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문 URL] https://www.routefinder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89&fbclid=IwY2xjawEUSaxleHRuA2FlbQIxMAABHTI_Op_e0BsGuf1T6EQAd97hWFyLqXjmvADcfyZ3Yby2Ri7Yu8V_ev76yg_aem_ltXlQ4uG4a6J7AcGpcqf5Q
[특별기고] "정윤희와 설악산...“에서 좀 더 나아간 얘기들
김진덕 기자 (dar_shan@routefinders.co.kr)
편집자 주) 필자 박순백(수필가, 언론학박사 https://namu.wiki/w/%EB%B0%95%EC%88%9C%EB%B0%B1%20%EC%B9%BC%EB%9F%BC )은 1968년 경희고 산악부에 입회해서 경희대 산악부(71학번)에 이르기까지 20대 전후 치열하게 등반활동을 펼쳤다. 당시 가스통 레뷔파 등의 책을 통해 토탈 산악운동을 위해서는 스키가 필수라는 것을 직감하고 스키를 배워 돌아오겠다며 오디세이를 떠났다. 이후 주지하다시피 "박순백 칼럼(Dr, Sprark's Colums)"을 통해 스키를 중심으로 한 빛나는 '성채'를 구축했으나, 산악계로 귀환하지는 못했다. 떠나 있으면 기억과 의미가 마치 핀으로 고정되듯 더 오롯해지는 법. 이번 특별기고를 계기로 청춘을 홀렸던 산과 산벗들의 추억 그리고 산에 관한 에스프리 등을 한번씩 풀어낼 예정이다.
오래 떠났던 고향마을을 기웃거리는 중이다. 한 때 정들었던 곳이고, 꼭 돌아오리라는 기약으로 떠났으나 외지에서 이방인으로 떠도는 가운데 젊은 시절이 다 지나갔다.
주변인의 시선으로 탐색한 "루트파인더스"는 산과 등산에 관한 정통성을 지킨 글들로 가득하여 잠시 낯설기도 했다. 하지만 몇 개의 기사들은 산과 등산의 레거시(legacy)에서 살짝 벗어나 비교적 가벼운 마음으로 읽을 수 있었다. 당연히 그런 글 역시 산 주변에 머물러 있기는 했다.
그 중 두 가지가 요들에 관한 기사와 정윤희와 설악산에 관한 기사였다. 그래서 고향마을 주민들과의 대화를 위해 "아름다운 베르네 산골"에 관한 글을 썼다.(여기를 http://www.routefinders.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77 )
그리고 이 글이 두 번째의 글이며, 1970년대를 주름잡았던 배우 정윤희가 설악산을 배경으로 찍은 영화에 관한 것이다. 이 역시 필자의 첫 번째 글처럼 원 기사에서 제기한 의문을 푸는 방식으로 풀어갈 것이다.

일단 이 글을 읽고자하는 분들은 우선 "[김진덕의 등산재구성] 정윤희와 설악산... 이곳이 어디인지 모르시나요."( https://www.fntoday.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3849 )란 기사를 먼저 읽으셔야 한다. 아니면 이 글은 "전혀 뜬금없는 글"로 여겨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글의 전체적인 맥락은 그 기사에 연결되어 있고, 거기서 제기된 의문이나 보충되어야할 내용들이 이 글을 통해 채워질 것이다.
여기서 다뤄질 모든 정보들은 한 때 고향인 산을 떠나기 전의 열정적 산악인이었던 필자의 경험과 정윤희의 설악산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를 촬영한 내설악을 생활무대로 한 현지인의 경험에서 우러난 것이다. 그 현지인의 이름은 국민가요가 된 양희은의 노래 "한계령"의 처절한 가사를 원작 시로 쓴 시인 정덕수이다.
사건의 발단은 한 장의 사진으로부터......
한 장의 사진이 상기한 기사의 빌미가 되었다. 설악산을 배경으로 정윤희와 손을 잡은 신성일이 한 아이를 목말을 태우고 있는 사진이다. 기사에서 그걸 "꿈같은 사진 한 장"이라 표현한 것으로 보아 기사를 쓴 분의 진심이 느껴진다. 그건 설악산에 대한 대부분의 진심과 정윤희란 배우에 대한 작은 흑심(?)이라고 할 것이다.

