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영화「트로이」를 보고 / 劉 載 源 한국外大 언어인지학과 교수 / 고성애 - 2007-04-24 20:43:57
劉 載 源 한국外大 언어인지학과 교수
1950년 서울 출생. 경기高·서울大 언어학과 졸업. 서울大 대학원 언어학 수료, 그리스 아테네大 대학원 언어학 박사. 한글학회 표창 및 우리말 지킴이 논문상 수상. 저서로 「우리말 逆順사전」, 「표준한국어발음 대사전(공저)」, 「그리스 신화의 세계 1·2」 등.
할리우드的 상상력과 상업성이 그리스 神話를 난도질했다
원정군 그리스의 배 1000척이 인구 4000~8000명인 트로이를 정복하는 장면은 터무니없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그렸던 전쟁의 권태와 피곤함, 잔혹함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전쟁을 재미있는 전자게임처럼 즐기는 모습이다
神話를 난도질한 영화
할리우드의 야심작 「트로이」는 2억 달러(약 2400억원)라는 천문학적 제작비만으로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돈을 많이 들인 만큼 호화 배역과 대규모 세트를 배경으로 하는 웅대한 전쟁 장면과 잔혹한 전투 장면 등 상당한 볼거리를 제공한다.
그러나 이 영화가 관객들의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원인은 호화 배역이나 대규모 제작비가 아니다. 정작 관객들의 관심을 집중시키는 것은 「트로이」란 제목이다.
트로이 전쟁은 인류의 역사를 바꾼 신화 시대의 전쟁으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익히 알려진 이야기이다. 할리우드는 그리스 신화로 널리 알려진 이 전쟁을 내세워 또다시 떼돈을 벌 꿈에 젖어 있다. 돈을 투자한 만큼 벌어들이겠다는 천박한 자본주의적 발상은 영화 곳곳에 모습을 드러내며 神話를 난도질하고 있다.
우선 트로이 전설에서 神을 배제한 것부터가 모든 왜곡의 시작이다.
트로이 전쟁 神話에서 神들의 이야기를 뺀다면 남는 것은 잔혹한 전투 장면과 저급한 상업주의적 철학뿐이다. 힘이나 돈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전통과 역사이다. 미국은 이 영화에서 유럽 神話를 제거함으로써 전통과 역사에 대한 콤플렉스를 해소하는 것 같다. 이런 전례는 로마 역사를 자의적으로 비틀어 만든 영화 「글래디에이터」에서도 드러난다.
영화는 엉뚱하게 아가멤논이 그리스 연합군을 이끌고 테살리아 지방을 정복하는 장면에서 시작된다. 그리고 아킬레우스와 상대방 장수의 대결로 승부를 가리는 지극히 서양 중세적인 결투로 이어진다.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는 있을 수 없는 발상이다.
두 장수가 대결하는 장면은 다윗과 골리앗의 결투 장면을 떠올리게 한다. 내륙 도시인 스파르타와 뮈케나이가 항구도시로 나오는가 하면, 원전에는 언급도 없는 헥토르의 뮈케나이 방문 장면에서는 아랍 춤을 추는 무희가 출연한다.
아가멤논의 얼굴은 사리사욕에 가득찬 모습이고, 주인공들의 갑옷은 청동이 아니라 가죽 제품이다. 청동 투구와 갑옷이 보기에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원정군 그리스의 배 1000척이 바다를 가득 채운 장면은 인구 4000~8000명인 트로이를 정복하는 데 너무 낭비라는 생각을 금할 수 없게 한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그렸던 전쟁의 권태와 피곤함, 잔혹함은 영화에서 찾아볼 수 없다.
장수들과 병사들은 모두 전쟁을 재미있는 전자게임처럼 즐기는 모습이다. 전쟁에 대한 회의와 비참함은 영화의 흥미를 죽일지 모른다고 생각한 듯하다.
戰車에서 내리는 군인은 없다
더욱 황당한 것은 브리세이스가 헥토르와 파리스의 사촌 누이며 아폴론 신전의 여사제 신분으로 나온다는 점이다. 그리고 브리세이스와 아킬레우스의 사랑이 영화의 가장 중요한 모티브로 각색된다. 원전에는 암시조차 없는 발상이다.
