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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 1
제목 :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 - 1 / 고성애 - 2006-03-29 21:00:28

“나는 마땅히 사직을 위해 죽겠지만 너는 피하여 나라의 계통을 잇도록 하라”

개로왕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475년 9월. 자신의 운명을 예감한 개로왕은 아들 문주에게 ‘피를 토하는’ 유언을 내린다. 한성백제(BC 18~AD 475년) 시대가 비극적인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이와 함께 한성백제의 500년 도읍지 풍납토성도 패배자의 역사 속에 파묻혀 1,400여년간이나 잊혀져 갔다. 그러던 1925년, 이른바 을축년 대홍수로 이름조차 없었던 풍납토성의 서벽마저 대부분 유실된다. 하지만 그 순간 잠자고 있던 한성백제가 깨어날 줄이야.

◇을축년 대홍수로 잠을 깬 한성백제=홍수가 쓸고간 자리에서 백제시대 제사용으로 사용했던 것으로 여겨지는 중국제의 청동제 초두 등 중요 유물이 발견되어 총독부 박물관에 신고된 것이다. 일제는 즉각 이 토성을 ‘풍납리 토성’으로 불렀고 광복 후에도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사적 제11호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풍납토성의 사적 지정 범위는 일제시대 지정된 범위 그대로였다. 즉 잔존하고 있는 토성벽만 지정하고 그 외는 지정대상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성벽 내부는 아무런 조사 없이 급속적인 개발로 말미암아 도시로 변해 버렸다. 결과적으로 지금까지 지정 보호받고 있는 범위가 성벽에 지나지 않아 한마디로 속은 버리고 껍데기만 지정한 꼴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의 비극이 끝나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도 백제의 경우 BC 18년 건국 이후 사비시대인 부여에서 660년 멸망할 때까지의 약 700년 역사 가운데 한성백제 약 500년은 망각한 채 겨우 200여년간 버틴 공주와 부여만을 백제로 알고 있었으니 통탄할 노릇이다.

◇철통같은 기존학설, “풍납토성은 사성(蛇城)일 뿐”=1964년, 필자가 대학 3학년 때의 일이다. 스승인 삼불 김원룡 선생은 서울대 고고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풍납토성을 찾아 야외실습용 시굴조사를 벌였다. 그런데 토성의 북벽 가까운 곳에 8곳의 작은 구덩이를 팠는데 초기백제 토기편들이 나왔다.

선생은 이 결과를 정리하여 출토유물로 보아 기원후 1세기부터 초기백제인 한성백제가 공주로 수도를 옮기기 전까지 5세기 동안 사용한 중요한 성이라고 1967년 발표했다. 말하자면 김원룡은 ‘삼국사기’에 기록된 초기백제의 기록을 믿는 입장에서 해석했던 것이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철저한 ‘무시’였다. 고대 사학계가 한마디로 “말도 안 되는 주장”이라며 묵살한 것이다.

왜냐하면 당시 우리 고대 사학자들은 백제가 기원 전후 시기 한강변에 풍납토성을 쌓을 만한 힘이 있었을 리 없고 한성백제가 명실공히 강력한 왕국으로 고구려·신라와 맞설 수 있었던 시기는 3세기 후반대인 고이왕 때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이 주장이 바로 일제 강점기 때부터 누구도 움직일 수 없는 정설로 자리잡았다. 그랬으니 작은 시굴 구덩이에서 나온 백제유물을 인정할 리 만무였다.

그 기존학설이란 국사학의 태두 이병도 박사가 1933년 “풍납토성은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기록된 사성(蛇城)”이라고 비정(批正)한 것을 뜻한다. 이 백제본기 기록은 “AD 286년 백제 9대 책계왕이 수도인 위례성을 수리하고 고구려의 침입을 막고자 아차성과 사성을 수축했다”는 것이다. 이병도 박사는 “풍납리 지명은 원래 ‘배암(蛇)들이 마을’이 ‘바람들이’로 말이 바뀌었고 이 ‘바람들이’ 지명이 한자로 표기되면 풍(風)은 ‘바람’, 납(納)은 ‘들이’이기 때문에 풍납리가 되었다”고 주장했다. 이 이병도 박사의 주장은 광복 후에도 어느 누구의 반대의견 없이 통용되어 정설이 되었던 것이다.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이것은 고고학자 김원룡의 패배를 뜻하는 것이며, 그가 고고학적인 발굴조사를 통해 얻어진 자료를 분석, 이를 옛 기록에 대입해 새롭게 해석한 노력이 곧바로 암초에 걸렸던 것이라 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일제강점기 때부터 뿌리깊이 내려져 있는 학설을 정면 부인하는 새로운 주장이 먹혀들 리 없었던 것이다.