하긴 최근에 케이블TV인 채널A가 한 방송 프로그램에서 정윤희를 가리켜 "단군 이래 최고의 미인"이란 찬사를 보냈다. 미모를 평가하는 기준이 사람마다 다르니 의견이 분분할 수 있지만, 필자 역시 "저는 마릴린 몬로보다 정윤희가 더 예쁘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한 기자의 평소 의견에 동의한다. 그가 사랑하는 두 가지, 설악과 정윤희가 함께 한 사진이니 그게 꿈같은 사진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정윤희에 꽂힌 필이 그녀의 눈길을 받았을 배경의 설악에 이르자 그는 그곳이 설악산 어디인가를 궁금해 하고 그걸 공개적으로 묻는다. 이 사진이 신성일, 정윤희, 김자옥이 주연한 1979년작 "가을비 우산 속에"란 영화의 한 장면이라는 걸 알고 시작한 일이다.

그러나 수십 년이 지난 시점에서는 그 사진 한 장과 관련된 정보에 대해 알 길이 없다. 그래서 집단지성의 힘을 빌리고자 한 것이다. 사진에 대한 흥미는 기자를 그들의 배경에 있는 녹슨 양철지붕 집까지 확장시킨다. 그게 화전민의 집일 거라는 추측과 함께 집 뒤의 높은 나무에 하얀 꽂이 만발한 걸 보며 그건 배꽃일 거라 생각한다.
동요 고향의 봄에서 "나의 살던 고향"이라 부르던 마음 속 고향의 원형과 같은 그곳을 그리워하기 시작한다. 1979년의 풍경이니 이젠 그 흔적이나 있으려나하는 생각으로 기자가 허무함까지 느끼는 지경에 이른 걸 보니 필자의 마음까지 아려온다. 이미 깊은 사랑에 빠졌고, 그리움이 넘치는 상황이니 누구라도 그럴 법하다.
한국산서회의 집단지성을 통해 많은 답이 나왔다. 그 답들은 배경의 산에 국한된 것이나 질문에 대한 답이 일부나마 나온 걸 기자는 기뻐했다. 하지만 필자는 아쉬웠다. 사진의 산 말고 화전민 집과 배나무로 추정한 나무에 대한 답이 빠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필자가 그 지역에서 바로 한계령만 넘어가면 되는 오색리의 주민에게 직접 물어봤다. 역시나……. 바로 답이 나왔다.
그건 화전민의 집이 맞고, 배나무도 맞는데 정확히는 산에서 자라는 '돌배나무'라는 것이다. 하긴 사진의 흰 나무는 그 높이가 집보다 세 배는 높은 듯 보이는데 배나무가 그렇게 큰 건 없다. 한계령 주위 산에 돌배나무가 많은데, 설악의 정상부의 돌배나무는 키가 작지만 해발 400m 고지에서 1,100m 고지 사이엔 10m 이상의 큰 나무가 제법 많고, 밑동의 지름이 1m에 가까운 고목도 있다고 한다.
한계령을 중간에 둔 남설악과 내설악의 돌배나무는 대략 5월 20일경에 만개하는데, 때에 따라 일찍 기온이 오르는 해엔 20일 정도 그 시점이 당겨지기도 한단다. 자료에 의하면 그 영화를 6월에 찍었다고 하니 맞는 얘기일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 기록이 잘못 되었다는 건 두 가지 면에서 알 수 있었다.

그 영화를 촬영한 걸 기억하는 정 시인이 4월에 첫 로케이션이 이루어졌다고 했다. 그리고 정윤희가 1979년 5월 6일에 발행된 선데이 서울 잡지의 표지 인물인데, 그 인터뷰 기사에서 “이미 설악산에서 열흘간의 촬영을 마치고 돌아왔다.”는 답변을 한 것이다.

