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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애의 Naver 블로그 "디카로 그리다"
2011.06.05 16:59

d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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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넬레스키의 돔

카테드라(cathedra)는 그리스어로 ‘신의 옥좌’를 의미합니다. 중세 유럽 시대에 들어서면 웅장하고 장대한 ‘신의 집’, 즉 대성당(두오모, cathedral)이 하나 둘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현대적인 건설 장비가 아무것도 없던 시절에 그렇게나 높고 웅장한 건물을 지었다는 사실은 21세기에 사는 현대인이 보아도 놀라울 뿐이고 기적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고딕 성당이 처음 세워졌을 때 사람들은 마구 혹평을 해댔습니다. 그 모습이 마치 괴물같다는 이유에서였다고 하는데, 고딕이란 의미가 ‘고트족스럽다’, 즉 야만스럽다는 의미를 그 당시인들이 인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겠습니다. 이후 영국 골통품 애호가들이 중세 기념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초기의 경멸적인 의미에서 벗어나게 되어 고딕 양식은 건축 외에 조각, 회화, 공예에서도 이 명칭을 적용하여 실현하게 됩니다.

부유한 상업도시에 사는 시 당국과 시민들은 신을 찬양하기 위해, 그리고 잘 살게 해 줘서 신께 감사드린다는 의미로 종종 대성당을 건설했습니다. 그러나 대성당의 건설은 시간이 흐르면서 대성당을 두고 경쟁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것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1507년 베드로 성당을 증축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교황은 면죄부를 판매하기 시작했지만, 그보다 훨씬 이전 13세기에 영국 왕 헨리 3세는 웨스트민스터 사원을 새로 고치고 싶어합니다. 이유는 북프랑스 랭스에 멋진 대성당이 세워진 것을 보고 경쟁심에 웨스트민스트 사원을 그 성당과 똑같이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자금이 부족하자 당시 링컨 백작이 죽었는데 왕은 백작 부인에게 “남편을 죽게 했으니 백작 부인은 웨스트민스터 사원 개축 기금으로 4000파운드를 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부인의 어린 아들을 영원히 떼어놓겠다.“라고까지 말합니다.

14세기와 15세기에 걸쳐서 피렌체는 밀라노(Milano)와 토스카나 지역 피사(Pisa)와 시에나(Siena)와 치열하게 대립, 경쟁하게 되고, 성당의 규모는 각 도시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중대한 문제였습니다. 피렌체의 시민들은 중세 사람들과는 다른, 완전히 새로운 시대의 상징을 원했고 그러기에 대성당 위에 세계에서 가장 큰 돔(쿠폴라, 원형지붕)을 올리고 싶어 했던 것입니다.

- 점차 확장되어 나간 두오모의 설계도. Plan of the church with various extension phases

피렌체 대성당은 이전에 산타 레파라타 성당이 있던 자리에 지어졌고,

*18세기의 피렌체 사진. Procession outside the cathedral during the 18th century

피렌체 대성당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가 설계했고, 1302년 교회 정면이 완성되었으나, 자주 바뀌는 건축가들이 시시때때로 설계안을 변경하는 바람에 공사는 자꾸 지연됩니다. 1412년에 이르러 돔 구조를 제외한 대부분의 공사가 마무리되었지만 직경이 43미터나 되는 거대한 돔을 석재로 만들어 올리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고, 그것을 지상 수십미터 높이에 올린다는 것은 생각만으로는 굉장할 거라 상상이 갔지만, 실제 짓는 방법을 아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습니다.

르네상스 시대 미술사가인 바자리(Giorgis Vasari)의 책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 열전>에 의하면, “중세에 번영을 누리던 피렌체에서 1296년부터 대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했는데, 건축 책임자 캄비오가 원형 지붕(dome)을 완성하기 전에 죽었고(1302년), 그 후 1세기 동안 돔을 완성하기 위해 온갖 방법을 다 써봤지만, 누구도 성공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 왼쪽부터 브루넬레스키가 설계한 돔 구조의 단면도와 구조분해도 (노매드). Section of the dome of Florence Cathedral.
Filippo brunelleschi의 초상 1423-1428
Masaccio작, cappella brancacci, san pietro in cattedra.

