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입학?
그런게 무슨 꿈이야. 남들 다 하는 걸 가지고....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저에게는 아주 중요하고 소중한 꿈이었습니다.
오랜 방황의 끝에 그 탈출구로 선택한 것이 대학이었기에 당시의 저에겐 모든 희망이 그 곳에 있었습니다.
1984년 여름.
저는 당시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어린 나이였지만 또래들보다 상대적으로 조숙했던 저는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았답니다. 특히 "왜 사는가?"라는 문제는 당시의 제 머릿속을 거의 떠나 본 적이 없었습니다.
이런 고민들에 빠져 있던 저에게 당시의 고등학교 교육이란 모순투성이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찾을 수가 없었고, 오직 공부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하는가?"가 또한 빠져 있었습니다. 물론 선생님들은 "좋은 대학가기 위해서"라는 답을 내어 놓지만 그게 어디 학교 선생님들의 답변입니까? 입시학원 강사의 답변이지. 그래서 고등학교란 "단지 대학을 가기 위한 학원"이라는 느낌밖에는 없었습니다.
점점 학교를 다니기도 싫어졌고 공부도 싫어졌습니다. 수업시간엔 창 밖을 바라보며 엉뚱한 생각이나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반복했습니다. 점점 말이 없어지고 어두운 표정인 학생으로 변해갔습니다. 그러다 담임선생님이 어느 정도 나의 상황을 눈치챈 것은 1학기를 마칠 때쯤 치뤄진 학기말 고사에서 였습니다. 거의 전교 꼴찌를 했거든요. 중간고사에서만 해도 10등안에 드는 상위권학생이었으니 선생님이 놀랄만도 하죠.
몇 차례 선생님과 면담을 하면서 저는 자퇴의사를 밝혔지만, 담임선생님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입장이셨고, 저를 설득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일단 한번 마음먹은 것이 쉽게 변하지는 않았습니다. 결국 그러다 방학을 맞았고, 방학이 끝난 뒤 한달간의 무단결석 끝에 학교를 자퇴할 수 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봐도 당시의 무모함에는 혀를 내두르게 됩니다. 대부분의 모든 사람들처럼 살지 않고 혼자만의 길을 가겠다는 용기는 어디서 나왔을까요? 어쩌면 그것은 용기라기 보다는 '싫은 일은 죽어도 못하겠다'는 오기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의 제 삶은 방황의 연속이었습니다.
따뜻하고 모든 것이 적당히 갖추어진 비닐하우스의 화초에서,
거센 바람과 뜨거운 태양, 그리고 메마름 뿐인 황야에 내동댕이 쳐진 잡초가 되었습니다.
아는 친구들이라고는 다 학교에 가고 혼자 남겨진 저에게 외로움은 가장 큰 고통이었습니다.
그 때부터 산(山)이 유일한 친구가 되어 주었습니다. 북한산 자락의 끝 즈음이 우리동네 뒷동산이었기에 남들이 학교가듯이 저는 혼자 산으로 갔습니다. 그 곳에서 레고 블럭처럼 엉겨붙은 조그만 도시의 집들을 내려다 보며 이런 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집으로 돌아오곤 했습니다.
산은 처음엔 도피처로서 나에게 다가왔지만 점점 그 매력에 빠져들게 하였습니다. 가까운 북한산은 거의 수 백 번은 오르내렸고, 점차 설악산이나 지리산 등과 같은 큰 산들을 찾아다니게 되었습니다. 어린아이의 혼자만의 여행이었기에 고독은 배낭처럼, 혹은 등산화처럼 나의 동반자가 되었습니다. 당시의 방황은 저에게 외로움이라는 고통을 주었지만 그 보답으로 산의 아름다움, 자연의 풍요로움을 알게 해 주었습니다.
그 방황이 거의 이 년이 지나고 삼 년 째에 이를 무렵 저는 지독한 무기력증에 시달려야 했습니다. 삶에 대한 고민은 아무리 해봐도 어떠한 답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어린 제 머릿속에 잡동사니 철학들이 어지럽게 널려지고 그 무엇하나 정리되지 않았습니다. 그 때쯤 저는 제가 우물안의 개구리처럼 어떤 함정속에 빠져 있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벗어나려 애써봐야 좁은 우물안이라는 것을 이 년이라는 긴 방황끝에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쯤 제 고등학교 친구들이 대학을 가기 시작했습니다.
끝없는 방황과 외로움때문에 무기력해진 나에게 대학은 유일한 탈출구로 비춰졌습니다. 우물안에서 유일하게 바라다 보이는 외부의 세계인 하늘처럼...... 그 우물안을 벗어나 맘껏 세상을 누비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넒은 세상을 보기만해도 여한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1987년 봄에 대학입시학원 종합반에 들어가서 오랜만에 다시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87년은 한국 현대사의 큰 격랑의 시기였고, 서울 시내는 온통 매캐한 최루가스로 가득한 날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에겐 그런 것이 무감하게 느껴질 정도로 공부에 집중해야 했습니다. 3년치 고등학교 과정을 단기간에 끝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공부를 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학원에 콕 박혀 있어야 하는 것이 저에겐 가장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항상 배낭을 메고 자유롭게 세상을 돌아다니던 삶에서 꽉 막힌 교실에서의 생활은 숨이 막힐 정도로 답답한 것이 었으니까요.
어쨌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그 해 겨울 제가 원하던 심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과 인간을 알고 싶어 선택한 심리학. 당시 서울 시내 대학 중에 심리학과는 서울대, 연대, 고대, 중앙대에만 있었고, 저는 중앙대 심리학과에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처럼 정해진 길을 열심히 달려온 사람에게 주어진 "정해진 결과"가 아니라, 내 자신의 길을 찾아서 길없는 곳에서 무수한 날들을 헤매이며 상처투성이로 찾아낸 길이었기에 그것은 나에겐 "꿈"이었으며 "만들어낸 결과"였습니다.
어찌보면 대학입학이라는 하나의 결과만 생각하면 저는 참 쉬운 길을 멀고도 어렵게 돌아온 셈입니다. 하지만 저는 그 과정을 통해 또래의 친구들과는 달리 많은 것을 제 경험으로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사람들에겐 누구나 그 사람의 삶을 극적으로 변화시키는 계기들이 있습니다. 80년대 후반에 대학생활을 했던 386세대들에겐 특히나 대학은 단순히 학문을 배우는 장에 그치지 않습니다. 세상을 보는 세계관을, 무엇이 소중한 것인지 알게 하는 가치관을, 평생 함께 삶의 희노애락을 나눌 친구들을 얻었으니까요.
이처럼 대학생활을 통해 너무나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그것을 통해 내 자신이 극적으로 변화하였기에 "대학입학"이라는 꿈은 저에게 있어 가장 소중한 최초의 꿈이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세상을 향해 당당히 홀로서기를 선언했던 열일곱살의 소년을 생각하면 지금 돌이켜보아도 놀라울 따름입니다. 이런 무모한 도전정신이 제 삶을 이끌어온 원동력인가 봅니다. 타임머신이 있어 당시의 저를 만날 수 있다면 어깨 다독이며 "고생했다"라고 위로의 말을 전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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