그렇다면 6월 촬영 얘기는 잘못 된 것이고, 4월에서 5월 초에 촬영을 마친 셈이다. 필자는 이 글을 쓰기 위해 뒤늦게 이 영화를 시청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반전이 시작된다. 이 사진은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멀리서 찍은 장면들이 있긴 해도 정작 그 사진과 똑같이 클로즈업으로 독립시킨 장면은 없었다. 알고 보니 그건 영화사가 영화 촬영 중 홍보용으로 따로 사진사를 동원해서 찍은 스틸 컷이고, 그건 보도자료로 돌린 사진과 영화 포스터 한 귀퉁이에만 등장한다.
필자는 자료화면으로 사용키 위해 여러 흥미로운 장면들을 캡처했다. 그리고 그 중 일부를 검토해 달라고 정덕수 시인에게 보냈다. 정 시인은 거기서 산장 맞은편에 보이는 가리봉과 주걱봉 골짜기에 잔설(殘雪)이 뚜렷하고, 계곡 주변의 나무들은 녹음이 짙은 걸로 보아 절대 6월일 수 없고, 4월의 풍경이 분명하다고 했다. 그렇다면 돌배나무 꽃이 만발한 이 해엔 봄기운이 20일 이상 빨리 왔다는 얘기다.
나아가 그 양철 지붕의 화전민 집을 본 그의 의견은 어떠했을까? 그건 화전민의 집이 분명하지만 또 한 편 화전민의 집이라 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유는 처음 밭을 일구던 무렵엔 산과 들에 불을 놓아 개간을 했지만, 몇 대를 대물림해 살아오던 터전이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당시 주민들의 조상들은 화전민이었으나 1970년대가 되면 그들은 모두 산촌민화되어 더 이상 화전민으로 부를 수 없고, 그 집 역시 화전민의 집이랄 수 없다는 것이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한국전쟁의 여파와 나무를 땔감으로 하는 생활 방식으로 인해 온 국토가 민둥산으로 변한 걸 한탄하며 산림녹화에 대한 법제화를 함과 동시에 강력한 행정력을 동원해서 녹화사업을 진행했다. 이때엔 “절대녹화(絶對綠化)”라는 의미는 대충 알겠으나 한글 어법엔 어긋난 이상한 구호까지 써 붙여가면서 산림녹화에 온 힘을 다했다. 땔감을 바꾸기 위해 석탄 개발에 주력하고, 1967년에는 농림부 산림국을 산림청으로 격상시키기도 했다.
특히 이 때 추진한 정책이 산림을 황폐화시키는 주범 중의 하나인 화전민들을 특정 단지로 이주시켜 산촌민화하는 작업이었다. 당시 화전민촌을 강제 철거하며 가구당 일정 금액(20만 원)을 지원하고, 이주민들을 정착시킬 새로운 집단 주거단지를 만들었다. 이런 정책은 1980년대 초까지 길게 진행되었다.
한계령을 사이에 두고 동서의 화전민촌들은 1981년까지 철거가 완료됨과 동시에 현재 오색약수터 뒤에 있는 오색리 마을이 집단 주거지로 조성되어 이주자들이 모여서 살게 된 것이다.
당시 한계국민학교의 장수대 분교는 학생수가 57명에 달할 정도로 부근에 흩어진 화전민 집들이 많았는데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를 촬영한 1979년에 이 학교가 폐교됐다. 이 해는 한계령으로 향하는 44번 국도를 아스팔트로 포장하는 작업이 시작된 해이기도 한데, 영화 속에서는 흙먼지 날리는 비포장도로가 나온다.
이 영화를 봐야 한다.

그럼 다시 영화 이야기로 돌아가자. 그 이유는 이 글의 독자들이 46년이나 지난 이 영화 속의 설악산 풍경을 꼭 보셔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야만 지금보다는 나무가 덜 자라 산의 실루엣이 더 명료한 설악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을 만끽할 수 있다.
영화에 그려진 설악의 풍경은 공해에 찌든 지금과는 다른 날 것의 냄새가 나며, 그 향기는 감미롭고, 연신 감탄을 자아냄과 동시에 깊은 향수와 아쉬움을 느끼게 한다. 특히 내설악을 통해 등산을 해 본 바 있는 산악인들은 당시의 설악 모습이 던져주는 신비감과 놀람을 느끼는 동시에 그것에 깊이 매료될 것이다.
유튜브(YouTube)의 한국영상자료원(KOFA) 공개 영상 자료에도 없는 이 영화를 다행히 OTT(Over The Top) 인터넷 스트리밍 서비스를 통해 시청할 수 있었다. 언제라도 티빙(TVing), 와챠(Watcha), 그리고 웨이브(WAVVE)의 세 서비스를 통해 이 귀한 영화를 시청할 수 있다.
이 영화는 인제군 북면 한계리 일대에서 촬영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상기한 영화 속 한 가족이 찍은 “한 장의 꿈같은 사진”의 배경이 된 마을과 암봉들에 관한 이야기에 앞서서 원래의 기사에서는 다뤄지지 않은 영화, 그 자체에 대해서도 잠깐 알아보기로 한다.

- 최헌 4집. 1978년 발매.
이 영화는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유행하던 방식으로 기획되었다. 말하자면 대히트한 가요가 있으면 같은 제목으로 영화를 한 편 제작하는 것이다. "가을비 우산 속에"는 당시의 인기가수 최헌이 부른 노래이다. 당연히 대히트를 한 노래인데, 가수 최헌은 그 전해인 1978년 12월의 연말 "10대 가수상"에서 가수왕을 차지했다. 그 사이에 부른 노래가 “가을비 우산 속에“인데, 이게 아주 짧은 기간 내에 떠오르는 바람에 그 열기에 힘입어 영화가 기획된 것이다.
영화의 로케이션이 4월부터 된 것임을 생각하면 겨우 3-4개월 만에 설악을 배경으로 하는 영화의 각본이 쓰이고, 촬영에 들어간 것이다.
당시에 강원도는 ‘관광강원’으로서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많은 홍보를 했는데, 어려운 1970년대 말까지 일반인들에게 설악산 관광은 언감생심(焉敢生心), 꿈도 꾸기 힘든 일이었다. 그러므로 경치가 수려하기로 이름난 내설악 한계리를 로케이션 장소로 정하고 촬영이 진행된 것이다.

