filarete Tower)이 보입니다.
- 단테의 거리 중간에는 시에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대여해 준 세그웨이(Segway)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 때, 저 세그웨이를 타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사진 상으로만 봐 와서 그게 몹시 궁금했거든요. 세그웨이는 전기로 움직이는 스쿠터인데, 사진 같은 것을 촬영할 때 좁은 곳이라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사용하고, 홍보용으로도 사용합니다. 세그웨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도시의 출퇴근용으로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큰 화제가 되었지만, 배터리가 쉽게 소모된다는 단점 외에 타는 모습이 그다지 멋진 모습은 아니라는 점에서 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인라인 스케이팅의 전성기에 여성들에게 인라인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많은 수의 여성이 ‘인라인을 신고 달리면 키가 커 보이고 멋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 스포르체스코 성에 가까이 오니 예쁜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밀라노는 로마시대에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번영하였고, 밀라노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밀라노와 파비아를 포함하여 롬바르디아 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여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이 남달리 큰 것은 이런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중세의 위압적인 성의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시골이 아닌 도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히 특별합니다.
- 5월 말인데도 밀라노는 몹시 더웠습니다. 분수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이 건축된 것은 1368년 비스콘티(Visconti) 가문(밀라노 대성당의 건설을 추진했던 가문)의 당시 영주인 갈레아초 비스콘티(Galeazzo Visconti)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1447년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영주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Filippo Maria Visconti)가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자, 밀라노에서는 권력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의 비스콘티 가문의 장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는 비스콘티 가문의 유일한 혈육인 비앙카 마리아(Bianca Maria)와 결혼하게 되고,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아 파괴된 성을 1450년부터 개축했습니다.
그 후로도 이 성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개축되었습니다.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일명 일 모로) 대에 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인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초대되어 이 성의 개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유모차를 끌고,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 이쁜 아이가 강아지를 발견했군요. 처음에는 이렇게 서로 경계를 합니다. 엄마 손에는 피노키오 인형이 들려있구요. 아이들은 절대로 강아지를 그대로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림책에서만 보고 또 보던 예쁜 강아지를 어찌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 둘이 금방 친해집니다. 이 녀석은 커서 배려심이 있는건지 어린아이를 우습게 여기지 않고 짖지도 않더군요.
- 자세히 보니 광장 앞에는 죽 일렬로 좌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소위 짝퉁 명품 백을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스포르체스코 성의 입구입니다.
- 이걸 누가 사 가긴 하니까 이렇게 성 안에까지 들어와서 파는 것이겠지요?
명품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여행가는 사람이 짝퉁을 사 올 리는 만무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한 마디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불법체류자들이 파는 ‘짝퉁’ 명품을 살 경우, 판매자는 물론이고 물건을 산 사람도 구속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나 구제책은 달리 없었을까요? 반복되는 의례적인 단속 속에 그들의 고단한 삶의 편린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니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투박하나 남성적이면서도 짜임새있는 장대한 스케일에 마음이 탁 트이는 곳이 스포르체스코 성이었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밀라노를 점령한 군대가 도시의 권리를 양도 받고 나서 성채의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복구 작업은 루카 벨트라미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 필라레테 탑 위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스포르체스코 성 곳곳에는 스포르차가(家)의 문장을 여기저기서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이 사진도 탑의 사진 원본에서 일부만 잘라내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 탑 꼭대기의 오른쪽에 있는 부조는 현재도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암부로우스(Sant'Ambrogio, Ambrose)의 상이고, 왼편의 스포르체스코가(家)의 문장은 뱀이 사람을 삼키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이 사진 역시 탑의 사진 원본에서 일부만 잘라내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3년에 연합국 측의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탈리아의 건축 모임 BBPR에 의해 박물관 용도의 건물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자료: 위키백과>
전시된 유물은 주로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출토된 고미술품들로 밀라노 시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문화재들이라고 합니다.
- 성 안의 잔디밭은 가족들과의 소통의 장소였으며 파아란 하늘을 보고 누울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였습니다.
-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곳이었고요.
