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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4.09 17:55

포도주 이야기

조회 수 5463 좋아요 781 댓글 1
은 선생님의 포도주에 관한 글을 잘 읽었습니다.
저도 파리에 살면서 15년 가까이 포도주를 마시다보니 글을 한 편 쓰게 되었습니다.
한번 읽어 보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위기의 프랑스포도주산업

「포도주의 왕국」 프랑스에 황혼이 오는가? 몇년전부터 세계적인 생산과잉과 소비감소로 위기의식이 높아지던 프랑스포도주가 2004년 수출액이 10% 감소하고 금년도 1/4분기에 다시 13%가 감소하자 이러다가는 산업이 붕괴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고조되고 있다. 2005년 6월부터 세계의 주요언론에서는 프랑스포도주산업이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하지 않는 한 상황이 더욱 악화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특히 세계포도주의 상징이자 프랑스포도주의 자존심으로 불리는 보르도포도주의 곤두박질은 심상치 않은 흐름을 보여준다. 전세계 포도주생산량(2천6백억리터:2002년 FAO통계)의 약 20%를 차지하며 이태리와 더불어 포도주산업의 맹주였던 프랑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인가? 이번 기회에 포도주의 역사와 기본지식, 왜 프랑스포도주가 유명해졌으며 무엇때문에 위기를 맞고 있는지, 나아가 향후 전망 등을 살펴보기로 한다.

서구문화의 정수이자 하늘이 내려준 선물로 칭송받는 포도주에 대해 세익스피어는 “좋은 포도주는 인간관계를 새롭게 만들어준다”고 예찬한 바 있다. 일찍부터 종교의식에 사용되었던 포도주는 무역의 주요품목이기도 하며 전쟁의 원인이 되기도 했다. 서구문화의 역사가 스며들어 있는 포도주에 대한 정의를 살펴보기로 하자. 포도주는 ‘신선한 포도 또는 포도과즙을 발효시켜 만든 알콜음료제품'으로 정의된다. 포도주는 다른 술과는 달리 제조과정에서 물이나 알코올이 첨가되지 않으면서도 유기산, 무기질 등이 파괴되지 않은 채 포도당분이 살아 있고 알코올 함량이 낮은 특별한 술이다. 포도의 단맛은 포도당으로부터 나오며 껍질(果皮)에는 천연효모가 자라고 있어 터진 상태의 포도는 자연히 발효하여 술이 된다. 인간은 아직 원시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시대에 자연발효된 포도주를 마셨던 것으로 추측된다. 포도주의 어원은 포도나무를 뜻하는 라틴어의 '비눔(vinum)’에서 유래하였으며 비노(vino), 뱅(vin), 바인(wein), 와인(wine) 등에 그 흔적이 남아 있다. 한편 그리스어로 포도주는 오에노(oeno)라고 하는데 오늘날에는 거의 사용되고 있지 않지만 포도주에 관한 학문(oenology)등에 남아 있다.

포도주의 역사
포도주의 역사는 인류와 함께 시작했다고 할 수 있으나 유물로 남아 있는 것으로는 기원전 6000년경 메소포타미아지방과 카스피해근방에서 처음 찾을 수 있다. 기원전 5400년경에 만들어진 이란지역의 자고로스(Zagoros) 북쪽의 하지 피루즈언덕(Hajji Firuz Tepe)의 유적에서 약 9리터의 포도주항아리 5개가 발굴된 것이다.  또한 아라비아반도를 따라 이어진 해안선부근에서는 포도씨와 저장용기 등의 유물들이 계속 발굴되었다. 기원전 5세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는 『역사』에서 아르메니아지역에서 바빌론으로 보내기 위해 선적되는 포도주를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이로 미루어볼 때 당시 메소포타미아지방에서 이미 포도주산업이 발달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또 다른 고대문명인 이집트에서는 원래 포도나무가 없었으나 기원전 2700년경 제 3왕조때 만들어진 벽화에는 포도주제조과정과 항아리그림이 그려져 있다. 나일강하류의 델타지역에 아리비아지역으로부터 포도나무를 가져와 이를 심고 왕(Pharaoh)들이 포도주를 즐겼음을 보여주는 유물들이 나온다. 당시 이집트인들은 시신을 씻고 내장을 꺼낸 후 신체내부를 깨끗이 닦는데 포도주를 이용했다. 많은 무덤에서는 시신과 함께 포도주가 부장품으로 묻혔는데 이는 포도주가 이집트인들에게  얼마나 중요했는지를 보여준다.

포도주의 역사는 그리스에 오면서 큰 획을 긋는다. 그리스신화속에서 포도주의 신 디오니소스신앙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원래 근동과 마케도니아지방에서 광란의 의식에서 숭배되었던 자연신이었는데 그리스에 들어오면서 포도주의 신이자 연극의 수호신으로 자리매김한다.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와 세멜레사이에서 잉태되었으나 세멜레가 헤라의 증오로 일찍 죽자 제우스는 6개월짜리 태아를 자신의 허벅지에 넣고 키운다. 달이 차자 디오니소스는 제우스의 허벅지로부터 태어난다. 디오니소스는 헤라의 질투로 미친 병에 걸렸으나 제우스의 치유를 받아 완쾌된 그는 포도재배법과 포도주를 담그는 법을 가르키면서 여러 곳을 유랑했다. 신화에 따르면 그는 크레타의 왕녀 아리아드네와 결혼하여 세자녀 암펠로스(Ampelos:포도밭), 스타필로스(Staphylos:포도나무), 오이노피온(Oinipion:포도주 애주가)을 두었다. 디오니소스가 그림속에 나타날 때는 항상 포도덩쿨이 달린 지팡이(Thyrsos)를 들고 다닌다. 예술을 즐겼던 그리스인들은 많은 예술품속에서 포도주와 관련된 유물들을 남겨두었다. 먼저 포도주를 담는 도기들이 다양한 형태로 나오는데 운반을 위한 암포라(ampora), 포도주와 물을 섞는 그릇 크라테르(cratere), 술주전자 오에노코에(oenocoe)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주연(symposion)에서는 포도주가 빠질수 없었고 그 때 벽쪽에 있는 길쭉한 의자(banquette)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술자리를 즐겼다. 오늘날에도 서양식당에는 한쪽면에 긴 의자를, 안쪽에는 안락의자를 놓은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고대그리스에서 유래된 것이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히포크라테스와 같은 많은 그리스철학자들은 포도주를 마시며 종교의식을 치르고 신들을 찬양하며 인생을 논했다. 포도주는 단순한 음료수가 아니라 고급문화로서 자리한 것이다. 그리스인들에게는 포도주가 생활속에 자리했기 때문에 그들은 이주하거나 식민지로 개척한 땅에서도 포도나무를 심게 되었다. 그리스의 포도재배는 알렉산더대왕의 원정으로 인해 더욱 확산되었는데 전한(前漢)시대의 중국에까지 포도주가 전파되기도 했다. 그리스인에 의해 로마에 전파된 포도재배 기술은 '팍스 로마나‘를 위해 군대가 주둔한 지역으로 넓게 퍼져 나갔다. 로마인들은 굉장한 포도주 애호가들로서 한때 이탈리아반도내에 포도재배단지의 확대로 곡물을 속주(屬州)에서 수입해야만 하는 상황을 겪기도 했다. 로마군은 오늘날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 독일, 북아프리카 등을 점령하고 포도나무를 심어 포도주를 생산하였다. 점령지에서 포도재배는 군단병사들에게 중요한 업무이기도 했다. 재배지역은 주로 강의 계곡이었는데 프랑스에는 아직도 포도재배의 중심지로 남아 있다. 그들이 강의 계곡을 선택한 것은 △계곡의 경사면은 햇볕을 잘 받고 관개가 편리한 점 △운반을 위해서는 육로보다는 강이 유리한 점 △강둑에 있는 숲을 제거하여 적군의 게릴라전이나 잠복을 방지하는 군사적 목적때문이었다고 한다. 포도주문화는 로마시대에 주둔 군사들의 병영을 중심으로 만개했는데 독일의 스페이어(Speyer)지방에서 발견된 기원후 325년에 만들어진 로마시대의 유리술병을 보면 오늘날의 형태와 거의 비슷하여 우리를 놀라게 한다. 오늘날 유럽의 포도산지 대부분은 로마시대인 기원후 1-5세기에 형성된 것이다.

