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 고성애 - 2008-04-27 01:03:05
이름 : 고성애 ( 2001-07-19 14:05:09, hit : 130, good : 0)
제목 : 양양 오산리 신석기시대 유적지
양양 오산리 유적(襄陽 鰲山里 遺蹟) 답사기
답사 일: 2001년 7월 8일 일요일 오후 3시경.
Written by Kosa
- 역문동 MT 답사 시의 모습 하나.
- 역문동 게시판의 글 중 [MT 기행] 한계령과 오색리 - 2와 [MT 기행] 한계령과 오색리 - 3에 걸쳐 있는 글 중에 오산리 유적 방문 내용이 있습니다. 거기 있는 사진과 글을 일단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아래 글 중에서는 위 링크의 사진 자료 몇 개를 링크해서 사용하겠습니다.
이 답사기는 학술적인 내용이라기보다는 가벼운 기행입니다. 학술적인 내용은 너무 딱딱해 지기 때문에 학술적인 내용을 포함하되 이를 통해서
답사의 즐거움을 음미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그러므로 답사지와 관련된 주변 정보에 대해서도 가급적 자세한 설명을 부기하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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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유적의 소재지는 해뜨는 고장 양양(襄陽)이며, 정확히는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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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돋는 오산 마을 표석(標石).
이 유적은 잘 알려진 신석기시대의 유적으로서, 신석기 시대의 유적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이 유적의 최초 발견 시기는 1970년 대로 거슬러 올라가며, 이를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1981년부터 1987에
이르기까지 계속 발굴하였습니다.(1985년의 발굴이 5차 발굴인데, 아마도 1987년까지 계속되었다면 7차 발굴까지 행해진 것이라 하겠습니다.)
오산리 유적은 우리가 답사한 바와 같이 해안으로부터 멀지 않으며, 정확히는 200여 미터 정도 떨어져 있습니다. 양양 시내에서
낙산 해수욕장 및 오산 해수욕장의 바닷가로 나가는 길의 왼편에 오산리가 있고, 그 길 건너편 다리에 오산리 유적의 표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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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유적 표석.
이 유적은 두 개의 호수라는 의미의 쌍호(雙湖)라 불리는 자연 호숫가의 모래 언덕(砂丘) 위에 형성되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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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옆 사구 위 송림 사이의 유적지 안내판 두 개. 안내판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양양 오산리 선사유적
사적
제394호
강원도 양양군 손양면 오산리
이 유적은 기원전 6,000년 이전부터 신석기시대의 사람들이 살았던 집터가 남아있는
곳으로 지금까지 알려진 우리 나라 신석기시대 유적중 가장 오래된 곳이다.
이 유적에서 출토된 목탄은 측정 연대가 지금으로부터
8,000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므로 우리 나라 신석기 문화의 초기 단계의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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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서울대 박물관의 "한국선사문화전" 도록. 오산리에서 출토된 토기가 겉장에 인쇄되어 있다.
1977년 처음 발견된 후
1987년까지 서울대학교 박물관에서 6차례의 발굴조사를 실시하였는데, 집터의 모양은 신석기시대의 다른 유적이 움집인 것과는 달리 바닥이 둥근
형태의 지상가옥으로 밝혀졌다.
출토 유물 중 토기는 아가리 부분에만 덧띠를 붙이거나, 눌러찍기로 무늬를 낸 납작바닥의 토기가
대표적이며, 석기는 이음낚시도구, 돌칼 등 해양어로 생활에 쓰인 도구가 많이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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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록 표지의 평저형토기(27.7cm x 37.5cm)
이 사구는 매우 고운 모래가 바람에 불려 와 쌓임으로써 형성된 것으로서
사막의 모래 언덕을 생각해 보면 됩니다. 사막의 모래는 모래라기보다는 아주 고운 먼지가 쌓여 있는 것 같은 형상인데, 이곳의 모래는 먼지 같은
것이 아니고, 먼지에 가까운 아주 고운 모래를 상상하면 됩니다. 그래서 그 모래 언덕을 밟고 올라가면 모래가 사르르 밑으로 꺼지면서 그 감촉이
매우 부드럽게 느껴집니다.
- 유적지의 현 상황.
사구만 보입니다.
