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회 수 4170 좋아요 766 댓글 3
안녕하세요!
한겨레 신문에 "은근한 결론으로 설득하라"라는 안광복 선생님(중동고 철학교사)님의
논술에 관한 글이 올라왔길래 그를 예문으로 해서 우리나라의 잘못된 논술교육에
대해서 글을 써 봅니다. 아무리 어휘를 많이 알고, 고급 영문법을 많이 알아도,
글을 쓰면 콩글리쉬가 되어버리는 이유는 바로 한글의 애매한 어법을 그대로 영어로
옮겨버리기 때문입니다. 한국 영자신문이 미국인이 보기에 이상한 이유이기도 하구요.

기본적으로 고전철학과 아리스토텔레스로부터 기인한 고대 논리학 등이 제대로 보존된
것은 오히려 미국입니다. 영국의 문화를 그대로 들여오지 못하고, 도서관 등을 통해서
세익스피어 등의 고전을 통해 영국과 유럽문화를 받아들인 미국이 "I guess"와 같은
고어를 더 많이 쓰는 이유도 여기에 있구요. 영국은 "I suppose"라고 하는 말을
더 많이 쓰는대, 세익스피어를 통해 영국문화를 배우니까 고여를 평상어로 쓰게 되었던
거죠.

그럼, 한글을 논리적으로 쓰는 것은 영어하곤 다르지 않느냐는 생각을 가지시는 분이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죄송하게도 전혀 그렇진 않습니다. 한국에 들어와있는 논리학
책은 아리스토텔레스 시절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체계화된 서양의 철학중 논리적 진실을
추구하는 체계로, 일본의 번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와 있습니다. 일본의 번역이 엉터리
이기 때문에 이상한 형태로 들어와 있기 때문에 일본어와 한글이 애매한 언어가 되어
버린 것입니다.

우리가 논리에 대해서 얼마나 잘못 알고 있는가 하면, "당신 논리는 당신 생각이고,
내 생각, 내 논리가 있다는" 이상한 얘기에서 가장 잘 알 수가 있습니다. 논리적,
합리적이란 것은 정해져 있는 것이지 이 사람 것과 저 사람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논리(logic)를 사고방식이라고 엉터리로 번역해 버리니까 발생하는 문제죠. 연역법
이든, 귀납법이든, 논리모순이라든지 하는 것은 모두 서양 논리학의 추론 방법입니다.

따라서 논리학에 맞지 않는 주장을 하는 것은 자기 나름의 논리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비합리적인 것이고, 주관적인 것이고, 소위 미국 선교사가 한글은 악마의 언어라고
하면서 도무지 설득을 할 수 없는 언어이다라고 했다는 것의 이유가 됩니다. 참고로
미국 역시 고등학교 졸업을 하지 못하거나(통상 졸업률이 50%미만), 대학 졸업을 하지
않으면 잘 모르는 것이기도 합니다.

물론 미국 사람들도 논리학을 따로 배우기보단, 일상의 수업을 통해서 발표나, 토론을
하면서 스스로 터득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관련된 내용이 전혀
소개가 되지 않거나, 일본식으로 엉뚱하게 소개가 되어 있기 때문에 유명한 논술교사나
심지어 논술문제를 내는 사람조차 모르는 것이 일상입니다. 다만, 유럽이나 미국의
유학생활을 오래한 경우에는 스스로 자연스럽게 체득되어서 논리적으로 말할 수가 있지만
스스로도 왜 자기가 그렇게 얘기하고 다른 사람들은 논리적일 수 없는지 이해를 할 수가
없습니다. 이유를 알고 배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죠. 살다보니 그렇게 변했을 뿐.

우리나라에도 PSAT라고 해도 소위 고시라고 하는 고급공무원 선출시험에서 영어문장을
번역해서 논리추론 문제를 내고는 있지만, 어느 수험교재에도 제대로 된 설명은 없습
니다. 문제를 많이 풀어서 유형을 외워서 푼다는 우리의 전형적인 수험요령만 전수되고
있는 형편이지요.