- 영화 한 장면. 권금성 케이블카
정윤희의 나이가 이 때 25세였는데, 그 4년 전에 배우로 데뷔한 그녀는 이미 톱스타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요즘 젊은 친구들까지도 "옛날엔 정윤희란 배우가 예뻤다면서요?"란 소리를 한다. 그들에게 정윤희의 리즈 시절 사진을 보여주면 최은희, 문정숙과 같은 한국적인 여인상을 지닌 옛날 배우를 생각하던 그들은 두 눈이 동그래진다. "아니 이 얼굴이 거의 50년이 가까운 시절의 얼굴이 맞아요? 요즘 아이돌 그룹의 가수 얼굴인데요? 와, 지금 아이돌을 해도 탑급이겠어요."라는 감탄이 나온다.
하긴 그 얼굴과 미모는 시대를 앞서 간 게 맞다. 지금 나타나 블랙핑크나 에스파 같은 그룹의 일원으로 노래하고 춤추면 제니나 카리나 같은 애들 잡아먹는 건 시쳇말로 "쌉 가능(완전 가능)"이다.

근데 정윤희는 데뷔 첫 해인 21세에 한 잡지의 표지모델로 나서서 인터뷰하며 "가고 싶은 곳?"이란 질문에 답한 것이 "설악산, 스위스, 스웨덴"이다. 맨 앞에 내세운 것이 설악인 걸 보면 몇 년 후의 설악산 촬영이 팔자소관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4월에 촬영한 이 영화는 그해 8월 23일에 단성사에서 개봉했다. 그러니까 이건 영화 기획에서 개봉까지 겨우 4개월 만에 해치운 거라 완전히 콩 볶아 먹은 것이다. 이렇게 날림(?)으로 만든 영화가 성공했을까? 의외의 일이지만 대성공이었다.

- 영화 한 장명. 동원(신성일)이 그림을 그리는 장소
시놉시스가 "화가인 동원(신성일)은 좌절에 빠져 설악산으로 작품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도 만족을 얻지 못하자 자살을 시도하고, 산장 주인의 딸 선희(정윤희)의 도움으로 살아나 그녀와 사랑에 빠진다. 선희 엄마(문정숙)의 결사반대로 이뤄지지 못 한 사랑 때문에 동원은 설악을 떠나오고 정은(김자옥)과 결혼한다. 후에 동원은 설악을 되찾아 혼자 아들을 키우고 사는 선희를 재회하고......"인 이 단순(?)한 영화는 당시의 성공 방식인 삼각관계를 멜로 로맨스 물로 다룬 청소년입장불가의 작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무려 16만 명에서 조금 빠지는 159,335명이나 동원한 대히트 영화가 됐다.
그 성공 비결 중에서 가장 확실한 것은 세 명의 주인공들이다. 1937년생 신성일에 비해 1954년생 정윤희와 1951년생 김자옥의 나이 차이가 영화에서 살짝 드러나긴 하지만 청춘영화의 표상인 신성일을 비롯한 두 톱 여배우를 동원한 영화이기에 흥행은 보증수표나 마찬가지란 예상이 있었다.

- 촬영장의 두 여주인공(좌측), 젊은 석래명 감독(우측), 그리고 촬영 스태프들
신성일은 1979년에만 6편의 영화에 겹치기 출연을 할 정도의 인기를 구가했다. “사랑의 조선, 땅콩껍질속의 연가, 가을비 우산 속에, 독신녀, 가시를 삼킨 장미, 순자야”가 그것이다. 정윤희 역시 이 한 해에 “죽음보다 깊은 잠, 도시의 사냥꾼, 사랑이 깊어질 때, 가을비 우산 속에, 우요일, 꽃순이를 아시나요”의 무려 6개 영화에 출연한다. 또한 공동 여주인공인 김자옥은 “비련의 홍살문, 목마 위의 여자, 태양을 훔친 여자, 수녀, 그리고 가을비 우산 속에”의 5편에 출연했다.
영화 "고교얄개"의 감독 석래명이 참신한 연출을 한 것도 좋았지만 한국 촬영기사들의 대부 정일성 촬영감독의 혼이 깃든 설악산 촬영도 크게 한 몫을 했다고 한다.
내설악 지리지(內雪嶽 地理志)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앞서 한국산서회의 집단지성을 통해 밝혀진 사실들과 관련한 사항들을 살펴보도록 한다. “꿈같은 한 장의 사진” 배경의 봉우리가 서북주릉의 장군봉(장군바위)으로 보이니 44번국도 옆의 자양전 같다는 얘기가 한 분에게서 나왔고, 다음 분이 상투바윗골, 재량골, 삼지바윗골에 대한 언급을 했다.

