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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지난 주 금요일 저녁, 최악의 실례라는 것을 무릅쓰고 최고의 턴테이블인 SOTA Star Saphire Nova 기종을 구경(!)하러 박사님 댁을 찾았습니다.  게시판에서 박사님의 허락이 있었다지만 너무 늦은 시간이였지라 망설이고 망설이다가 전화를 드리는 등 오랜만에 '깡'을 동원해야만 했었지요. (관련 글)

항상 어려운 분, 때문에 언제나 예의를 생각해도 모자랄 판에 22:30에 찾아뵙는다고?
용기있는 자만이 미인을 얻으리니! 아, 모르겠습니다. 산다는 게 언제나 반듯하고 정석적일 수만은 없으니까요. (정말? -_-^)

아날로그 vs 디지털

이미 대세가 되어버린 디지털의 시대에서는 모든 것이 참 편리합니다. 하긴 디지털이 지향하는 것 중의 하나가 바로 직관적인 감각인지라 그런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바로 그런 직관성이 디지털의 한계이기도 한 것 같습니다.

사실 아날로그라는 말은 그저 '구식' 정도로 쉽게 오도되어 되어오곤 했습니다. 그걸 조금 더 세련된 말로 표현해 봤자 '복고' 라는 말로 가능했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아날로그에는 역시 첨단이라는 정서가 쉽게 매치되진 않았다는 것이죠.

그러나 ... 이런 생각들은 역시 무지에 대한 인정일 뿐이였습니다.
아날로그가 구식(!)이라니 이 무슨 단순 무식한 편견이였을까요?    

'소리'란 무엇인가?

고가의 오디오 기기에 대해서 사실 제가 갖고 있던 생각이라는 것이 무척 단순합니다. 어느 정도 일정 수준에 이른 기기부터는 가격대 비용의 효용성을 따져봐야 한다고 말이지요. 그 이상의 차이는 분명 기기의 가격과 정비례할 만큼 그 차이가 뚜렷하게 크지 않다는 확신입니다. 뭐 이건 어느 정도 선에서 대충 쇼부(^^)를 볼 수 있다는 생각이겠지요.

그럴 때 흔히 회자하는 핑계는 유명 오디오 기기에 대한 블라인드 테스트였습니다. 전문가들에게 소리만으로 청음을 의뢰해 보면 가격에 대한 차이가 무색할 정도로 소리에 대한 취향이 제각각 다르다는 소식을 종종 듣곤 합니다. 그런 소식이 나오면 저같은 사람은 아주 간단하게 그렇게 이야기 하죠. "거봐"

그런데 말이죠, 소리에 제대로 '미친' 분들은 응당 반격을 가해오시곤 합니다. 그 반격은 아주 간단했습니다.
소리는 애정이다. 그리고 열정이다.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은 그런 상징적인 자기 의지의 반영인 것이다.

음... 그렇습니다. 이게 참 소위 거칠고 막 되먹은 말로 '돈지x'(죄송합니다 바르고 고운 말. -_-v)과는 분명 다른 것일지도 모릅니다. 이걸 궤변이라고 받아들이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공감하시는 분들도 계실 테고 할 텐데 그 경계라는 것도 사실 개인에 따른 이런 저런 차이이기 때문에 뭐라고 단정지어 이야기 할 수는 없겠지요.

명기를 만나다

박사님 댁 거실에 놓인 기기는 종종 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었습니다. 익히 알고 있었던 바대로 메인 앰프는 마크 레빈슨(Mark Levinson), 스피커는 탄노이 웨스트민스터(Westminster)이지요. 대충 눈대중으로 견적을 빼도 (ㅋㅋ) 기 천만 원 대로 짐작되는 시스템에 대한 선입견이라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습니다.

제가 어쩔 수 없이 다소 속물적인지라(T_T) '돈 값'에 대한 기대치를 아무리 억누르려고 해도 잘 안 되더군요.
아아, 소리가 궁금했던 것이지, 돈 값이 궁금했던 것이 아닌데... (오호, 양심에 털이 수북해 지는 느낌! -_-^)

그나저나 역시 한 번도 실물로 접하지 못했던 소타의 턴테이블이 가장 궁금합니다.
아날로그의 궁극, 나도 예술을 보고 싶다!

허겁지겁 눈을 돌려봅니다. 일단 '우와~ 멋지다.'라는 느낌이 절로 듭니다.
중후하고 세련된 ...



▲ 박사님 댁 SOTA Star Saphire

원래 다양한 사진이 좀 있어야 되는데 그건 박사님이 올려주신 게시물에 나와 있으니 패스하도록 합니다. 그나저나 역시 사진이 아무리 좋아도 실물에 대한 느낌은 직접 봐야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런 말도 있잖습니까. 조명빨/사진빨에 속지 말라는... ^^

요리조리 후딱 살펴봤습니다.
사실 시간도 무척 늦었고, 더구나 소리가 가장 궁금해서 시각적 음미에 할애할 시간을 줄여야 했지요.