- Dome seen from the Bell Tower
- The Cathedral viewed from the cliffs overlooking Florence
- 왼쪽부터 우피치(Uffizzi) 미술관에 조각상 일부, 1446년 카발칸티(Cavalcanti)의 브루넬레스키무덤부조, Museo dell'Opera del Duomo에 보관되어 있는 브루넬레스키 사후 안면상(Death mask)
- Presumed depiction in Resurrection of the Son of Theophilus, Masaccio
-Picture of Brunelleschi's panel.
- Brunelleschi's machines

1407년 피렌체의 건축가들이 모두 모여 돔을 완성하는 방법을 둘러싸고 오랜 토론을 벌이고 있는 가운데, 필리포 브루넬레스키(Filippo Brunelleschi: 1377-1446)란 젊은 건축가가 자신이 그 지붕을 설계도대로 만들어 보겠다고 장담합니다. 이미 시도하였다가 실패한 유명한 건축가들은 이 무명의 젊은이 말을 믿으려하지 않았지요. 브루넬레스키는 규모가 비슷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거대한 돔에서 아이디어를 얻어 판테온의 가구(架構) 기술을 도입하여 전통을 중요시하면서도 새로운 구성미를 만들어내고자 노력했습니다. 브루넬레스키는 이 돔을 완성할 수 있는 설계도와 모형까지 제작해 놓고 이 집회에 참가하여 자신의 돔을 완성할 수 있다고 얘기했지만, 자기가 고안한 건축법을 다른 건축가들이 도용할 것을 꺼려하여 공개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른 건축가들은 건축 책임을 브루넬레스키에게 맡기는 것에 반대하면서 그가 제안한 방법을 면밀하게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누가 피렌체 대성당 위에 거대한 돔을 올릴 것인가?

1419년, 피렌체 대성당의 돔을 설계할 건축가를 찾기 위해 공모전이 열렸습니다. 어떤 시민 하나가 “금화를 가득 넣은 거대한 흙더미 위에 돔을 만들고, 사람들이 금화를 찾아 흙을 다 치우면 돔이 완성될 수 있다.”는 아이디어를 냈지만 어이가 없는 제안이라 받아들여지지 않았습니다.

금세공인이자 건축가였던 브루넬레스키는 다른 제안을 했습니다. “공모에 참가한 응모자 전원에게 평평하고 미끄러운 대리석 위에 달걀을 세울 수 있는 사람에게 돔 건축을 맡기자.“는 것. 시당국은 그 말을 그대로 실천해 다른 참가자들은 달걀을 세우지 못했으나, 브루넬레스키는 달걀을 집어 들더니 한쪽 끝으로 세게 내리쳐 결국 끝을 부숴뜨리고 달걀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이를 본 다른 건축가들은 소리 높여 “그렇게라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 때 브루넬레스키는 말합니다. “내가 돔을 만드는 방법을 미리 알려준다면 당신들도 나와 마찬가지로 그 일을 할 수 있을 것이오.” 사실 어떤 새로운 일을 누군가가 처음으로 해 내면 아무 것도 아닌, 쉬운 일처럼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누가 창조적인 발상으로 그것을 먼저 해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후대의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는 85년전 이 브루넬레스키의 카피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피렌체에서는 르네상스 시대부터 벌써 공모전 제도를 통해 공개 경쟁을 실시해서 뛰어난 예술가로 하여금 더 의욕적으로 일할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의 공모전의 효시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르네상스 조각의 선두주자였던 도나텔로와 대성당 앞 세례당의 청동문을 제작했던 기베르티를 비롯해 당대의 걸출한 예술가들이 응모했지만 결국 브루넬레스키에게 영광이 돌아가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는 건축가 겸 조각가인 로렌초 기베르티(1378~1455)와 함께 일하게 되었는데 기베르티가 누구입니까? 1401년 브루넬레스키는 피렌체에 있는 세례당의 청동 문 세트를 디자인하는 공모전에 응모했을 때(당시 금 세공인이었던 로렌초 기베르티와 함께 그는 ‘이삭의 희생’, 피렌체 바르젤로미술관 소장, 을 묘사한 금으로 도금된 청동판을 만들어냈다.) 바로 기베르티에게 고배를 마셨던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와 그의 친구 도나텔로는 고대 로마 유적들을 연구하러 곧바로 로마로 떠나게 됩니다.