로마제국의 멸망 후 포도원은 수세기 동안 성당과 수도원에 의해 관리되었다. 당시 모든 학문의 중심지였던 수도원의 수도사들에 의한 포도재배기술의 연구는 포도주의 발전에 크게 공헌했다. 기독교와 포도주는 지난 2000년 동안 애증이 교차하면서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다. 구약성경에는 노아가 대홍수 이후 포도농사를 지었다는 기록이 있다. 예수와 열두제자의 ‘최후의 만찬(la Cène)’에서 포도주는 빵과 더불어 성물로 제공되었으며 성서에서는 포도원을 귀중한 곳으로 언급하고 있다. 기독교가 전파됨에 따라 포도주문화도 확산되었다. 지금도 성당에서는 미사때 굽이 달린 포도주잔(聖杯:chalice)을 쓰는데 이것은 그리스시대에 만들어진 형태를 차용한 것이었다. 오늘날에도 포도주잔들은 반드시 굽이 달린 잔을 사용하는 데 와인의 향기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종교의식에 쓰이던 관습이 계속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포도주의 향기를 보호하는데는 잔의 굽은 아무런 연관이 없지 않은가.

중세이후 포도재배와 포도주의 양조기술은 국가로부터 면세혜택 등 정책적인 배려를 받음에 따라 유럽의 포도원은 거의 귀족이나 교회의 소유가 되었다. 그러나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나고 그들을 보호하고 있던 왕권이 무너지면서 왕의 보호를 받던 귀족이나 교회소유의 포도원들은 소작인들에게 분할된다. 이후 신흥자본가(Bourgeois)에 의한 포도재배가 시작되어 포도주는 종교적인 의미는 사라지고 산업으로서 자리잡는다. 수질이 좋지 않은 서유럽의 일부지역에서 포도주는 물을 대신하는 음료수였고 질병을 예방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당시의 포도주 소비량은 오늘날과 비교되지 않을 정도로 많았다고 한다.  

어떻게 만드는가
오늘날 포도의 학명은 비투스 비니페라(vitus vinifera)라고 하는데 18세기 스웨덴의 식물학자 리메네우스(Carolus Limmaeus)가 붙인 것이다. 이것은 크게 4천여종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품종으로 만든 포도주일지라도 성분을 분석하면 수분 80-90%, 알코올 8-17% 정도이고 나머지는 당분, 비타민, 유기산, 각종 미네랄, 동맥경화를 예방하는 폴리페놀 등으로 구성된다. 그런데 포도주의 맛은 품종뿐만이 아니라 토질, 기온, 강수량, 일조 시간 등 자연적 조건과 더불어 양조법에 따라 달라지게 된다. 지방은 물론이고 같은 포도원일지라도 포도나무위치에 따라 생산된 포도주의 맛과 향이 다른 것이다. 그러나 포도주의 제조과정은 어디에서나 동일하다. 포도주의 제조과정은 크게 포도를 △수확하고 분리 및 파쇄하는 과정, △포도쥬스를 만들고 발효시키는 과정, △숙성과 와인의 병에 담는 과정의 단계로 나눌 수 있다. 먼저 백포도주에 대해 알아보자. 백포도주는 흰 포도로 만드는데 포도수확→ 파쇄(줄기를 골라내고 포도를 으깸)→압착(과즙상태로 됨)→(저장통에 넣어서)발효→찌거기 분리→숙성→여과→병입(甁入)과정을 거친다. 이에 비해 적포도주는 붉은 포도로 만든다. 이론적으로는 붉은 포도를 가지고도 백포도주를 만들 수 있으나 대부분 적포도주를 만드는데 쓰인다. 붉은 포도는 포도껍질에 있는 붉은 색소를 많이 추출해야 하므로 백포도주와는 제조방법이 좀 다르다. 흰 포도는 으깬 뒤 바로 압착하여 나온 과즙을 발효시키지만 붉은 포도는 씨와 껍질을 같이 파쇄하여 발효시킴으로서 붉은 색소가 추출되도록 한다. 이어서 압착하여 과즙을 만들고 다시 한번 발효과정을 거친 것이 다른 점이다. 백포도주는 맛이 상큼하지만 적포도주는 발효시 붉은 색소와 씨와 껍질에 있는 탄닌(tannin)성분까지 함께 추출되어 떫은 맛이 난다.  