이 한반도 최고(最古)의 신석기시대 유적은 최초로 1977년에 두 개의 호수를 메워 농지로 전용(轉用)하기 위해
모래를 채취하는 과정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이 당시 다량의 신석기 시대 유물이 노출됨으로써 이 유적의 존재가 처음으로 알려진 것입니다.
강원도의 동해안은 이 당시까지는 신석기 문화가 분포하지 않은 곳으로 알려지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한반도에 존재하는 신석기 유적은
약 150개에 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이것이 대동강, 한강유역, 서해안 지역, 두만강 유역, 그리고 낙동강 유역에 밀집 분포하고 있는 것으로만
알려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들 각 유역의 유적지들은 매우 상이한 문화 양상을 보여주고 있는 것도 특징입니다. 그러다가 신석기 유적의 공백지인
양양에서 비로소 동북해안지역의 유적을 대표하는 가장 오래된 신석기 문화 유적지가 발견된 것입니다. 아직도 그 거대한 유적지의 일부만 발굴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 발굴 당시의
모습. 대대적인 발굴 조사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 서울대 박물관 사진.
발굴 조사 결과 점토다짐의 원형 주거지(집자리)
10기를 비롯하여 야외 노지(爐址)로 추정되는 적석유구 및 소할석(小割石) 유구(遺構) 등이 확인되었습니다. 원형 집자리는 신석기시대에 보편적인
견혈식이 아닌 지상식이어서 주거지 연구상으로도 새로운 자료가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즉, 이들 집자리는 모두 평면 형태가 원형이나 타원형의 지상
주거지로서 이는 유적인 세사(細砂/고운 모래)로 이루어진 사구이기 때문에 땅을 파고 들어가 집자리를 만드는 견혈주거지 형식 대신 점토를 다져서
지상 가옥의 형식을 채택한 것이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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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리 출토의 융기문 토기.(16.5cm x 23.6cm)
여기서 나온 유물로 중요한 것은 토기인데, 이 토기 역시 한국
신석기시대의 전형적인 토기인 아래 부분이 뿔처럼 뾰족하게 생긴, 뾰족밑토기는 상하층에서만 약간 나왔을 뿐이고, 그보다는 대부분이 유적 하층의
밑이 납작하게 만들어진, 납작밑토기인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오산리 하층의 토기들은 중국 동북지역의 흑룡강성 지역과의 관련성이 있는 것으로 보이고
있습니다. 동북해안지역의 토기는 기형이 평저이며, 태토(원료 흙)에는 굵은 사립(砂粒)이 혼입되어 있고, 수적으로는 적지만 조개 가루를 혼입한
것도 있습니다.
- 오산리 출토의 이부대형토기(17.6cm x 11.3cm)
여기서는 복원 가능한 납작밑토기(平底土器) 20여 점,
덧무늬토기(隆起文土器), 뾰족밑빗살무늬토기(尖底櫛文土器) 등의 토기류 및 조합식 어구, 결합식 낚시바늘(結合式釣針), 돌톱, 흑요석기를 비롯한
석기류 300여 점, 그리고 점토제 얼굴상 등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습니다.
- 오산리 출토의 빗살무늬토기(40.8cm x 50.4cm) 이는 서울 암사동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와 비슷한데 입구가 매우 넓고,
위아래의 기장이 좀 짧은 게 특징입니다.(흰색으로 메운 것은 파편이 없어서 석고로 복원한 것.) -> 이런 식이 뾰족밑토기인데 이 밑부분을
바닷가나 강가의 모래에 꽂아놓는 방식으로 사용했기 때문에 이런 형태가 나타난 것입니다.
납작밑토기는 뾰족밑토기보다 연대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이는 위의 동북한, 연해주, 아래로는 남해안, 그리고 바다 건너 일본의 토기와도 비교되는 것으로서 당시의 문화양상을 밝히는데
중요한 유물인데, 이것이 오산리 유적에서 다량 출토된 것입니다. 또한 조합식 어구의 다량 출토도 큰 의미가 있습니다. 이는 남해안과 일본으로의
문화 전파의 경로를 밝히는 중요한 유물인 것입니다.