브루넬레스키와 도나텔로가 여행을 하기 전까지는 아무도 고대 유적의 건축 방법을 상세하게 연구하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로마에서 3년간 머무는 동안 그는 판테온의 천장에 대한 구조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특히 브루넬레스키는 아직도 볼 수 있는 직립구조를 위한 뛰어난 골조체계에 대해 서술한 ‘건축십서’를 지은 고대 로마의 건축가 비트루비우스(Marcus Vitruvius Pollio)에게 매우 큰 영감을 받았다고 전해집니다.

* 지름 43미터의 이 돔 구조물을 계획하고 완성하는데 브루넬레스키는 대부분의 생을 보냈다.

1420년 브루넬레스키는 기베르티와의 공동 작업이 못마땅한 차에 자신의 의견에 반대를 일삼는 기베르티 때문에 몸이 아프다는 것을 핑계로 돔 공사에서 손을 떼게 됩니다. 건축에 대해서는 문외한이었던 기베르티가 남아 공사를 책임지게 되자 문제가 잇따라 터지게 되었는데, 1423년 브루넬레스키는 돌아와 공사를 단독으로 책임지고 진행시키라는 요청을 받게 됩니다.

공사 내용은 돔 안에 또 돔이 있는 이중 돔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바깥 돔의 무게를 엄청나게 줄여주었습니다. 안쪽 돔은 스스로 지탱했고, 바깥 돔과는 돌로 된 리브(ribs/돌로 된 아치)로 열결되었습니다. 돔은 몹시 무거웠지만 철과 돌로 만들어진 거대한 사슬로 묶어 모양을 유지했고 버트리스(Buttress/받침벽)는 필요 없었습니다. 자재들은 브루넬레스키가 고안한 동물의 힘을 이용해 움직이는 도르래 장치에 실어 돔까지 올렸습니다. 그 후 사람이 돔 안의 기중기로 작업 현장까지 들어 올렸습니다. 무게가 37,000톤인 돔 제작을 위해 4만개 이상의 벽돌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인부들이 식사를 하러 오르내리는 시간을 아끼기 위해 브루넬레스키는 돔 위의 건설현장에 식당과 포도주 가게와 화장실을 만들었습니다. 돔은 1420년에 착공되어 1434년에 완공되었는데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건물 중 가장 짧은 기간이 소요된 건축물이었다고 합니다. 역사상 최초의 팔각형 돔이었고(로마의 판테온은 원형 돔),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 돔의 탄생이었습니다.

“하늘을 향해 뻗어나간 이 거대한 건축물은 그 그림자가 토스카나의 모든 시민을 가릴 정도다.” 이것은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의 외관을 디자인하고 ‘회화론’을 저술했던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가 언급한 말입니다.

이탈리아에서 설계와 시공의 기초 자료로 사용한 건축 모형은 이 15세기부터 제작된 것으로 당시 피렌체에서는 건축의 주문자가 교회가 아니라 양모 상인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
(Arte della Rana) 였습니다. 조합은 1366년 건축가와 화가, 금 세공업자를 집합시켜 대성당을 위한 건축 계획을 세우게 됩니다. 이 설계에 따라 공사장에 벽돌로 된 대성당 모형을 제작합니다.

처음엔 벽돌로 대성당 모형을 제작했는데 모형이 너무 커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1391년 공사장이 폐쇄돼 모형만 남아있었는데 울타리를 설치했음에도 사람들이 모형 교회를 공중 화장실로 이용해, 악취가 진동하게 되어  공사가 시작되기도 전에 모형을 해체했다고 합니다.

그 후 원하는 크기로 깎아 만들 수 있는 목재를 사용했는데, 목재는 벽돌보다 가볍고 더 간단히 만들 수 있고 값도 쌌지요. 목조 모형이 발전하게 된 이유는 바로 공모전 때문이었습니다. 피렌체는 1418년까지 공모전으로 대성당 돔 천장 건축가를 구했고, 그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였지요. 15세기 이래 건축 모형의 도움으로 우리는 오늘날 원래 계획안과 실재의 모습을 비교할 수 있고, 오늘날 거기에 덧붙여 진 것은 컴퓨터 시뮬레이션입니다. 1420년 브루넬레스키에 의해 제작된 목조 모형은 현재까지 오페라 델 두오모 박물관에 잘 보전되어 있고, 대성당 돔의 각 개별 부위와 완전히 일치한다고 합니다.