박사님이 설명을 해주시는 것을 들으면서 중요 포인트만 머리 속에 찰칵합니다.
플래터 섹션이 본체와의 간섭을 최대로 줄이려고 공중 부양을 하고 있더군요. 그래서 웬만한 진동에는 꿈쩍도 하지 않습니다. 실제 박사님께서 플레이 도중 주먹으로 본체 위를 수직으로 탁탁 쳐서 보여주시던데 정말 그렇더군요. (아, 이거 저도 직접 해볼까 하다가 참았습니다. ^^)

보통 일반적인 턴테이블에서 재생을 해보면 판의 상태에 따라 구불구불 하게 플래터가 돌아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잘 관리한 판도 플레이 해보면 다소 그럽니다. -_-) 그런데 이 소타 사파이어는 레코드 중앙을 추로 고정하고 플래터 밑에 달린 비닐 관으로 진공 펌프가 공기를 빨아내어 레코드판을 최대한 수평으로 만들어 주더군요. 막강한 진동방지에 극한의 레코드판의 수평화만으로도 게임 끝입니다. ^^  

첨단의 실제

사실 단순히 눈에 보이는 것 정도만 적었습니다만, 실제론 아마 그 정도가 아니겠죠. 모터의 정확한 스핀들 수치와 정밀한 베어링이 빚어내는 회전수도 음의 왜곡을 철저히 차단하리라 생각됩니다. 사실 평범한 턴테이블에서 조금 민감한 분들이라면 회전수의 정밀함을 실질적으로 느끼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자면 끝도 없겠고 ... 종합하자면 생산된 지가 20년도 넘었지만 전 이 소타를 최첨단이라고 말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최첨단의 개념이란 꼭 시간 개념만으로 설명될 수는 없겠지요. 상대적인 기술수준에 대한 가치 개념도 최첨단의 범주에 들어가니까요.

이 이야기는 박사님께서 말씀하신 바가 정확한 것 같습니다.

"그럼 왜 이게 아직도 최첨단 제품이라 불릴 수 있는 것인가요? 왜냐하면, 턴테이블은 명기가 단종된 80년대에 이미 아날로그 기술의 종국의 경지(leading edge)까지 이르렀고, 그 이후에는 더 만들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더 이상의 기술 개발이 없었고, 현재 향수(鄕愁) 충족용으로 생산되는 턴테이블들은 중국제의 싸구려나, 유럽제의 중급기들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지금의 최첨단 제품들은 아이팟 나노가 될 수 있지만, 고려시대의 청자(celadon)는 그 당시의 최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것이라는 거죠. 지금의 첨단 기술 국가인 일본이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시기에 만든 것은 토기입니다.-_- 걔네들은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임진왜란을 일으키고, 우리의 최첨단 과학자들, 즉 백자를 만드는 도공(陶工)들을 잡아가서 그 첨단기술을 가지고 비로소 백자를 만들게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일본에서는 종이비행기를 접어 날리고 있는 시점에서 우리는 스페이스 셔틀을 만들어 달나라에 보내고 있었던 것입니다.-_-(그러니 지금의 우리들이 많이 반성해야죠. 조상님들 죄송합니다.-_-)"


드디어 듣는 소리

소리의 느낌은... 아, 정말 감동적이더군요.
물론 마크 레빈슨 앰프와 탄노이 웨스트민스터 스피커의 영향이 절대적이겠습니다만.,,

제가 갖고 간 므라빈스키 지휘의 쇼스타고비치 교향곡을 처음으로 소타에 걸고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할 정도였습니다. 돈 값을 한다가 아니라 오랜만에 맛보는 아날로그의 그 투명하고 그윽한 소리, 그런 우아한 정교함에 매니악이 아닌 아무리 막귀더라도 그 느낌은 거의 비슷하지 않을까라는 확신이 들더군요.

밤 12시30분까지 60db 정도에 놓고 여러 장르의 여러 곡들을 CD와도 비교하면서 들었습니다.
네, 그렇게 귀를 처절하게 버렸습니다. T_T 소위 최초의 청음.