포도주는 몇 가지 기준으로 다음과 같이 나눌 수 있다. 먼저 색깔로 적, 백, 분홍포도주로 나누는데 엷은 붉은 색이나 분홍색을 띤 로제(rosé)가 특이하다. 로제는 적포도주와 같이 껍질을 같이 넣고 발효시키다가 어느 정도 포도즙이 우러날 때 껍질을 제거하고 과즙만을 가지고 포도주를 만들었기 때문에 분홍빛을 띠는데 맛은 백포도주와 유사하다. 용도에 따라서는 식사때 반주로 마시는 일반(still)포도주외에도 식전에 식욕을 돋구기 위한 삼페인, 세리 등의 식전용(aperetif), 식후에 소화를 돕는 약간 달콤하고 도수가 약간 높은 식후용(digestif)이 있다. 제조방법에 따라서는 제조과정에서 발생되는 탄산가스를 완전히 제거한 일반포도주와 발효가 끝난 포도주에 다시 당분을 추가하여 인위적으로 재발효시켜 기포가 생기게 만든 스파클링(Sparkling)포도주로 구분된다. 특히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 생산되는 것만을 샴페인이라고 부르는데 이탈리아의 스푸만테와 더불어 대표적인 스파클링포도주이다. 스페인의 셰리(Jerez)나 포르투갈의 포르토(Porto)처럼 발효 중간에 증류주를 첨가해 알코올 함유량을 16~20%로 높인 주정강화포도주(fortified wine)도 있다. 발효시 천연포도당이 모두 발효되어 단맛이 거의 없는 ‘드라이 와인’과 포도당이 남아 단맛이 나는 ‘스위트 와인’이 있다. 맛은 포도즙내 남아 있는 당분에 따라 달라진다. 적포도주는 대부분 단맛이 없지만 색깔이 짙을수록, 백포도주는 색깔이 엷을수록 단맛이 없다. 찬란한 금을 띤 백포도주는 단맛이 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왜 프랑스포도주인가
케사르(Julius Caesar, 기원전 102-44)의 갈리아정복이후 포도주재배가 급속히 확산되었던 프랑스에서는 적절한 기후와 토양으로 말미암아 일찍부터 품질로 명성을 얻게 된다. 또한 프랑크왕국으로부터 시작된 강력한 중앙집권적인 왕권의 보호아래 수도원에서는 안정적으로 포도주를 생산할 수 있었다. 강력한 경쟁국이었던 이탈리아가 오랫동안 소국으로 나누어졌던 반면 프랑스는 중앙집권적인 국가였던 것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프랑스인에게 포도주는 생활의 일부였으며 고유한 문화를 형성하는 중요한 결정요인이기도 했다. 그들의 식탁에는 포도주가 있었고 치즈와 바게트(빵)가 곁들여졌다. 한 자리에 앉아서 수다(?)떨기를 좋아하는 프랑스적인 관습에는 포도주가 촉매역할을 했다. 이 점은 왕가에서도 마찬가지여서 15세기에 디종지역을 중심으로 한 포도주의 명산지 부르고뉴지방을 손에 넣은 왕가의 식탁은 얼마나 풍성했을까. 당시 프랑스왕에게 헌상된 부르고뉴지방의 포도주는 「포도주의 왕(vinum regum)」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또다른 명산지인 보르도는 샤를마뉴대제(Charlemagne, 768-814재위)가 귀족들에게 포도주 생산을 권장함에 따라 포도원이 늘어 났으나 18세기까지 부르고뉴의 명성에 눌려 있었다. 그런데 루이15세(1715-1774)가 집권하면서 보르도지역출신의 첩들이 보르도산 포도주를 궁중에 들여오면서 보르도는 부르고뉴에게 도전하기 시작한다. 이 두 지역의 치열한 경쟁은 프랑스포도주산업을 급속히 발전시킨다. 두 지역에서는 일년 내내 정성을 들여 포도원을 관리하고 양조기법도 발전시켜갔다. 그런데 일찍부터 영국 등에 잘 알려진 보르도포도주의 명성은 1855년 파리에서 개최된 제 4차 세계만국박람회에서 처음으로 포도주가 출품되고 무역상담을 하게 되면서 명성이 더 올라간다. 당시 경쟁국 이탈리아가 아직 정치적 통일을 이루지 못한 상태에 있었던 반면 프랑스는 세계최초로 체계적인 수출상담시장을 연 것이다. 이후 전염병, 생산과잉 등의 위기상황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포도주는 생산량을 줄이거나 품질관리를 통해 극복해가며 용량의 크기, 코르크마개사용, 상표부착 등으로 세계포도주의 표준이 된 것이다. 프랑스포도주가 유명하게 된 동기중의 또 하나는 1860년 파스퇴르가 효모에 의한 알코올발효를 증명했고 1865년 포도주의 산패(酸敗)의 원인균을 발견하고 60도의 저온살균으로 박멸할 수 있음을 밝히어 포도주제조에 크게 공헌하게 된 점도 빠뜨릴 수 없다.

보르도: 양안(兩岸)의 전쟁
오늘날 보르도지뱡은 약65만ha에 이르는 유럽에서 가장 큰 포도원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독일전체의 포도원면적에 상당한다. 생산량으로 볼 때는 전세계의 2%에 불과하지만 전세계 포도주의 표준이 된 데에는 토양과 기후가 크게 작용하였지만 사람들의 노력도 중요했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프랑스포도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보르도를 잘 살펴보아야 한다. 보르도지방은 가론느강을 중심으로 강왼쪽에는 하류로부터 메독, 그라브, 페삭-레오냥, 백포도주의 명산지 소테른, 바르삭이 위치한다. 반면 오른쪽에는 도르도뉴강과 마주친 델타지역에 앙트르 더 메르지역과 도르도뉴강북의 생테밀리옹, 포메롤이 위치한다. 보르도의 포도주에는 쌰또(château)라는 명칭이 따라 붙는데 이것은 정원과 영지가 딸린 귀족스러운 저택을 의미하지만 포도를 재배하고 술을 숙성시킨후 병입하는 농가나 포도주양조장을 의미하기도 한다.