- 두 주연배우가 만난 촬영지의 장승들
숙소인 산장으로 가다 발견한 장승 옆에서 정윤희, 김자옥 두 배우가 포즈를 취한 사진 등을 통한 추리로 결국은 답에 접근했다는 것이다. 요지는 한계리 일대의 장승과 계곡이 있는 오래된 마을이며, 한계령을 중심한 암봉이 보이는 좌우 중 하나일 것이라는 것.

그래서 내린 최종 결론은 사진의 인물 주위는 자양전의 화전민 집이 있는 곳이고, 배경에 재량골, 장군바윗골, 상투바윗골이 보인다는 것이다. 과연 이 결론은 옳은 것이었을까??? 아닐 수 있다고 생각한 분들은 틀렸다. 정확한 답이다. 하지만 필자는 여기에 더해 조금 더 쉽게 수긍할 수 있는 지리지(地理志)스러운(?) 내용을 추가할까한다.
내설악의 북부에는 북천(北川)이 있고, 남부에는 한계천(寒溪川)이 있다. "차가운 시내(寒溪)"를 의미하는 이 천은 한계령(寒溪嶺)에서 흘러와 장수대(將帥臺) 휴게소 앞에 이르는 상류 하천만을 따로 자양천(紫陽川)이라 부르는데, 전체적으로 보아서 이는 한계천과 하나이다. 이 천은 한계리를 지나 서쪽으로 흘러 북한강 상류를 이루게 된다.
전에는 자양천이 장수대 바로 뒤편에서 두 줄기로 갈라져 작은 섬을 이루고, 거기에 장수대 야영장이 있었다. 2006년의 대폭우로 설악산의 풍광이 많이 바뀌어 버렸는데, 이때 야영장이 유실된 후 폐쇄되었다. 양편으로 갈라진 청정옥수(淸淨玉水)가 소나무 숲 안의 야영장을 운치 있게 감싸 도는 근사한 명소였다.
이 장수대를 중심으로 한 일대의 지역을 내설악이라 일컫는데, 이의 옛 이름이 자양전(紫陽田)이다. 자양(紫陽)이란 단어는 "저녁노을"을 뜻하는데, 방위(方位)로는 서쪽에 해당한다. 결국 자양전은 "한계령 서쪽에 있는 밭"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를 한글로 자양밭이라 썼는데, 강원도 사투리로는 "재량전“이자 ”재량밭"이다. 여길 흐르는 자양천은 당연히 자양전을 흐르는 하천이다.
우리가 아는 자양전은 1970년대엔 실제로 밭이 많은 너른 들이었는데, 이곳에서 장군바위(봉)와 부근의 무명봉으로 올라가는 골짜기를 자양곡((紫陽谷)이라 하고, 이를 사투리로 재량곡(谷) 혹은 재량골이라 했다.(이는 영어에서 valley나 ~vill이 붙은 지명과도 일맥상통한다.) 이 명칭들은 "자양전에 있는 마을"을 의미하는 말이다.
이곳은 화전민 마을로서 여러 채의 집이 있었고, 이 당시엔 상기한 바, 이미 불을 질러 화전하던 시기를 지나 몇 대에 걸쳐 삶을 이어온 산골 마을 중 하나가 되어 있었다. 자양전의 주민들은 밭농사는 물론 주변 점봉산 등지로의 사나흘 혹은 일주일여의 비박 산행을 통한 나물채취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쌀농사를 짓지 않으니 이들의 주식은 감자밥이었는데 말이 그렇지 약간의 삶은 보리쌀과 옥수수에다가 으깬 감자와 함께 비빈 것이 전부인 거친 음식이었다. 반찬이 있다해도 짠지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건 나중에 알려진 북한의 감자밥과 완전히 동일한 레시피(recipe)를 가진 것이었다.
대학생 가이드의 내설악 경험
필자는 대학 신입생 시절인 1971년부터 1년 반 동안 오진관광의 전국적인 등산여행 가이드 아르바이트를 한 일이 있다. 알바비를 모아 스위스제 헨케(Henke) 같은 명품 등산화를 사려는 것이었는데 대학생의 수입으로는 할 만했다.(지방에서 상경한 동급생 친구들은 공사장 막노동을 하던 어려운 시절이었다.)
당시 내설악 등산 패키지의 경우, 지금 44번 도로 옆의 장수대 휴게소 근처에 대여섯 채의 화전민집이 있었는데 등산 팀은 거기서 묵던지 거기서 좀 떨어진 장수대 한옥에서 묵었다.
필자는 하루 전에 사전답사를 위해 먼저 와서 1박을 하고, 등산로를 사전 점검한 후, 다음날 관광버스를 타고 오는 1박2일 팀에게 숙소를 배정하고 셋 째날 장수대 부근의 사전 점검한 등산코스로 안내하면 됐다. 본격적인 산악인들을 위한 가이드가 아니고 관광등산을 하러온 분들을 안내하는 것이므로 코스는 장수대에서 출발해서 남교리로 가는 정도였다. 대승폭포며, 십이선녀탕, 복숭아탕 등을 볼 수 있었기에 참가한 분들은 힘들어하면서도 좋아했다.
당시엔 지금처럼 계단이나 전망대를 만들어 놓지 않았던 때이기에 사실상 관광등산객들에게는 그것도 쉽지 않은 코스여서 무사히 등산을 마치고나면 안내를 받은 분들은 대단한 성취감을 느끼며 환호하곤 했다. (당연히 가장 나이가 어린 가이드인 난 칭찬에 곁들여 용돈까지 얹어 받았다. 그래서 그 비싼 헨케 등산화와 일본 사포로의 등산장비 명인이 만든 카도타:Kadota 수제 피켈까지 장만할 수 있었다.)
당시 연장자들이 등산을 할 때는 피켈의 모양만 딴 등산용 지팡이가 유행했다. 그런데 스키어인 필자는 현재와 같이 스키 스틱을 등산 폴처럼 사용했고, 그건 당시엔 알프스 등산이나 극지탐험 사진에서나 볼 수 있는 장비라서 사람들이 모두 신기해하며 한 번씩 만져봤다.
다시 “가을비 우산 속에” 들어가 영화와 설악의 역사를 뒤돌아본다.