영화의 끝 장면에서 아킬레우스는 브리세이스를 찾으러 갔다가 파리스의 화살을 맞아 죽는 것으로 처리된다. 관객들의 감동을 불러일으키기 위한 지극히 상투적인 수법이다. 메넬라오스와 1대 1로 결투를 벌이던 파리스가 비겁하게 도망치는 장면에서는 고대 그리스 영웅을 겁쟁이로 만드는 이유가 무엇인지, 또 그런 파리스가 영화 끝 장면에서는 가장 무서운 영웅이 되어 아킬레우스를 비롯한 그리스軍을 종횡무진으로 죽이는 갑작스러운 변신은 어떻게 가능한지 당황스럽게 만든다.
파리스와 결투를 벌이던 메넬라오스가 헥토르의 일격에 쓰러지는 장면은, 헥토르를 상대방의 방심을 틈타 기습하는 야비한 악당처럼 보이게 만든다. 원전에서 메넬라오스는 살아 고향으로 돌아간 몇 안 되는 영웅 가운데 하나로 그려진다.
아이아스 역시 전쟁터에서 죽지 않는 인물인데, 영화에서는 헥토르에게 죽임을 당한다. 아가멤논은 브리세이스의 은장도에 목을 찔려 죽는다. 아가멤논이 뮈케나이로 개선하여 그의 처 클뤼타임네스트라와 그녀의 정부 아이기스토스의 손에 무참히 살해된다는 神話는 완전히 무시된다.
더욱 가관인 것은 아킬레우스가 전차를 타고 성 앞으로 왔을 때 헥토르가 도전을 받아들여 걸어 나가는 장면과 이를 보고 아킬레우스가 전차에서 땅으로 내려서는 장면이다. 당시 戰車는 현대전의 탱크와 같은 무기로서 어떤 전사도 피치 못할 사정이 아닌 한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무기였다.
적장을 보고 탱크에서 내려서 소총으로 싸우는 현대 군인을 상상할 수 없듯이 고대 전쟁에서 戰車에서 제 발로 내려서는 장면은 상상할 수 없다.
기원 전 4세기나 되어서 나오는 기마병은 영화 全篇에 걸쳐 등장한다. 흥미와 멋있게 보이는 장면을 위해서는 이런 정도의 엉터리 조작은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감독의 철학이 느껴지는 장면들이다.
「일리아드」를 읽어 보지 못한 관객들이 영화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위험에 대해서는 조금도 염두에 두지 않는다.
감독의 자의적 해석이 절정에 달하는 것은 파리스와 헬레네가 도피에 성공하여 행복하게 살게 될 것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영화의 끝부분이다. 이런 해석은 사랑하는 남녀가 부모와 주변의 온갖 반대를 무릅쓰고 사랑의 도피 행각을 벌여 결국은 해피엔딩으로 끝난다는 할리우드의 공식에 딱 들어맞는 수법이다. 그러나 비참한 운명에 비장하게 맞서다 찬란하게 散花(산화)하는 그리스 영웅들에게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전쟁이 있기에 영웅이 있다(?)
영화에서는 헥토르의 젊은 아내 안드로마케와 그의 아들이 아이네이아스와 무사히 빠져 나가는 것으로 매듭짓는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비극작가 에우리피데스는 그의 작품 「트로이아의 여인들」이나 「헤카베」, 「안드로마케」에서 전쟁의 잔혹함과 패배자의 비참한 운명을 그리면서 전쟁은 인류가 어떻게 해서든 피해야 할 모든 불행의 근원이라고 경고한다.
아킬레스 역을 맡은 브래드 피트의 강렬한 눈빛과 우람한 근육에 열광하고, 운명적인 죽음을 예감하고도 비장하게 아내에게 어린 아들과 탈출하라고 말하는 헥토르에 대한 동정과 찬사를 아끼지 않는 한국 관객들은 이 영화를 보면서 전쟁의 아름다움에 흠뻑 빠져들지도 모른다.
전쟁이 있기에 영웅이 있다는 식의 지극히 위험한 발상이 영화 全篇에 흐른다. 영화 「트로이」는 9·11 테러 이후 호전적이 된 미국의 정서를 반영하는 영화인지도 모른다.
나는 트로이 유적지를 세 차례 방문했다. 그때마다 나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한다.
『이곳에는 여러분들이 기대했던 웅장한 유적이나 성채가 없습니다. 혹시 「이런 돌무덤이나 보려고 그 먼 길을 왔느냐」 하는 의문과 실망감을 느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땅은 슬픈 땅입니다.
저 무너져 가는 성벽 망루 위에서 아킬레우스의 잔인한 손에 죽어 가는 아들 헥토르를 찢어지는 듯한 가슴으로 내려다보는 늙은 왕 프리아모스와 헥토르의 어머니 헤카베와 그의 아내 안드로마케를 상상해 보십시오. 또 그 모든 비극의 원인 제공자인 헬레네의 심정을 헤아려 보십시오.