보르도지방은 원래 켈트의 한 부족(Biturige vivisque)이 살았는데 기원전 4세기에 로마군이 진출하면서 로마인들은 이 지방을 부르디갈라(Burdigala)라고 불렀다. 인근지역에 살던 가스콘(Gascon)부족들은 자신들의 언어로 보르되(Bordèu)라고 했는데 이것이 변형되어 보르도(Bordeaux)에 이른다. 불어를 알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항구(Bord des eaux)라는 뜻임이 짐작이 갈 것이다. 보르도지방은 로마시대에 이미 포도재배가 왕성했다. 4세기 집정관(consol)을 지낸 보르도출신의 오소니우스(Decimus Magnus Ausonuis, 310-395, 불어식 표기는 Ausone)가 기록한 것처럼 생산된 포도주는 대부분 같은 지역에서 소비되었다. 보르도 포도주가 명성을 얻게 된 것은 상징적으로 볼 때 1152년 5월 18일에 시작된다. 당시 가론느 강을 중심으로 한 서남부 아키텐지역의 엘레아노르(Eleanor of Aquitaine)가 영국의 헨리 2세(Henry Plantagenet)와 결혼하면서 영국령에 속하게 된다. 이후부터 그곳에서 생산된 모든 포도주들이 영국으로 수출되었는데 영국인들은 이 포도주를 클라렛(claret)이라고 불렀다. 당시 다른 지역에서 나는 포도주들은 약간 노란색이 섞인 붉은 빛이었는데 비해 보르도의 포도주는 짙은 적색을 띠기 때문이었다. 클라렛은 라틴어의 클라라툼(claratum)에서 유래하며 ‘밝은(clear)'을 뜻한다. 보르도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짙은 붉은 색을 나타내는 색깔용어로 쓰이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보르도를 중심으로 한 아키텐지역은 1453년 카스티옹전투에서 영국에 승리하여 백년전쟁을 끝냄과 동시에 다시 프랑스령이 되었다. 당시의 포도원은 대부분 강의 우안지역인 생테밀리옹과 포메롤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런데 17세기부터는 네덜란드상인들이 진출하여 수요가 늘어나자 보르도지역에서는 중요한 변화가 일어난다. 첫째 백포도주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강의 좌안지역에도 포도원이 생기기 시작한 것이다. 생테밀리옹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던 포도원이 메독(médoc: 바다와 강사이의 땅이라는 의미로 로마인들은 medulorum이라고 불렀다)지방으로도 확대되면서 18세기에는 새로운 보르도술(new claret)로 명성을 드높여갔다. 1784년 신생 독립국인 미국의 프랑스초대대사로 부임한 토마스 제퍼슨은 보르도샤또들에 관심을 보여 이를 순방하고 신흥포도재배지역이었던 소테른(Sauternes)의 이깡싸또(Château d'Yquem)에서는 병에다가 사인을 남겨 그의 각별한 애정을 표시하기도 했다. 당시 보르도포도주는 1/3이 수출되는 효자상품이기도 했는데 강을 둘러싼 좌우가 경쟁에 들어선 시기이기도 하다. 이 무렵부터 보르도는 부르고뉴의 명성을 완전히 누르고 프랑스포도주를 대표하게 된다.

1789년 프랑스혁명이후 1792년 8월 10일 소집된 국민공회에서는 의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지롱드(Girondins)당이, 왼쪽에는 자코뱅당이 착석했다. 1793년 왕의 처형에 대한 찬성하던 자코뱅당이 집권하고 지롱드당이 몰락하였는데 지롱드당은 보르도를 중심으로 하였던 지방세습귀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몰락귀족들은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밭을 쪼개어 야금야금 팔기 시작했고 신흥자본가들은 소규모이지만 독립된 포도원의 주인이 되어갔다. 그들은 새로 사들인 포도원을 중심에 양조장을 만들었는데 귀족을 흉내내어 샤또라고 불렀다. 오늘날 보르도에 있는 포도양조장을 샤또라고 부르는 이유는 여기에 서 찾을 수 있다. 그런데 나폴레옹의 집권기간동안 프랑스포도주는 영국에 수출이 금지되어 보르도지역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몰락귀족들은 더욱 생활이 어려워져 포도원을 쪼개어 팔 수밖에 없었고 오늘날 보르도지역에 3000여개의 샤또가 있는 한 이유가 된다.

1855년 파리엑스포: 명품의 국제화
프랑스포도주를 이야기할 때 1855년은 기념비적인 해가 된다. 제2의 공화정이후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 3세는 라이벌 영국을 의식하여 국민들의 인기를 얻기 위해 대대적인 국책사업을 벌인다. 파리에서 세계만국박람회(Exposition Universelle)을 개최한 것이다. 파리엑스포는 1851년 세계최초로 열린 런던, 더블린(53년), 뉴욕(54년)에 이은 4번째였으나 기존 엑스포와는 달리 기계류중심의 신상품을 전시하는 것외에도 농산물과 예술분야를 추가로 소개하였다. 이 박람회는 천백오십만프랑의 예산을 들였으나 수입은 고작 삼백이십만프랑에 그쳐 엄청난 적자를 기록하여 실패한 엑스포였다. 그나마 5백만명이상이 참관한 것이 위안거리였다. 이 당시 정부는 보르도의 상공회의소에 부탁하여 보르도의 명산포도주를 소개하도록 했다. 오늘날 보르도의 5개지역으로 불리는 메독, 페섹-레오냥, 그라브, 생테밀리옹, 뽀메롤 등이 참여를 권유받았으나 뒤의 두 우안지역의 제조업자들은 신흥제조업자들과 같이 출품되는 것을 꺼려 자존심을 걸고 참여를 거부한다. 이를 제외한 앞의 3개 좌안지역의 61개의 포도주가 5개의 등급으로 평가되었는데 이때 가장 우수한 샤또 5곳이 최상등급(premier cru)으로 지정된다. 당시 평가의 기준은 품질, 명성, 지난 100년간의 가격추세 등이었는데 실제로 맛은 보지도 않았다는 것이 재미있다. 당시 포도주에 관한 엑스포의 위력은 상당해서 당시 출품해서 좋은 평가를 받은 포도원들은 세계적인 명성을 얻게 되었다. 이후 메독지역에서는 포도재배가 성행하여 급속히 포도원이 많아지게 된다. 세계의 호사가들이 화제로 삼는 라피트-로쉴드(Lafite-Rothschild), 라뚜르(Latour), 마르고(Margaux), 오-브리옹(Haut-Brion)의 적포도주와 이깡의 백포도주가 최상등급로 지정되었다. 그런데 지금까지 150년동안 등급체계는 변화가 없었으나 딱 한번의 예외가 있었다. 1973년 무똥-로쉴드(Mouton-Rothschild)가 2등급에서 최상등급으로 승급한 것이다. 이를 기념하여 싸또주인이던 로쉴드남작은 상표(label)에 피카소의 그림사용을 간청했고 노대가는 이를 허락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 극적요소를 더한다.  