여기서 다시 영화 얘기로 돌아간다. 이 글의 주제 중 하나는 "가을비 우산 속에"란 영화에 나오는 오래전 설악 모습을 독자들이 감상하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곁들이는 것이 "정윤희의 재발견"인 것이 덤이다.
상기한 바처럼 난 이 글을 쓰기 위해 티빙 OTT를 통해 영화를 세 번 감상했다. 시놉시스가 단순한 영화이나 줄거리의 전개는 매끄럽고, 옛 영화의 특색도 잘 보여주어 추억을 자극하는 영화이기에 좋았다.
그리고 영화 속에서 소소하게 발견하는 사실들이 있었고, 지금은 사라진 많은 것들을 보여주기에 흥미로우면서도 안타까웠기에 이 멜로물이 가슴 한편에 아련하게 자리 잡았다.

- 영화 속 "설악장" 산잔(실제로는 동부산장)
영화 속에서 서울에서 대학공부를 마친 선희(정윤희)는 설악장(雪嶽莊)이란 숙소를 경영하는 어머니(문정숙) 곁으로 돌아온다. 선희 아버지는 산이 좋아 설악으로 옮겨 살다가 등반사고로 사망했다는 설정이다.

- 영화 한 장면. 한계리 안산 기슭의 서구식 산장(간판엔 "설악장"이라 쓰여있다.) 왼편에 보물 한계사 남 삼층석탑이 살짝 보인다.
그런데 이 설악장이 실은 현 설악산국립공원의 장수대분소(현 한계산성분소) 부근 언덕 위에 있는 “동부산장”이다. 촬영지인 한계리에서 산장의 오픈 세트로 가장 적합한 장소였던 셈이다.

- 영화 한 장면. 산장 앞에 선 선희 모녀(정윤희, 문정숙) 뒤로 필례약수터 방향 가리봉과 주걱봉 계곡의 잔설이 보인다.
여기서는 정면으로 필례약수터 방향의 가리봉과 주걱봉이 보인다. 이 산장의 뒤로는 바위산이 보이는데 이 산이 한계산성 유적이 있는 안산이다.