- 성 네 면에 각각 문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정문 입구 위에 있는 중앙의 필라레테 탑(Torre del Filarete, Filarete Tower)은 움베르토 1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1906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움베르토 1세는 1878년 1월 9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한 왕입니다.(로마 판테온(Pantheon) 입구의 오른쪽에는 이탈리아 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의 무덤이, 그 건너편에는 움베르토 1세의 무덤이 있다. 움베르토 1세의 무덤 오른쪽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
- 부조로 만들어진 움베르토 1세의 상입니다. 움베르토 1세의 이탈리아 표기는 'Hvmberto Primo'입니다.
** 믿어도 될 이야기인지 진가민가 한 움베르토 1세의 기구한 운명 이야기
움베르토 1세가 이탈리아 몬차로 가서 한 레스토랑에 있을 때 움베르토는 너무나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도 이름이 '움베르토'였으며, 태어난 날과 결혼한 날도 똑같았고, 움베르토 1세가 왕위에 오를 때 그 사람은 레스토랑을 개장했다.
이렇게 너무나도 똑같은 사람을 본 움베르토 1세는 그 사람에게 큰 직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움베르토 1세가 그 레스토랑에 가 보니 그와 똑같았던 움베르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었다. 움베르토 1세는 그의 장례식장에 가다가 결국 G. 브래시에게 자신과 똑같았던 움베르토처럼 총에 맞아 죽었다. <자료: 위키백과>
To be continued...
이탈리아의 최고의 명문 가문이라면 메디치가(家)가 으뜸이고, 그 다음이 밀라노의 비스콘티가(家)와 스포르차가(家), 파르마의 파르네세가(Farnese家), 르네상스 예술의 이름 높은 후원자였던 이사벨라 곤차가의 친정가문인 페라라의 데스테(d'Este, 영어로 Este)가문 등 명가들이 수도 없이 많습니다.
이탈리아에서 자주 보이는, 그리고 경찰차로도 이용되는 알파 로메오(Alfa Romeo)의 엠블럼은 밀라노의 명문가,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입니다. 사람을 잡아먹는 뱀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비스콘티 가문의 창시자가 제1차 십자군 전쟁에 참가하여 사라센 병사를 사살한 뒤 이 병사의 문장에서 “뱀이 사람을 삼키는" 것을 보고 이것을 가족의 문장으로 만들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뱀’은 비스콘티 가문을 상징하고, ‘사람’은 적을 상징하므로 뱀은 언제나 사람을 입안에 넣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 알파 로메오의 엠블렘 중 왼쪽의 붉은 십자가는 밀라노의 문장에서 따온 것으로 밀라노의 자치성을 나타내고, 오른쪽은 방패 모양의 비스콘티 가문의 문장입니다.
이 가문의 문장은 바로는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 그런 내용입니다. 보통은 사악한 뱀은 적이나 나쁜 쪽으로 치부되기 마련인데, 여기선 자신의 가문을 상징하는 쪽으로 택하고, 사람을 적으로 용감하게 설정했으니 말이지요. 아, 그런 좋지 않은 의미를 상쇄시키기 위해서 뱀의 머리 위에 빛나는 왕관을 얹어 놓았던 것일까요?
- 스포르차가의 문장입니다.<자료: Wikimedia>
- 군인들을 보호하는 신인 St. Giovanni Nepucemo의 조각상 밑에도 똑같은 문장이 새겨져 있었지요.(저작권 문제로 인해, 제가 찍어 온 사진 중 원본에서 해당 부분만 오려내어 사진의 질이 좋지 않네요.)
하지만 밀라노에서는 비스콘티가보다 스포르차가가 더 유명합니다. 두오모 지역에서 나와 단테의 거리(Via Dante)를 따라 걷다 보면 스포르차 가문의 살아 있는 역사인 스포르체스코 성(Castello Sforzesco)과 만나게 됩니다. 두오모를 중심으로 보면 북서쪽에 위치해 있고 두오모에서 걸어서 단 5분밖에 걸리지 않는 접근성이 뛰어난 유적입니다.(보통은 두오모에서 걸어서 10분 이상 20분이 소요된다고 하던데 우린 단 5분만에 주파. 사실 우린 걸음이 엄청 빨라 시간을 많이 세이브 할 수 있었습니다.)