박사님 댁이 아파트 였던지라 소리를 더 크게 들을 수 없던 것이 아쉬움 이였습니다. 아무리 스파이크, 방진패드, 튜닝제를 동원한다고 해도 공간의 제약에는 어쩔 수가 없다는 것이죠. 볼륨을 좀 더 높이고 더 높고 넓은 장소에서 들었다면 분명 감동은 두 배 이상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그걸 크게 아쉬워 하고 계신 것 같았습니다. T_T

차를 갖고 가지 않았더라면 내오신 샤도네이를 실컷 마시면서 흠뻑 분위기에 취해보고 싶었습니다만, 으~ 어쨌던 맨 정신에도 뚜렷하게 각인되어 오는 느낌들을 주체할 수 없어서 티를 안 내느라고 혼났습니다.(ㅋ~ 촌티 줄줄 흐릅니다. ^^)

잃어버린 소리를 찾아서

단순하게 감동적이라고 이야기 하는 것, 어떻게 보면 대단히 식상스런 '밋밋함'입니다. 그러나 전 감동이라는 말을 그렇게 흔하고 가볍게 쓰고 싶진 않습니다. 가슴을 쿡(!) 찔러오는 소리, 이거 그저 무식하게 소리가 크다고만 해서 각인되는 느낌은 절대 아니지요. 단적으로 표현한다면 대단히 정교하면서도 깊은 소리입니다. 분명 이게 CD에서는, 또 평범한 시스템에서는 느끼지 못한 소리이기도 하지요.

좋은 소리가 꼭 최첨단이라는 것이 아닌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이런 저런 매너리즘적인 현대식 관성에 길들여져 가면서 좋은 소리에 대한 의지를 많이 잃어버려 갑니다. 물론 실질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부분이긴 합니다만, 그걸 뒷받침 해줄 수 있는 경제력은 그 다음 이야기 정도가 되겠지요.

이런 이야기를 하다보니 제가 주로 즐겨 선택해서 듣는 mp3와 cd의 소리가 왠지 갑자기 초라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게 다 스스로 귀를 베린 업보이겠습니다만... T_T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저도 명기 하나 쯤은 꼬옥 곁에 두고 싶은 생각이 점점 간절해져 오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제 돈, 제 맘대로 쓸 수 있는 싱글 때 사고를 쳐야 하지 않을까요? ㅎㅎㅎ)

박사님 댁에서 느낀 소리는 제겐 잃어버린 소리였던 것 같습니다. 단순히 좋은 시스템에서 들리는 좋은 소리가 아닌 그야말로 매니악들의 이야기인 '소리에 대한 열정과 애정을 일깨워 준' 소리였다는 것이죠. 그게 설령 덧없는 자기 만족이라고 할지언정 전 기꺼이 그 소리를 선택하고 긍정하겠습니다.


늦은 시간 폐를 끼쳤습니다.
초대해 주시고, 좋은 시간 보내게 해주신 박사님과 사모님께 감사드립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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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1'
  • ?
    최재원 2005.09.29 19:28
    저도 소리엔 완전 문맹인 편입니다. 오죽하면 어릴적 유아교육과 다니던 누나한테 피아노 배운다고
    그러다가 박자하나 못 맞춘다고 몇번 세게 지어박히고 부터는 완전히 벽을 쌓고 살았습니다.
    성악가이던 고교 선생님 탓에 몇번 음악회도 가보고 했는데, 정명화, 정명희(?) 등등 이름도 잘
    모르는 유명한 분들 공연때만 염치 불구하고 연애의 장소로 활용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름을 더럽힐까 죄송스럽지만 피아노도 백모모 님의 공연을 갔었는데, 손이 촛불의
    움직임을
    보듯 너무 좋더군요. 가정용 오디오 시스템과 TV나 일반 CD등의 소리에 질려서 음악하곤 담을
    쌓고 살았지요. 그러다가 그렇게 비싸지도 않은 매니아용 오디오와 작은 출력의 스피커의 소리를
    접하고 부터는 소리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변화되더라구요.

    우리나라 사람들이 클래식을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음질 나쁘고, 대량 생산된 조잡한 오디오
    소리에 질려서 싫어하는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음악회의 현장에서 듣는 음악소리를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 없을 거에요.

    군대를 제대하는 날 집에도 안가고 먼저 가본게 막을 내리던 2002년 레 미제라블 공연. 작년엔 맘마미아
    공연도 갔었는데 굳이 클래식과 팝을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못하겠더라구요. 여기 보스턴에서도 라이언
    킹 공연을 보았는데 소리가 진짜 보이더라구요. 들리지 않고 말이죠. 매니아라면 소리만 듣고도 오케
    스트라의 악기 위치까지 맞출 수가 있다던데 너무 부러운 일이지요.

    예전엔 유학생들이 귀국을 할 때엔 몇센트로 살 수 있는 수많은 명반들과 명품 스피커 등을 세관관련자와
    흥정을 해서 들고 들어가곤 했다는 얘길 많이 들었어요. 소리의 문맹인 저에겐 그것도 꿈과 같은 일이지만요.
    어릴적 소질을 길러서 진공관 스피커 만드는 취미라도 개발했으면 좋으련만 영어공부하고, 전공공부하기에
    진이 다 빠지네요. 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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