14세기말과 15세기 초에 밀라노와 피렌체의 경쟁은 치열했는데 밀라노가 전제 군주 국가였다면 피렌체는 그래도 형식상은 자유로운 민주 국가였습니다. 블래커의 ‘가난한 빵집 주인이라도 아르테(길드)에 가입되어 있으면 언젠가는 공화국 총무 자리에 앉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라는 말에서도 피렌체의 민주제를 읽을 수 있겠습니다.

두 나라의 각기 다른 성격은 예술에서도 차이가 컸습니다. 밀라노가 새로 짓는 대성당을 무수한 첨탑이 솟아있는 고딕 양식으로 한다고 하자, 피렌체는 대성당 공사를 재개해 반밀라노와 반고딕의 상징으로 돔을 만들었지요. 공사를 진행하는 방법도 달라 밀라노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훌륭한 고딕 건축물을 만들고자 해 고딕의 본고장인 프랑스와 독일에서 기술자들을 불러들였던 반면 피렌체는 궁정에 속해 있는 미술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시민들을 대상으로 설계를 공모하고 시민들의 대표자로부터 심사를 받아 건축가를 선정했습니다.

돔은 대성당 건물과 지오토가 설계한 종탑이 일체감을 느끼도록 해 주었고, 대도시 피렌체의 도시의 경관을 새롭게 결정지었습니다. 그 웅대함과 곡선의 균형미가 함께 어우러져 시 주위에 있는 언덕이 만들어 내는 자연적인 선과의 조화도 아름답습니다. 위에서도 언급한 알베르티가 ‘새로운 돔은 토스카나의 모든 시민을 덮어 씌울만한 크기’라고 말한 것은 그런 의미에서였다고 합니다.

브루넬레스키의 명성은 그가 개척한 모든 대상이 비례와 균형의 관계에 따라 배치되는 소실점에 의한 원근법으로 인해 드높아졌고, 그가 설계한 피렌체 시내에 있는 산로렌초 성당은 원근법의 교과서가 됩니다. 후일 그를 시초로 한 과학적 근거를 바탕으로 한 원근법이 마사초의 예술작품에 도입되어 이후 미술사의 획기적인 걸작들이 탄생하게 됩니다.

자신의 뚜렷한 꿈을 위해 독신으로 살며, 로마로 건너가 고대 로마건축을 연구하면서 원형 천장에 관한 철저한 조사와 자료 분석으로 30여년간을 외로움과 싸우며 한 길 우물만을 판 집념의 사나이 브루넬레스키. 과거 로마의 전통적인 건축의 장점을 본받아 새로운 양식을 창조해 낸 그가 ‘르네상스 건축의 창시자’라 불리는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닙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일에 1만 시간, 즉 하루 3시간씩 10년을 투자하면 전문가의 길로 들어선다고 하는 현대에, 브루넬레스키의 무서운 집념과 그의 숭고한 꿈에 대한 평생의 도전은 우리 모두의 뇌리에 오래도록 살아 있을 것입니다.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상은 대성당 광장에 있는 카노니치 궁전 바깥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영원히 피렌체의 상징이 될 돔을 생각에 잠긴 채 언제까지나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습니다. 토스카나의 자랑이며 전 이탈리아의 자랑인 두오모의 돔을 그 자신도 대견해 하면서... 두오모 지하실 한 켠에 잠들어 있는 브루넬레스키 무덤에서 피렌체인들의 그에 대한 진한 사랑을 감지할 수 있었습니다.

- Tomb of Filippo Brunelles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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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당은 교황 에우제니오 4세가 1436년 3월 25일 축성(祝聖)하였다.

사진 Florence Cathedral as it appears in a fresco by Andrea di Bonaiuto, painted in the 1390s, before the commencement of the dome

That architectural choice, in 1367, was one of the first events of the Italian Renaissance, marking a break with the Medieval Gothic style and a return to the classic Mediterranean dome.

Pantheon in Rome for solutions. The dome of the Pantheon is a single shell of concrete, the formula for which had long since been forgotten.

