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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하 10도의 날씨인데 왜 안 춥지???

 

또 한 번의 주말이다. 01/06(토)의 아침 기온은 꽤 내려갔다. 꽤 추운 날씨라면서 나 만큼이나 추위를 타는 집사람은 무척이나 추워했다. 근데 난 안 그랬다. '별로 안 추운데 웬 호들갑인가?' 생각하면서 스타힐리조트 스키장의 베이스 쪽에 도착한 시각이 08:38. 그런데도 이 때의 기온은 놀랍게도 영하 10도였다. 추워야 정상인 기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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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영하 10도인데 왜 춥다고 생각지 않았지???-_- 이상하다.아침을 든든하게 먹고 와서 그런 건가????' 별 생각을 다 해봤지만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이 날은 집에서부터 좀 덥다는 생각이 들어서 미들웨어도 처음엔 두꺼운 비스트(Vist)를 입었다가 아주 얇은 피닉스(Phenix)로 갈아입고 왔었다. 스키장에 와서도 가볍게 '희한하네?'하는 생각만 했을 뿐...

 

희한하게도 몸이 더웠던 이 날 아침, 스키장에 와서 첫 번째로 한 일은 스키를 튜닝하는 일이었다. 스키 보관소 앞 테이블가 항상 나의 스키장 내 튜닝 벤치 역할을 한다. 아래와 같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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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를 테이블 위에 올려 놓고, 간이 튜닝 도구 보관용 하드 파우치를 연다. 당연히 이것은 바인딩 조절용의 테이블이기에 정비용 바이스는 없으므로 스키는 브레이크 고정용의 밴드로 올려두고, 에지 샤프닝(edge sharpening)도 하고, 왁싱도 한다.

 

케슬러와 캐슬레는 다른 스키에요.^^ - Kessler is not Käst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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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즌들어 타고 있는 스위스의 수제 스키인 케슬러(Kessler), 이걸 가끔 오스트리아의 캐슬레(Kästle)와 혼동하는 분들이 있다.^^ 후자는 70~80년대에 오스트리아 스키 장비 중 명품에 붙어있던 "Top Team" 별칭을 받은 브랜드 중의 하나이다.(이 스키는 불세출의 선수 중 하나인 스위스의 피르민 주브리겐/Pirmin Zurbriggen이 80년대에 타서 유명했던 스키이다.) 근데 아토믹, 헤드(처음엔 미국제였으나 이제는 오스트리아제로 변신), 피셔 등의 브랜드에 밀려 그 명성을 잃어가다가 스키 부츠의 명가인 이탈리아의 노르디카가 스키 쪽으로 진출하면서 인수되어 그 회사의 스키 공장으로 전락했었던 브랜드이다.(결국은 노르디카에서 버림 받고, 다시 캐슬레란 브랜드로 독자 제작, 판매를 하고 있다.) 오스트리아의 Kästle는 영어의 Castle(성)에 해당하는 명칭이지만, Kessler는 스위스인의 성(family name) 중의 하나이고, 케슬러 사를 창립한 사람의 이름인 것이다. 그의 이름은 "한스유르그 케슬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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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슬러는 대량생산으로는 진짜 좋은 스노우 장비를 만들 수 없다고 생각하고 스위스인의 장인정신을 발휘하기로 한다. 그는 모든 제품이 공예가의 정신에 의거하여 하나의 예술작품처럼 만들어지던 시대를 동경하면서 그걸 재연키로 했는데, 그의 생각은 경쟁이 덜 심한 스노우보드 분야에서 단시간 내에 성취된다. 그리고 케슬러는 몇 번의 동계올림픽과 스노우보드 월드컵을 거치면서 세계 최고의 스노우보드로 등극한다. 그리고 그런 성공에 힘입어 케슬러는 스키 쪽으로도 진출하되 동일한 전략을 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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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타고 있는 케슬러의 남성용 스키인 팬텀(Phantom) S. 검정색의 166cm짜리 회전용 스키이다. 이미 탑벤드(topbend) 쪽은 상판이 많이 상했다. 내가 폐각(closed legs)으로 다리를 붙여 타길 즐기다 보니 양쪽 스키가 많이 접촉을 하게 되고, 그래서 긁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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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식으로 무릎과 스키를 완전히 붙이고 타는 식이다 보니 두 개의 스키가 부딪혀 상판 가장자리와 탑벤드의 둥근 부위 가장자리가 조금씩 상하는 것이다.

 

수제 스키는 뭐가 다른가? 무슨 정성이 뻗혀서???

 

사실상 96/97 스키 시즌 이후 지금까지 계속 스키를 스폰서링 받다 보니 스키가 좀 상하는 것에 대해서는 무감각해 진 지 오래이다. 하지만 이번엔 그게 좀 달라졌다. 케슬러 스키가 흠이 나는 건 왠지 좀 아깝기도 하지만 그런 생각보다는 그걸 정성스레 만들어준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스키어는 절대 그런 생각을 하면 안 된다. 스키를 잘 타려면 그런 생각은 던져 버리고 (스키가 좀 상하건 말건) 열심히 스키를 타야하기 때문이다.

