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년전, 엄마가 딸에게 쓴 편지
요즘 오랫동안 집안에 있던, 전혀 쓰지 않고 공간만 차지하던 물건들을 정리하고 있다. "지난 3년 이내에 한 번도 쓰지 않은 물건은 앞으로도 쓸 일이 없을 테니 버리세요!"란 말을 한 아들녀석의 뜻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결국 방 세 개와 베란다를 차지하고 있던 물건들을 살펴보고 버릴 걸 선택하는데 대개가 다 버릴 것이었다. 아까워도 쓰지 않을 물건이라 버리는 게 답이었다. 지난 3주에 걸쳐서 정말 엄청나게 많은 물건들을 버렸다. 오늘 자로 방 세 개가 새로(?) 생겼다.
그러다가 발견한, 버릴 수 없는 많은 것들도 찾았다. 값비싸고 귀한 물건이라도 과감히 버렸는데 오히려 버릴 수 없는 것들은 정신적인 유산이었다. 게다가 내가 전에 보지 못 했던 이런 편지를 예전 딸아이가 쓰던 방 깊숙한 곳, 그 애가 자신에게 귀중한 것으로 여겨 보관해 놓은 철제 박스 속에서 찾았다.
집사람이 1996년 8월 31일 토요일에 쓴 글이 그것이다. 내가 오래 전에 프린트샵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A4용지에 레이저 프린터로 인쇄해 놓은 편지지를 이용해서 집사람이 쓴 딸에게 주는 편지였다. 1996년이면 딸아이가 중학교 3학년 때였을 듯하다.
위의 서신인데 이걸 스마트폰으로 찍고 구글 렌즈(Google Lens) 기능을 이용해서 OCR처럼 아래와 같이 읽어들였다.
아래가 그 결과물이다. 거기서 다섯 번째 단락의 소원이 이뤄지지 못 한 것을 생각하면서 내 맘이 찡해졌다. 그리고 살짝 아파왔다. 아직도... 아직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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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사람은,
아직도 기다릴 것이 남아 있는 사람은
행복하다.
TO: 박지연에게
지연아! 편지지가 너무 예뻐서 갑자기 네게 글을 쓰고 싶어졌다.
요즘 힘 많이 들지? 그래도 항상 웃는 얼굴로 생활하는 네가 엄마는 참 대견스럽구나. "엄마! 오성식 영어 듣기 평가하자."라고말하는 널 보면 엄마는 괜히 신이 난다. 한 가지 두 가지 점점 많은 일에 네가 적극적이 되어간다는 일이 그렇게 엄마를 기운나게만들 수가 없구나. 모든 부모에게 있어서 가장 슬프고 불행한 일이 자식이 잘못되거나 원하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불행해 하거나자포자기 하거나 하는 일이지.
네가 여러 면에서 열성을 보이고 적극성을 띤다는 것은 그만큼 삶을 긍정적으로 보고 삶이란 도전해 볼 만한 가치를 가진다고 믿는 것이 아니겠니? 그러니 엄마가 신이날 수밖에.
지연아! 앞으로 시간이 갈수록 점점 힘들어 질 것이고 갈등도 많아지리라 생각되지만 네가 슬기롭게 극복해 나가길 바란다. 모든것은 마음 먹기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단다. 부정적인 시각을 버리고 모든 것을 긍정적인 시각에서 바라본다면 세상은 훨씬 더 아름답고 살 만한 충분한 가치를 가지는 것이지.
엄마는 가끔 꿈꿔 본다. 너와 내가 앞뒷집이나 마주 바라 보이는 집에 살면서 아침, 저녁으로 들락거리면서 재미있게 사는 것을말야. 그건 아마도 내가 내 엄마와 같이 하지 못한 시간이 너무나 많고 마음 아파서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은 욕심에서 네게 옆집에서 살자고 얘기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엄마는 항상 너의 든든한 후원자이고, 네가 슬프거나 기쁠 때 늘 함께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는 그런 친구 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
너는 알고 있니? 이 세상에서 엄마가 가장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누구인가를? 그건 물론 아빠, 지연이, 현근이지. 그러나 그중에서도 첫 애에게 가지는 애틋한 정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것이지. 너는 그런 귀중하고 소중한 아이야. 엄마가 그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힘내라! 네가 좋아하는 솔리드의 노래도 크게 틀어놓고 스트레스도 좀 풀고 큰 소리로 노래도 불러보고.... 언제 시간을 만들어서엄마와 둘이서 영화구경도 좀 가자. Good idea?
엄마가 제일 좋아하는 것 두 가지! 뭘까? 그건 지연이가 우유랑 빵이랑 과일이랑 음식들을 잘 먹는 것 또 하나는 지연이가 즐거워하고 행복해 하는 것.
1996. 8. 31. 토,
FROM: 엄마가
- Dr. Kosa와 지연이가 용평리조트 실버코스의 실버스낵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었다. 지연이가 고등학생이던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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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r. Spark: 딸과 지근거리에서 살고 싶었던 엄마 고성애는 그 단락의 글에서 이유를 밝혔다. "그건 아마도 내가 내 엄마와 같이 하지 못한 시간이 너무나 많고 마음 아파서 너를 내 곁에 두고 싶은 욕심"이라고...
그건 집사람이 대학시절에 처가가 이민을 갔고, 우리 아이들이 성인이 될 때까지 집사람은 친정과 떨어져 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 장모님과 처남은 역이민으로 돌아오셨다.(안타깝게도 장인은 이민 가계시던 중에 세상을 떠나셨다.) 그리고 장모님은 만년을 딸과 함께 지내시다 몇 년 전에 떠나가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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