가론느강의 우안지방들은 이때 참여하지 않은 것을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특히 일찍부터 최고의 명성을 누리던 생테밀리옹지역의 포도원들은 1843년 그 지역에서 로마시대의 빌라(villa Lucaniac)가 발굴되면서 자신들의 지역에서 최초로 포도재배가 시작되었다는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오소니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생테밀리옹은 보르도지방중에서 처음으로 포도를 재배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 지역의 이름은 7세기 브레타뉴지방에서 온 자비로운 신부 에밀리안(Emilian)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했으나 19세기 역사학자 삐가노(E. Piganeau)는 라틴어의 셍트멜리온(Sentmelion)에서 왔으며 디오니소스의 어머니인 ‘세멜레의 샘(fountain of Semele)’ 즉 ‘포도주를 만드는 샘‘이라는 뜻이라고 하는데 오늘날 이것이 정설로 받아들여진다. 17세기부터 포도원이 크게 확대된 생테밀리옹지방은 1855년 엑스포를 애써 무시했지만 외국상인들이 메독으로 몰려들자 1867년 열린 파리엑스포에 적극 참여하여 38개의 출품작이 금메달을 따는 영예를 누렸지만 참가규모와 관심이 떨어지는 바람에 효과가 반감되었다. 오히려 엑스포에 참여함으로 엑스포의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되어 1855년의 등급결정을 더 굳혀 주는 계기가 되고 말았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이 지역상인들은 상인조합을 만들고 품질관리와 수량조절에 집중하게 된다. 그런데 1863년부터 창궐한 포도뿌리전염병(phylloxera)이 특히 가론느서안지방인 메독과 그라브지역에 집중되며서 두 지역의 포도주는 1950년까지 거의 빈사상태에 빠진다. 다행히 우안지방은 피해가 적어 포도주의 종가집다운 위상을 유지하는 듯했다. 그런데 1880년대부터 활발해진 철도의 부설은 물류이동의 혁신을 가져왔다. 포도주도 예외가 아니어서 1890년대에는 당시 식민지였던 알제리로부터 보르도 전체 생산량에 버금가는 년간 7백만 헥토리터(hectoliter:포도주를 나타내는 단위로 100리터에 해당)의 포도주가 들어오는 바람에 공급과잉에 따른 가격폭락이 이어졌다. 1900년 생산원가의 절반에도 못미치는 10프랑에 팔리자 위기감을 느낀 포도원들은 1900년 각 지역에서 조합을 만들었다. 1905년에는 생산과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각 지역에서 자체적으로 카르텔을 구성하여 수량규제를 도입하기도 했다. 그러나 규제에 따른 실효는 거의 없었다. 1907년 포도주에 대한 정의를 보다 명확히 하여 해외에서 들어오는 포도주에 대한 제한을 두었다. (오늘날 EU에서 채택한 포도주의 정의는 앞에서 살펴본 포도주에 대한 프랑스의 정의를 그대로 따르고 있다). 대부분의 포도원에서 적자가 계속되자 재배면적이 줄어들어 1912년 1천6백4십만ha에 이르던 것이 1920년경에는 20%가 감소하게 된다. (참고로 1996년 통계에 의하면 1912년의 절반에 불과하다)

위기에 대한 대응:AOC의 정립  
위기는 가격측면에서도 계속 되었다. 1929년 1헥토리터에 154프랑이던 포도주 도매가격이 32년에는 128프랑으로, 1935년에는 64프랑으로 폭락했다. 소비량은 줄어드는데 공급과잉이 주요인이었다. 일부에서는 포도원을 쪼개어 팔거나 아예 전업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부르고뉴지방의 포도주 명가인 클로 드 부조(Clos de Vougeot)가 당시 포도원을 80개로 쪼개어 판 것이 사례의 하나이다. 최상등급을 생산하던 전통의 명문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여서 1855년 프르미에 크뤼로 지정받았던 오-브리옹샤또가 이 무렵에 미국인에게 팔리게 된다. 상황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당시 포도주산업은 프랑스농업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어서 업계의 불황은 경제위기로 치닫게 된다. 위기에 대한 타개책의 하나로 1932년 ‘크뤼 부르조아(cru bourgeois)’를 만들어 외국산 포도주와 가격차별화를 노렸으나 그나마도 효과가 없었다. (1972년 3개로 나누어져 있던 것을 하나로 통합한 후 282개의 싸또를 지정했으나 큰 의미가 없는 것으로 판명되고 만다). 포도주업계의 거물이었던 까퓌스(Joseph Capus)상원의원이 제안한 개혁안을 놓고 피에르 라발(Pierre Laval)농업장관은 포도주생산업자들을 코레즈에 모이도록 했다. 1936년 5월 원산지명은 해당지역에서 생산된 포도를 사용한 것으로 한정하고 포도품종, 면적당 포도나무수, 알코올도수, 양조량까지도 세세히 규정한 이 원산지통제법을 AOC(appellation d‘Origine controlée)라고 하며 상표에 명기토록 했다. 이 법은 여러 지역에서 생산된 포도주들의 동질성을 유지하고 일정수준이상의 품질을 보증하는 것이 골자였다. 이 원산지통제법은 이를 적용한 포도주와 적용되지 않은 것으로 상품을 차별하여 상당한 효과를 보았다. 당시 생산량의 약 30%가 AOC의 규정에 따라 포도주를 생산했는데 해외로 수출될 때는 대부분 이 포도주들이 선호되었고 이에 참가하지 않은 양조업자들은 고전을 면치 못했다. 오늘날 프랑스포도주는 생산량의 약 40%가 AOC등급이고 나머지는 수준이 떨어진다.  

1855년 엑스포에 참가를 거부한 후 AOC마저도 참여하지 않고 옛 명성에만 의존하던 생테밀리옹지역마저도 백년이 지난 1955년 독자적인 등급체계를 도입한다. 이어 그라브(모래지역을 뜻함)와 포메롤(과수원을 뜻하는 라틴어의  pomarius에서 유래된 지명)지역도 각기 독자적인 등급제도를 실시하게 되었다. 소비자들은 기존의 유명한 샤또 다음으로 AOC가 부착된 포도주들은 중급포도주로, 그렇지 않은 것은 하급포도주로 쉽게 구별할 수 있게 되었다. 생테밀리옹의 등급제도는 원래 10년마다 갱신하기로 했으나 참여자들의 이해관계로 69년, 79년, 84년, 96년에 등급갱신이 각각 이루어졌다. 그들은 자기지역의 포도주를 4단계로 구분하였는데 외국인소비자들에게는 AOC외에도 지역에 따라 수많은 등급제도가 있게 됨으로서 프랑스포도주의 등급체제가 아주 복잡하고 어렵다는 인식을 갖게 하였다.