유럽/남미의 글쓰기 스타일은 통상 길게 쓰는 것이 글을 잘 쓰는 것이라고 알려져 있습
니다. 심지어 남미는 한페이지를 한 문장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이 글을 잘 쓰는 능력이라
고 정의되구요. 유럽의 경우에는 이유나 근거제시가 매우 짧습니다. 하나의 이유만 있다면
무조건 옳다고 글을 쓰게 됩니다. 학설이 발달하고 코멘타르가 발달하는 이유입니다.
반면에 철학적 논리적 진실에 철저한, 오히려 고전적인 논리학에 철저한 미국의 영어의
경우에는 짧은 글, 쉬운 단어로 쓴 글, 자신의 주장을 증명하는 여러가지 이유들에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결론이 옳으냐 그르냐보단, 그 이유가 옳으냐 그르냐에 더 초점을 맞추는
것이죠.

유럽/남미의 글쓰기가 그럴듯한 주장을 많이 늘어놓을 수 있느냐에 초점이 있다면, 미국식
글쓰기는 실제로 그 이유들이 합당한지 여러차례 재점검을 하는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겠습
니다. 하나의 주장이 있으면 그 결론이 무조건 옳다고 고집하는 대륙법 문화가 다양한
이유를 가지고 그 하나 하나를 공격/방어하면서 서로 협상할 수 있는 여지가 많이 만들어
지는 문화에 취약점을 가지게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영미계 로펌이 대륙법계 국가의
로펌시장에 상대적 우위를 점하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개방성의 차이라고 할까요?

안광복 선생님의 예제를 인용해서 왜 잘못된 설명인지 실전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영어로
그대로 옮겨도 콩글리쉬가 되지 않도록 말이죠.

첫째, "엘리트들은 스마트 청바지를 입습니다."가 암시하는 결론을 찾으라고 합니다.
http://www.hani.co.kr/arti/society/schooling/168074.html
(안광복 선생님, "은근한 결론으로 설득하라," 한겨레 신문, 10/29/2006) 그는 이유와
근거만 제시하고 결론은 내리지 말라고 합니다. 이것은 문단이 한 사고의 단위라는 작문의
기초에도 어긋나는 글 작성방법입니다.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는 것이 아니라면 상대방을
설득하는 글을 이렇게 쓰면 절대로 안됩니다.

본문의 내용을 보면, "엘리트가 되려면 스마트 청바지를 입어라"가 정답이 될 듯 합니다.
그렇지만 이것은 문학적 표현이 되거나, 시적 표현, 소위 광고적 상상의 표현이 될 수는
있겠지만, 논술에서 이렇게 쓴다면 완전히 주관적인 비합리적인 글이 되어 버립니다.

철수는 사각 바지를 입습니다.
사각 바지를 입으면 천재가 됩니다.
철수는 천재가 됩니다.

라고 하면 완벽한 삼단논법의 귀납법이 됩니다. 여기에서 두번째 문장이나 첫번째 문장중
하나를 없애고 그것이 무엇인지 찾으라면 추측을 찾는 것이고, 영어시험에선 assumed된
내용을 찾는 것이 되며 없어서 논리적인 글이 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결론을 안써도
암시될 수 있다는 생각은 시적, 문학적으로 훌륭한 창작이 될 수 있지만, 객관적인 논술
이 될 수는 없습니다.

흔히 논술의 모범답안으로 소개되는 글에는 어김없이 우화나 고전속의 사자성어 혹은 속담
의 인용이 보입니다. 그러나 객관적인 글이나 설득을 위한 글, 그러니까 설명문이나 논설
문의 경우에는 가능하면 이러한 비유는 피하는 것이 좋습니다. 왜냐하면 감정적으로 혹은
주관적으로는 해당 우화가 논술의 주제와 비슷한 것 같이 보이지만, 실제로 이렇게 일치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주관적 인상평가로 비슷해 보일 뿐인
것입니다. 이렇게 잘못되거나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는 비유를 인용할 경우에는 유사비교
모순에 해당합니다. 비슷하지도 않는데 비슷하다고 혼자 생각하는 것일 뿐이란 얘기죠.