- 밀라노의 옛 지도입니다. 1550년이라고 되어 있는데 중앙의 좀 진한 부분이 두오모이고 정북쪽의 사각형모양이 스포르체스코 성입니다. 정남으로 진한 부분은 Porto Romana입니다.,
- 단테의 거리에는 마침 사진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지요. 저 멀리 스포르체스코 성의 필라레테 탑(Torre del Filarete, Filarete Tower)이 보입니다.
- 단테의 거리 중간에는 시에서 시민들과 관광객들을 위해 대여해 준 세그웨이(Segway)를 타는 사람들이 보였습니다.
저도 그 때, 저 세그웨이를 타 보고 싶었습니다. 그동안 사진 상으로만 봐 와서 그게 몹시 궁금했거든요. 세그웨이는 전기로 움직이는 스쿠터인데, 사진 같은 것을 촬영할 때 좁은 곳이라 차가 들어갈 수 없는 곳에서 사용하고, 홍보용으로도 사용합니다. 세그웨이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도시의 출퇴근용으로 획기적인 제품이라고 큰 화제가 되었지만, 배터리가 쉽게 소모된다는 단점 외에 타는 모습이 그다지 멋진 모습은 아니라는 점에서 붐을 이루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인라인 스케이팅의 전성기에 여성들에게 인라인을 즐기는 가장 큰 이유가 뭐냐고 물었을 때, 많은 수의 여성이 ‘인라인을 신고 달리면 키가 커 보이고 멋지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하는데 비슷한 맥락인 것 같습니다.
- 스포르체스코 성에 가까이 오니 예쁜 꽃들이 눈에 들어옵니다.
밀라노는 로마시대에 메디올라눔이라고 불리는 북부 이탈리아의 중심지로 번영하였고, 밀라노 공국은 신성로마제국의 일부로서 밀라노와 파비아를 포함하여 롬바르디아 지방의 대부분을 회복하여 큰 규모를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이 남달리 큰 것은 이런 배경과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중세의 위압적인 성의 규모를 가지고 있지만, 시골이 아닌 도시 한복판에 위치하고 있다는 점이 대단히 특별합니다.
- 5월 말인데도 밀라노는 몹시 더웠습니다. 분수대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상쾌해집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이 건축된 것은 1368년 비스콘티(Visconti) 가문(밀라노 대성당의 건설을 추진했던 가문)의 당시 영주인 갈레아초 비스콘티(Galeazzo Visconti)에 의해서였습니다. 이후 1447년 비스콘티 가문의 마지막 영주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Filippo Maria Visconti)가 뒤를 이을 아들을 남기지 않고 죽자, 밀라노에서는 권력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당시의 비스콘티 가문의 장군인 프란체스코 스포르차(Francesco Sforza)는 비스콘티 가문의 유일한 혈육인 비앙카 마리아(Bianca Maria)와 결혼하게 되고, 비스콘티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아 파괴된 성을 1450년부터 개축했습니다.
그 후로도 이 성은 여러 세대를 거치면서 개축되었습니다. 루도비코 마리아 스포르차(Ludovico Maria Sforza, 일명 일 모로) 대에 와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설계자인 건축가 브라만테(Donato Bramante, 1444~1514)와 레오나르도 다 빈치(Leonardo da Vinci, 1452~1519)가 초대되어 이 성의 개축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 그 날이 마침 일요일이어서 유모차를 끌고, 아이 손을 잡고 온 부모들과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많았습니다.
- 이쁜 아이가 강아지를 발견했군요. 처음에는 이렇게 서로 경계를 합니다. 엄마 손에는 피노키오 인형이 들려있구요. 아이들은 절대로 강아지를 그대로 지나치지 못합니다. 그림책에서만 보고 또 보던 예쁜 강아지를 어찌 만져 보지도 못하고 그냥 갈 수 있겠습니까?
- 둘이 금방 친해집니다. 이 녀석은 커서 배려심이 있는건지 어린아이를 우습게 여기지 않고 짖지도 않더군요.
- 자세히 보니 광장 앞에는 죽 일렬로 좌판이 벌어지고 있었는데 소위 짝퉁 명품 백을 파는 사람들이었습니다.
- 스포르체스코 성의 입구입니다.
