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명성황후(明成皇后) 그녀는 누구인가? / 고성애 - 2006-08-06 19:40:05
요즘 우리에게 민비(閔妃)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명성황후에 대한 관심이 지대하다. 지난해에 뮤지컬 명성황후가 대성공을 거두고, 이번에 KBS 기획 드라마 '명성황후'로 인한 사극 바람이 거세기 때문이리라.
명성황후에 대한 생애가 왜곡되거나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게 된 것은 명성황후를 시해했던 일제가 그 후 조선을 강점한 사실을 정당화시키기 위해 지어낸 것이 많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각해 봐야 할 것은 그 부정적인 인식들은 당대 사대 유림들의 비판적 시각에서 먼저 그 원인을 찾아봐야 할 것이다. 또한 명성황후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을 이해하지 않으면 안된다.
명성황후는 1866년(고종 3년) 16세에 왕비로 간택되었고, 이 때 고종의 나이는 15세였다. 명성황후는 여주군 능현리에서 여흥 민씨인 민치록의 딸로 태어났고,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여의게 된다. 아버지 민치록은 젊어서 빈대떡을 먹고 체끼가 있었는데, 평생 그 체끼로 고생을 하다가 명성황후가 8세 되던 해에 후사 없이 돌아가셨다.
- 조선시대 마지막 국왕인 순종의 어머니이며 고종 황제의 비였던 명성황후. 그녀의 생가는 목조로 된 단아한 기와집으로 명성황후가 태어나 황후로 책봉되던 16세까지 살던 집이다. 본채에 4쪽으로 꺾어 부수 건물은 연접되어 있다. 존채는 8작지붕이다.(2000년 7월 29일 여주 신륵사에 들른 길에 명성황후 생가에 가서 찍은 사진.)
대원군이 일부러 자신의 처가의 소녀를 간택한 이유를 3대 60여년에 걸친 세도 정치의 폐단을 막기 위한 최선의 방책이었다고 역사는 서술하고 있다. 또한 명성황후와 대원군의 부인과는 먼 친척 지간인데 대원군은 외척의 권세 위험이 없는 고아 소녀를 적임자로 판단했다고 해 '고아 소녀'임을 강조하고 있다.
- 경기도 여주읍에서 남쪽으로 5km 떨어진 곳에 위치한 명성황후 생가에 대한 안내문이다.
그러나 명성황후가 부모를 일찍 여의고 계모인 한산 이씨 슬하에서 자랐지만 이 한산 이씨가 엄격하면서도 딸을 애지중지 잘 키웠고, 실제론 4촌이나 양자로 온 오라버니 민승호도 총명하고 성품이 곧았던 분으로 현재 드라마에서 묘사되고 있는 것처럼 형편없는 집안은 아니었다.
명성황후가 살았던 감고당은 실제로 숙종의 왕비였다가 장희빈의 계략에 빠져 폐서인이 된 인현왕후가 살던 집이었다고 한다. 사패지지라고 해서 임금의 처가 집에 주는 땅인데, 그 재산이 감고당에 속해 있었던 것이다.
- 인현왕후의 부친인 민유중 선생 묘와 신도비의 안내문이다.
- 신도비의 아래 쪽 설명문과 같이 귀부의 머리가 묘소 쪽을 향해 우향으로 틀고 있는 것이 보인다.
명성황후의 이름에 대한 논란도 많다. 정비석 씨나 강신재 씨의 소설 등에 민자영이라고 나오는데 과연 "왕비로 간택되기 전 명성황후의 본래 이름이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여흥 민씨 집안에서는 그 이름을 받아들일 수 없다고 한다. 족보에는 딸 이름 대신 사위 이름이 오르고, 명성황후의 경우 중전으로 간택이 되면 이름 대신 공란으로 비워 놓기 때문에 실제 불렸던 이름을 알 수 없다고 한다.
일제시대에는 일본에 유학했던 역사 학자들이 일본의 주장만 믿고 명성황후를 민비로 격하시키고, 민비의 치맛바람이 나라를 잡아먹었다고까지 했다. 그녀는 권력에 집착하고, 친족의 이익을 위해 나라를 팔아먹고, 투기와 변덕이 심한 여자로 평가되었었다.
그러나 명성황후는 천성적으로 밝고, 시골 소녀답지 않게 틈틈이 '춘추'와 '춘추좌씨전'을 읽을 정도로 총명했다고 알려져 있다.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사이가 나빠지게 된 것은 연보당 이씨(이 상궁)의 소생인 완화군의 세자 책봉 문제로 알려져 있으나, 실은 명성황후의 첫 출산 후였다고 한다.
1871년 득남을 했는데 항문이 없는 불구였으므로 수술하려 했으나 대원군이 반대하고 약을 내렸는데 그 약을 먹고 병이 더 심해져서 죽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대원군이 내린 약에 문제가 있다고 여겨 그 때부터 둘의 감정 대립이 심화되는 것이다.
명성황후 세력에게 실각당한게 분했던 대원군은 고종 황제의 선물로 속여 오빠 민승호에게 함을 보내 따뜻한 곳에 잘 보관했다가 식구들이 모두 모여 있을 때 펴 보라고 한다. 그리해 민승호와 아들, 한산 이씨 3대가 그 자리에서 폭사하고 만다.
여기서 어떻게 명성황후는 그렇게까지 정치색 강한 여성이 되었는가 하는 점을 살펴보자.