- 백두대간 붐을 일으킨 남난희의 "하얀 능선에 서면" 표지에도 같은 장면이 등장한다.
원래 동부산장은 대한산악연맹에서 설악산에서의 히말라야원정대를 조직하여 설악산 대청봉과 죽음의 계곡 일원에서 동계훈련을 하다 조난사고를 당한 소위 "10동지 조난사고"를 계기로 지어졌다.
동부산장과 같은 시기에 지어진 산장이 천불동의 양폭산장과 공룡능선 초입에 위치한 희운산장인데 이 역시 사고 후에 지어졌다. 희운산장은 백두대간의 안부(鞍部)에 산악인들의 안전을 위해 ‘희운 최태묵 선생’이 사비를 들여 지었다.
또한 동부산장은 양폭산장과 함께 1990년대 중반까지는 겨울철 한국등산학교 동계훈련지로 이용되었다. 동부산장은 열혈 클라이머들의 겨울철 대승폭포에서의 빙폭 훈련 시에도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다.

- 영화의 한 장면. 가리봉과 주걱봉

- 영화 한 장면. 설악의 산안개
동부산장은 영화 촬영을 위한 오픈 세트이자, 촬영에 참여한 배우나 스태프들이 직접 머물던 곳이기도 하다. 산악계에서 볼 때도 이는 역사적인 의미를 가진 산장인 셈이다. 하지만 지금은 산장이 폐쇄되고, 오래 관리를 않다 보니 지붕이 무너지고 창문도 깨져 을씨년스러운 폐허가 되었다.

- 영화 한 장면. 산장 앞 설악에 드리운 무지개
하지만 당시엔 산기슭 언덕에 세워진 상당히 세련된 서구식 산장이었다. 영화 속에서 보이는 객실이나 복도의 모습은 지금도 꽤 멋지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카페 겸 레스토랑으로 사용된 공간의 규모도 상당히 크고, 통창을 통해 설악의 여러 방향을 살필 수 있으니 뷰도 뛰어나다. 실내의 인테리어는 매우 현대적이고, 모든 시설이 매우 잘 구비되었다는 생각도 든다.
벽엔 비자카드 표지가 붙어 있어서 당시에 내설악의 산장에서 신용카드를 사용했다는 사실에 놀라게 된다. 왜냐하면 외환 비자카드가 최초 발행된 것이 그 1년 전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일반인들은 해외여행이 자유화되기 10여 년 전이니 외환 비자카드는 활용 가치가 없다며 만들지조차 않던 시절이다.
44번국도 쪽에서 올려다 보이는 산장의 멋스러움은 현재 자작나무 숲에 가려지고, 그 뒤의 폐허로만 남아 그걸 봐야하는 가슴이 허허롭다 못 해 아파 온다.
이 산장의 주소와 일치하는 주소가 한계사지(寒溪寺址)이다. 그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이곳은 폐사지(廢寺址)로서 쉽게 말하면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된 한계사의 절터이다. 여긴 오래전부터 폐사지였는데 이곳의 남 삼층석탑과 북 삼층석탑은 나라의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 영화 한 장면. 영화 속에 남 삼층석탑이 보인다. 설악장(동부산장) 왼편 뜰
그런데 남 삼층석탑은 한동안 동부산장의 서쪽 뜰에 복원되어 서있었다는 기록만 있고 그 사진을 볼 수 없었는데, 이 영화 속에서 산장 건물의 왼편 뜰에 그게 서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귀중한 역사 자료이다.
이 석탑은 1985년 강원대학교 박물관 팀의 폐사지 발굴 작업이 행해진 후에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 복원되어 있다. 어쨌든 동부산장이 폐쇄됨에 따라 서구식 산장의 한편에 신라시대의 삼층석탑이 서 있어 대조되는 특별한 광경은 이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재량밭 너른 평지의 그 장소
한계령에서 내려오면서 장수대 방향으로 2km 정도 진행하면 오른쪽의 지형이 완만하다는 걸 누구나 느낄 수 있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나무들이 인위적으로 조성된 것임도 쉽게 알 수 있을 정도이다. 화전민들을 몰아내고 산림녹화 사업에 따른 식수를 한 것인데, 그렇지 않았다면 서북주릉을 둘러싼 더 많은 스토리텔링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곳은 반대편 장수대에서 한계령을 향할 때는 대략 3.7km를 올라가는데, 도로 북쪽에 있는 오솔길을 따라 산길로 진입하게 된다. 산길을 400m 정도 오르면 무명용사충혼비가 서 있다. 그곳에 이젠 건천(乾川)이 된 자양천이 있고, 자양교가 놓여 있다.
또다른 안타까움은 현재 그곳엔 설악산국립공원사무소장 명의의 출입금지 표지판이 서있다는 것이다. 공원 레인저들이 혹간 순찰차를 타고 살피러 오기도 한다. 말하자면 이제는 여길 월경(越境)해서 자양전에 들어가면 불법이라는 얘기다.
그곳에서 재량골로 불리는 초입이 재량밭이라 불리는 너른 평지인데, 상기하였듯이 자양전이 재량전이자 재량밭이라서 거기가 “꿈의 사진 한 장”이 찍힌 장소이다. 그 재량골 초입에서 조금 들어가면 지금도 확실하게 알 수 있는 넓은 화전민 터가 존재한다. 그 위엔 2002년의 태풍 루사와 2006년의 대폭우를 겪은 사태지역이 있는데 지금은 당시의 흉측한 사태 흔적이 좀 지워져 있다.

