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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후기
2006.09.27 15:36

샌프란시스코의 도로는 위험하다

조회 수 7816 좋아요 1052 댓글 7

8월 22일인데도 서울은 아직 더웠다. 낮에는 아직도 찌는 듯 무더웠고 밤에도 27도 가까운 열대야가 계속되었다. 미치기 일보직전, 나는 서울을 탈출하였다. 샌프란시스코에서 Old Navy와의 상담이 있었기 때문이다. 1년에 단 두 차례만 주어지는 중요한 상담이다. 이 상담을 위해 우리는 거의 4개월을 준비해야 한다.

샌프란시스코는 지금, 아마도 선선할 것이고 밤에는 춥기까지 할 것이다. 마크 트웨인(Mark Twain)은 자신의 일생 중 가장 사무치게 추웠던 날이 바로 샌프란시스코에서의 여름 밤이었다고 했다.
지금이 트웨인이 얘기했던 바로 그 때이다. 하지만 나는 어리석게도 긴 팔 옷을 준비하지 않았다. 서울이 너무도 더웠던 탓에 긴 팔 옷의 존재 같은 것이 말끔하게 대뇌피질의 기억 세포에서 지워져 버린 탓이었다.
비행기가 이륙하고 3만 피트의 고도로 올라가자 에어컨이 힘차게 돌아가기 시작했고 나는 그제서야 내가 샌프란시스코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사실 비행기의 에어컨은 이상한 것이다. 비행기의 바깥 기온이 영하 50도가 넘는데 히터가 아닌 에어컨이 필요한 이유가 뭘까?
고도 3만 피트 상공은 공기가 희박하다. 따라서 바깥 공기가 그대로 비행기 안으로 유입되면 승객들이 산소부족으로 숨을 쉴 수 없게 된다. 하지만 제트기 엔진은 공기를 압축하여 사용하게 되므로 이렇게 압축된 공기는 사람이 숨을 쉴 수 있을 만큼 산소 농도가 충분하다. 따라서 엔진을 통과한 압축공기를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 엔진을 통과한 압축공기는 뜨겁다. 무려 180도에서 230도 정도이다. 물론 이것은 제트 분사열 때문이 아니라 공기를 압축하는 행위, 그 자체만으로도 공기가 뜨거워 지는 것이다. 자전거 타이어에 바람을 넣는 것은 바로 공기를 압축하는 것과 같은데, 과연 바람을 빵빵 하게 넣은 후 타이어를 만져보면 놀랍게도 타이어가 상당히 뜨거워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이유로 기내에는 강력한 에어컨이 필요한 것이다.

우리는 4일 동안 미국에 머물기로 되어있었으므로 공항에서 차를 빌리는 것이 더 낫다고 판단하였다. 평소 할리 데이비슨 오토바이를 동경하며 험비가 드림카인 C는 찝차를 빌리자고 고집하였다. 우리는 여행 중 비포장 도로를 달릴 계획이 전혀 없었으므로 나는 반대했지만 그의 쇠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험비보다 더 커 보이는 7인 승의 커맨더 찝을 타고 공항을 빠져 나왔다. 생긴 건 노르만디 상륙 작전에 투입되었던 미제 장갑차처럼 투박하게 생겼지만, 유명한 아우디 Q7, X5, Lexus Rx400을 제치고 2007년 최고의 SUV로 뽑힌 바 있는 인기 모델이다. 모습과 걸맞게 강력한 8기통의 5700cc 가솔린 엔진을 갖추고 있는 이 미제 머슬카는 부드럽게 움직였고 엔진 배기음도 비교적 조용했다.


샌프란시스코의 도로는 산 위에 형성된 것들이 대부분이어서 30도가 넘는 경사를 올라가거나 내려가야 할 때가 많았다. 집들은 마치 절벽 위에 세울 수 있는 건축물의 온갖 노하우를 보여 주기 위한 각축장 같았다.

가장 많이 알려진 곳이 바로 그 유명한 소살리토(Sausalito)이다. 금문교 다리를 지나 오른쪽의 작은 길로 내려가다 산 모퉁이를 돌면 돌연 나타나는 이 아름다운 마을은 깎아지른듯한 경사도 높은 산 속에 여기저기 지어놓은 그림 같은 집들로 보통 사람들의 넋을 빼놓기 충분하다.

