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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우리 직원들은 ‘우리 회사’를 3인칭으로 부르고 있을까. 왜 우리에게는 지극히 제한된 연대의식과 빈약한 소속감밖에 없을까.
평생을 Sales로 잔뼈가 굵은 저에게 인간의 정신세계에 대한 탐구는 어렵기 짝이 없는 과제 입니다.
노곤한 오후 점심 먹고 잠깐 졸다가 사장님~ 하고 누군가 귀에 속삭이는 바람에 퍼뜩 잠이 깨었고 그 순간 그에 대한 통찰이 떠올랐습니다.
갑자기 우리에게는 고래힘줄 보다 더 질긴 연대의식과 친 형제보다 더 끈끈한 소속감이 있었던 적이 있다는 사실이 생각 났습니다.

직원이 5명 밖에 없었던 화이스트 상사의 1990년 여름.
그 해도 올해처럼 유난히, 끈질기게 더웠습니다.
Libya로 나가는 Polyester직물의 Packing List를 살펴 보던 우리 회사의 경리과이자 영업부 사원인 Miss김은 깜짝 놀랐습니다. (당시 고대를 다니고 있던 동생에게 학비를 대 주고 있던 부산출신의 Miss Kim은, 파업/농성중인 NYK Line을 찾아가서 울며불며 기광을 부려 농성을 일시 중단 시키고 우리가 필요했던 B/L을 악착같이 찾아 온 엽기전적인 인물로 유명합니다)
같은 Carton box가 여러 개 중복되어 Packing list에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전체 수량도 틀릴 수 있다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Packing list와 실물이 틀리는, 회사의 신뢰를 해칠 수 있는 이런 일은 당시의 카다피가 지배하고 있던 리비아 분위기로는 거래 중단이라는 큰 문제도 야기 할 수 있는 중대 사안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던 일을 즉시 멈추고 숙의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생긴지 1년 밖에 안 된 신생회사로서는 사활이 걸린 일이 틀림없었고 우리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무슨 수가 있어도 막아야 했습니다.
결론은 CY로 가서 컨테이너의 문을 열고 실물을 확인하고 만약 틀린다면 Packing list를 다시 작성해야 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일은 불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미 CY에 들어간 봉인된 컨테이너의 문은 그 누구도 열 수 없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는 우리들이었습니다. 또 누군가 컨테이너의 문을 열도록 허락 한다고 하더라도 바위덩이처럼 무거운 100kg이 넘는 박스들을 모두 꺼내서 물건을 확인하고 P/L를 다시 작성 한 다음 박스들을 다시 컨테이너에 집어 넣어야 하는 중노동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차라리 짜낸 치약을 다시 집어 넣는 것이 더 쉬워 보일 정도로 도저히 가능 할 것 같지 않은 막막한 상황이었습니다.(요즘의 치약은 예전처럼 알루미늄 튜브가 아니라서 그도 쉬워 보입니다만.)
하지만 그렇다고 회사의 운명을 남의 회사의 규정이나 물리적인 노동에 대한 부담 따위에 좌우 되도록 방치 할 수는 없었습니다. 경리과장을 포함한 전 직원이 그날 밤 기차로 부산으로 내려갔습니다.

아침이 되자 비장한 모습으로 CY사무실로 쳐들어가서 부릅뜬 충혈된 눈으로 컨테이너 문을 열게 해 달라고 현장 소장에게 무조건 떼를 썼습니다.
오랜 눈 싸움 끝에 단호한 눈빛을 번득이는 우리가 도저히 물러설 기미를 보이지 않자 마침내 소장은 우리에게 문을 열어도 좋다고 허가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기뻐서 모두 그 자리에서 만세를 불렀습니다. 이제 회사를 구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정작 진짜 고통은 그 다음부터였습니다.

태양이 남중하고 있는 한 여름 뙤약볕 아래에서 우리는 코로부터는 비릿한 부두의 바다내음과 입 속에서의 단 내음을 동시에 맡으며 증기기관차가 김을 뿜어 내듯 열심히 박스들을 나르고 또 날랐습니다. 그 무거운 박스들을 모조리 컨테이너에서 끄집어 내 놓고 실물을 확인하고 다시 집어 넣고 하길 수십 차례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땀으로 번질거리는 3남자의 등이 새까맣게 그을리고 마침내 6개의 다리에 맥이 풀릴 때쯤 그 일은 끝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지쳐 파 김치가 되었지만 파국을 막았다는 사실에 모두 안도했습니다.

우리는 일을 끝내고 부산 역 앞에 있는 사우나에 들러 소금기어린 땀을 깨끗이 씻어내고 소주 한잔을 곁들인 삼겹살과 함께 맛있는 저녁을 먹은 다음 훌훌 막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왔습니다. 우리는 피곤함도 몰랐고 시간 외 수당 없이 20시간 이상을 근무했다는 사실에 대한 불평불만도 전혀 없었습니다.
당시의 우리들은 친형제 보다 더 가까운 연대의식으로 똘똘 뭉친 동지였습니다.