대신 풍납토성 인근의 몽촌토성이 한성백제의 도읍지(하남위례성)로 각광을 받았다. 몽촌토성은 88서울올림픽 체육시설 및 공원 조성지로 결정되어 1983년부터 서울대 박물관을 중심으로 발굴이 이뤄졌다. 그런데 이곳에서 지상건물터, 움집인 수혈주거터, 저장시설, 방어시설로 보이는 목책 흔적뿐 아니라 백제시대 유물이 다량으로 수습됐다. 그랬으니 몽촌토성이 AD 3세기 중반에서 백제가 패망한 475년까지 약 2세기 동안 존속한 백제의 도성으로 추정되는 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이 성과는 백제가 한강변에서 3세기 후반(고이왕대)에 들어서야 국가의 기반을 잡았다는 기존 국사학설과도 절묘하게 부합되는 것이었다.

잠깐 고개를 들었던 풍납토성은 다시 땅속으로 기어들어갔다. 그러던 사이 사적으로 지정된 토성벽 일부만 제외된 채 성벽의 안팎은 도시화되면서 날로 파괴되어 가고 있었고 1990년대 들어와 경제성장에 따른 주택 재개발이 풍납토성 내부에도 불어닥쳤다.

◇기적처럼 부활한 한성백제=잃어버린 한성백제의 한(恨)은 그다지도 깊었나 보다. 1996년말, 겨울방학을 이용해 학생들과 함께 토성의 정밀실측을 하던 이형구 선문대 교수가 다시 백제의 혼을 일으켰다. 아무도 접근하지 못하게 방호벽을 치고 기초 터파기 공사가 한창인 현대아파트 재개발 부지에 잠입한 이교수는 공사현장 지하 벽면에 백제토기편들이 금맥이 터지듯 무수히 박혀 있는 것을 목격했다. 지하 4m 이상이나 팠는 데도…. 기존 주택건물은 파봐야 2m 정도였기에 깊숙이 박혀 있던 백제유물층을 발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역설적으로 대규모 재개발이 지하 깊숙이 묻힌 백제를 깨웠으니…. 이교수는 즉각 필자에게 숨이 멎을 듯한 목소리로 “나왔어요”하고 더듬거리며 발견사실을 알렸다.

1997년 새해벽두부터 난리가 났다. 언론의 엄청난 관심 속에 국립문화재연구소·서울대박물관·한신대박물관 등이 참여하는 공동 긴급구제발굴이 이뤄졌다. 곧 유구와 유물이 공개되었다. 조사의 성과는 지하 2.5~4m에 걸쳐 유물포함층과 아울러 기원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일종의 방어시설인 3중의 환호(環壕)유구를 비롯, 한성백제 시기의 주거지, 폐기된 유구, 토기 가마 흔적 등이 밝혀진 것이다.

필자도 발굴조사 현장을 참관하고 출토 수습된 유물들을 보면서 백제의 역사는 다시 써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1971년 백제 무령왕릉 이후 백제유적 최대의 발견·발굴이었다. 그것은 1964년 당시 학생신분이지만 최초 발굴에 참여한 필자가 문화유산관련 분야에 종사해 오면서 손 한번 못 써보고 도시화가 되는 것을 방관했다는 죄책감이 일시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한신대 박물관의 발굴에서도 역시 백제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서울대 박물관이 참여한 위치에서는 백제시대와 관련되는 아무런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지 않았다.

아무튼 이렇게 백제가 발견됐으나 발굴이 끝나자 아파트 건축은 이뤄졌다. 어쨌든 이 발견은 서곡에 불과했다. 필자가 민속박물관장 근무를 마치고 1998년 친정인 국립문화재연구소에 돌아온 뒤부터 더욱 엄청난 사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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