그러면 호메로스가 아무리 아름답고 영웅적으로 트로이 전쟁을 노래했다고 해도 다시는 전쟁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들 것입니다. 아마도 이것이 우리가 이 트로이 유적지를 찾는 까닭인지도 모릅니다. 아무것도 볼 수 없는 황량한 히르살리크 언덕에 바람이 분다면, 그런 애절한 소망을 우리에게 전하려는 옛 영웅들의 경고라고 들어 주세요』
이 말을, 영화 「트로이」를 보고 감동했거나 멋있다고 느낀 관객들에게 다시 들려주고 싶다.
제우스神이 일으킨 트로이 전쟁
영화 「트로이」의 바탕은 고대 그리스의 詩人 호메로스가 쓴 大서사시 「일리아드」이다. 기원전 7세기 말쯤에 쓰인 이 작품은 기원전 1250년쯤에 벌어졌다고 짐작되는 한 전쟁에서 전쟁의 주인공들이 영웅적으로 벌이는 갈등과 번뇌, 투쟁과 용기, 지략 등을 다루고 있다.
「일리아드」는 1만5693행, 24권으로 이루어진 방대한 서사시로, 그리스軍의 트로이 원정으로 시작된 10년 전쟁 중 마지막 50일 동안의 공방전을 다루고 있다.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를 납치하면서 시작된 이 전쟁은 원래 제우스神이 영웅들을 제거함으로써 神들과 인간 사이의 왕래를 끊으려는 음모로 치밀하게 계획한 전쟁이다.
제우스는 프로메테우스에게서 자신이 마음에 두고 있는 바다의 요정 테티스가 아버지보다 더 훌륭한 아들을 낳을 운명을 타고났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녀를 인간인 펠레우스와 결혼시킨다. 그녀가 혹시 다른 神과 어울려 아들을 낳을 경우, 제우스 자신의 권좌가 위태로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펠레우스와 테티스의 결혼식에 올림포스 神들을 비롯한 모든 神들이 초대받았으나 불화의 神 에리스는 초대받지 못했다. 심술이 난 에리스는 연회장에 나타나 「가장 아름다운 여인에게 드리는 선물」이란 문구가 적힌 황금 사과 하나를 놓고 간다.
이 사과를 놓고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 女神이 서로 자신의 것이라 주장하자 제우스는 이에 대한 판정을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에게 맡긴다. 이 판정에서 파리스는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주겠다」는 제의를 한 아프로디테에게 황금 사과를 주었다. 파리스가 그리스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헬레네를 얻게 된 데에는 사랑의 神 아프로디테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아내를 빼앗긴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는 자신의 형이자 뮈케나이의 왕인 아가멤논의 도움으로 그리스 全域의 영웅들을 모아 트로이 원정을 떠난다.
아킬레우스는 아폴론의 화살에 죽어
전쟁은 9년 동안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10년째 되는 해에 그리스軍 사이에 역병이 돌았다. 이 질병은 아가멤논이 아폴론 신전의 제관 크뤼세스의 딸 크뤼세이스를 돌려줄 것을 거절하자 아폴론이 보낸 재앙이었다.
결국 神의 이런 보복에 견디지 못한 아가멤논은 크뤼세이스를 돌려주기로 결정하지만 그 대신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인 브리세이스를 빼앗았다. 이에 기분이 상한 아킬레우스는 전투에 더 이상 참가하지 않는다.
그리스軍 가운데 가장 용맹스럽고 무서운 아킬레우스가 빠지자 전쟁은 트로이軍에게 유리하게 돌아갔다. 특히 트로이의 영웅 헥토르는 그리스軍을 마음껏 유린하여 그리스軍은 궤멸 직전의 위기에 몰린다. 한번 자존심에 상처 입은 아킬레우스는 이를 오히려 고소하다고 여겨 전투에 참여할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는다.
아군이 계속 죽어 가는 것을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의 둘도 없는 친구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투구를 빌려 쓰고 전투에 참가해 크게 공을 세우지만 헥토르의 손에 죽고 만다.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한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전투에 참가하면 죽을 운명임을 알면서도 비장하게 전쟁에 나가 헥토르를 죽인 뒤 그의 시신을 戰車 뒤에 끌고 다닌다.
아들의 시신이 모욕당하는 것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트로이의 늙은 왕 프리아모스는 헤르메스 神의 도움으로 아무도 몰래 아킬레우스의 막사로 찾아가 헥토르의 시신을 찾아온다. 그리스軍과 트로이軍은 헥토르와 파트로클로스의 장례가 치러지는 동안 휴전하기로 합의하고 각기 성대한 장례식을 치른다.