5대샤또와 명가들
보르도지방에서 생산되는 포도주의 품질이 좋은 것은 토양, 기후와 포도품종의 3박자가 설명할 수 없는 미묘한 상호작용을 하여 최고의 품질을 자랑한다. 이 지역의 토양은 농사에는 부적합하고 비옥하지 않지만 모래나 거친 자갈돌이 많아 배수가 잘 되기때문에 포도나무의 뿌리가 필요한 물과 양분이 흐르는 곳을 찾아 깊숙이 땅속을 파고 들 수 있도록 한다. 따라서 다른 지역의 포도나무들 보다 평균수명이 더 긴 장점이 있다. 봄과 가을에 서리가 내려 작황을 망치기도 하지만 4계절이 분명하고 일조량이 풍부하여 포도재배에 적합한 지방이다.

보르도의 적포도주는 보통 3가지 다른 품종을 섞는데 이것을 비티스 비투리카(vitis biturica)라고 부른다. 이 이름은 이 지역에서 살던 골(Gaule)족의 부족명에서 따온 것으로 까베르네 쇼비뇽(Cabernet Sauvignon), 까베르네 프랑(Cabernet Franc), 멜로(Merlot)등을 가리킨다. 보르도지방은 부르고뉴지방 등 다른 지역에서 단일품종으로 포도주를 만드는 것과는 달리 여러 포도품종을 섞어 양조하는 것이 가장 큰 특색이다. 가론느강을 경계로 메독 등의 좌안지역은 까베르네 쇼비뇽이 주가 되고 포메롤 등의 우안지역은 멜로가 중심이 되어 있는 것도 흥미롭다. 두 지역은 포도원의 원조논란, 1855년 등급체제뿐만 아니라 포도품종으로도 경쟁하고 있는 상황이다. 바로 이런 점으로 인해 보르도 포도주는 풍성한 이야기를 제공해 왔다. 그 중에서도 애호가들이 즐겨 화제로 삼는 것은 5대 샤또에 관한 것일 것이다.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가론느강을 중심으로 좌안과 우안지역의 치열한 경쟁의 결과는 보르도 포도주의 질적완성도를 높여갔다. 특히 선발주자였던 생테밀리옹과 포메롤지역이 1855년 엑스포에 참가를 거부함으로서 신흥업자들인 메독과 그라브지역에서 최초로 공인된 최상급품이 나오면서 상인들은 신흥업자의 좌안지역에서 나오는 명주를 선호하게 되었다. 당시 발표된 5대 쌰또의 구성을 보면 뽀이약(Pauillac)지역이 3개이고 그라브지역 1개이며 소테른지역이 마지막에 있다. 그런데 소테른은 백포도주여서 흔히 5대 싸또를 언급할 때는 소테른을 대신하여 1973년에 유일하게 승급한 뽀이약의 무통-로쉴드를 포함시킨다.

좌안에 위치한 뽀이약은 메독의 상류지역인 오메독(Haut Médoc)지방의 일부 포도원이다. 이곳은 로마시대에 항구로 알려졌는데 뽀이약은 로마시대에 이곳을 왕래하던 배이름(pavillacus)에서 유래한다. 이곳에서는 3개의 최상등급의 포도주를 생산하는 샤또가 있다. 뽀이약에는 17세기부터 본격적으로 포도가 재배된 후 1855년 엑스포를 계기로 세계적인 명성과 지위를 가지게 된다. 그 중에서도 첫 자리에 오른 라피트는 생루이 시대의 귀족이름에서 유래하며 최고의 명문가로 자리잡았다. 10년 이상된 포도주의 병당가격은 적어도 300유로를 넘는다. 1680년에 시작된 라뚜르는 메독지방에서는 가장 오래 된 것중의 하나인데 강에 바로 접하여 있으며 작은 돌탑에서 이름이 유래한다. 47ha에 이르는 ‘분리된 큰 포도원(grand enclos)'으로 유명한데 이곳에서는 12년생 이상의 포도만을 가지고 최상등품을 만들며 같은 밭에서 나온 것일지라도 12년미만은 2등급이 된다. 이곳에서는 좌안의 포도원들과 마찬가지로 까베르네 쇼비뇽이 75%, 멜로 20%에 다른 품종이 추가된다. 참고로 라벨에 라뚜르라고 적은 다음 하이픈으로 연결된 상표는 이 샤또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다. 최상등급 중 세번째로 이름이 오른 마르고는 오묘한 맛으로 이름이 높으며 장기보관에 특히 좋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보르도포도주의 최고전문가인 파커(Robert Parker)는 그의 여러 저서에서 마르고포도주는 가장 전통에 충실한 것으로 칭찬을 아끼지 않은 바 있다. 특히 1990년산 포도주는 전통적인 맛에 충실했다는 점에서 만점을 받는 최고영예를 누린바 있다. 이 샤또는 1750년경 그라브지역의 오-브리앙사또와 혼인관계를 맺고 서로 영향을 주고받아 두 지역의 포도주가 비슷한 경향을 띠게 되었다. 베네치아 출신의 수도승 이름에서 유래한 오-브리옹샤또는 1533년에 포도원이 시작되었으며 그라브지역에서는 가장 오랜된 전통을 자랑한다. 그러나 이 명문이 1935년 미국인에게 팔림으로서 자존심의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그러나 이곳은 다른 뽀이약지방의 포도주들과는 달리 또 다른 깊은 맛으로 포도주의 여왕으로 불리는 보르도포도주의 오묘한 맛을 한껏 자랑한다.

한편 불어로 양을 무통(mouton)이라고 하는데 1973년 예외적으로 최상등급에 오른 무통-로쉴드샤또에는 양의 머리가 샤또를 장식하고 있다. 그러나 원래 어원은 '작은 언덕'을 의미하는 라틴어 모똥(mothon)에서 유래한다. ‘언덕’과 그곳에 사는 짐승(양)의 이름이 옛날에는 같은 단어를 사용했다는 것이 재미있다. 1855년 2등급에 오른 바 있지만, 이에 만족하지 않고 1862년 런던엑스포에 참가하는 등 상품알리기에 주력했다. 1924년 최초로 병입과정을 기계화하여 주위를 놀라게 했고 1945년 상표에다가 대가의 미술작품들을 넣아 차별화를 시작했다. 더구나 캘리포니아의 최대포도원인 이탈리아출신의 몬다비(Robert Mondavi)샤또와 합작하여 포도주의 ‘작품 1번(Opus 1)'을 만드는 등 공격적인 마켓팅에 성공하여 탄탄한 기반을 자랑하게 된다. 그 외에도 보르도에는 많은 명가들이 있는데 포메롤지방의 페트루스(Petrus)는 연간 5만병만을 한정생산하여 유서깊은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 한국에도 잘 알려진 딸보(Talbot)는 15세기 영국의 장군이름에서 유래하는데 1855년 4등급을 받았지만 고급포도주로 이름이 높다.