- 영화 한 장면. 선희가 부임 전에 방문한 국민학교(원통국민학교 로케이션) 배경의 아이들은 이제 50대 중반에 이르렀다.
영화 속에서 교사로 나오는 정윤희가 부임을 앞두고 들른 학교는 알고 보면 정 시인의 여동생이 다녔던 인제군 북면의 원통국민학교이다. 거기서 정윤희를 둘러싼 수많은 어린이들이 현재는 모두 50세 중반을 넘어선 장년일 거라 생각하니 세월의 흐름이 무상하다.
영화 촬영 당시 원통에 있던 작은 병원(의원)에 정윤희가 치료를 받으러 왔었는데 간호사들이 누군지 알아보고 물었을 때 처음엔 부인했다가 나중에 자신이라 했다는 전설도 전한다. 그건 아마도 스타가 그 답지 않은 평소의 모습을 드러내기 싫어서 말도 안 되는 부인을 한 듯하다.

- 영화 한 장면. 추억의 금강운수 "자연보호 관광강원" 구호를 옆구리에 인쇄했다.

- 영화 한 장면. 비포장 도로를 달려오는 완행버스. "자연보호 인제군 시범구역 북면"이라 쓰인 관광 안내판이 서 있는 이 자리는 현재의 장수대 앞이다.
추억을 부르는 영화의 또 다른 장면은 당시 내설악을 찾는 산악인들이 많은 신세를 진 금강운수의 버스이다. 당시 완행은 옆면에 "자연보호 관광강원"이라 쓴 흰색이었고, 이 차가 선 정류장에 세워진 관광안내판에는 "자연보호 인제군 시범구역 북면"이라고 쓰여 있는데, 여기가 바로 장수대인 것이다. 완행버스는 당시 원통에서 장수대 노선을 달렸고, 또 다른 노선은 서화면 천도리를 거쳐 양구군 해안면까지 운행했다.

- 영화 한 장면. 금강운수의 녹색 버스는 직행버스이다.
영화에는 신성일이 초록색 버스를 타고 설악을 떠나가는 장면도 나오는데 이것은 직행으로 마장동에서 속초까지 운행했다. 한계령을 넘으면 양양인데 이 직행버스가 속초까지 가는 걸 의아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속초에 가려면 차라리 미시령 도로를 이용하지 않겠는가 싶어서……
하지만 미시령 도로는 올림픽이 열린 1988년에 2차선으로 완성되어 1989년에 개통했기에 그건 당시로서는 10년 후에나 일어날 일이었다. 미시령 도로가 완성될 무렵 한겨레신문을 필두로 "산" 지를 발행하는 조선일보까지 많은 매체들이 자연보호를 이유로 미시령 도로의 개통을 반대했었으나 무위에 그쳤다.
이 당시의 한계령 흙먼지 길은 1971년부터 한계령에 관광버스가 운행 가능한 44번 국도의 신작로로 만들어졌는데, 그게 당시의 김재규 3군단장(궁정동의 그 사람)이 주도한 사업이었다. 이 도로가 아스팔트 포장이 된 것은 1980년에 이르러서인데, 그 전해까지는 망우리에서 속초에 이르는 구간 대부분이 비포장 도로였다. 1981년에 이 도로의 개통식이 치러졌다.
끝으로...

- 영화 한 장면. 고향의 봄을 연상케 하는 장면


이로써 길게 전개한 영화 "가을비 우산 속에"와 이의 홍보를 위해 찍은 한 장의 자양전 스틸 컷을 둘러싼 스토리를 마감하고자 한다. 이 릴레이의 원문 기사 작성 후에도 이에 대한 깊은 호기심을 가지고 계셨던 김진덕 기자가 가진 나머지 의문에 대한 답이 되었기 바란다.
훗날 자양전에 대한 그리움과 아쉬움으로 출입금지 경고판 앞에서 선 넘기를 주저하며 서성이는 한 중년남자에 대한 환영(幻影)을 자주 보게 될 듯하다. 내게 그 그리움을 전염시킨 분이다. 이 글의 작성에 지대한 기여를 해주신 국민가요 "한계령"의 작사자 정덕수 시인께 감사드린다.
출처 : 루트파인더스(http://www.routefinder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