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 이런 놈이 하나씩 있다.
꼭 이런 놈이 하나씩 있다. 그런데...
"비가 내려 곡식을 성장시키는 절기"인 곡우(穀雨)는 어느 한 날짜로 못 박히지 않는다. 그래서 2019년 올해의 곡우는 4월 20일 토요일로부터 5월 6일 월요일까지 이어진다. 그러므로 4월 26일인 오늘은 이 절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말입니다."(김상중 톤으로...)
사회생활을 하다 보면 꼭 이런 놈이 하나씩 있다. 오래 전에 중한 약속을 해 놓고 그 날짜가 목전에 이르거나 딱 그날 들어 못 온다는 놈 말이다. 어쩌다 내가 그 지경이 되는 수도 있긴한데, 다른 놈이 그 짓을 하면 그 놈이 어찌나 미운지...-_-
오늘 저녁이 고등학교 동기동창들이 만나는 날인데 딱 그런 놈이 하나 생겨서 20여 명의 모임에서 그 녀석 하나만 빠지게 되었다. 카카오톡 단톡방에서 모처럼 다 만나는 날에 이르러 불참을 통보하는 글이 올라오면 이건 시쳇말로 "갑분싸"가 되어 버리기 마련인데... 오늘 고교동창 단톡방의 첫 글이 바로 그런 글이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불참 통보의 글이 진달래꽃 핀 산속 풍경과 이런 시 한 줄로 시작되어, 초보 농부 운운하며 좋은 자리를 만들라는 두 번째 메시지로 끝이 나 있었다.
곡우
둥기둥 밤비 소리
동 트자 새닢 나니
맞추어 벌레 잡이
과수엔 거름일세
허둥타 늙은 농부야
술 약속은 어이리
이원희: 초보 시골농부의 신의 없는 핑계니 좋은 자리 약주 한 잔 맛있게들 나누시기를...
"허.................."^^
"참.................."^^
이런 멋진 핑계라니...........
단톡방에서 이 글을 본 친구들 모두가 이 친구를 질타하기는 커녕 "낙향한 그 삶이 부럽다"는 놈에, "출근 서두르다 갑자기 맘이 여유로워진다"는 놈에, "혼자 선계에 사니 부럽다"는 놈에, "이런 멋진 놈이 오늘 못 온다니 더 보고 싶다"는 놈에...-_-
그 친구가 10여 년 전에 교총회장을 했던 이원희다. 서울대 사대 국문과 출신의 잠실고 국어교사이자 EBS의 스타강사로서 교육단체총연합회의 수장이 되어 화제가 되었던 바로 그 친구.
[한국일보 기사/2007-07-14] 이원희씨, 교총 회장 당선/ 잠실고 이 선생님, 최대 교원단체 수장됐다 - http://www.hankookilbo.com/News/Read/200707140229772553
교총도 정치 바람을 타는 곳이다 보니 그 친구는 회장 임기를 마치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그 바닥을 떠나 낙향했다. 그리고 이젠 스스로 "늙은 농부"를 자처하며 아마도 서툰 농부 흉내를 내고 있을 터이다.
더러운 정치에 휘말려 이런저런 맘 상할 일을 겪기도 했으나 이원희가 저런 멋을 지닌 나의 좋은 친구라는 것도 기억해 주실 분이 있기를 바란다.
-
?
-
사실 이 글이 곡우에 대한 답으로 쓰여지긴 했지만 "가(歌)"가 아니므로 말씀하신 걸 충족할 수 없습니다.ㅋ 근데 저 정도 수준의 글에 대해서는 저 정도로 응수해야하는데 그건 여간한 고수가 아니면 힘들 듯합니다.
답은
"못 옷단 소리에 잠깐 서운했으나
듣고 보니 그도 그럴 싸하여
정황을 아니, 더이상 오라
우겨 말하지 못 하고,
단지 친구의 뜻에 따라
모인 우리 모두 즐거이 시간을 보냄세.
친구와는 다음을 기약해 보네."란 의미로
하면 될 듯합니다만,
이걸 은유를 통해 점잖게, 그리고 품위있게
표현해야 하니 그게 불가능하다는 말씀입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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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시간에 시를 읽고, 보고, 듣고해도 이해도 안 가고, 느껴지지도 않고, 외워지지도 않았는데 이 글을 읽는 동안 친구분의 시 '곡우'에 대한 배경과 작가에 처한 상황에 대한 이해를 넘어 공감하게 되었습니다. 왠지 '곡우'에 대한 답가가 필요할 듯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