- 1349년 대성당 공사가 재개되어 프란체스코 탈렌티는 종탑을 완성하고 전체 프로젝트를 후진(後陣)과 측면 경당까지 포함하도록 확대했다

* 두오모 지하로 내려가면 두오모 이전, 1375년 헐리기까지 중심 성당 역할을 했던 산타 레파라타 성당의 잔재와 묘석들을 볼 수 있다.

기베르티는 세례당을 위한 두 번째 청동 문의 제작에 착수했는데, 그 아름다움은 100년 뒤에 미켈란젤로가 "분명히 이것은 천국의 문이다"라고 칭송할 정도였다.[3]

브루넬레스키의 거대한 상은 대성당 광장에 있는 카노니치 궁전 바깥에 앉아서 자신의 가장 위대한 업적이며 영원히 피렌체 전경의 중심이 될 돔을 생각에 잠긴 시선으로 보고 있다. 돔이 세워지고서 150년 이후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바티칸 시국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이 이 돔의 규모를 뛰어넘게 된다.

대성당 건물은 1296년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안으로 시작하여 1469년 베로키오가 랜턴 꼭대기에 구리로 된 구를 설치하면서 완성되었다. 그러나 전면은 19세기까지도 아직 미완성이었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무덤.


돔은 106m, 종탑은 82m. 피렌체 시는 웅대한 두오모의 원형 지붕, 브루넬레스키가 탄생시킨 돔에 대한 예우로 이보다 더 높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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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돔처럼 위에서 덮어씌우는 듯한 양감과 건물 전체의 힘을 한 점으로 집중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형태는 밀라노의 대성당처럼 무수한 첨탑을 세워서 힘을 공중에 확산시키는 고딕 양식과 전혀 다른 것이었습니다. 밀라노 대성당의 건축가들은 건물에 작용하는 힘을 하나하나 개별화 해 불꽃처럼 날카롭고 눈부신 첨탑의 숲을 통해 공중으로 발산시키려 한 반면 부르넬레스키는 건물에 작용하는 모든 힘을 총괄해서 균형을 맞추는 것으로 없애버렸지요.(후지사와 미치오, 이탈리아에서 역사와 이야기는 같은 말이다.) 부르넬레스키의 대성당 돔은 르네상스의 승리의 기념비라 할만 합니다.

- 피렌체의 돔을 보고 있는 브루넬레스키의 조각상

- 두오모 맞은편 카노니치 궁 앞에서 자신들의 걸작품을 바라보고 있는 아르놀포 디 캄비오와 필립포 브루넬레스키.
- 파사드(전면)-정면의 장미창과 조각상들

피렌체에는 메디치 가문의 문화 예술 활동에 대한 전폭적인 지원 덕에 각지로부터 재능 있는 사상가, 예술가들이 몰려들었다. 다양한 배경의 사람이 뒤섞여 있는 도시에 살면서 이곳 사람들은 다른 문화에 대한 개방적인 마음을 가질 수 있었을 것이다.
피렌체를 예술의 도시로 성장시켰던 요인 중 하나로 피렌체인들의 비판적 기질을 꼽을 수 있다. 분쟁거리가 생기면 다른 도시국가들의 2배나 되는 다양한 주장들이 일어났다. 이러한 비판적 기질은 정국 안정에는 도움이 뒤지 못했지만 학문과 예술 이 꽃필 수 있는 적절한 토양이 되었다. 조각가 도나텔로는 베네치아와 밀라노에서 그를 초빙하겠다는 요청이 쇄도했지만 이를 모두 고사하고 고향인 피렌체로 돌아갔다. 이유를 묻는 친구에게 그는 “베네치아나 밀라노에서는 피렌체 사람들의 거리낌 없는 험담을 들을 수 없기 때문”이라고 답했다고 한다.
메디치 가문은 시민들과의 친화를 도모하기 위한 목적으로 재능 있는 예술가들을 후원했다. 의도야 어쨌든 문화 예술에 대한 지원 활동은 피렌체를 창조적 기운이 넘치는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만들었다.

* 돔은 106m, 종탑은 82m. 피렌체 시는 웅대한 두오모의 지붕, 브루넬레스키가 탄생시킨 돔에 대한 예우로 이보다 더 높은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금하고 있다고.