논술은 감동을 주기위해 글을 쓰는 문학적인 글도 아니고, 어려운 고전속 에피소드나
사자성어를 인용해 글의 품위를 높이는 등으로 쓰는 글도 아닙니다. 상대를 설득하는 것은
감동을 주는 것이 아니라 논리에 맞게 합리적인 주장을 하므로써 상대가 고개를 끄덕이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객관적이어야 하는 것이죠. 그렇게 되면 바로 영어로 옮긴다고 해도
콩글리쉬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서양의 논리학을 쓰면서, 연역법, 귀납법의 정의를 일본식/한국식으로 내리면서 이상하게
글을 쓰는 것은 말이 안됩니다.

진실에는 실체적 진실, 형식적 진실, 그리고 논리적 진실로 나뉘게 됩니다. 통상 미국
사람들은 논리적으로 사고하여 내린 결론에 집착하게 되는데 이 역시 법률적 진실 앞에선
주관적인 것이 됩니다. 논리적으로 A가 범인이라고 해도 증거가 없다면 그가 범인으로
처벌받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한국이나 일본의 주관적인 것이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그냥 주관적으로 A가 범인일 것 같다는 쪽에 가깝습니다. 물론 자기 나름의 이유는
있습니다. 범인형으로 생겼다거나, 과거에 전과가 있다거나 하는 것이죠. 그러나 이것은
법률적인 근거가 될 수도 없고, 논리적인 근거도 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느낌, 소위
인상평가에 의한 주관이죠.

기독교 사회인 서양에선 실체적 진실은 신 밖에 모르는 것이고, 동양에선 부처밖에 모르
는 것이죠. 인간이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다신교적 사회에서
나 가능한 생각이니까요. 따라서 서양은 철학의 세계에선 논리적 진실을 신학의 영역밖에선
최고의 진실로 인정하고, 법학의 세계에선 논리적 진실을 넘어서 증거우위의 법칙 혹은,
합리적인 의심을 넘어서라는 원칙으로 진실을 추구하게 됩니다.

반면에 일본이나 한국은 권위를 가진 사람의 얘기가 진실이 되고, 권위가 없으면 그 사람의
말이 맞는 얘기이든 아니든 신뢰를 얻지 못합니다. 또한 독립법원인 법관은 소송절차에
의한 시간낭비 등은 개념치 않고, 당사자나 변호사들의 끊임없는 공방을 허용함으로써 공판
중심주의의 단점을 누증시켜서, 다시 말하면 당사자들의 속마음을 다 털어놓게 허용을 하는
등 절차의 위반 정도는 실체적 진실을 밝히자는 원칙에 의해 무시되기도 하는 것이죠.

물론 재판이 끝나도 어느 당사자도 만족을 못하고 불만을 터트리게 되는 이유이기도 하구요.
자신이 이기지 못하면 무조건 법원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죠. 법률적인 이유가 아니라
자기 생각에 상대방이 무조건 더 잘못했다는 생각이 앞서게 되는 이유가 되기도 하구요.

우리 교육제도에서 빠져있는게 있다면 빨리 제도를 도입하고, 장단점을 비교해서 한국화를
하면 됩니다. 분명 동양의 통합적인 문화와 서양의 듀얼리즘, 분리적인 문화는 일장일단이
있으며 서로 조화될 때에 비로서 문명간의 대화가 가능할 테니까요. 논술을 학원에서 1-2년
안에 배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잘못이고, 학교에서 가르치지도 않는데 대학 입시에서
평가를 하겠다고 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학교에서 토론과 발표/ 그리고 글쓰기 수업이
이루어지도록 교육제도를 바꾸고, 그 학생들이 유치원에서 고등학교를 거칠 때까지 기다린
다음에 평가를 한다고 하면 또 모르겠지만요.

객관적인 기준이 없이 채점자의 주관을 학생들에게 주입시킬 생각이라면 일찍 제도를 없애
버리는 게 더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창의적인 글쓰기나 학문의 발전을 위해 전혀 도움
이 되지 않는 제도이니까요. 참고로 프랑스이 논술은 위원들이 모범답안을 작성하고, 해당
내용마다 객관적인 점수를 부여해서 선생님마다 다른 채점결과가 나오지 않도록 한다는 데에서
채점자 마음대로 채점하는 우리와는 전혀 다른 제도입니다. 미국의 새로운 SAT에 첨부되는
에세이는 명문대의 경우 지나치게 주관적이란 이유로 점수로 참고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논술학원의 상업성을 위해서 더이상 글쓰기교육이 왜곡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차라리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을 쓰게 하거나, 전공에 따라서 자유롭게 적성이나 학습계획
등을 작성하게 하는 자기소개서가 훨씬 수험자의 특성을 잘 반영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프랑스식도 아니고, 미국식도 아니고 그냥 출제위원들의 상식에 따른 문제출제는 엉터리
투성이의 한국화의 또다른 실패작일 뿐이라 생각합니다.