언덕 배기에 주차해 놓은 차들은 모두 핸들을 잔뜩 도로쪽으로 꺾어놓았다. 혹시라도 브레이크가 풀리면 그대로 언덕 아래까지 굴러 내려가지 않도록 한 배려이다. 하지만 그 잔인한, 경사각 급한 고갯길들을 올라가다 보면 마치 차가 그대로 뒤로 뒤집어질 것 같은 공포에 빠진다. 거기에서 만약 엔진이 꺼지기라도 한다면……

그런데 대부분이 편도 2차선 정도의 좁은 1way인 도로들 중, 2way가 가끔가다 있는 것이 문제였다. 그래서 2way를 주행하다 보면 느닷없이 길 전체가 1way로 바뀌면서 그대로 역 주행이 되고 마는 어이없는 경우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 도로에 주의표시라고는 둥그렇고 빨간 바닥에 하얀 선이 수평으로 가로질러 있는 진입 금지표시판과 ‘Do not Enter’라고 조그맣게 써있는 문구가 전부였다.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가 가지않는 일이어서 나는 그 표시를 보고도 믿어지지 가 않았다. 잘 진행하던 도로가 갑자기 1way, 역 방향으로 바뀌며, 그런 길에 신호등 표시도 없다니…. 이건 마치 누군가 일부러 교통사고 건수를 높이기 위해 꾸민 악랄한 장난 같았다.
때문에 우리는 여러 번 주의를 했건만 결국 C는 아침에 상담을 나서다 역주행을 하고 말았다. 그건 정말 황당하고 충격적인 경험이다.                              

샌프란시스코의 도로에는 신호등이 귀하다. 10m에 교차로가 하나씩 나타날 정도로 워낙 교차로가 많아서인지도 모른다. 길 중앙에 신호등이 있는 곳도 있지만 대부분은 그냥 횡단보도 신호등 옆에 붙어 있는 플래쉬 불빛만한 아주 작은 신호등에 의존한다.

우리는 처음에는 아주 조심스럽게 살금살금 차를 몰고 다녔지만 며칠 지나니 교만한 마음이 생겨 주의력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서울에서는 도저히 만져볼 수도 없는 강력한 엔진의 4륜 구동 찝을 살살 몬다는 것은 엄청난 고통이었다. 우리는 곧 차를 거칠게 몰게 되었다. 그리고 그런 부주의에 대한 대가는 곧 우리를 처절하게 응징하였던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의 마지막 날 밤, 미팅에 참석한 한국 Mill들과 바이어들이 함께 모여 유명한 Tony’s toy restaurant에서 저녁식사를 하기로 되어있었다. 음식은 최고였다. 랍스터와 북경오리를 위시한 6가지의 최고급 코스요리가 제공되었는데 가격은 겨우 60불이었다. 서울이었다면 아마 못 받아도 20만원은 받았을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바이어로부터 우리의 Presentation이 세계 최고였다는 칭찬을 듣고 몹시 기분이 좋았다.

마지막 날, 마지막 식사를 마치고 집에 돌아갈 일만 남자, 우리는 그동안 쌓였던 노독이 한꺼번에 밀려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미국에 온지 3일이 지났지만 아직 시차조정도 채 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나이 탓에 멜라토닌이 고갈되었는지 하루에 3시간 정도 밖에 잘 수 없었다. 눈은 충혈되고 아랫도리가 물속에 잠겨있는 듯 무겁기만 하였다.
우리는 9시 반이 되어 아쉬운 자리를 마감하고 일어섰다. 레스토랑이 있던 몽고메리 스트리트에서 우리의 호텔이 있는 Sutter까지의 거리는 불과 3-4km, 나는 운전대를 잡고 Powell을 지나 Sutter를 향해 차를 몰았다.

피곤했다. 운전대를 잡고있는 내 눈꺼풀이 천근만근 이었다. 나의 자율 신경계는 아세틸콜린(Acetylcholine)이 분비되면서 서서히 부교감 신경의 지배 하로 들어가고있었다. 심장 박동이 느려지고 기도가 좁아지며 혈압이 하강하고 있었다.
사람은 낮에는 교감신경의 지배를 받아 노르아드레날린(Noradrenalin)이 분비되어 대사가 활발해지지만 밤이 되면 쉴 준비를 하게 되면서 부교감신경의 지배 하에 들어가게 된다.

교차로를 건너는데 갑자기 C가 외쳤다. “앗 빨간 불인데 그냥 가면 어떡해요.”
그 소리를 듣는 순간, 섬뜩한 얼음 송곳이 뒷덜미에 꽂히는 느낌이 들었다. 오른쪽 창문으로 신호를 받고 고갯길에서 탄력을 받아 쏜살같이 내려오는 75년형 시보레가 보였다. 나는 순간, 이대로라면 틀림없이 내 차의 뒷 부분을 시보레에게 받힐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차는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있어서 고도가 높은 우리 차를 받으면 우리 차가 전복할지도 몰랐다. 구형차이므로 시보레는 에어백도 없을 것이고 강력한 찝을 들이받으면 시보레 운전자는 크게 다칠 것이다. 뒤로 다른 차가 따라오는 것을 보지는 못했지만 또 다른 충돌이 있을 수도 있다. 엉망이 될 것이다. 우리 차를 얻어 탄 다른 두 사람도 무사하기 힘들 것이다. 그 와중에 경비를 아끼기 위해 보험을 Basic으로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발등을 찍고싶은 기분이었다.