피렌체 시내를 한 눈에 조망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 광장이나 쿠폴라의 옥상이나 종탑 꼭대기의 테라스에 올라 아름다운 시내를 바라볼 때 느껴지는 건 피렌체의 건물들은 대체적으로 낮다는 것입니다.  

13세기 이탈리아의 도시들에는 탑을 많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토스카나의 산 지미냐노가 그 확실한 증거이지요. 당시 피렌체에는 159개, 볼로냐에는 180개, 루카에는 700개의 탑이 있었다고 하는데 비록 콘크리트나 강철은 아니지만 석재로 지었습니다.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꼭 가 보고 싶었던 곳이 탑의 마을 산 지미냐노였지만, 일정을 갑자기 바꿔 부세토와 피렌체에 들르는 바람에 아쉽게 가보지 못해 지금도 아쉽습니다.

그 많던 피렌체의 수백개의 탑들은 다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요? 당시 귀족의 저택 옆에는 탑을 세웠고, 탑의 높이는 귀족의 부과 권력을 상징했는데, 요새화된 성과 마찬가지의 역할을 했다고 합니다. 법령으로 탑의 높이가 70m를 넘지 못하도록 했는데 그 후 귀족의 탑은 최대 29m 높이로 한정시켜 모든 탑의 높이가 같아지게 된 것이지요. 오늘날 피렌체의 집들은 높이가 같아야 했기에, 지붕 선이 거의 일정하게 남아있게 된 것입니다. 어쩌면 그것이 피렌체의 모습을 독특하게 하고, 두오모의 쿠폴라와 종탑과 베키오 궁의 탑을 더 돗보이게 하는 이유일 수 있겠습니다.                                          

섬세한 조각과 그림들. 두오모의 외벽은 하얀 윤곽선을 두르고 초록, 분홍의 대리석으로 마감.

코시모는 생애 대부분을 일개 시민이자 은행가로 지냈을 뿐인데 코시모의 권력은 30년 동안 요지부동이었습니다. 그는 사실상 피렌체의 국왕이었으며 그 지위는 아들에서 손자로 세습되었습니다.

가문의 대를 이어가면서 르네상스 예술을 가능하게 한 메디치 가문이 왜 예술을 후원하였을까? 라는 의문은 당연 자연스럽게 나오기 마련이다. 그들은 막대한 자본을 들여 성당을 짓고 벽화를 주문하며 그들의 궁에 신화와 역사이야기를 그리게 했다.
메디치 가문의 행동은 단순하게 사람이나 단체와 작품, 예술 등을 뒷받침하고 용기를 북돋고 장려하는 후원자의 행위라는 것만이 아닌 가문의 사회적인 지위를 상승시키고 정치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이다

코시모는 학문과 미술 분야에서 새로운 조류를 적극적으로 비호하고 후원했습니다. 그의 후원으로 피렌체에 플라톤 아카데미가 설립되어, 이미 시류에 뒤처진 학문을 가르치고 있던 대학을 대신해 학술 연구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코시모는 부르넬레스키에게 산로렌초 성당의 공사를 계속 맡겼고, 도나텔로와는 평생 친구가 되어 끊임없이 일을 주었고 경제 원조까지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코시모는 1464년 세상을 떠났고 시신은 산로렌초 성당에 묻혔습니다. 피렌체 시민 모두가 그의 죽음을 애도했고, 정부는 그에게 ‘조국의 아버지’라는 존칭을 추서했다고 합니다.

부르넬레스키의 대성당 돔과 기베르티의 천국의 문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영광을 후세에 전했습니다. 코지모 데 메디치가 이루어 놓은 평화는 그의 사후 30년 동안이나 계속되었습니다. 이탈리아는 최고의 번영을 구가했고, 피렌체의 문화는 유럽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지위를 유지했습니다.

지금도 피렌체 중심부는 코시모가 살아있을 때와 기본 틀은 거의 같다고 합니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의 아름다운 돔은 변함없이 도시를 굽어보고 있고, 산조반니 세례당의 천국의 문 앞에는 관광객들의 줄이 끊이지 않습니다. 그곳에서 북으로 조금 가면 메디치 저택, 그 대각선 맞은편에는 산로렌초 성당, 북쪽으로 조금 가면 산마르코 성당 앞 광장에 다다릅니다. 이곳의 수도원은 미술관이 되어 안젤리코의 명작을 자랑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대성당 앞 광장에서 남쪽으로 걸으면 시청사 팔라초 베키오의 전망탑이 보입니다. 피렌체에서 메디치가와 연관된 장소만 찾아 걸어 보는 것도 특별한 즐거움이 될 수 있습니다.