최재원 올림.
Comment '3'
  • ?
    김문형 2006.10.31 18:25
    [ coolski@coolski.net ]

    최재원 선생님의 글을 즐겨 읽는 사람입니다. 늘 느끼는 것이지만 무척 논리적이고
    '학생'다운 기운이 풍겨 기분이 좋습니다. 하지만 안광복 선생님의 글에 대한 언급은
    살짝 글의 논지를 비껴나간 듯 합니다. 달을 가르키는데 손가락이 못생겼다고 하는
    말이 생각난다고 할까요?^^

    논술시험에 대한 최재원 선생님의 의견은 전적으로 동감입니다. 하지만 안광복 선생님의
    글은 논술에 대한 강의라기 보다는 실제생활에서의 지혜 차원의 언급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오해가 발생한 것은 그 글이 '기사'이고 언론의 속성상 논술 이라는 핫 이슈에 촛점을
    맞추다 보니 생겨난 것이 아닌가 짐작해봅니다. 미스 매칭이라고 해야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물론그 글을 안광복 선생님이 논술고사를 보게될 학생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 목적으로
    쓴 것이라면 잘못된 것이겠지만 말입니다.

    실제 생활에서는 딱부러지는 결론을 내리는 것보다 안광복 선생님이 주장한 것처럼
    상대방으로 하여금 결론을 추측하게 만드는 것이 훨씬 실용적이고 효과가 있는 것은
    분명하다고 생각됩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설득당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상대방에게 무언가를 하게 하고 싶다면 그 사람이 그걸 하고 싶도록 만드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인 것이지요.^^

    게다가 사람들은 실체적 진실을 원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적당하고 자신이 쉽게 납득할
    만한 설명을 더 좋아합니다. '증명'에 쓰여서는 안되는 '설명'을 위한 도구인 '비유'가
    그토록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알고 잘 활용하면
    좋겠지만 꼭 악용하는 사람들이 있어 문제가 생깁니다. 특히 정치쪽...^^

    좋은 글 계속 올려주세요. ^^
  • ?
    최재원 2006.11.01 04:05
    [ saro@dreamwiz.com ]

    김문형 선생님의 좋은 말씀 고맙습니다. 문제는 우리나라 사람들끼리만 이 지구에
    살 수 있지 않다는 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외국 사람들과도 교류를 해야 한다는데에
    문제가 있지요. 일상생활에서 그것이 효과가 있다고 해서 우리 후손들을 계속 그렇게
    살도록 해야 하느냐는데에 저의 의문점이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 사회는 명문대를 나와서 고시에 합격하거나 사자가 되고, 강남에 아파트를
    가지고 살면 발언권도 있고, 큰소리 치며 살 수가 있습니다. 통상은 고생을 원하지도
    않지요. 그렇다고 우리 후손들이 이렇게 사회 조류에 맞춰가며 자신이 하고 싶은 것,
    자신의 생각을 감추며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논술시험을 위한 글이 따로 있고, 신문사설이나 일상생활 속에서 쓰는 글이 따로 있다고
    생각하시는 거 자체가 우리 교육제도의 가장 큰 잘못 입니다. 즉, 공부는 일상생활과 아무런
    연관성이 없다는 생각이지요. 수학 배워서, 역사 배워서 밥주느냐는 생각입니다. 교육제도가
    잘못되어서 그런것이지, 학교에서 배우는 것이 도대체 왜 일상생활에 전혀 적용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해야 되느냐는 것입니다.

    시험을 치기 위한 것이 따로 있고, 삶을 살기 위한 것이 따로 있다면 그야말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뜯어 고쳐야겠지요.

