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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11월 16일 오전 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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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김광규

 

4·19가 나던 해 세밑

우리는 오후 다섯 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불도 없이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되어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 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우커를 하러 갔고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 흘린 곳에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하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세밑은 "한 해가 거의 다 가서 얼마 남지 않은 무렵"을 의미하는 "한 해가 저물어 가는 때"를 의미하는 세모(歲暮)와 거의 같은 말이다. 1960년에 4.19혁명이 일어났으니 이 시를 쓴 김광규(金光圭, 1941년 1월 7일~) 시인의 나이는 약관 스무 살이었다. 당시 대학 신입생인 그가 다니던 동숭동 서울대(독문과) 부근의 혜화동 로터리에서 술을 마신 것으로 그의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가 시작된다.

그리고 그로부터 18년 후, 혁명이 두려운 기성세대가 된 그들이 다시 중년이 되어 같은 자리에 서고, 젊은 시절의 그 패기와 때묻지 않았던 때를 돌이켜 생각하며 큰 부끄러움을 느낀다. 40이 가까운 나이가 된 그들은 "중년기의 건강"을 얘기하며, "깊숙한 늪"으로 대변되는 현실로 돌아온다. 1979년 쓰여져 1980년에 발간 된 시집 [우리를 적시는 마지막 꿈]에 수록된 것이 바로 이 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시인이 39세에 쓴 이 시는 당시 유신체제와 뒤이은 전두환 정권의 신군부 검열에서 인생을 "늪"으로 부정적으로 비유했다는 이유로 판매 금지 되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1995년에 이르러서야 바로 이 시를 제목으로 하는 시집이 출간되고, 표제작으로 이 시가 재수록된다.

갑자기 그의 시가 생각난 이유는 오늘 내가 참석하지 못 한 고교 동기동창들의 모임에서 나온 얘기 때문이다. 오늘 저녁 고속버스터미널역 부근의 한 식당에서 있었던 동창 모임을 가장 그리워하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해외에 살며 같은 하늘 아래 사는 우리들이 정기적으로 모이는 걸 부러워했다. 우리 친구들은 카톡방에서 서로 대화하는데, 모임이 끝난 시간에 그 모임의 현장을 궁금해 한 그 친구가 혹 사진 찍은 게 없냐고 물었다.

그 소리에 내가 좀 찔렸는데 이유는 내가 그 모임의 공식 찍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모임에 갈 때마다 사진을 찍다보니 친구들에게는 그렇게 인식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에 대해 사과하며, 내가 아니라도 사진을 잘 찍어 올리던 친구를 거론하니 한의사인 그가 친구들의 건강 상담을 하느라 바빴고, 변호사인 자기는 그런 사석에서의 상담에 청구서를 보낼 수 있느냐는 다른 친구의 법률 자문에 응하느라 바빠서 못 찍은 것이란다.^^;

유명석이란 친구가 거기 잇달아 "갑성이에게 이것저것 무료로 건강에 대해 상담하니 "나하고 상담하면 비쌀 텐데..."하더군. 그런데 옆에 있던 이봉구 변호사께서 "그런 문제는 자기하고 상담하라"하여 오랜만에 많이 웃었다."고 덧붙였다. 재미있는 일이다.^^

나도 이 대화를 거들었다. "사석에서의 건강 상담 후에 친구에게 청구서를 보내는 것이 법적으로 타당한 일인가에 대한 또다른, 변호사에 대한 상담이 있었구만...ㅋ"

내가 추정하는 이봉구 변호사의 답은: "일반적으로 의사와 환자 사이의 공식적인 진료 관계는 명확한 동의와 함께 시작돼야 한다. 사적인 자리에서 이루어진 대화는 보통 공식적인 의료 상담으로 간주되지 않는다. 따라서 의사가 사석에서 친구와 나눈 대화에 대해 후에 상담료를 청구하는 것은 윤리적으로나 법적으로 문제가 될 수 있다."일 것이라 했다.

어쨌건 이제 나이가 든 우리 친구들이 모이면 대화의 주제로 꼭 끼어드는 게 건강 문제이다. 어쩌면 당연한 일인데, 난 "친구들의 모임과 건강,"이란 주제가 나오면 생각나는 시가 바로 김광규 시인의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이다. 1979년에 쓰여졌고, 앞서 이야기했듯이 이 시는 유신체제에서 수상한 표현물 취급을 받고, 그에 뒤이은 신군부의 검열에 걸린 시이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처연하고도 아름다운 시 제목이 바로 이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이다. 이건 제목만으로도 마음속에 잔잔히 울려 퍼지는 낭만적인 느낌과 서정적인 여운이 있다. 이 말은 마치 오래된 사진첩 속에 숨겨진 흑백 사진 한 장과 같다. 시간이 흐르며 빛이 바래고, 가장자리에는 약간의 주름이 잡혔으며, 표면엔 더이상 털어낼 수 없는 먼지가 박혀있으나, 그 사진을 바라보는 우리의 마음은 여전히 따뜻하다.

희미하다는 것은 선명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것은 우리가 다가갈수록 멀어지는 안개 속의 형상과도 같다. 어쩌면 옛사랑이란 그런 것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기억 속에서는 언제나 완벽하고 아름답고, 갈수록 더 아름답게 채색되지만, 현실 속에서는 손에 잡을 수 없는 실체 없는 그림자일 뿐이다. 그러나 그 희미함이 오히려 더 큰 힘으로 우리를 사로잡는다. 선명하지 않기에 우리는 그 빈곳을 스스로 채우며, 더욱 아름다운 모습으로 그리워한다.

