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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밖은 단풍 – 오아시스정글 캠핑장 그리고 필례온천

겨울이 오기 전에 시리즈를 마무리하려고 했는데, 해를 넘겨 봄맞이할 것 같네요.

연말연시 바빴다는 얘기인데,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고이제서야 텐트(캠핑) 얘기를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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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약해 놓은 캠핑장으로 가기 위해 설악산 오색리 주차장에서 한계령으로 출발했습니다.

한계령 휴게소 도착 직전 인제군 현리로 빠지는 도로가 있습니다. 바로 필례로입니다. 이 길을 통해 약6km를 내려가면 예약한 오아시스정글 캠핑장이 나옵니다. 이 지역은 원래 게르마늄 온천장과 약수터(필례온천과 필례약수로 부른다)로 유명한 곳입니다. 온천장에서 캠핑장을 운영하기 시작하면서 온천도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색적인 캠핑장으로도 알려지게 되었죠. ‘필례라는 말이 외래어처럼 이국적인데, 이 곳 지형이 베 짜는 여인의 형상을 닮았다고 해서 ‘필녀(匹女)’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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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령에서 필례온천 가는 길 -  카카오맵 로드뷰)

 

필례로는 저에게 추억이 있습니다. 앞서 1편 끝에 한계령에 대한 단상에서 언급했듯이, 스물아홉 살 때 한계령을 형 내외와 함께 양양에서 인제 방향으로 넘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때가 저녁 무렵이었는데 한계령 휴게소를 지나자마자 차가 막히는 겁니다. 당시 북한 잠수함 무장공비 소탕작전이 한창이었고, 두 명이 살아남아 도주 중이었을 때였죠. 이런 이유로 인제 헌병 초소에서 차량 검문이 있었고, 그것이 엄청난 교통 정체를 초래했습니다.

 

한 시간이 지나도 차가 꼼짝 않고 있었습니다. 퇴로가 없어 다들 하염없이 기다리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때 한계령을 넘어오면서 현리로 가는 도로 표지판(조그만 임시 안내 표지판이었던 것으로 기억함)을 봤던 것이 생각난 겁니다. 그래서 바로 차를 돌려 한계령으로 다시 올라와 이 도로를 탔습니다. 당시 포장된 지 얼마 안 된 신생 도로라 지도에도 없었습니다. 때문에 운전자들이 이 도로를 거의 몰랐을 것이고, 덕분에 우리가 갈 때는 차가 한 대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주변에 인가가 없고 현리까지 가로등 하나 없어 칠흑 같은 어두운 밤길을 긴장하며 지나갔던 기억이 납니다. 더구나 무장공비가 나타날까 봐 더 긴장했던 것 같습니다. 이 와중에, 당시 예비군이었던 저는 형과 함께 목숨 바쳐 형수님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을 했습니다(근데 그 순간 난 아직 장가도 못 가봤다는 생각이 들었던 기억이 난다). 그런데 형수님이 도련님! 걱정 마세요. 공비가 나타나면 내가 때려잡을게요.“라고 말씀하시며 오히려 저를 다독이시는 겁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형과 나는 좀 묘한 기분을 느꼈던 기억이 납니다. 아무튼 이 길을 이번에 두 번째로 아내와 함께 지나가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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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장 안내문)

 