오산리 유적은 모두 6개의 자연 층위(層位)로 이루어져 있는데, 1층은 유적의
일부에서만 나타나는 청동기문화층이고 2, 3, 4, 5층이 신석기시대에 해당하는 층입니다. 신석기시대 상층인 2층에서는 서해안지역 신석기시대의
특징적인 토기형태인 뾰족밑빗살무늬토기가 출토되었습니다. 토기 문양은 구연부(토기 아가리)와 기복부(중간부)에 시문(試紋/문양이 그려진 것.)되어
있는데 구연부에서 기복부까지 어골문(고기뼈 모양의 무늬)으로 시문한 것과 구연부에 평행밀집단사선문(平行密集單斜線文), 사격자문(斜格字文),
조대문(組帶文)을 시문하고 기복부에는 어골문을 시문한 것이 많습니다.
석기 중에는 납작한 강에서 구할 수 있는 자갈의 양단을 쪼아
내어 만든 그물추가 있습니다. 해안 지대에서 어업에 종사하며 살았던 신석기시대인의 생활 모습을 잘 보여주는 유물들입니다. 이와 같이 토기·석기의
여러 특징에서 보면 역시 해안의 유적이기 때문에 서해안지역 신석기문화와 공통점이 많아, 3, 5문화층과는 뚜렷이 구분됩니다.
신석기시대 중층인 3층은 암갈색사질층으로 여기에서 출토된 토기는 모두 평저형이며, 아래 부분에 나뭇잎 모양이 찍힌 것이 많다.
주로 무문양 토기가 많으며, 유문양토기 중에는 동북지방의 토기와 유사한 것이 있습니다. 이 층에서는 신석기인의 정신적 측면의 사유(思惟) 및
종교관을 알 수 있는 점토제 안면상(顔面像)이 채집되었습니다. 이는 점토에 단순한 몇 개의 구멍을 파 놓은 것이나, 누가 보아도 인간의 얼굴을
조각한 것이라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유물입니다.
- 토제(土製) 인면(人面)(5.0cm x 4.3cm)
신석기시대 하층인 5층에서는 집자리를 비롯하여 다수의 납작밑토기,
소량의 덧무늬토기 및 다양한 석기가 출토되었습니다. 집자리는 지름 6m안의 원형 집자리로 그 안에 70×70cm 크기의 사각형 화덕이 한두 개씩
있습니다. 출토된 토기는 모두 납작밑으로 좁은 아래 부분에 비하여 몸체 부분이 넓은 발형토기와 옹형 또는 호형토기가 있습니다. 문양은 구연부에만
국한되어 있습니다.
석기로는 결합식조침(結合式釣針), 톱, 사각형석도, 흑요석 인기(刃器) 등이 출토되었는데 특히 어업관련 도구가
많이 출토되었습니다. 이 층에서 출토된 흑요석기는 형광 X선 분석결과 원석의 산지가 백두산으로 밝혀져 동북지방 신석기 문화와의 관련성, 당시의
교역과 문화 교류 상황을 시사해 주고 있습니다. 7개의 목탄 시료를 C14 방사성탄소측정법에 의해 분석한 결과 기원전 6,000∼5,000년
사이로 연대가 측정되어 우리 나라의 신석기시대 기원을 8,000년 전으로 끌어올린 신석기시대 유적 중 최고(最古)의 유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 조합식 어구들(10.6cm~4.1cm)
이상에서와 같이 오산리 유적은 우리 나라 최고의 신석기시대문화 유적으로서
서해안지역의 뾰족밑빗살무늬토기와 동북지방의 납작밑토기 및 남해안지역의 덧무늬토기 등 각 지역 토기류의 특징이 고루 나타나며, 특히 동해안의
납작밑토기문화가 서해안 뾰족밑토기문화보다 선행함이 확인된 유적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오산리 유적은 우리 나라 신석기 문화의 기원 및 주변
지역과의 문화적 상관관계를 밝힐 수 있는 중요한 유적입니다.
- 오산리 출토의 돌톱(17.7cm x 8.8cm)
안타까운 것은 이러한 유적이 아무런 복원 노력이 없는 가운데 방치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유적의 많은 부분이 발굴되지 않은 문제도 있지만, 이 유적의 중요성을 알고, 이곳을 방문하는 답사자들에게 뭔가 실질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것을 마련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는 양양군청에서 많은 신경을 써야 할 일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관광 양양의
기치를 높이 세우기 위해서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