'그림자'는 어쩌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일지도 모른다. 그림자는 빛이 있을 때만 존재한다. 사랑이란 것이 꼭 빛처럼 따스하거나 선명하지 않더라도, 그로 인해 생겨난 그림자는 우리의 존재를 오히려 더 풍요롭게 한다. 우리가 사랑의 그림자를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과거에 그 사랑이 얼마나 강렬하게 존재했었는지를 보여준다.

이 제목을 곱씹다 보면, '옛사랑'이라는 단어는 더 이상 한 사람만을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은 우리가 잃어버린 시간, 지나가버린 청춘, 그리고 순수했던 열정일 수도 있다. 삶의 순간순간에서 사랑했던 것들, 그리워했던 모든 것의 집합체로서 '옛사랑'은 존재한다.

그렇기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단순히 과거의 낭만을 떠올리는 구절이 아니라, 우리가 여전히 품고 있는 그리움,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고백이자 그것을 애틋하게 안고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에 대한 은유이다. 희미해질수록 더욱 진하게 우리를 감싸는 기억의 잔상, 그것이 바로 '옛사랑의 그림자' 아닐까.

탤런트 양미경(1961년생)이 출연한 MBC 드라마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1987/10/25 방영, 베스트셀러 극장)도 있었다. 하재영, 양미경, 오미연 등이 출연한 이 드라마에서 당시 데뷔 4년차, 27세의 양미경은 따뜻하면서도 섬세한 연기를 선보이며 많은 시청자들의 공감을 얻어 비로소 주연급으로 발돋움했다. 드라마의 제목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는 과거의 사랑과 인연을 되짚어보는 느낌을 담고 있어서 당시에도 큰 반향을 일으켰지만, 지금까지도 그 여운을 기억하는 이들이 있다. 내가 그중 하나이다.^^

친구들과 우린 오래 살고 있다. 젊은 시절의 김광규 시인이 불어온 바람의 소리에 자문했듯이 "부끄럽지 않은가?"를 되뇌이며 살고 있다. 내 고교 동기동창 친구들, 앞으로도 오래 건강하길 빈다.

 

양1-김광규 1시인.jpg
- 김광규 시인(1941~)

 

-----

 

그림자로 남은 옛사랑

 

박순백

 

희미한 기억들이 색 바래며

어느새인가 사라져가는 그대,

우리 그렇게 오래된 이야기를

되새기며 차가운 밤을 걸었다.

거기서 마음은 여전히 흔들려.

 

동트는 새벽 오기 오래 전에

거리에 울려 퍼진 목소리들,

가슴에 남은 모든 흔적들은

과연 무슨 의미를 지녔는지,

답을 찾을 수 없었던 그날들.

 

우리가 부른 많은 노래들을

정녕 아무도 듣지 않았을까?

그 소리들이 하늘로 날아가

별똥별처럼 떨어지듯 사라져

기억 속에 흩어졌을 뿐인가.

 

몇 번이나 돌아본 그 길에서,

변해버린 풍경에 고개 떨군다.

이제 우리는 다른 모습이지만

여전히 변치 않은 늪에 살며,

어디선가 울리는 소리 듣는다.

 

우리들은 낮아진 목소리로

건강과 세상을 이야기한다.

잃은 순수한 날들이 그리워

앞으로 나아가고 싶었기에,

그리움은 끝없이 이어진다.

 

부끄럽지 않은가 물어왔던

혜화동의 바람이 다시 불고,

가을의 찬바람에 스치우며,

넌 이제 부끄럽지 않은가?

넌 진정 부끄럽지 않은가?

 

양3-미경.jpg
- 리즈 시절의 양미경, 27세에 시 제목과 같은 MBC 드라마에 출연했고, 나중(2003)에 드라마 대장금에 한상궁 역으로 나와 인상적인 연기를 펼쳤다.

 

-----

 

Old Love Left as a Faded Shadow

 

By Dr. Spark

 

Faded memories lose their hue,

And soon, you vanish from my view,

We walked through nights so cold, so deep,

Recalling tales that time would keep.

And in my heart, a stir, anew.

 

Before the dawn could break the night,

Voices echoed in the street’s light,

The traces left upon our chest,

What meaning did they all possess?

That day’s answers stayed out of sight.

 

The songs we sang, so loud, so true,

Did anyone hear them? Did you?

They soared above, they reached the sky,

Like shooting stars, they passed us by,

And in our minds, they scattered too.

 

The road I walked, so oft before,

Changed landscapes made my heart implore.

Now different forms, we still endure,

In stubborn swamps, we still secure,

While distant sounds begin to roar.

 

Our voices low, we speak of health,

Of life's concerns, and fleeting wealth.

We mourn the days of purity,

Yet long to move toward destiny,

For in our hearts, there lies the stealth.

 

Was it not shame that we once asked?

The winds of Hyehwa blow, unmasked,

They whisper through the autumn’s chill,

And question still, with biting will,

"Are you not ashamed? Are you unmask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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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긴 놈이 이긴다."
별 재주 없는 나는 남들 그만 둘 때까지 계속해야 했다.
아니면 남들과의 경쟁을 피해 남들이 하기 전에 먼저 해야 했다.
그게 내가 살아온 방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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