여기서 잠깐 부르고뉴지방의 포도주에 대해서도 살펴보기로 한다. 부르고뉴지방은 욘강의 계곡을 따라 펼쳐진 포도원을 지칭하는데 1765년-1832년사이에 건설된 욘강과 손강을 연결하는 242km의 운하로 포도원이 더욱 풍성하게 되었다. 1415년 샤를 6세가 상스다리(pont de Sens)를 경계로 두 지역으로 구분한 후 1905년 8월과 1919년 5월에 정해진 법에 따라 5지역으로 세분되었다. 백포도주로 유명한 샤블리, 코트 도르, 마콩, 보졸레로 나누어진다. 원래 이 지역은 프랑쉬 콩트(자유국가라는 뜻)라고 불리는 부르고뉴공국이 있던 지역인데 1467년 루이 11세때 프랑스에 병합된다. 루이11세가 스위스와의 연합작전으로 후손이 없던 마지막 왕 필립을 해위시키면서 많은 영지들은 분할되어 소작을 주게 되었다. 따라서 이 지역의 포도원들은 샤또가 아니라 장원(domaine)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 지역에는 보르도와는 반대로 최상등급을 ‘그랑 크뤼(Grand cru)라고 하고 그 다음 고급품을 '프르미에 크뤼'라고 부른다. 오늘날에는 각각 600여개와 33개가 있다. 특히 이 지역의 그랑 크뤼를 ’테트 드 퀴베(Tête de cuvée)라고 따로 부르기도 한다. 그중에서 로마네-콩티샤또는 최고의 명문가인데 12세기 생 비비앙(Saint-viviant)수도승이 엄선한 피노 노와르품종을 이곳에 들여옴으로서 명산지가 되었다. 1.8ha에 불과한 이곳은 부르고뉴의 포도주의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이때부터 부르고뉴지방의 적포도주는 이 샤또의 영향으로 단일품종의 피노 노와르(Pinot Noir)를 재배하고 백포도주는 샤르도네(Chardonnay)로 담는다. 그러나 남부의 보졸레지역에서는 가메(Gamay)를 이용하기도 한다. 부르고뉴포도주의 상표에는 클로(Clos)가 나오는데 이것은 일반적으로 돌담 등으로 ‘구획된 포도밭’을 의미하며 고급포도주를 나타낸다고 보면 틀림없다. 이 지역의 유명한 적포도주인 포마르(Pommard)는 로마신화의 과일의 여신인 포모나(Pomona)에서 온 것이다. 또 다른 명가인 몽트라쉐(Montrachet)는 불어로 ‘민둥산’이라는 뜻이다. 아마도 포도원이 굉장히 커서 주위에 나무가 없어 보이는 겨울에 붙여진 명칭일 것이다.

새로운 도전
프랑스포도주에 대한 도전은 끊임없이 계속 되어왔다. 16세기 헝가리의 토까이(Tokay)포도주는 합스부르크왕가를 비롯한 유럽의 여러 왕실에 공급되던 명주로 프랑스왕가의 납품을 두고 부르고뉴포도주와 일전을 벌이기도 했다. 결국 부르고뉴가 ‘포도주의 왕’의 호칭을 얻게 되자 토까이의 명성은 사라졌다가 최근에 회복중이다. 근래에 와서는 이태리는 프랑스에 포도주를 알려준 종주국인데다가 세계최대의 생산국이며 가장 다양한 품종을 생산하는 곳이다. 이곳은 국토전역에서 포도주가 생산되기 때문에 포도주의 향기와 맛의 다양함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광범위하다. 그중에서도 북서부 피에몬테(Piedmonte)지역은 무엇보다도 적포도주로 바롤로(Barolo) 와 바바레스꼬(Barbaresco)가 유명하다. 백포도주로는 달콤하면서도 탄산이 있는 아스띠(Asti)가 손꼽힌다. 중서부의 토스카나(Toscana)지역은 이태리에서 가장 유명한 적포도주 끼안띠(Chianti)로 수세기 동안 인기를 끌었다. 시에나(Siena)와 피렌체사이의 중앙언덕에 위치한 끼안띠마을에서 시작한 이 포도주는 급속도로 포도원이 확산되었다. 원산지통제법이 상당적으로 느슨한 비해 지역이 넓다보니 끼안띠라는 상표가 붙은 포도주는 품질이 천차만별이고 값도 뒤죽박죽인 것이 큰 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끼안티는 이태리 최고포도주라는데 이견이 없다.

또다른 경쟁자였던 스페인은 포도밭 면적은 가장 넓지만 날씨가 건조하여 재배 면적당 포도수확량은 많지 않은 편이다. 스페인에서 가장 좋은 와인을 생산하는 대표적인 곳은 리오하(Rioja)와 헤레즈가 손꼽힌다. 영어식 발음인  '세리(Sherry)'로 알려진 헤레즈는 세계적인 명주의 반열에 올라 있다. 바로셀로나를 중심으로 하는 카탈루냐(Cataluna)지역은 지중해 연안에 위치하며 북으로는 피레네산맥, 동남쪽으로는 지중해쪽에 면한 산기슭에 포도원이 있다. 지난 30년 동안 이 지역은 포도원을 확장하여 리오하지역에 필적하는 유명한 지역으로 떠올랐다.

이탈리아와 스페인은 지금가지 부단히 프랑스포도주에 도전했지만 프랑스의 명성을 넘어설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상품의 동질성과 체계적인 품질관리 등에서 프랑스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오늘날에는 국내소비마저 줄어들고 신세계(New World) 포도주생산국들의 품종개량과 기계화에 따른 가격경쟁력에 밀려 도전은 고사하고 급속히 사양길로 접어들고 있다.

위협적인 도전은 신세계 포도주생산국들로부터 지속되고 있다. 선두주자인 미국은 전통(Old World)포도주생산국인 프랑스나 이태리, 스페인에 맞서고 있다. 미국포도주의 85%를 생산하는 캘리포니아지방은 기후와 토양이 포도재배에 이상적인 환경을 갖추고 있다. 특히 유럽품종들을 옮겨와서 이곳의 기후와 토양에 알맞는 품종개발에 성공함으로서 현지화에 성공한 생산업자들은 1983년에 처음으로 토양과 기후에 따라 지역명칭(appellation)을 붙이는 것으로 고급화를 추구하고 있다. 가장 유명한 포도재배지역인 나파계곡(Napa valley)은 샌프란시스코 북쪽에 자리 잡고 있는데 토질이 비옥하여 대량투자로 품질고급화에 나서 프랑스가 지배하던 포도주시장에 도전하고 있다.