연대의식은 고통에서 나옵니다.
즉 고통을 함께 보낸 사이에서 연대의식은 저절로 우러나는 것입니다. 그 반대로 성공하고 나면 어려웠을 때의 끈끈한 연대 의식은 자취를 감추고 반목과 질시와 불신이 지배하게 됩니다.
오죽하면 가장 친한 두 친구의 사이를 갈라 놓은 가장 좋은 방법은 둘에게 동일한 성공을 안겨주는 일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 입니다.
실제로 고난이나 고통이 연대의식에 관한 한 성공이나 행복과 엄밀하게 반대는 아닐지라도 반비례 관계에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해 보입니다.
군대에서 같이 죽을 고생을 했던 전우들이(후방에서 편하게 군 생활한 군인들 말고) 가장 긴밀한 연대의식으로 뭉쳐져 있다는 것도 그것을 입증합니다. 군대에서 만난 전우들은 나중 제대하고 나서 신분이 달라졌어도 여전히 친구이거나 부하이거나 상사라는 것이 신기하고도 재미있는 사실입니다.

왜 고통과 난국을 함께 해온 동지들의 연대의식이 오히려 행복한 시절을 함께한 동지들보다 더 긴밀해 지는 것일까요. 많은 심리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제가 생각하는 논리는 놀랍게도 바로 마약의 효과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몸은 고통에 오랜 시간 반응하게 되면 대뇌피질에서는 그 고통을 경감시키기 위하여 진통제를 분비합니다. 그 진통제가 바로 엔도르핀입니다.
엔도르핀은 Endo(Inner 또는 Within의 뜻)와 Morphine의 두 글자를 합성하여 만들어진 이름입니다.
여러분은 마라토너스 하이(Marathoner’s High)라는 현상을 직접 겪어 보았거나 아니면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마라토너스 하이란 마라토너가 러닝을 하다 중반부 쯤이 되면 숨이 턱에 차고 다리는 천근만근 무거우며 입에서는 단내가 날 정도로 고통스러워 지지만 어느 순간 갑자기 머리 속이 환하게 밝아지며 팔 다리도 가벼워지고 날아갈 듯 숨도 안 차는 희한한 현상이 나타나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엔도르핀의 분비 때문이고 마라토너들이 그 힘든 고통을 감내할 수 있는 비방이 바로 이 단백질인 것입니다.

그런데 엔도르핀이 나올 때의 그 기분이 바로 마약을 맞았을 때의 기분과 같다고 합니다. 따라서 같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마라토너들은 그렇게 죽어라 고 달리는 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우리 뇌의 기억세포는 바로 이 사실을 잘 기억해 둡니다. 어느 정도 뛰면 기분이 좋아진다. 또는 마약을 맞으면 기분이 좋아진다. 따라서 같은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 같은 행동을 반복 하려고 합니다. 마약 중독은 그래서 생기게 되는 것이지요. 따라서 마라톤도 일종의 마약 중독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예 농담입니다.

엔도르핀이 보여주는 효과의 또 다른 예는 영화 ‘Titanic’에서 주인공인 잭 도슨(레오나르도 디까프리오)이 영상 2도의 차가운 바다 위에서 얼어 죽기 직전에 보여준 상태 입니다. 1시간 이상을 얼음물 같은 바다 위에서 추워 덜덜 떨던 그는 갑자기 몸이 따뜻해 지면서 졸음이 오는 것을 느꼈을 것입니다.(실제로는 20분도 견디기 힘들었으리라 생각 하지만)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이 이제 죽는 신호 라는 것을 감지하고 Rose(케이트 윈슬렛)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Winning that ticket, Rose, was the best thing that ever happened to me.”
도박으로 딴 Titanic의 승선 티켓으로 인해서 자신이 죽게 되었는데도 그 순간 그녀와의 사랑이 목숨보다 더 소중했다고 말하는 장면입니다. 그런 사랑을 받은 여자들은 죽을 때까지 행복 할 것입니다.

이때 잭처럼 졸음을 못 이기고 잠에 빠지면 바로 동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차가운 환경에서 체온을 지탱하던 유일한 통로인 운동을 멈추게 되면 항온 동물인 사람은 급속도로 체온이 떨어지기 때문에 마침내 저체온증으로 죽게 마련입니다.
사람은 죽을 때 가장 많은 엔도르핀을 분비 한다고도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죽음을 맞이하게 되면 살아 생전 그 어느 때도 느끼지 못했던 극치감을 느끼게 될 수도 있다는 얘기 입니다. 사형수가 목을 매달려 죽을 때 황홀한 느낌을 갖게 된다는 얘기와도 일치 합니다. 하지만 죽을 때의 느낌은 도저히 죽은 사람이 그 느낌을 산 사람에게 전달 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미지수로 남겨져 있습니다. 모두 다 추측이라는 말이지요.

결국 고통이 크면 클수록 엔도르핀은 더 많이 분비되고 작은 고통에는 작은 양의 엔도르핀이 분비 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얘기가 길어졌지만 그래서 고통이 지나간 뒤에는 의례히 환희가 찾아 오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 환희를 느낄 때 주위에 같이 있던 사람은 누구던 반갑게 느껴지게 되는 법입니다. 그로 인해 강한 연대의식이 생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결국 연대의식은 고통 끝에 생겨 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보면 달콤한 환희 뒤에 만들어 진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환희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고통이 유발 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대 기업에서 직원들에게 극기훈련을 실시 하는 것도 바로 직원들간의 연대감을 고양시키기 위한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고통은 쾌락을 불러 오고 쾌락은 동지애를 불러옵니다. 결국 동지애는 연대의식으로 발전 합니다.
연대 의식은 마약의 효과 때문입니다.
믿거나 말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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