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도 양평 문호리의 "잔아(문학)박물관(殘兒文學博物館).
한 시낭송회를 보며 받은 충격: “시(詩)는 죽었다!”
박순백
같은 취미 활동을 하며 만난 사회 후배 중에 김재곤 선생이 있다. 이젠 사명이 바뀐 전 ㈜대림산업에 근무하던 중에 현 대림문화재단의 "대림미술관"을 사진 전문 미술관으로 기획, 창립하는 데 일등공신이었던, 사진병 출신의 스키어이다. 글을 읽고 쓰기를 좋아하는 문화인이다. 김 선생이 2024년 9월 28일(토), 양평 문호리의 잔아(문학)박물관 뜰에서 열린 '유자효 시인과 시낭송회-시(詩)와 놀다' 행사에 참여했다. 잔아박물관은 소설가이자 시인인 잔아(殘兒) 김용만 선생(1940년생)이 2010년에 경기도의 문화촌인 문호리에 설립했다. 이날의 주인공 유자효 시인(전 언론인)은 1947년생으로 현재 77세이다. 그런데 김재곤 선생은 행사장에서 60세 중반의 자신이 참석자들 중 꽤 젊은 축에 속한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한다.
- 앞줄 왼편에 중절모를 쓴 분이 잔아 김용만 선생이고, 그 옆의 중절모를 쓰고 황금색 넥타이를 맨 분이 유자효 시인이다.
김 선생이 보내온 여러 장의 행사 사진을 본 나는 '시는 죽었다'는 문학인들의 한탄을 떠올렸다. 그 요체는 이제 젊은이들은 시를 읽지 않고, 시집을 사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시에 젊은 피가 수혈되지 않고 있으며,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노년층으로 한정되어 버린 것이다. 시는 이제 노년들, ”그들만의 리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이들 노년의 문학청년들(?)이 사라지면 시 또한 그들과 함께 사라질 것이라는 우려를 할 수밖에 없다. 김 선생은 이미 현장에서 나와 비슷한 감정을 느꼈으며, 시낭송장의 분위기가 자신을 멘탈 붕괴에까지 이르게 했다고 고백했다. 그는 돌아오는 길에 다시는 이런 행사에 참여하고 싶지 않다고까지 생각하며 그 밤에 잠을 못 이룰 듯하다고 했다.
시적 영역으로 진입한 밥 딜런(Bob Dylan)의 노래 가사와 노벨 문학상
시는 노래 가사의 형태로만 남을 것인가? 노벨 문학상 선정위원회를 겸하고 있는 스웨덴 한림원(Swedish Academy)이 2016년 세계적인 가수 밥 딜런에게 노벨 문학상을 주기로 결정했던 것은 먼 미래를 내다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림원이 밥 딜런에게 문학상을 준다고 발표했을 때 그건 문학에 목숨을 바치듯 살아온 전 세계 문학인들을 모독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사람들이 많았다. 하지만 시가 가진 사회적인 역할이나 이의 정체성이 메타포(隱喩)에서 비롯한다는 걸 고려할 때 밥 딜런의 노래 가사 역시 시와 다르지 않다. 그의 노래가 가진 의미는 세상의 어떤 문학보다도 메시지로서의 힘이 강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딜런은 "미국 노래의 전통 안에서 새로운 시적(詩的) 표현을 창조했다"는 평가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이 수상에 대한 논란의 소지가 많았음도 부정할 수 없다.
특히 문학과 대중음악의 경계가 문제 되었다. 노벨 문학상은 일반적으로 소설가나 시인, 극작가 등 글을 통한 문학적 창작자들에게 주어져 왔는데, 노래를 통한 시적 표현으로 활동한 뮤지션은 전통적인 문학가들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노래 가사와 시를 포함한 순수 문학의 차이가 지적되었다. 한 발 양보해서 딜런의 노래가 문학적 가치를 가졌더라도 그에 대한 문학상 수여는 문학의 경계를 흐린다는 게 문제였다. 또한 대중성과 예술성에 대한 지적도 많았다. 딜런이 대중 음악계에서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 것은 인정하지만 그의 수상이 대중 예술과 순수 예술의 경계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인물이라는 의견이 있는 반면, 다른 쪽에서는 문학상이 대중음악가에게 수여되는 것이 문학적 권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본 것이다.