여기까지가 「일리아드」의 내용이다. 그 뒤 신화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장례식이 끝난 뒤 아킬레우스는 파리스의 뒤에 숨어 있던 아폴론의 화살에 그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맞아 죽는다.
파리스는 헤라클레스의 후계자인 필로크테테스와 활 시합을 벌이다 왼손과 오른쪽 눈, 발목에 화살을 맞는다. 상처 입은 파리스는 급히 그가 목동 생활을 하던 이다산으로 옮겨졌다. 그곳에는 의술에 능한 파리스의 옛 애인 요정 오이노네가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오이노네는 파리스를 치료하기를 거부한다. 자신을 버리고 헬레네에게 간 데에 대한 노여움이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이노네는 죽어 가는 옛 애인을 보고 마음을 바꾸어 약 바구니를 가지러 간다. 그러나 그 사이에 상처가 깊어져 파리스는 죽고 만다.
트로이 영웅 아이네이아스는 로마의 선조
전쟁의 마지막은 오디세우스의 책략으로 마무리된다. 그리스軍은 오디세우스의 제안에 따라 목마를 남기고 후퇴하는 척한다. 트로이人들은 이 목마가 함정인 줄 모르고 성벽을 허물고 목마를 성 안에 들인다.
그날 밤, 트로이人들이 승리감에 도취하여 축제를 벌이는 동안 목마 안에 숨어 있던 오디세우스를 비롯한 그리스軍은 몰래 목마에서 빠져나와 성문을 열어 매복하고 있던 아군을 불러들인다. 이 기습으로 難攻不落(난공불락)의 트로이는 멸망한다.
트로이 남자들 대부분은 살해되고 여인들과 아이들은 전쟁 노예가 되어 각자의 새로운 주인을 따라 뿔뿔이 그리스로 끌려간다.
트로이의 영웅 가운데 아이네이아스만이 탈출에 성공한다. 아이네이아스는 헤라 女神의 방해 때문에 바다에서 폭풍우를 만나지만 아프로디테 女神의 도움으로 무사히 카르타고를 거쳐 이탈리아 반도 중부에 위치한 라티움 땅에 도착한다. 이곳에 그의 후손 로물루스와 레무스가 세운 나라가 바로 로마다.
영화 「트로이」의 바탕이 된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를 둘러싼 문헌학적 논점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우선 서사시의 작가 호메로스가 실제 인물인가 아니면 전설 속의 허구적 인물인가 하는 점이다.
이 문제에는 호메로스가 과연 한 명의 작가를 가리키는가 아니면 어떤 음유詩人 집단을 가리키는가 하는 논란과 그가 과연 실제 인물이라면 어느 시기에 어디에서 활동했는가 하는 논쟁이 포함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일리아드」에서 노래하고 있는 트로이 전쟁은 과연 실제로 일어났던 전쟁인가 아니면 작가의 순수한 상상의 산물인가, 이 전쟁이 역사적 근거가 있다면 어느 시대에 일어났는가 하는 문제다.
호메로스를 연구한 학자들은 오랜 논쟁 끝에 호메로스라는 이름은 단수이므로 한 집단의 음유詩人을 가리키기보다는 한 개인을 가리키는 말로 보는 것이 옳다는 데에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그리고 호메로스의 詩에 나타나는 풍습이나 장례 의식, 영웅들이 사용하는 방패를 비롯한 무기에 대해 언급한 부분 등에 대한 면밀한 연구를 통해 이 위대한 詩人이 기원전 7세기 끝 무렵 이전에 활동했을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가 이오니아 방언을 사용하고 있는 반면 그리스 본토, 특히 펠로폰네소스 지역에 대한 정보가 정확하지 못한 점과 도리아族에 대해 언급이 없는 점에서 그의 고향을 키오스 섬이나 소아시아의 한 지방, 특히 이즈미르 지방으로 추정한다.
그의 또 다른 서사시 「오디세이」에 그려진 음유詩人들의 지위가 높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당시 음유詩人들은 귀족에 비해 낮은 신분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가 장님이었다는 이야기도 「오디세이」나 다른 서사시에 음유詩人들이 그를 장님으로 그리고 있는 데에서 나온 것이다. 이렇게 볼 때 호메로스는 기원전 7~8세기쯤에 귀족 계급의 취향에 맞춰 옛 영웅들의 모험담과 공적을 노래하는 평민 계급의 음유詩人으로 볼 수 있다.
