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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미
2005.10.11 09:29

춘천마라톤 도전기

조회 수 5254 좋아요 982 댓글 3
2004년 제가 담당하는 고객사 임원진을 위한 잡지, <신기술 신경영>에 박순백 박사님을 초청하여 박사님의 취미활동에 대해 기사를 게재한 적이 있다.  
그 후 나에게 소원 겸 희망사항 한 가지가 생겼었다.  이 박순백 박사님의 홈페이지에 저의 원고를 하나 올리는 일이었다.  평소 박사님 처럼 글쓰기를 좋아 하는 것도 아니고, 좋아 한다고 한들 아는 게 별로 없으니 지속성이 없을 듯 하여 그럭저럭 시간만 보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얼마전 조선일보 춘천마라톤 사무국에서 마라톤 원고를 하나 쓰라고 해서 <그러마>고 했다.  어떻게 오락가락 원고를 썼는데 통과가 되고 2005년 조선일보 마라톤 참가자에게 배포하는 안내책자에 실리게 되었다.  
순간, 박순백 박사님의 홈페이지가 생각났다.  원을 풀 좋은 기회라고.  그래서 박사님께 안부인사도 드릴 겸 저의 원고를 이곳에 옮겨 싣는다.  이런 자리를 마련해 주신 박사님께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이제 속이 좀 시원하다.


<마라톤, 그 건강한 꿈의 원천>

- 이병윤 -

철이 덜 들어서일까?  어른이 되고 나이가 50이 되어서도 난 어렸을 적 꾸었던 황당한 꿈을 가끔 꾼다.  날개도 없이 몸짓 하나로 하늘을 날아 다니는 꿈이나, 형체없는 귀신 덩어리에게 이리저리 쫓겨 다니는 꿈이 그런 부류들이다.  그런 꿈들은 깨고 나면 늘 신 웃음이 나온다.

5년전 마라톤을 시작한 후 언제부터인가 꿈을 꾸면 힘들게 쫓기는 꿈보다, 강력한 파워로 주변을 압도하는 그런 꿈을 더 많이 꾸게 되었다. 아마도, 마라톤으로 힘이 들어간 다리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마라톤은 꿈속에서도 우리에게 향상된 삶의 질을 제공해 주는 셈이다.        

매년 늦가을이 되면 ‘춘천마라톤’이라는 초대형 마라톤 이벤트가 가슴을 벅차게 한다.  피할 수도 거역할 수도 없는 연례행사지만, 그때마다 새롭게 느껴지는 까닭은 그 백리 길을 대하는 내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컨디션이 다르고, 자신감이 다르고, 그래서 목표와 주로(走路) 전략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지난 무더운 여름 동안 짬 날 때마다 혼자 혹은 동료들과 달리며 마치 ‘신선 도 닦듯’ 연습했는데, 이제 곧 그 결과를 검증하기 위해 장엄한 출발선의 아치에 서게 된다.  정중동(靜中動), 동중정(動中靜)의 출발대열에는 나와 유사한 입장의 매니아 동료들이 오늘의 잔치를 위해 함께 설 것이다.  <마우스 피스>를 물고 링 안에 갇힌 상대에게 돌진해야 할 권투선수처럼, 나는 비장한 자세로 선다.

다리표면에는 스포츠크림을 발라 상쾌한 느낌을 유지하고, 주먹으로는 볼기를 두드리며 얼굴에 긴장을 각인시킨다.  지난 1주일간의 식사조절은 출발선의 몸 상태를 더욱 고조시켜 줄 것이다.

결코 녹록하지 않는 1백리길!  3시간이 넘도록 나는 매 순간 다른 모형의 주로(走路) 공간을 형성해 줄 동반주자들과 함께 달릴 것이다.  나는 동반주자들에게 포위돼 달리기도 하고, 다른 낯 모르는 주자와 1대1 동반주를 하도록 하기도 할 것이다.  나는 뒤에서 감지되는 어느 발자국 소리에 견제를 받기도 하고, 어느 소집단의 선두에 서기도 할 것이다. 나는 이렇게 시시각각 달라지는 나만의 달리기 공간을 감상하며, 그때마다 다른 주로 전략과 주법을 구사하는 즐거움을 맛볼 것이다.

춘천 마라톤처럼 큰 대회에 참가하는 즐거움은, 동반주자가 많을수록 주로의 형태변화가 무쌍하고, 그만큼 즐거움도 크다.  그 즐거움은 춘천호반의 풍광과 어울려 달리기의 기쁨을 더더욱 고조시킨다.