- 폰트르모가 그린 코시모의 초상; 온화하고 지혜의 빛으로 부드럽게 반짝이는 눈. 마주잡은 손의 굵은 뼈와 커다란 매부리코, 아랫입술이 불쓱 나온 입을 꽉 다물고 있는 모습에서 강한 의지력과 절제된 욕망, 냉혹함과 비정함을 엿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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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렌체 시민 가운데 어떤 형태로든 코시모의 기부나 자선, 후원의 덕을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피렌체 시민들 사이의 좋은 평판이야말로 메디치 가문의 권력의 기반이었고 정당성이었으며 결국 막대한 부를 아낌없이 쓰는 것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코시모는 학문과 예술을 후원하는 일에서 돈 쓰는 즐거움을 느낀 것. 유럽과 오스만 제국까지 사람들을 보내 문헌을 수집.

**랜턴(돔 위의 위에서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첨탑)

15세기 초부터 메디치가(家)가 시정(市政)에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하였는데, 코지모 및 손자인 대(大)로렌츠는 실질적으로 메디치가의 독재체제를 확립하여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화의 중심으로서 그 황금시대를 맞이하였다.

상공업이 성하며 식품·의료·가구 등의 일용품공업 외에 자동차부품·자전거·냉장고·농업기계 등의 제조공업과 전통적으로 이름높은 가죽제품공업이 이루어진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중심지로서 13∼15세기의 예술작품이 많이 남아 있는데, 시정(市政)의 중심이었던 시뇰리아 궁전을 비롯하여, 지금은 국립미술관·도서관·고문서관(古文書館)이 들어 있는 우피치 궁전, 독특한 고딕 양식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교회, 조토의 벽화 등으로 유명한 산타 크로체 교회, 도나텔로 등의 작품으로 알려진 산 로렌초 교회 등이 있는 시가지 중심부는 거리 전체가 박물관과도 같다.

한때 메디치가(家)의 저택이었던 팔라초-피티(궁전)는 현재 미술관이고, 그 밖에 미켈란젤로의 작품으로 이름높은 아카데미아 미술관, 바르젤로 미술관이라는 통칭으로 알려진 국립미술관, 안젤리코의 벽화로 유명한 산마르코 미술관 등이 있다. 또 이탈리아에서 손꼽히는 종합대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기관 ·연구기관이 모여 있다. 1966년 가을에 아르노강이 범람, 우피치 궁전 등 시가의 중심부가 침수되어 귀중한 문화재가 큰 손실을 입었다. 세계유산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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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르네상스 문화가 만개했던 이 아름다운 도시에는 지금도 세개의 이름이 있다.
'Fiorentina'  'Florence' 그리고 'Firen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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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 있는 팔각형의 건물이 산 지오반니 세례당이다.

8은 천주교에서 부활을 뜻한다고 책자에 친절하게 설명되어 있었다.;;

대문호 단테도 여기서 세례를 받았다고 한다.

세례당의 동쪽 청동문이 그 유명한 천국의 문이다.

난 종교에 관심이 없어서 그런지 천국의 문 하니까 GNR 의 노래가 먼저 생각이 났다;;
Florence (Italian: Firenze [fiˈrɛntse]  ( listen), alternate obsolete spelling: Fiorenza; Latin: Florentia) is the capital city of the Italian region of Tuscany and of the province of Florence. It is the most populous city in Tuscany, with 367,569 inhabitants (1,500,000 in the metropolitan area).[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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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rom his youth Brunelleschi had been interested in mechanical devices, in particular clocks, wheels, gears and weights. He now combined his artistic skills, his mathematical skills, and his understanding of mechanical devices when he made a proposal to the wardens of works of the cathedral when they set up a competition in 1418 to find the best solution to the problem of designing and constructing the dome. Brunelleschi proposed a double self-supporting shell and a rib structure to support the enormous weight. He proposed brick as a building material, laid in rotating herringbone patterns. His method of construction included ways of lifting construction materials into position, avoided the use of scaffolding but included the use of machines which he had designed specially for the purpose.