트로이 전쟁은 실제 있었는가
트로이 전쟁의 역사성에 대한 논의는 더 복잡하다.
기원후 1870년대까지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고대 詩人들이 지어낸 허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1873년 독일 고고학자 슐리만이 트로이 유적 발굴에 성공하고, 그 유적 일부에서 외부의 침입에 의한 파괴와 화재의 흔적이 발견됐다.
한동안 슐리만의 발견에 자극받은 학자들은 트로이 전쟁이 실제로 있었다고 믿었다. 그러나 그 후 고고학자들은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슐리만이 발굴한 트로이 제2 도시가 화재에 의해 완전히 파괴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시기는 대략 기원전 2200~2150년이라는 것이다.
「일리아드」에서 말하는 트로이 전쟁보다 1000년 더 먼 옛날에 벌어진 일이다.
그 이후 고고학에서는 트로이 전쟁이 과연 「일리아드」에서 노래한 모습대로 있었는지 아닌지에 대한 논의가 끊이지 않고 이어졌다.
이 궁금증에 대한 실마리는 의외의 곳에서 발견됐다. 1905년 앙카라에서 동쪽으로 약 200km 떨어진 보가즈쾨이라는 산골 마을에서 지금은 잊혀진 대제국 히타이트의 유적이 발견되었고 곧이어 그 제국의 문자였던 쐐기문자가 해독됐다.
학자들은 히타이트 제국 왕실 기록실에 보관된 문서에서 트로이 전쟁을 노래한 듯한 구절을 찾아냈다. 이 문서에는 「윌루사(Wilusha)」 왕국이 알라크산두 왕 시절에 서쪽의 해상 세력인 아히야와와 분쟁이 있었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히타이트 학자들은 윌루사가 트로이의 또 다른 그리스어 이름인 「윌레오스(Wileos)」일 것으로 믿고 있다. 이 지명에서 「일리온」이라는 지명이 나왔으라는 추측이다.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드」는 「일리온의 이야기」라는 뜻이다. 윌루사의 왕 이름 알라크산두는 파리스의 또 다른 이름인 알렉산드로스와 발음이 비슷하다.
이와 같이 히타이트의 기록에는 그리스人들이 바다를 건너와 트로이와 전쟁을 벌이고 그 도시를 멸망시켰을지도 모르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렇다면 트로이 전쟁은 정말 있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해서는 아무도 섣불리 결론을 내리려 들지 않는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해 트로이 땅에 아홉 개의 도시가 15층 높이로 시루떡처럼 차곡차곡 겹쳐 있음을 알게 됐다.
이 가운데 기원전 1250년쯤에 도시 전체가 화재에 심하게 파괴되고 그 이후 주민들 사이의 위계질서가 깨진 듯한 증거물들이 나오는 제6 도시를 트로이 전쟁이 일어났던 시절의 트로이로 보는 견해가 우세하다.
이때는 청동기의 마지막 시기로 지중해 전체가 새로운 민족의 이동과 청동 제작의 어려움으로 혼란기에 처해 있었다. 그러나 기원전 1250년쯤에 트로이에 전쟁이 있었고 트로이가 이 전쟁으로 말미암아 멸망했다 하더라도 이 전쟁이 바로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노래한 전쟁이었다고 보장할 수는 없다.
「일리아드」는 역사서가 아니라 문학 작품
무엇보다도 「일리아드」는 어디까지나 문학 작품이지 역사 기록은 아니다. 고고학적 발굴은 트로이城을 사이에 두고 단 한 번의 전쟁이 벌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번 전쟁이 있었음을 보여 준다.
그 가운데 어느 것도 호메로스가 「일리아드」에서 그린 그대로의 전개 과정과 모습을 닮은 것은 없다. 호메로스가 「일리아드」를 노래할 때 아마도 수많은 전쟁에서 활동했던 戰士들의 영웅적 행위와 모험을 한 특정 영웅의 것으로 만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전투 장면이나 전쟁의 전개 과정도 한 전쟁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라 여러 번에 걸쳐 있었던 사건들을 詩人의 뛰어난 상상력으로 일관성 있게 再창조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리아드」는 한 구체적인 전쟁에 대한 역사서가 아니라 상당 부분 詩人이 만들어 낸 허구 세계를 노래한 문학 작품이다. 수백 년 동안 일어난 역사적 사건들 가운데 자신의 작품에 어울리는 사건들을 골라내어 자신의 상상력에 의해 하나의 줄거리로 아름답게 만들어 낸 호메로스의 천재성이야말로 모든 창작 행위의 본보기이다.● 월간 조선 2004년 07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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