    문제는 감동을 주기 위한 글은 문학적이거나 시적인 글이 될 수는 있어도 삶속에서 발생하는
    사람들간의 갈등, 분쟁을 해결하는 것에는 전혀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감동을 주는 CF보단
    인기있는 연예인이 나오는 CF의 상품이 훨씬 더 잘 팔리는 이유는 감동이나 육감적인 욕구나
    모두 인가의 심퍼테틱 너브를 이용하는데에 있기 때문입니다. 교감신경과 부교감신경중 이성보단
    성적매력에 호소하는 것이 훨씬 좋다는 것이죠.

    한국이나 일본이 연예인을 활용한 CF나 인기인을 활용한 영화/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반면에
    서양사회는 연예인 보단 일반인을 CF에 기용하는 차이점이 나오는 것도 이런 문화적 차이게
    기인합니다. 연예인이 아프리카에 가서 불쌍한 아이들을 않고 울면서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나
    일반인이 아프리카에서 차분히 도움을 호소하는 것이나 같은 효과가 나와야 하는 것이 옳바른
    사회가 아니겠습니까? 이런 공익성 광고에까지 연예인을 동원해야만 하는 사회가 옳바른 사회는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것이 실제 사회에서 효과가 있는 것이라 해도 말입니다.

    감동에 호소하는 것은 전형적인 논리모순인데 한국은 이것이 글을 잘 쓴다고 하는 데에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왜 문제가 있느냐구요?

    지지자의 글을 지지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이순신을 지지하거나 세종대왕을 연구
    하는데에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그런데 논쟁거리가 되는 연산군에 관한 얘기나, 이순신의
    적으로 등장하는 장수에 대한 얘기에 대해서는 어떻게 됩니까?

    소위 지역감정이라고 말하는 상대방의 지역에 대한 얘기는 어떻게 합니까? 황우석 지지자와
    반대자의 견해가 갈리고, 어떤 정치인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의 견해가 갈리는 경우는 어떻게
    합니까? 어떤 이념에 대한 지지자와 반대자의 견해가 갈리는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진보지지자는 감동을 하는 글은, 보수 지지자에겐 감동을 주기는 커녕 반감만을 불러 일으킵니다.
    역으로도 마찬가지이구요. 이렇게 되면 싸움만 하게 됩니다. 진보가 옳으니 보수가 옳으니 하면서
    이념 싸움만 하게 됩니다. 즉, 감동을 받는다는 것은 감정적인 지지 성향과 연관이 있기 때문에
    자기 지지자를 모으기에는 좋은 연설과 웅변이지만, 사회를 발전시키고, 논의를 진행시키는 토론을
    위한 글로써는 중립성을 상실한 글이 되어 버립니다.

    가령 좋은게 좋은 것이다라는 전제하에서 모든 사람에게 눈물을 흘리게 해야만 한다라고 한다면
    사회개혁은 불가능합니다. 무언가 잘못되어 있는 것을 비판하는데, 비판 받는 사람이 감동을 받지는
    못하니까요. 진보주의자가 보수주의자를 감동시킬 수 있습니까? 불가능한 일이지요. 물론 개혁을
    하지 않고, 황희정승 처럼 네가 옳다, 네가 옳다라고 한다면 모든 진영에서 칭찬을 받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비판을 하면 감동을 주지 못하니까 무례한 것이다라고 하면 현 체계를 보수적으로 지지하는
    사람들에겐 아무 문제가 없겠지만, 지금 체계하에서 고생하는 사람들에겐 심각한 문제가 됩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의 윌슨 대통령을 지지하고, 일본과 카스라테프트 밀약을
    맺고, 러일전쟁을 평화적으로 해결하는데 일조한 아버지 루즈벨트 대통령을 미워한다고 가정합시다.
    그런데 윌슨이 국제연맹안에서 주장한 것은 세계평화이고, 그 방법은 현재의 국경과 식민지에 관한
    권한을 그대로 인정하고, 그것을 깨려고 하는 나라엔 연맹군을 활용해 제재를 하자고 했습니다. 그러면
    한국은 영원이 독립이 안되는 것이죠. 한국의 독립운동은 국제연맹의 평화정책에 위반되는 행위가 되는
    것이구요. 과연 그런가요? 명백히 아니죠.