Sketch of the construction platform.


The competition to be awarded the commission was tough and Brunelleschi again had to compete against Ghiberti. In 1420 Brunelleschi was awarded the commission and construction began. Using techniques reminiscent of Archimedes (according to Vasari [13]):-

... by using counterweights and wheels for lifting he made it possible for a single ox to raise a load so heavy that previously it would hardly have been possible for six pairs of oxen to move it.

Brunelleschi's sketches of his machines.

It was still a lengthy construction process, but by the time Brunelleschi died in 1446 the dome was almost completely finished. The only missing part was the huge lantern that he had designed to hang from the centre of the dome. The lantern was not only for decorative purposes but was also part of the way that the structure supported itself. It was built following Brunelleschi's specifications after his death.

브루넬레스키는 고대 로마예술의 열광적인 애호가로 1402년 부터 여러번에 걸쳐 로마를 견학했다.
그는 고전주의적 건축술과 후기 고딕 예술문화를 거부하고
구조의 변경(조정)에 기반한 새로운 디자인을 통해 고대양식의 조화로움을 추구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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돔을 만들기 위해 보강재(서까래)를 쓰던 전통적 기법을 쓰지않은 브루넬레스키만의 이 공법은 건축사에 남는 걸작이다.

브루넬레스키로 인해 현대 건축가 개념이 탄생했다고 할 수 있는데, 그는 중세의 장인들 처럼 건축 공정에만 참여하는 것이 아니고, 설계단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단순히 기술공정만 숙련하는 것이 아니라 건축사와 수학, 기하학을 기반으로 "자유로운 예술"을 응용하는 지식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이다.[2]

부벽이 없이 어떻게 이 돔은 무너지지 않고 지탱되는가에 --
로마에 있는 브라만테의 건축물과 더불어 르네상스의 전형을 보여준다는 브루넬레스키의 파치 예배당입니다.

그리고 그 위의 건축물은 고아원인데요
붉은 옷을 입은 Masaccio와 Brunellesch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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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술곰; 이탈리아의 브루넬레스키가 고전적인 모티브를 건축에 도입한 ‘르네상스적인 방법’을 개발한 것에 반해 다른 유럽 국가들에서 이런 양식이 나타난 것은 한 세기 정도 후의 일이다. 즉 그가 다른 국가들보다 한세기나 앞서 피렌체의 고딕양식을 끝마쳐 버린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를 제외한 북유럽 국가들은 고딕 양식을 버리지 않고 오히려 더 발전시켜 나갔다.
----요술곰:로마네스크에서 고딕양식까지(12-13세기 교회 건축)
실험적인 시도에 의해 기술적인 발전을 이루었다. 바실리카에서 사용되었던 목조 지붕은 이제 구식이 되어 사용치 않았고 튼튼한 석조 궁륭을 올리긴 해야겠는데 전에 사용되었던 로마의 기술은 잊혀져버리고 말았다.
13세기 고딕 양식의 교회들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말 그대로 환상적인 교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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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딕이란 게르만족의 하나인 고트족에서 유래되었으나 고트족과는 아무 관계가 없었다. 고딕이란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인들이 ‘야만적’이란 의미로 중세미술 전반을 가르킬 때 사용하였던 용어였다. 십자군전쟁 이후 생활과 신앙의 중심은 수도원에서 도시의 대성당으로 이동하였다. 새로운 중심지가 된 도시의 자유로운 생활은 새로운 사상과 학문, 예술등을 발전시키는 토대로 작용하였다.

  13세기의 교회는 지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었다. 이제 지상에서 교회와 대적할만한 악의 세력은 사라졌다. 기독교가 지상에서 완전한 승리를 거두게 되자 신학도 환상이나 계율을 전달하는 것에서 벗어나 복음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사실적인 힘이 바로 고딕미술의 핵심이었다.

로마네스크 미술에 이어 12세기 중기부터 르네상스 미술의 개화기에 이르기까지 서유럽 전역에 전개된 중세 기독교 미술의 발전 단계 및 그 일반적인 양식을 의미한다.

영국 골통품 애호가들이 중세 기념물에 관심을 나타내기 시작하면서 초기의 경멸적인 의미에서 벗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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