캠핑장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5시가 넘어 날이 어두워졌습니다. 캠핑장에 입장하니 온천욕을 할 수 있는 코인을 두개 주더군요. 그러나 평일에는 이용시간이 오후 6시까지라 내일 아침에 하기로 하고 텐트부터 피칭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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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를 치고 나서 화목난로를 세팅했습니다. 가을이라고 하지만, 밖에서 불멍을 즐기기에는 날이 추웠습니다. 더구나 여기는 강원도 설악산 자락이라 저녁에는 기온이 초겨울 수준으로 급격히 떨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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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 캠핑을 즐기는 데는 화목난로 만한 게 없죠. 따뜻한 실내에서 장작을 하나씩 넣으면서 느끼는 온기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성을 줍니다. 연기도 거의 없는 것도 장점입니다. 하지만 실내에서는 일산화탄소 중독에 유의해야 합니다. 사용 중에 경보기 설치는 물론 환기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안전을 위해서 저희는 잠잘 때 아예 끄고 재정리까지 한 후 침낭을 이용해서 잡니다. 전기장판까지 사용하면 잘 때 훈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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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은 미리 예약한 필례치킨을 먹었습니다. 예약한 시간에 관리실에 가면 사진처럼 소쿠리에 담아 준비해줍니다. 텐트로 갖고 와서 별다른 차림 없이 배달음식 시켜먹듯 편하게 먹으면 됩니다(캠핑장 예약할 때 미리 주문해 놓으면 편하다). 맛도 웬만한 유명 프랜차이즈에 뒤지지 않는 고급스러운 맛이었습니다. 약간 매콤한 맛이 중독성이 있으며 세가지 소스로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습니다. 관리실 옆에 캠핑장에서 운영하는 들락이라는 식당이 있는데 먹지는 않았습니다만 평들이 좋더군요. 여기서 이 치킨도 만드는 것 같습니다. 등산 후 늦은 입실과 텐트 피칭으로 피곤한 상태에서 이렇게 편하게 단백질을 섭취할 수 있다는 것도 매력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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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곤한 몸으로 저녁에 치킨을 잘 먹어서인지 잠을 푹 잤습니다. 새벽에 일어나 텐트 밖으로 나와보니 이렇게 텐트 밖은 단풍입니다. 우리 자리는 A5입니다. 여기는 오토캠핑 존입니다. 이 캠핑장에는 차가 들어가지 못하는 자작나무 숲도 있어 백패킹 같은 미니멀 캠핑을 즐길 수 있는 존도 있습니다. 여름에 와서 즐겨도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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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여행을 위해 새로 구입한 캠핑 장비입니다. 좌측에 코베아 버너(베론 40th Edition)는 일반 부르스타보다 작은 사이즈로 기존 즐겨 사용한 소토의 윈드마스터 버너보다 안정적입니다. 보조테이블도 있어 편리합니다. 이소가스가 아닌 부탄가스용이라 연료조달도 쉽습니다. 우측의 신일 미니 가스난로는 추운 겨울 보조 난로로 사용하기 위해 구입했습니다. 급하게 몸과 손을 녹이기에 좋습니다. 부탄가스 한통으로 약 2시간 정도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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텐트 안으로 들어와서 바깥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어제 우리가 내려온 한계령 쪽 산들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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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은 계란 프라이와 볶음밥을 해먹었습니다. 흑미 햇반에 집에서 갖고 온 더덕무침과 돼지고기 고추장 볶음 소스를 프라이팬에 넣고 볶았습니다. 프라이팬은 국산 백마 제품으로 이번에 개비한 것입니다. 백마 프라이팬은 백패커들에게 호평이 좋은 국산 제품입니다. 적당한 경량에 코팅이 튼실하고 내구성이 아주 좋았습니다. 프라이팬 계의 헬리녹스 수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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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을 먹고 바로 짐을 싸 차에 실었습니다. 온천욕을 일찍 하고 나서 개운한 몸상태로 다음 여행지로 출발키로 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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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핑장 입구 계곡 쪽에 위치한 필례온천입니다. 들어가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라서 아래 제가 쓴 개인적인 단상으로 대신하고 이번편을 마무리합니다.

 

 

필례온천에 대한 단상

 

작년 여름. 왼쪽 눈이 갑자기 안 보이는 증상이 왔다. 눈 가운데서 불꽃놀이 같은 섬광이 보이더니 꺼진 모니터 화면처럼 아무것도 안 보였다. 병원에 가서 진단한 결과, 안타깝게도 시신경 50%가 괴사하였다고 한다. 병명은 망막중심동맥폐쇄였다. 쉽게 말해 망막 시세포에 연결된 동맥 혈관이 혈전(피떡)에 막혀 피 공급을 하지 못해 시신경 세포가 죽었다는 얘기이다. 아스피린을 통해 혈전을 녹였지만, 골든 타임을 놓쳐 시신경을 온전히 살리지 못했다.

 

결국 왼쪽 눈 중심에 도넛 모양의 회색 스티커를 붙여 놓은 것 같은 시야 장애가 왔다. 당황한 와중에 더 황망했던 것은 이것이 완치가 어려운 영구장애라는 의사의 말을 들었을 때였다. 그나마 전문의가 초기에 약제를 잘 처방한 덕에 뚜렷했던 도넛 모양의 음영이 흐려지기는 했다. 그러나 화면을 블러 처리한 것처럼 사물의 형체만 구분할 수 있을 정도에 그쳤다. 그 이후부터 현재까지 더 나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좋아지지도 않았다.