- 이걸 누가 사 가긴 하니까 이렇게 성 안에까지 들어와서 파는 것이겠지요?
명품의 본고장 이탈리아에 여행가는 사람이 짝퉁을 사 올 리는 만무하겠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서 한 마디 합니다. 이탈리아에서는 불법체류자들이 파는 ‘짝퉁’ 명품을 살 경우, 판매자는 물론이고 물건을 산 사람도 구속한다고 합니다. 그들의 삶에 대한 뾰족한 해결책이나 구제책은 달리 없었을까요? 반복되는 의례적인 단속 속에 그들의 고단한 삶의 편린들이 눈 앞에서 펼쳐지니 오래도록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습니다.
- 투박하나 남성적이면서도 짜임새있는 장대한 스케일에 마음이 탁 트이는 곳이 스포르체스코 성이었습니다.
19세기 이탈리아의 통일 이후, 밀라노를 점령한 군대가 도시의 권리를 양도 받고 나서 성채의 복구 작업이 시작되었고, 복구 작업은 루카 벨트라미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습니다.
- 필라레테 탑 위에 새겨진 문장입니다. 스포르체스코 성 곳곳에는 스포르차가(家)의 문장을 여기저기서 발견 할 수 있었습니다.(이 사진도 탑의 사진 원본에서 일부만 잘라내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 탑 꼭대기의 오른쪽에 있는 부조는 현재도 밀라노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고 있는 성 암부로우스(Sant'Ambrogio, Ambrose)의 상이고, 왼편의 스포르체스코가(家)의 문장은 뱀이 사람을 삼키는 다양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이 사진 역시 탑의 사진 원본에서 일부만 잘라내어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스포르체스코 성은 제2차 세계 대전 도중인 1943년에 연합국 측의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괴되었으나,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탈리아의 건축 모임 BBPR에 의해 박물관 용도의 건물로 개축되었다고 합니다.<자료: 위키백과>
전시된 유물은 주로 롬바르디아 평원에서 출토된 고미술품들로 밀라노 시가 심혈을 기울여 수집한 문화재들이라고 합니다.
- 성 안의 잔디밭은 가족들과의 소통의 장소였으며 파아란 하늘을 보고 누울 수 있는 편안한 휴식처였습니다.
- 연인들의 데이트 장소로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 곳이었고요.
- 성 네 면에 각각 문이 만들어져 있는 것도 인상적입니다.
정문 입구 위에 있는 중앙의 필라레테 탑(Torre del Filarete, Filarete Tower)은 움베르토 1세를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1906년에 재건되었습니다. 움베르토 1세는 1878년 1월 9일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뒤를 이어 이탈리아 왕국의 2대 국왕으로 즉위한 왕입니다.(로마 판테온(Pantheon) 입구의 오른쪽에는 이탈리아 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Vittorio Emanuele II)의 무덤이, 그 건너편에는 움베르토 1세의 무덤이 있다. 움베르토 1세의 무덤 오른쪽으로는 르네상스 시대의 거장 라파엘로의 무덤이 있다.)
- 부조로 만들어진 움베르토 1세의 상입니다. 움베르토 1세의 이탈리아 표기는 'Hvmberto Primo'입니다.
** 믿어도 될 이야기인지 진가민가 한 움베르토 1세의 기구한 운명 이야기
움베르토 1세가 이탈리아 몬차로 가서 한 레스토랑에 있을 때 움베르토는 너무나도 자신과 똑같은 사람을 만났다. 그 사람도 이름이 '움베르토'였으며, 태어난 날과 결혼한 날도 똑같았고, 움베르토 1세가 왕위에 오를 때 그 사람은 레스토랑을 개장했다.
이렇게 너무나도 똑같은 사람을 본 움베르토 1세는 그 사람에게 큰 직위를 주려고 했다. 그러나 다음 날 움베르토 1세가 그 레스토랑에 가 보니 그와 똑같았던 움베르토가 총에 맞아 죽었다는 소식을 듣었다. 움베르토 1세는 그의 장례식장에 가다가 결국 G. 브래시에게 자신과 똑같았던 움베르토처럼 총에 맞아 죽었다. <자료: 위키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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