    감동을 주는 글은 어떠한 사회갈등도 해결할 수가 없습니다. 누구에게 감동을 준다고 해서 그 사람이
    훌륭한 사람이 될 수는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들의 지지자에게만 훌륭한 사람이지, 반대자에겐 감동이
    아니라 고통을 주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갈등을 해소하는 글이란 너도 좋고 나도 좋고라는 식의 양시론이
    아니라 실은 논리적으로 이부분은 옳고 저부분은 그르고를 판단하고, 그 다음엔 서로 다른 부분을 하나씩
    양보하면서 50대 50으로 나누기보단, 이유가 타당한 부분은 9대1로 나누기도 하고, 인류공통의 진리 즉,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는 것과 같은 것은 10대 0으로 나누기도 하면서 사회의 대타협을 이루어 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는 것입니다.

    특정 이념을 위한 10대 0의 싸움이 아니고, 사회안정과 평화를 위한 0대 10의 논쟁이 되더라도 대화를
    해야 하는 것이죠. 분쟁 당사자 모두를 감동시키는 방법은 없으니까 감정에 호소하는 글을 쓰지 말라고
    하는 것이 논설문과 설명문의 기본입니다. 물론 문학과 시, 수필 같은 것은 전혀 별게의 문제입니다.
    지지자나 메니아만 읽으면 되니까요.

    논지는 좋은게 좋은게 아니라 옳고 그른 것은 있는 것이고, 그 진실의 위에서 옳은 것만 고집해서도 안되고
    그른 사람하고도 협상을 하고, 하나씩 주고 받거나, 화해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감동을
    주는 사람이 쿠데타를 하라고 하고(극보수), 폭력시위를 하라고 해서(극진보) 그대로 따르는 사람을 만들지
    말고, 평화롭게 비폭력적으로 자신의 주장을 냉정하게 말하고, 웃으면서 자기가 싫어하는 사상, 이념의 얘기도
    들어가면서, 서로 양보하기도 하고, 이렇게 밀고 당기면서 100점인 결론보단, 7-80점인 사회 대타협안을
    만드는 것이 지속적인 사회발전의 긴요라고 생각합니다.

    100점의 결론만을 바라고 99점인 사람을 감동을 주지 못하는 무례한 사람이라고 비난하거나, 또다른 99점인
    논리적이지 못한 사람이지만 감동을 주는 훌륭한 사람을 비합리적인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똑같이
    어느 한문화권의 시각에서만 사물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가 틀렸거나 잘못된 것은 아니고 모두 다른 문화권
    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일 뿐입니다. 100점은 아니고, A나 B학점은 아니지만, 낙제에 가까운 C+학점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서로 의견이 다른 사람이 지속적이고 비폭력, 평화적인 방법으로 협력해 갈 수 있는 방법
    이라면 자신의 100점인 답안을 고집하지 않는 것이 바람직한 방법이라 생각합니다.

    김문형 선생님이 알고 계시는 "딱부러진 결론은 사람들이 싫어한다거나, 설득당하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
    우리사회의 진실이고 그것과 반대로 가는 것이 우리 사회에선 존경받지 못한다고 해도 그것이 사회통합과
    세계평화나 문명권 교류에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누군가는 바꿔가기 시작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기존 사회가 분쟁을 효과적으로 해결하지 못한다면 그대로 둘 것이 아니라 다양한 대안들을 찾으려는 노력을
    해야 겠지요. 그것을 이용하기 보단 말이죠.