 

담당 교수는 이 정도만 해도 감사한 일이라고 위로를 해줬다. 오른쪽 눈이 아직은 멀쩡하고, 왼쪽 눈도 완전치는 않지만 보조 역할을 해서 업무도 볼 수 있고 운전도 가능했기 때문이다. 또한 만약 혈전이 눈이 아닌 뇌로 갔다면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었기에 오히려 감사해야 할 일이었다

 

하지만, 나는 속으로 낙심했다. 왼쪽 안경 렌즈에 뭔가 묻은 것처럼 시야가 예전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음악을 들을 때 왼쪽 스피커가 찢어져서 그 잡음이 자꾸만 신경 쓰이는 것과 같았다. 무엇보다 아름다운 풍경을 보고 사진을 찍는 맛이 시원치 않아 슬펐다. 걱정만 드릴 것 같아 연로하신 어머니께는 지금까지도 말씀을 못 드렸다.

 

당시 또 하나 나를 괴롭혔던 것은 오른쪽 무릎 통증이었다. 등산 시 뭔가 뒤틀린 듯했는데 이후부터 긴 시간을 걸을 때, 특히 계단을 오르내릴 때 통증이 왔다. 붓지는 않았으나 이물감이 있는 듯했고 완전히 구부릴 수가 없었다. 양방과 한방을 오가며 약제와 침, 도수치료, 추나요법 등 여러 방법을 동원하였으나 통증 치료에 딱히 차도가 없었다. 백패킹은커녕 동네 뒷산도 가기가 부담스러워 이후 등산을 접었었다.

 

그 후로 1년이 지난 현재 눈은 여전히 변화가 없다. 그러나 얼마 전부터 무릎은 거의 90% 이상 돌아왔다. 어느 날 나와 증상이 같은 등산 유튜버가 유명 물리치료사에게 스트레칭을 배우는 영상을 우연히 보았고, 그것을 따라했더니 신기하게도 무릎 통증이 사라졌다. 그 치료사의 말에 따르면, 무릎 앞의 슬개골(원판형의 뼈)을 위아래로 잡아주는 인대가 무리한 운동 또는 노화 등으로 조금씩 틀어진다는 것이다. 이때 인대에 붙어있는 슬개골도 같이 틀어지면서 주변의 다른 인대와 연골 부분에 스크래치를 조금씩 내면서 염증과 통증이 시작된다는 스토리였다. 영상에서 소개한 스트레칭은 그 틀어진 인대를 다시 원래 제자리로 되돌리는 기법이었다. 아무튼 회복 후 등산도 가능하게 되었다. 가끔 무릎이 아파 올 때면, 오래된 기계를 손보듯 그때마다 스트레칭을 해주고 있다.

 

일부 회복이 되었지만, 여전히 몸이 망가져간다는 생각이 앞선다. 완쾌의 소망보다는 현실 적응이 더 익숙해져 가고 있다. 물론 크리스천으로서 예수님이 행하신 기적을 동경하고 기도한다. 그러나 이런 나의 모습이 부질없어 보일 정도는 아니지만, 솔직히 우스울 때도 있다. 한편으로는 이 웃음조차도 사라의 미소가 아닐까 하는 기대도 하면서 말이다.

 

(사라: 구약성경 창세기에 나오는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아내. 평생 불임이었으나 아이를 낳는다는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비웃었다가 결국 나이 90세에 야곱의 아버지가 되는 이삭을 낳는다. 이삭이라는 이름의 의미는 웃음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나는 여기 필례온천 입구에 잠시 서 있었다. 현관 안으로 들어서자 아담한 신발장이 눈에 들어왔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게르마늄 성분이 많다고 하는데, 그 명성에 비해 온천의 규모는 너무도 작았다. 그렇다고 건물이 후지지는 않았다. 나름 깔끔하고 단정했다.

 

캠핑장에 입장하면서 받은 코인을 계산대에 내고 로비에 들어섰는데, 로비라 하기에는 가정집 거실에 가까웠다. 가운데는 안마 의자가 있고...  여기서부터 아내는 여실로 나는 남실로 갈라졌다. 탈의실은 대체로 조명이 어두웠고 옷장 수도 많지 않았다. 어두운 오크 색상의 옷장과 거울 그리고 화장대 모두 평범했다. 천장에는 보온재로 감싼 굵직한 온수 파이프가 지나고 있었다.