하지만 딜런의 수상에 찬성하는 이들은 그의 노래 가사가 시적인 깊이와 문학적 가치를 함께 지니고 있다고 주장했다. 딜런은 1960년대부터 시대적 사회 문제와 인간의 내면을 깊이 파고드는 가사로 많은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었고, 그의 가사들은 고전 문학 작품들과 견줄 만하다는 평가도 있었다. 또한, 이 수상이 문학의 정의를 확장하고, 문학의 다양한 형태를 인정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도 했다. 이 사실이 중요하다. 문학의 정의를 확장하면 될 일이다. 전통을 고수하려다보면 시가 죽을 수 있고, 문학이 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중음악과 순수문학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가능성을 스웨덴 한림원이 제시했다는 건 전통과 권위에 집착할 것 같은 기관에서 대단히 전향적인 관점을 보여줬다는 것이기에 큰 의미가 있다.
다시 한 번 “왜 시가 죽어 가는가?”
21세기에 들어서서 시가 "죽었다"는 말이 여기저기서 흔하게 들린다. 특히 젊은 세대가 시를 더 이상 읽지 않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 경향이 강한데, 이는 시대가 발전, 변화하면서 디지털 미디어와 소셜 미디어(SNS)의 등장으로 짧고 즉각적인 정보 소비가 중심이 되었고, 긴 집중력을 요구하는 전통적 시는 이런 경향에 반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시는 오랜 시간 동안 낭만적이고 감정적인 표현의 상징이었다. 하지만 이를 이어나가야할 젊은 세대는 현실적인 문제 해결에 더 큰 관심이 있다. 그러니 시처럼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문학 형태는 그들에게 현실과는 거리가 먼 이야기일 뿐이다. 이렇듯 시는 음미(吟味)하고 사유(思惟)해야 하는 문학 형태지만, 현대인은 빠른 리듬과 즉각적인 만족을 추구하는 경향이 크다. 이걸 부채질하는 게 교육과정의 변화인데, 각 급 학교에서는 지속적으로 문학 교육을 축소하는 정책을 펴왔다. 특히 시는 독해와 분석이 필요한 문학 형태라서 그 중요성이 점차 줄어들고 실용적인 글쓰기와 정보 처리 능력 등이 교육의 중심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시가 현실적이지 않고, 사회생활에 큰 도움이 안 된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학생들 사이에서 시에 대한 관심이 감소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고객(?)이 거부하는 교육을 계속하면 교육이 죽을 수 있으니 시에 반하는 교육 정책이 수립될 수밖에 없다.
시가 다시 전성시대를 회복할 수 있을까? 전과 동일한 전통을 이어가려는 시도가 계속된다면 그 가능성은 "전혀" 없다. 전통적인 시는 정체하고 있는데, 사회와 문화의 다른 영역에서는 빠른 발전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 상대적으로 시문학은 빠르게 후진(後進)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시는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 그 희미한 끈일 지라도 그걸 놓지 않아야 한다. 잔아박물관은 현재 과거와 연결되어 있다. 사라져 가는 문학의 황금시대를 추억하는 마지막 보루(堡壘)로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의 역할은 시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변화하고 있을 뿐이라는 걸 인식하고 전과 다른 대처를 하는 데 있다. 과거를 지키고자 뒤로 물러나는 게 아니라 미래를 향해 전향적인 시각으로 변화를 모색해야하는 것이다. 시 혹은 문학의 전성시대를 회복하는 것은 어렵지만, 가능성 자체를 부정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고, 잔아박물관은 다행히 그럴 수 있는 권위와 힘을 지니고 있다. 그러려면 어떤 변화가 필요할까?
어떤 미래를 선택할 것인가?
시를 살리기 위해서는 시대의 총아로 나타난 새로운 미디어들을 잘 활용해야 한다. 소셜 미디어(SNS)의 다양한 플랫폼을 통해 나타나고 있는 짧고 간결한 시 형태를 수용해 가면서 이를 대중화하는 일에 나서야 한다. 이미 페이스북(Facebook)이나 인스타그램(Instagram)과 같은 소셜 미디어에서는 주로 짧은 시나 감정을 반영하는 짧은 글귀가 유행하고 있다. 트위터(현재의 “X")에서는 처음부터 그런 짧은 글귀를 쓰도록 강요되기도 했다. 문학인들, 특히 시인들은 이를 시가 자생적으로 디지털 환경에 적응하면서, 젊은 세대가 선호하는 형식으로 변형하는 과정임을 인정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시를 대중문화와 결합시키는 과감한 작업이 필요하다. 영화나 드라마는 당연한 듯 음악과 결합하고 있으며, 이 멜로디에 따라 붙는 가사의 시적 표현은 매우 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영화나 드라마 자체보다 거기 곁들여진 음악이 더 큰 의미를 주는 경우가 많으며, 심한 경우엔 음악만 기억되는 경우도 많아졌다. 이를 통해 대중들은 시적 표현의 아름다움을 자연스럽게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 시가 일상 속에서 다시 자리 잡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고 하겠다. 현대 생활이 주는 스트레스의 증가로 사람들은 내면의 성찰을 필요로 한다. 시는 인간의 깊은 감정과 사유를 표현하는 도구이기에 이러한 시대적 필요성에 맞춰 대중에게 위안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고, 그게 시의 르네상스를 이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 것이다.
