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목소리, 송도순 선생님을 보내며

젊은 시절 흑백 텔레비전 앞에서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를 통해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었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지만 그 목소리가 흘러나오는 만화영화를 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숨죽이며 보던 ‘톰과 제리’의 그 목소리. “제리야, 불쌍한 톰 좀 그만 괴롭혀라”라며 꾸짖으면서도, 그 안에 숨길 수 없는 웃음과 애정이 묻어나던 그 발랄하고 생기 넘치는 목소리의 주인공. 내게는 언제나 ‘명랑하고 정다운, 그러면서도 귀여운(?) 누나의 이미지’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잊히지 않는 선명한 기억으로 남아있던 송도순 선생님이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 전쟁 통에 유명을 달리한 누나 둘 대신 난 언제부터인가 목소리만 들은 송 선생님을 마음속의 누나로 여기며 살아왔다. 나중에 송 선생님의 얼굴을 미디어를 통해 처음 대하면서 그 얼굴에 송 선생님과 같은 나이의 우리 사촌누이 얼굴이 겹쳐오는 걸 보며 내가 왜 송 선생님을 친누이처럼 마음에 품어왔던가를 이해하게 되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송 선생님이 우리 곁을 홀연히 떠났다는 소식을 그분의 아들 박준혁 배우가 SNS를 통해 알렸다( 참조: https://bit.ly/4skN1uh ) 충격이었다. 눈물이 스르르 솟았다. 마치 영원히 우리 곁에 머물러 줄 것만 같았던 분인데, 수명이 한없이 늘어나는 게 문제라는 이 세상에서 갑작스러운 그분의 별세라니.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놀란 가슴은 쿵쾅거리고, 거대한 슬픔이 검은 파도처럼 밀려와 한동안 세상의 모든 소리가 들리지 않는 듯, 그저 멍하니 손을 놓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분은 단순한 성우가 아니었다. 내가 중학생이던 1967년 TBC 공채 성우로 데뷔한 이래 반세기가 넘는 시간 동안, 그분의 목소리는 우리 삶의 희로애락이 담긴 배경음악처럼 늘 함께했다. ‘톰과 제리’의 구수하고 정겨운 해설은 물론, ‘101마리 달마시안’의 무시무시한 악녀 크루엘라 드 빌부터 ‘암행어사’의 정의로운 박 상궁까지, 그분의 목소리는 선과 악, 희극과 비극을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수많은 캐릭터에 생명을 불어넣었다. 그 목소리가 없었다면 우리의 어린 시절, 젊은 시절은 얼마나 밋밋했을까. 그, 국민이 사랑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없었다면 우리의 저녁은 얼마나 허전했을까. 특히 배한성 선생님과 함께 17년간 진행했던 라디오 ‘함께 가는 저녁길’은 고된 하루를 마친 수많은 시민의 지친 어깨를 다독이는 따뜻한 위로였다. 그 시절, 우리 국민들은 그분을 ‘똑소리 아줌마’, ‘똑순이 아줌마’라 부르며 마치 오랜 이웃처럼, 친한 누나, 언니처럼 여기며 사랑했다.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단 한 번의 지각이나 결근 없이 “목숨 걸고 일했다”고 말하던 그분의 프로 정신과 뜨거운 열정은, 자신의 일을 얼마나 사랑하고 소중히 여겼는지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 목소리 하나로 온 국민을 웃고 울게 만들었던 그분의 실력은, 단순한 재능을 넘어선, 뼈를 깎는 노력과 자기 관리가 빚어낸 ‘예술의 경지’를 보여주고 있지 않았던가??

내가 유난히 아끼고 사랑하는 ‘배우 박준혁’, 그가 바로 송도순 선생님의 자랑스러운 아들이다. 우연히 한 자전거 모임에서 그를 처음 만났다. 이미 나의 존재를 알고 따뜻하게 다가와 인사하는 그에게 난 아무말도 못 하고 목례만 하면서 그 길다면 긴, 한강과 서울도심, 그리고 북악산을 오가는 시간을 보냈다. 당황했기 때문이다. ‘내 마음속의 누이’가 그를 내게 보내줬다는 사실에 놀라 평소에 말많은 내가 잠시 말을 잊었던 것이다. 그걸 후회했다. 하지만 지금껏 그 얘길 박준혁 배우에게 토로한 일이 없다. 나는 박준혁 배우가 출연하는 연극을 보러 갔고, 페이스북의 페친으로 오래 가깝게 지내며 우연 같은 필연적 인연을 쌓기도 했다. 한번은 아내가 아파 입맛을 잃고 힘들어할 때, 박준혁 배우가 어머니의 이름이 담긴 ‘깐깐 송도순 며느리 자연밥상 김치’를 보내주어 큰 감동과 위로를 받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 깊고 시원한 김치 맛에는 단순히 음식 맛을 넘어, 사람을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그 따뜻한 마음은 분명, 방송에서는 늘 유쾌하고 강한 모습을 보였지만, 실제로는 누구보다 다정하고 속 깊었던 어머니, 송도순 선생님에게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자식은 부모를 닮기 마련 아닌가? 동료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끌어안고, 후배들을 위해 스피치 아카데미를 열어 평생 쌓아온 자신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누어주던 그분의 인품은,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었다는 걸 후배들의 입을 통해 들은 바도 있다. 그분은 자신의 성공에만 머무르지 않고, 그 사랑과 재능을 세상에 끊임없이 베풀었던 진정한 어른이었다.

사랑하는 박준혁 배우에게, 그리고 남겨진 모든 가족에게 깊은 위로의 마음을 전하고 싶은데... 어머니를 잃은 슬픔을 어찌 말로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하지만 기억해주길 바란다. 송도순 선생님이 살아생전 세상에 베풀었던 그 수많은 온기와 선행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 따뜻함은 이제 수많은 사람의 진심 어린 위로와 기도가 되어, 당신과 당신의 가족에게 몇 배의 큰 보답으로 돌아갈 것을 나는 확신한다. 어머니가 그러셨듯, 당신 또한 그 슬픔을 딛고 일어나 더 많은 사람에게 희망과 감동을 주는 배우로 굳건히 서 주리라 믿는다.
이제 더 이상 그 생기 넘치는 목소리를 새로이 들을 수는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 목소리는 우리 모두의 추억 속에, 우리가 사랑했던 수많은 작품 속에 영원히 살아 숨 쉴 것이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국민 성우’이자, ‘따뜻한 마음을 지닌 진정한 거인으로서의 한 인간’이었던 송도순 선생님. 그분이 남긴 위대한 목소리의 유산과 사람들에게 베풀었던 온기는 밤하늘의 가장 밝은 별이 되어, 우리 곁을 영원히 비추며 지켜줄 것이다. 별이 졌다는 생각은 잠시, 그 별이 우리의 남은 생 전부를 비출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된다.
송도순 선생님, 당신이 빠진 우리 시대는 생각할 수도 없기에 우린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이제 세상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부디 평안히 잠드시기 바랍니다. 박준혁 배우를 비롯한 남은 모두를 살아생전의 그 사랑으로 영원히 지켜주세요.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