 

옷을 벗고 욕실 안으로 들어서자 유황 같은 냄새가 풍겨왔다. 온천수의 광물 성분 때문인지 바닥 타일은 녹물처럼 황갈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좌측에 좌식 포함하여 대여섯 개  정도 샤워부스가 있었다. 정면으로는 노천탕으로 이어지는 유리문이 보였고, 우측 안쪽에 욕탕 두 개가 자리 잡고 있었다. 평일이고 이른 아침이라 사람들은 손가락으로 셀 정도로 적었다.

 

간단하게 샤워를 하고 뜨거운 욕탕에 우선 몸을 담갔다. 천장 가까이 설치된 통유리 창을 통해 아침 햇살이 들어왔다. 그 햇빛에 비친 욕탕의 물색은 탁한 황옥 색이었다. 자세히 보니 부유물이 떠다녔는데 온천수의 좋은 성분이라고 한다. 이를 설명해 주듯 벽면에 원소기호로 표기된 다양한 성분표가 걸려 있었다. 그 옆에는 풍부한 게르마늄 성분의 효능을 자세히 적어 놓았다.

 

햇빛을 받으며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푹 담그자 어제 설악산에서 스며든 한기가 녹는 기분이다. 효능이 좋다는 말에 머리까지 담갔다가 온천수로 눈도 씻어봤다. 눈도 풀리는 느낌이라 혹시나 하고 왼쪽 눈만 떠 보았다. ‘에이. 설마 그러면 그렇지...’ 기적은 없었다. 다시 몸을 눕혀 눈을 감으니 좀 전의 행동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래도 혹시 언젠가는...’ 이런 생각을 하며 다시 사라의 미소를 지어보았다. 

 

체온을 올린 후 노천탕으로 나가 보았다. 바람 한 점 없는 청아한 가을 아침의 날씨다. 노천탕은 직사각형의 구조물로 천장이 없는 개방형이다. 앞쪽은 창틀 없는 큰 통창이 있고 바로 아래 편백나무로 만든 정방형의 욕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좌측 벽은 옛날 목욕탕 타일로 치장했으며, 그 벽 사이를 두고 맞은편에는 똑같은 구조일 것 같은 여자 노천탕이 자리하고 있었다. 우측 벽은 시멘트로 거칠게 발라놓은 장식으로 마감해서, 언뜻 보면 전체적으로 짓다 만 건물처럼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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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례온천 노천탕 사진 - 출처: 오아시스정글 캠핑장 홈페이지)

 

욕탕에는 두세 분의 어르신들이 이미 탕 안에 앉아 있었다. 그런데 욕탕 물 위에 에어캡 패드(일명 뾱뾱이)를 덮어 놓았다. 아마 추운 날씨에 보온을 위해 해 놓은 듯했다. 한편에 앉아 노천탕의 운치를 즐기다가 창가로 다가갔다(말이 창이지 유리 없이 벽면 가로 길이만큼 와이드하게 뚫어 놓았다).

 

창밖을 내다보니 아래는 작은 텃밭이 보이고 뒤쪽으로 계곡물이 흐르고 있었다. 계곡 뒤편에는 한계령 자락에서 내려온 산줄기가 동산처럼 앞을 가려주고 있었고 울창한 숲이 노천의 정취를 자아내고 있었다. 온천에 들어올 때는 1층이었는데 여기는 반 층 정도 더 높은 걸 보면 노천탕 위치의 지면은 계곡 쪽으로 경사진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건너편 여자 노천탕 쪽에서 아주머니들의 목소리가 물먹은 것처럼 웅웅거리며 조금씩 들려왔다. 나이 드신 한 분이 남편 병수발에 푸념을 늘어놓고 있었다. 근데 사이사이에 아내 목소리도 들리는 듯해서 이상하게 집중이 잘 되었다.

 

그사이 노천탕에 있던 어르신들이 안으로 들어갔고 나 홀로 탕에 남았다. 독차지한 욕탕 가운데로 자리를 옮겨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마치 거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벽면 전체를 덮은 와이드 TV를 보듯 그런 자세였다. 창밖에는 TV 화면처럼 앞동산의 숲만 보였고, 수면 위에 덮어놓은 에어캡 패드는 겨울에 눈이 내려 셔벗처럼 쌓인 느낌을 주었다. 그 위로 귀여운 물안개가 몽글몽글 피어나고 있었고... 