실질적인 방안에 더 집중해 보자!
결국 시는 변해야하는데, 그렇다면 시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이의 전통적인 역할과 기능 때문에 완전히 대체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여러 현대적 형식들이 시의 역할을 일정 부분 이어받고 있다는 것으로부터 위안을 느낄 수 있다. 시가 사라지고, 죽어가는 게 아니라 이것이 다른 현대적 형식에 녹아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게 위에서 말한 것처럼 소셜 미디어에서 가능성을 보이고, 팟캐스트(podcast)와 같은 라디오를 닮은 듣기 매체나 유튜브(YouTube)와 같은 영상 콘텐츠에서도 또 다른 가능성과 함께 발견된다. 이를 통해 감정을 전할 수 있고, 스토리텔링이나 심리적 치유 콘텐츠들을 통해 전통 시의 사유적인 역할을 대체하는 게 가능하기 때문이다. 팟캐스트나 유튜브 오디오를 통한 내레이션(narration)은 시 낭송의 현대적 버전인 것이다. 이미 그런 일들이 적으나마 행해지고 있는 건 다행인데, 그게 사회의 주류를 이루고 있지는 못 하다.
포에트리 스램(Poetry Slam)과 힙합(hiphop)이 또 다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포에트리 슬램은 자신이 쓴 자유시를 역동적으로 읽어 내려가는 낭독 대회로서 시 낭송의 현대적 버전이라 할 수 있으며, 힙합의 가사들은 젊은 층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 이들은 시적인 요소를 포함하며, 현대 사회와 문화를 반영하는 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전통적인 시의 역할과 다르지 않다. 과연 이를 기존 관념을 지닌 시인들이 용인할런가의 여부는 또 다른 얘기이다. "에이, 철 없는 애들이 뭘 안다고...“라고 말하는 노인들도 그들이 젊은 시절에 수많은 노친네들로부터 같은 소릴 들었음을 기억해야한다. 청년은 미래이고, 그들이 우리의 삶을 대신 연장해 주고, 우리가 이룩한 문화를 이어가고, 발전시키는 주역들이다. 이제 그들에게 바톤을 넘길 때가 온 것이고, 노년의 문학인들은 보다 관대해 져야한다.
다시 생각해 보는 ‘노래 가사가 시를 대체할 수 있는가?’
그렇다면 노래 가사가 시를 대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가 필요하다. 노래 가사와 시는 오랜 기간 서로 연결되어 왔다. 어려운 시가 노래와 연결됨으로써 쉽게 대중에게 전달되었다는 사실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시를 지어놓고 그 제목에 노래를 의미하는 가(歌)를 붙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시가 노래였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밥 딜런에게 노벨 문학상이 수여된 사례는 이러한 논의에 기름을 부었던 바, 노래 가사가 시적인 표현을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둘 사이에는 형식과 내용, 감정 전달의 방식의 차이점이 존재한다. 시는 형식적 제약에서 비교적 자유롭고, 보다 깊이 있는 철학적 사유나 감정을 탐구할 수 있다. 반면에 노래 가사는 주로 멜로디와 리듬에 맞춰져있으며, 그 때문에, 감정 표현이 더 즉각적이고 직설적이다. 이는 오히려 노래 가사가 시보다 전달할 수 있는 주제와 표현에 있어 제한적일 수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노래는 음악과 함께 감정을 전달하기 때문에, 음악의 힘이 강한 경우 가사가 시의 역할을 대신하기 어려울 수 있다. 시는 텍스트 자체로만 독자에게 감정을 전달하는 데 비해 노래 가사는 멜로디와 함께 감정을 전달하는 종합적인 예술이다. 하지만 시가 죽었다는 얘기가 나오는 마당에서는 맹렬히 살아 숨 쉬는 노래가 가진 차이점을 긍정적, 전향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시가 살아갈 길이다. 왜냐하면 노래 가사를 시로 대체할 수 없다고 단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특히 현대 대중음악의 일부 가사들은 시와 같은, 혹은 그걸 뛰어넘는 깊은 감정을 담아내기도 하며, 시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하고 있다. 이 점에서 노래 가사를 시로 평가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가사의 문학적 깊이나 형식적 완성도를 따져보는 것이 중요하다. 요컨대, 노래의 시적 가치를 인정할 필요성의 대두했다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잔아박물관의 역할이 있다면?