    비유가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사회는 우리의 현실일 뿐이고 그것이 사회를 위해 반드시 바람직한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정치인만 이를 악용해서 문제가 아니라 어느 한지지자가 추종하는 사회 위인이 이를 사용하는 것도
    그의 반대자에겐 악용이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선악의 구분은 항상 상대적인 것이니까요. 그러니까 이렇게
    정칙으로 가지않고, 사회의 나쁜 부분을 필요악으로 사용하는 것은 그 이념이 아무리 숭고하다 해도 결국은
    목적을 위한 수단의 신성시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A라는 사람이 아무리 훌륭하고 그의 이념이 아무리 좋아하도 그의 반대자에겐 악마로 불리게 됩니다. 이 양자를
    어떻게 평화적으로 조화시켜야 할까요? 거기에 사회를 새롭게 만들어갈 새로운 세대의 역할이 있지 않을까 합니다.
    5-60대에겐 386세대가 그 역할을 하고, 386세대에겐 우리사회의 브릿지 세대인 X세대가 그 역할을 하고, X세대에겐
    Y세대이니 하는 20대가, 그들에겐 또다른 10대가 항상 그러한 새로운 방법, 새로운 의사소통 수단을 찾는 반문명의
    역할을 해 주어야만 그 사회가 건강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집트 시대부터 요즘 젊은이들은 버릇이 없다는 얘기가
    나오게 되는 하나의 이유일테니까요. 세대차이건 의견차이건 자신의 선악의 기준으로 상대를 판단해서는 어떠한
    의견조화도 나올 수가 없습니다. 상대의 판단기준으로 상대의 언어로 설명을 해 주어야만 설득이 되는 것이구요.

    게임이론이나 기존의 사회의 잘못된 부분을 악용하는 경제이론가들은 반대로 군주론처럼 거짓말을 계속하라거나,
    절대로 상대의 링에서 상대의 용어로 싸우지 말라는 등의 자기가 이기기 위해 사회의 부조리를 그대로 이용하라고
    합니다. 그렇지만, 사회개혁을 바라고, 전쟁을 바라지 않는다면 부조리는 부조리로 바꾸어야 하는게 아니겠습니까?
  • ?
    박순백 2006.11.01 11:13
    [ spark@dreamwiz.com ]

    글 꾼들.^^

List of Articles
번호 분류 제목 이름 날짜 조회 수 좋아요
379 잡담 그것도 과거의 데이타일 뿐이자너~ 김문형 2008.12.06 3136 441
378 사는 얘기 삼순이와 함께... (재미있을 것 같지요? 하루만 있어보세요. T_T) 이종국 2008.12.04 3024 389
377 사는 얘기 빼꼼~~ 전민주 2008.11.25 2648 243
376 사는 얘기 인생은 짧다고 해서... 김덕주 2008.11.20 3085 454
375 잡담 [윤세욱의 자동차 헛소리] 스크래치에 대하여 윤세욱 2008.11.15 4511 336
374 사는 얘기 살면서 아빠들은... 박순백 2008.11.10 4204 351
373 사는 얘기 멀리 지구 반대편에 와서 오랜만에 인사 전합니다. 류재영 2008.11.10 3046 362
372 사는 얘기 보스톤에 와 있습니다. 임경희 2008.10.20 3585 407
371 잡담 [윤세욱의 자동차 헛소리] 새 차란 무엇인가 윤세욱 2008.10.17 3602 463
370 잡담 [윤세욱의 자동차 헛소리] 푸줏간의 무딘 칼 윤세욱 2008.10.14 3798 439
369 단상 영악한 중국인의 심리게임 안동진 2008.10.14 3956 565
368 사는 얘기 변기가 막힌 날 임경희 2008.09.22 4013 449
367 사는 얘기 너무나 짧았던 박순백 칼럼 가족과의 미국 상봉기 김용빈 2008.07.23 5235 586
366 여행 후기 북경 이야기 이동구 2008.07.01 4731 620
365 문화 영화 "WANTED"를 보고... 이선호 2008.07.01 3604 523
364 기사 존경하옵는 이명박 장로님께 장보성 2008.07.01 3426 484
363 사는 얘기 각하 왜 이러십니까? 박정기 2008.07.01 4652 769
362 칼럼 한미 쇠고기 협의 재협상 불가피, 한미 FTA협정과 모순되며 결함있다. 최재원 2008.06.26 4300 702
361 공지 정말 오랜만의 붓 가는 대로 번개 공지 정덕수 2008.06.19 4852 674
360 칼럼 EU법처럼 국내법으로 미국 쇠고기 협의 재협상 가능 최재원 2008.06.17 4178 855
목록
Board Pagination Prev 1 ... 120 121 122 123 124 125 126 127 128 129 ... 143 Next
/ 1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