 

이 모든 풍경이 정말 숨이 멎을 정도로 고요했다. 그 순간 저기 숲 한가운데 어둑한 곳에서 무언가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정확히 1초마다 하나씩 눈처럼 떨어졌는데 바로 낙엽이었다. 잠시 그 모습을 보면서 멍 때리다가 이런 생각을 했다. ‘인생은 죽어가는 과정이구나.’ 낙엽의 일생처럼 아기 같은 몽우리에서 신록의 소년으로 그리고 한여름 청춘 그 진초록의 무성함을 지나, 서리가 오기 전 중년의 중후한 단풍으로 갈아입다가, 시들어 떨어져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그런 인생. 너와 나 그렇게 죽음을 맞이한다. 단지 시간차가 있을 뿐.  

 

우리 모두는 죽는다. 예수님의 기적 속에 치유받고 살아난 사람들도 결국 모두 죽었다. 혈루병을 앓던 여인, 로마군 장교 백부장의 병든 하인, 열 명의 나병환자들, 어느 노부부의 날 때부터 맹인이었던 아들, 베데스다 연못가의 서른여덞 해 된 병자, 지붕을 뚫고 침상에 매달려 내려온 중풍병자, 귀신들린 정신병자... 이들 모두가 치유받고 새 삶을 얻었으나 결국 역사 속에서 다 죽었다. 무덤에서 죽어 있었던 막달라 마리아의 남동생 나사로도 나흘 만에 다시 살렸지만 그도 죽었다.

 

故 이어령 박사가 어린 시절 대낮에 보리밭 길에서 혼자 굴렁쇠를 굴리며 놀다가 갑자기 눈물을 흘렸다고 했다. 그때 처음 죽음을 느꼈기 때문이다. 이어진 어머니의 죽음은 그를 시대의 지성으로 인도하는 마중물이 되었다. 말년에는 암으로 먼저 세상을 떠난 자식을 간증하면서 영성의 문으로 들어섰고 생명자본에 열성을 쏟았다. 죽음을 통해 오히려 삶과 인생 그리고 생명에 대해 집요하고도 예리하게 분석했고, 마지막까지 기염을 토하고 소천을 받았다.

 

어찌 보면 역사 속에 죽어간 기적의 인물들은 누구보다 죽음을 절박하게 바라보며 절실함으로 생명에 집착한 사람들이었다. 기적 속에서 잠시 새 생명을 맛본 후 결국 죽음을 맞이했지만, 이전에 바라보던 죽음은 아니었을 것 같다. 낙엽이 떨어지는 순간, 하늘과 자기를 지탱해 준 큰 나무를 바라보면서 뿌리가 있는 흙으로 돌아가듯 그런 여정을 맛보았을 것이다. 내게 그런 기적은 없었으나, 그들의 삶과 소망을 여기 설악산 끝자락 자그마한 노천탕에서 느껴 본다.

 

아이와 젊은 아빠가 들어오는 바람에 적막과 평안의 시간은 길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아내보다 빨리 나가서 기다려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비에 나오니 들어올 때 보지 못했던 생수 몇 병이 탁자에 놓여 있었다. 먹는 온천수였다. 하나 사서 마셔보니 쌉싸름한 것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 갈증해소에 그만이었다. 위로받은 날이었다. 화창한 밖으로 나와 다음 여정을 나섰다. 

 

 

孟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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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4'
Dr.Spark
  • 2024.02.13

필례를 많이 지나갔었는데 이 글을 통해 그에 관해 알게 되니 좋군요.^^ 캠핑, 역시 매력있는 아웃도어 활동입니다. 

노천탕도 매우 궁금하군요. 언제 거길 한 번 가봐야겠어요.

이 댓글을

주말에는 사람들이 많을 겁니다. 설악산 등반 후 온천욕 추천드려요. 캠핑하지 않으면 가격이 좀 비싼 편입니다. 럭셔리하지 않으니 너무 기대는 마시고요.^^;

이 댓글을

임시후
  • 2024.02.13

텐트 밖은...시리즈의 사진은 느낌이 늘 좋습니다. 좋은 사진/글 감사합니다.

이 댓글을

항상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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