결론적으로, 시가 죽어가는 이유는 시대적 변화에 따른 것이므로 그 종말을 피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가진 시의 기능과 역할이 완전히 소멸될 가능성 또한 낮다고 할 수 있다. 다행히 시는 그 자체로 변화하고 있으며, 대중의 관심을 다시 끌기 위해 디지털 환경과 결합하거나, 노래 가사와 같은 대중적 표현으로 변형될 수 있고, 일부나마 그런 작업들이 행해지고 있다. 노래 가사를 시로 대체하는 것은 위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가능하지만, 둘 사이의 미묘한 차이를 인지하는 선에서 노래 가사의 새로운 역할에 주목해야 한다.
잔아박물관과 같이 시의 본령을 지키려는 수구파(守舊派)가 이 새로운 변화의 추이를 인정하고, 이걸 인정하면 새로운 힘을 얻은 새 시대의 시 세계가 열리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만약 지자체 등의 협력, 혹은 시(詩) 관련 단체들과의 협력을 통해 시를 중심한 가칭(假稱) "잔아문학상"이 탄생하고, 이것이 시의 새로운 영역으로 편입하고 있는 노래 가사, 포에트리 스램, 그리고 힙합 같은 분야를 수용한다면 어떨까? 이것이 시가 죽지 않는 길이고, 영속성을 가지는 길이 아닐까??? 보다 시에 가까운 노래를 찾고, 그걸 노래하는 음유시인들을 불러모아 음악회를 개최하고, 거기 모른 척하고 시낭송을 곁들이는 시도를 한다면 어떨까? 한국의 밥 딜런들에게 잔아(시)문학상이 주어지는 일이 생기면 어떤 변화가 일어날까? 이제는 고인이 된 음유시인 조동진과 김광석을 특별상을 주어 기리고 찬양하며, 아직 건재한 음유시인 정태춘에게 "잔아(시)문학상"이 수여되는 걸 보고 싶다.
잔아박물관에서의 시낭송회의 분위기가 나로 하여금 이 모든 생각에 이르게 했다. 시는 사라지면 안 된다. 그러니 시도, 시인들도, 더 크게는 문학인들 모두가 변모하는 길이 함께 사는 길이다. 그런 일에 있어서 잔아박물관(殘兒文學博物館)이 "마지막 아이(殘兒)"가 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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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함께 놀고자하니
박순백
잔아박물관의 넓은 뜰에 모인 노년의 시인들과
로맨티시스트의 상징 중절모를 쓴 이날의 시인.
중절모 시인을 중심으로 낭송되는 시는 그윽하고
가을 나뭇잎은 시간 위에 내려앉아 추억을 부르네.
낭송시는 지난 날을 노래하고, 세월의 무게를 담되
현실의 아픔을 외면하니 젊은이들 마음에서 멀다.
변해야 살 시는 여전하고 과거와 회상을 반복하니
미래의 시인들이 이런 자리를 채울 날은 언제일까?
늙어 아름다울 수 있지만 시인의 눈빛이 과거에 닿아
세월만 잔잔히 흐르고 젊음과 현실은 그 자리를 뜬다.
넓은 뜰에 부는 가을바람과 함께 이어지는 낭송회,
시인의 펜끝에 다른 바람이 불어오길 기대케 한다.
시조차 영원치 않으니 변모한 시의 영역을 인정할 때
젊은이들로 가득한 자리엔 새로운 시, 노래가 흐르리.
To Play with Poetry
By Dr. Spark
In Janna’s vast courtyard, old poets unite,
With hats of romanticist, their symbols in sight.
The poet in focus, with his timeless grace,
Reads verses of memory, in the autumn’s embrace.
Their lines sing of past days, the weight of the years,
But they turn from the present, ignore modern fears.
Poems must change, yet they circle the same,
When will new poets rise and reclaim the flame?
Aging can be lovely, but when eyes gaze behind,
The present and youth both slip out of mind.
In the breeze of the courtyard, their recitations flow,
Yet hope for a fresh wind is starting to grow.
For even poetry, too, must adapt and change,
When youth fills the space, new songs will arran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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