호주도 위협적인 존재이다. 2004년 통계에 따르면 30억달러를 수출했는데 특히 영국에 수출을 급속히 늘려가고 있다. 리슬링으로 만든 백포도주는 원산지인 독일산을 능가하는 정상급포도주로 인정받는다. 한편 프랑스에서는 별로 인기가 없는 론(Rhone)지방의 쉬라(Syrah)품종을 개량하여 만든 적포도주는 까베르네 쏘비뇽과 더불어 호주포도주의 미래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호주는 특히 내수가 늘어나고 영국을 중심으로 한 유럽에 고급품을 수출함으로서 프랑스의 수출시장에 위협적인 존재가 되고 있다.

칠레는 포도주업계의 다크호스라고 할 수 있다. 풍부한 일조량, 이상적인 토양, 병충해가 거의 없는 포도원이 코퀸보(Coquimbo)로부터 테뮈코(Temuco)까지 700Km에 걸쳐 64만ha의 포도원이 펼쳐져 있다. 국내시장은 협소하지만 생산되는 포도품종도 다양하고 저가정책을 바탕으로 한 수출이 크게 성공하면서 세계 포도주시장의 판도를 흔들고 있다. 특히 유럽인들이 좋아하는 주요품종을 아예 상표이름으로 사용하여 소비자에게 쉽게 접근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그러나 2년전부터는 공세가 다소 주춤한 편이다.

시장전망
유구한 역사와 종가집의 자존심을 긍지로 삼고 있는 프랑스포도주가 위기에 처한 것은 몇 가지 원인에서 찾을 수 있다. 첫째, 세계적인 포도주의 과잉공급이 가장 큰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프랑스의 국내생산은 늘어나는데 소비는 줄어들어 수출시장의 의존도가 심화되고 있는 상황이다. 그런데 수출시장의 상황은 악화일로에 있다. 프랑스포도주는 신세계포도주생산국인 미국, 호주, 칠레 등과의 가격경쟁에서 밀린다. 그들은 대량투자를 통해 포도원을 크게 만들고 규모의 경제를 살려 대량생산과 생산과정의 기계화, 유통시스템의 간소화 등을 통해 비용절감으로 저가공세로 나서고 있다. 몇몇 포도원을 제외하고는 소규모의 포도원, 복잡한 유통시스템을 고수하는 프랑스로서는 고전을 할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몇년째 지속되는 유로강세도 수출의 걸림돌이 되고 있다.

둘째, 세계적으로 사람들의 식생활변화도 한 요인이 된다. 60년대 세계적인 요리사로 등장한 뽈 보뀌즈가 ‘(새로운 요리(누벨 퀴진)’을 통해 종전 기름진 음식을 대신하여 야채위주의 식단으로 세계적인 추세를 바꾼 바 있다. 이에 따라 식사때 곁들여지던 포도주를 대신하여 가벼운 알코올류가 선호되었다. 식품의 인스턴트화도 포도주소비를 감소시키는 중요한 원인이 됨을 물론이다. 지역에 따라 달리하던 포도주의 잔의 모양만하더라도 격식이 사라짐에 따라 더 이상 포도주는 문화상품의 영역에서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포도주병의 단위가 18세기 300cl에서 현재는 그의 1/4인 75cl으로 변했지만 그것의  반병이 많이 나오는 것은 새로운 식생활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될 수 있다.

셋째, 프랑스포도주가 너무 알려져 프랑스의 포도품종이 전 세계을 석권한 상황이지만 프랑스는 AOC에 묶여 새로운 품종개발, 기술개발 등에 엄격한 제한이 있는 반면, 신세계포도주생산국들은 사또나 도메인으로 그 특정한 맛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포도품종별로 생산하고 누가 봐도 포도주의 맛을 알기 쉽게 포도품종이름으로 상표를 만들어 소비자에게 쉽게 접근한다. 이로 인해 무슨 쌰또니 지역이니 하는 프랑스의 포도주등급체계가 상대적으로 복잡하여 단순함을 좋아하는 현대인에게는 골치 아픈(?) 선택을 하게 만든다.

넷째, 세계적인 기후변화도 중요하다. 기후에 민감한 고급포도주들은 날씨의 미묘한 변화가 맛을 좌우하기 때문에 보르도지방의 기후변화는 상당한 타격을 준다. 종전의 재배방법으로는 더 이상 같은 품질의 포도를 수확할수 없게 된 상황이라고 한다. 아울러 유기농포도주의 등장도 화학비료를 주지 않는 전통적인 포도주명가를 위협하는 요인이기도 하다. 그들이 자랑으로 내세우는 포도재배기법은 결국 유기농방법과 거의 흡사하다. 따라서 신세계포도주생산국에서 대량으로 유기농재배가 이루어진다면 현재 프랑스산 고급품과 신세계의 보통포도주사이의 10배 이상 가격차이를 어떻게 납득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요인들을 감안하면 프랑스의 포도주산업은 점차 황혼기로 접어들 것이다.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요구하는 목소리들은 AOC의 대대적인 개혁으로 모아진다. 그러나 그들의 요구사항을 들어준다고 해도 규모의 경제를 이루지 못하면 프랑스포도주의 경쟁력은 개선효과가 별로 없을 것이라는데 프랑스포도주의 고민이 있다. 더구나 AOC이하의 저급포도주를 만드는 중소업자들은 EU의 공동농업정책에 근거한 보조금으로 근근히 사업을 유지하는 형편이고 보면 첨예하게 이해가 엇갈린 생산조합들의 합의는 쉽지 않을 것이다. 향후 포도주 소비시장은 좋든 싫든 시장원리에 따라 한계양조장들은 도태될 것이고 AOC이상의 상품만이 장기적으로 살아 남을 것이다. 이에 따라 품질에서는 세계적으로 평준화가 점차 이루어지겠지만 가격면에서 양극화현상이 더 심화될지도 모른다. 마치 대중음악이 온통 세상을 지배하는 것같아 보이지만 클래식음악도 건재한 것처럼 명주는 살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김영우)
Comment '1'
  • ?
    이종국 2006.04.11 17:46
    [ raphael@etri.re.케이알 ]

    뉴월드의 와인들이 기세를 올리는 것은 사실이지만.. 떼루아(표현은 좀 힘들지만 밭/기후의 차이라고 해야 하나요? 여러가지 환경을 극복한 힘..등등.으로 표현됩니다.)... 이것 한마디로 프랑스는 살아남을 것 같습니다. ^_^ 특히 피노누아같은 포도 품종에서는 뉴월드가 거의 맥을 못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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