이 모든 생각이 0.1초 사이에 이루어졌고 나의 자율 신경계는 급히 교감Mode로 변환 되었다.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면서 두뇌 활동이 재개되었다. 신경전달 물질의 속도는 시속 350km로 F1경주 자동차의 속도와 맞먹는다. 대뇌의 종합 판단에 의해 나의 체성 신경계는 결국 브레이크 대신 액셀레이터를 밟기로 최종 결정하였다. 나는 액셀을 힘껏 밟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으면서 충돌에 대비했다. 끼이익~ 브레이크가 비명을 토해내는 거친 마찰음이 들렸고, 뒷부분을 강하게 추돌 당한 내 찝은 곧 와장창 소리를 내면서 심하게 돌아갈 것이다. 전복이 될지도 모른다. 운전대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브레이크의 파열음 뒤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내 차는 미꾸라지가 기름 묻은 손에서 빠져나가듯 미끄럽게, C의 표현대로라면 깻잎 한 장 차이로 시보레와의 충돌을 면했다.

나는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에 더욱 더 세게 가속페달을 밟았다. 화가 잔뜩 난 시보레 운전자가 쫓아오는 것 같았다. 내 근육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고 근육에 많은 혈액을 퍼 붓기 위해 심장이 기관차처럼 빨리 뛰기 시작했다. 교감 신경이 최대한으로 활성화 되면서 땀샘에서 땀이 나오는 것이 느껴졌다. 혈액에 더 많은 산소를 공급하기 위해 폐가 바쁘게 움직이는 모양이다. 호흡이 거칠어졌다.

다음 신호가 빨간 불로 바뀌어서 나는 급히 우회전을 한 다음 다시 좌회전을 하였다. 그런데 좌측 길로 들어서자마자 경찰이 보였다. 빨간 플래쉬를 들고 있던 그는 차도에 서 있다가 나를 향해 1way! 라고 고함을 질렀다. 경찰차 옆에 시보레 한대가 엎어져 있었고 나는 순간, 내가 사고 현장으로 다시 돌아왔다는 착각에 빠졌다. 길을 다시 돌아 나오면 경찰과 마주쳐야 할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 하다 그대로 역주행 하였다. 덕분에 심장은 폭발하기 일보 직전이었다. 경찰차가 싸이렌을 울리며 쫓아올 것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찰의 크라운 빅토리아와 추격전을 한판 벌이게 되었다. 하지만 다행히 경찰은 사고 난 차를 수습하느라 나를 쫓아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주 오는 차도 없어서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우리 4명은 한숨을 몰아 쉬고 호텔 로비에 들어섰다.

진정이 잘 되지 않았다. 경찰이 금방이라도 쫓아올 것 같았다. 그 시보레가 멈추면서 다른 충돌을 하지는 않았는지 뒷자리에 앉은 친구에게 물어보았다. 다른 사고는 없이 무사히 정지 했다고 말해주었다. 그래도 불안했다. 경찰차가 호텔 앞으로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것 같다는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만약 그 사람이 다치기라도 했다면 나는 뺑소니가 되고 보석금을 10만 불은 내야 풀려날 수 있을 것이다.

망할 놈의 샌프란시스코 도로였다. 다시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운전 하지않으리라 다짐했다.
시상하부에서 체온을 올리기 위해 피부의 혈관들을 최대한 수축시키며 한차례 진동을 지시하였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샌프란시스코의 8월 밤은 염병나게 추웠다.

Comment '7'
  • ?
    정영기 2006.09.27 16:57
    [ goho99@chol.com ]

    와우....마치 영화의 한장면의 묘사신것 같읍니다....
    수명이...1년은 단축 되셨을듯....
    깔끔하신 글솜씨에 탄성이 절로 나옵니다.
  • ?
    박순백 2006.09.28 13:38
    [ spark@dreamwiz.com ]

    ^^ 정말 멋진 글입니다.

    "CSI-style writing"의 진수를 보여주신 안 선생님의 글.^^
  • ?
    홍종락 2006.09.28 14:14
    [ webmaster@스키돔.co.kr ]

    영화 "The Rock"에서 숀코네리가 하드탑 허머를 타고 센프란시스코를 내달리는 그 장면보다 더 멋집니다.
  • ?
    홍종락 2006.09.28 14:16
    [ webmaster@스키돔.co.kr ]

  • ?
    박순백 2006.09.28 14:47
    [ spark@dreamwiz.com ]

    [동영상에서] 역시 험비의 위력은 대단해요.
    다른 차 받고 지나가는 거 보면...
  • ?
    한상률 2006.09.29 11:29
    [ 19940@paran.com.nospam ]

    인라인계의 괴인 에디 매츠거가 전차와 누가 먼저 오르나 경주했던 곳이군요. ^^
  • ?
    나원규 2007.09.06 10:34
    [ afagom@gmail.콤 ]

    본문중에.. '엔진을 통과한' --> '엔진 압축기를 통과한'
    이제야 봤네요. 히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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