해마다 춘천마라톤에 참가했지만 나는 아마추어답지 못하게 풍광보다는 기록에 더 신경 썼다.  매번 그러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하지만 그게 잘 안된다. 즐기는 마라톤은 언제쯤 가능할까?  전반 코스에는 마음보다 앞서 가려는 청춘의 경쾌한 육신을 애써 억눌러 보자.  그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따라오지 않으려는 노년의 고단한 몸은 미소로 달래 보자. 다른 사람의 속도와 비교하지 않는 자신만의 페이스를 습관화해 보자. 풀 코스 내내 달라지는 다이내믹한 심리적 변화를 음미해 보자.  

그리고 정신통일.  <나는 기관차이다...나는 타고난 마라톤 선수이다…나의 전략은 적중되고 있고, 나는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나는 새로운 잠재력을 발견했다…>

주로에 나와 있는 시민들과도 하이파이브를 한다.  그들은 나를 ‘아놀드 슈와제네거’ 정도로 인식할 것이다.  그들이 나를 그렇게 보는 한 나는 그렇게 될 것이며, 따라서 그들은 내가 오늘의 마라톤을 두 배로 즐기는데 핵심적인 조력자가 될 것이다.  지난 50년 동안 대한민국 역사의 관중에 머물러 있었던 내가 짧은 팬티차림으로 이 거리의 주인공, 행렬의 중요한 구성원으로 거듭나는 순간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꺼져가는 몸으로 마지막 남은 에너지까지 다 태우며 도착한, 내가 그렇게도 도착하고 싶었던 춘천 공설운동장 결승아치는 내가 불과 3시간 전 상쾌한 컨디션으로 출발했던 바로 그 지점일 것이다.  그러나 소양 댐 전후의 가파른 오르막과 내리막, 춘천호반의 곧은 길과 비탈길을 드라마처럼 치열하게 지나 온 내게 그 지점은 결코 같은 지점의 의미로 남아 있지는 않을 것이다.  60갑자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원점에 돌아 온 환갑처럼 나는 시작과 끝의 아주 다른 맛을 작년에 이어 또다시 느끼게 될 것이다.  

40킬로 60갑자 한 바퀴를 돌고 나면 우리는 그 동안 저장한 글리코겐과 운동에너지를 소비하고 또 적지 않은 육체의 고통까지 감내한 끝에, 그 댓가로 퀭한 눈으로 보는 성취의 통렬함과 풍성한 이야깃거리를 얻게 된다.   풀 코스를 완주하는 동안 우리의 몸은 그 동안 쌓아왔던 노폐물을 완전히 소진시킨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서 그 빈 육체의 공간에 새롭고 활기찬 기운이 채워지며, 그 기운은 우리 몸을 바르고 힘있게 서도록 지지해 준다.  

그 3시간짜리 경험은 우리에게 날개 없이 하늘을 날아다니는 황당하지만 건강한 꿈을 꾸도록 이끌어 줄 것이다.                    

<나 지금 뛰러 가는데 같이 안 갈래?>  
5년 전 나와 같은 날 동시에 마라톤을 시작한 아내가 어제 늦게 귀가하는 나에게 밤 11시에 한 전화이다.  

<끝>

이병윤 소개
1956년생. 지난 1999년부터 교사인 아내와 동시에 마라톤을 시작한 부부 마라토너이다.  현재까지 풀코스 15회를 완주한 바 있으며, 120킬로 울트라 1회 및 산악마라톤 수회를 참가한 바 있다.  풀코스 최고기록은 2시간 58분 14초.  하프최고기록은 1시간 25분 26초.  신문 기자를 거쳐 현재 한국IBM 홍보부장으로 재직 중이다.    
        

Comment '3'
  • ?
    박순백 2005.10.11 15:41
    아래 소개 내용에 보시면 아시겠지만, 서브 쓰리를 달성하신 마라톤광이십니다.
    마라톤, 인라인 마라톤보다 훨씬 더 고된 승부를 필요로 하는, 진짜 고독한 스포츠입니다.^^

    이런 멋진 글을 실어주시다니 감사합니다.^^
  • ?
    박순백 2005.10.11 15:43
    http://drspark.dreamwiz.com/cgi-bin/zero/view.php?id=talk&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970

    "인라인 사랑방"의 많은 분들이 이 글을 읽으실 수 있도록 위와 같이 복사를 했습니다.^^
  • ?
    류재영 2005.10.18 18:36
    춘마(춘천마라톤)라는 제목을 보니 반갑습니다. 몇년 전부터 저도 겨울 천마산, 가을 의암호에서 계절과의 만남을 기다립니다. 취미와 운동으로 시작하였지만 이제는 반가운 만남, 간접적으로 느껴지는 노력과 애정의 흔적들이 더욱 소중히 생각됩니다.

    제한시간 내에 들어오시는 분들.. 대단히 존경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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