고종에게는 혼인하기 전부터 사랑을 나누던 연보당 이씨가 있어서 명성황후는 초야부터 독수공방을 지켰다고 한다. 게다가 연보당 이씨가 먼저 아들을 낳아 후계자 문제로 명성황후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그녀는 궁내에서는 대단히 칭송을 받았지만, 정작 고종으로부터는 아무런 사랑도 받지 못했다.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여자로서의 좌절감, 수치감에다 후계자 문제가 겹치게 되니 여기서 명성황후의 인간적 변화가 일게 된 것이다.
고종으로 인해 독수공방하는 밤이면 명성황후는 등불의 심지를 돋우고 책읽기에 전념했다. 공자 맹자를 읽고 역사, 정치, 철학을 공부했다. 그녀는 그 누구도 모르게 혼자서 변신을 시도해 간 것이었다.
또 한편 여자로서 몸가꾸기에 혼신의 힘을 기울여, 3년 만에 연보당 이씨에게서 고종의 마음을 돌리기에 성공하게 된다. 명성황후는 고종에게 그간에 읽은 지식을 바탕으로 해 정치 토론도 하고 비판도 하게 되어 고종을 사로잡게 되는데, 이 때부터 고종과 명성황후는 단순한 부부가 아니라 정치적인 동지로 바뀌게 되는 것이다.
명성황후는 연보당 이씨가 외간 남자와 정을 통했다고 고종에게 고해 궁밖으로 쫓아낸 후 자객을 시켜 살해하기에 이른다. 철저하고도 무서운 연적(戀敵) 제거라 아니할 수 없다.
명성황후는 우리 역사에서 보기 드문 정치력을 지닌 대원군을 권좌에서 축출할 정도로 대단한, 정치 수완이 뛰어난 여성이라고 평가되고 있다. 친척 오빠들인 민씨 일가를 요직에 앉혀 놓고 실권을 장악한 것은 차치하고라도, 대원군의 형님, 맏아들로부터 그 심복에 이르기까지 모두 설득하여 자기 세력으로 끌어들인 점은 놀라운 일일뿐이다.
- 명성황후가 고종 황제와 결혼하기 전 16세까지 자라 온 삶의 자리! '왕비로 간택되지 않고 이 집에서 그냥 가족끼리 서로 보듬어 가며 평범히 살았더라면 그 파란만장했던 생이 훨씬 평안했던 것은 아닐까?' 역사란 냉정한 것이어서 가정이 있을 수 없으련만 위와 같은 상상도 해 보게 되었다. 그녀의 점철된 생이 너무 가슴 아파서...
1874년 명성황후는 외아들 세자(순종)가 병약해 아들의 건강을 기원하는 굿을 매일 궁궐에서 한번 씩 하고 무당들에게 비단과 금을 하사해 국고를 축냈다. 왕통을 이을 아들을 위한 모성애의 발로였으나 그것이 거의 광적이어서 비판받고 있는 점이다.
1894년 청일 전쟁후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등에 업은 명성황후를 제거하기로 하고 신임 미우라 코로 공사의 주도로 살해 작전 계획을 세우는데 그것이 일명 '여우 사냥' 이었다.
한국 근대사의 가장 비극적인 사건이라면 단연 1895년의 명성황후 시해 사건이다. 일본 자료들에 의하면, 궁녀로 위장해 있던 명성황후가 발각되어 시해된 것은,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가 누군지 잘 모르자 궁궐에 자주 출입하던 일본인 시녀가 명성황후를 가려낸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한 궁녀의 말을 인용한 '노스 차이나 헤럴드'를 보면 일본 낭인들이 명성황후와 비슷해 보이면 무차별로 죽였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명성황후는 물론 궁녀들까지 억울하게 죽어 갔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나이 마흔 다섯의 일이었다.
명성황후는 폐위되고 본래 청량리 홍릉에 매장했으나 2년 뒤인 1897년 대한제국이 선포된 뒤에 명성(明成)이라는 시호가 내려져서 남양주 금곡으로 천장하게 된다.
- 동쪽 끝부분의 명성황후탄강구리비(明成皇后誕降舊里碑)는 1904년에 건립된 것으로 그 글씨는 고종의 친필이라고 한다. 고종은 명성황후의 혼을 기리기 위해 그녀가 어린 시절 글공부하던 방의 자리에 이 비를 세웠다.
- 비를 보호하기 위한 비각도 1904년에 건립된 것으로 본다.
1995년 초에 일본에서 동경 문학상을 받은 작품이 '민비 암살-조선 왕조 말기의 국모'라는 책이다. 이 책으로 인하여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만행이 알려지게 되었고, 일본인들 스스로도 놀라게 된다. 외국군이 남의 나라의 왕비를 살해한 것은 그 유례가 없는 일이었기에...
- 생가 뒤켠의 굴뚝은 오늘도 말없이 그 곳 그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건만... 이 옛 집도 예전에는 웃음꽃 담 밖으로 흘러나오고 굴뚝에 하얀 연기 피어오르던 넉넉한 곳이었을 텐데...
명성황후란 뮤지컬이 뉴욕 브로드웨이까지 진출하여 대단한 찬사를 받은 것도 의미 있는 일이었지만, 역사적으로 일본의 행적을 만방에 알렸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크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흔히 민비(閔妃)라고 부르는 명성황후! 이제 우리는 민비라는 말 대신 명성황후라고 불러야만 된다. 후세 역사 학자들은 명성황후가 정치 수완이 뛰어난 여걸이라고 평하지만, 그녀의 실책을 꼬집는 걸 잊지 않는다. 이제 그녀에 대한 재조명이 필요한 시점은 아닌가?
- 지붕 위의 제멋대로 자라난 풀들과 이끼들은 덧없는 지난 세월의 흔적들을 말해 줄 수 있을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