 

근데 왠지 미안하다.^^; 이 스키는 갖가지를 정말 공들여 만든 게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딱 한 가지만 지적하고 넘어가자면 저 스키의 상판에 새겨진 케슬러란 글자(로고타입)만 해도 그렇다. 대량생산된 스키는 스키 상판에 실크 스크린으로 로고와 로고타입을 프린팅하면 끝이다. 그리고 실은 그런 작업 정도면 족한 것이 아닌가? 그런데 케슬러 사는 수제 스키란 티를 내려고(?) 아래와 같은 씰(?) 데 없는 짓을 한다. 이게 뭘 어쩌자는 건지 유추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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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지 아시겠는가??? 스키 상판을 CNC 기계조각기로 따놓고, 거기에 미리 같은 형태로 조각을 해 놓은 글자를 박은 후에 이를 열과 압력을 가하여 접착시켜 일체화하는 것이다.-_- 말하자면 고려청자에 학이나 꽃을 박아넣듯이 상감(象嵌) 작업(inlaid work)을 한 것이다. 그렇게 하나 실크 스크린으로 재빨리 대량 작업을 하나 언뜻 보기엔  큰 차이가 없어보인다. 근데 왜 수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서 로고타입까지 상감을 해 넣고 난리(?)를 치는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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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감으로 박아넣은 로고타입.

다른 거 없다. 차별화를 위한 것이다. 다른 스키 제작사와는 다르다는 걸 그 이름에서부터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그런 수고와 정성은 스키의 표면에만 기울여진 것이 아니라 스키 바닥(base)에도 마찬가지로 행해졌고, 사용된 소재나 제작 공법에 이르기까지 다른 회사의 제품과 달리 만들고자 노력을 많이 했다. 스키 제작 기술이야 이미 상향평준화되어 있는데 케슬러 사는 오히려 알파인 스키 초창기의 제작 공법으로 되돌아간 것이다. 아이러니컬한 일은 스키를 만드는 별별 최신 공법이 다 나왔지만 최고의 기술로 만들어지는 스키가 아직도 샌드위치 공법(소위 월드컵 공법)인 것과 그것이 상당 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는 걸 생각하면, 케슬러의 생각이 틀린 것은 아닌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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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의 K자 로고도 역시 상감 처리.

 

What is K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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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슬러의 KST 기술을 자랑하기 위한, 그것이 스위스 특허를 받은 기술임을 자랑하기 위한 스틸 플레이트이다.

 

위의 사진의 명판은 앞 바인딩 부근에 붙어있는 KST 플레이트인데 이 경우도 아마 다른 회사 같으면 그 내용이 인쇄된 스티커를 붙이거나 실크 스크린 처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케슬러는 스테인리스 철판을 부식시키고 검정색과 빨간색, 흰색 페인트를 써서 글자와 스위스 국기를 넣었다.


비싼 소재, 긴 제작 시간과 많은 수고를 들여 차별화된 스키를 만들면 그걸 원하는, 남들로부터 차별화되고 싶어하는 수요가 있다는 것을 스위스 사람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 좋은, 본연의 목적에 충실한 전자시계가 나왔지만, 아직도 100% 수작업으로 만드는 오데마피게나 피아제 같은 스위스 시계들이 명품으로 인정받고 있는 걸 보면 말이다.(하긴 같은 나라의 스키 분야에서 이미 스퇴클리가 이런 사실을 웅변으로 증명한 거 아닌가???)

 

위와 같은 최고 구닥다리 공법의, 스위스인의 옹고집으로 만들어진 스키지만 이들이 채택한 소재와 기술은 첨단의 것이다. 케슬러도 스키 세계의 트렌드에 따라 락커 스키(rockered skis)를 만들고 있다. 락커는 말하자면 미리 휘어있는 커브(pre contoured curve)를 만들어 주어 바깥쪽 스키가 쉽게 회전할 수 있게 하기도 하고, 안쪽 스키는 역에지(reverse edge)가 잘 안 걸리게 만든 것이다. 아래의 사진에서 그들이 어떤 식의 락커링(rockering)을 하고 있는가를 살펴보시기 바란다.

 

특히 이 스키는 락커를 앞으로 밀어 강설 혹은 경기에 강한 유럽형 락커로 만들지 않고, 약간 뒤로 민 형태의 일본식 락커를 채용했다. 후자는 부드러운 눈에서 보다 쉽게 회전을 하게 하기 위함이다. 즉, 케슬러가 바라보는 건 경기 시장이 아니라 일반 대중 스키어의 시장인 것이다. 그래서 이들은 남성용 회전 스키에서 전형적인 길이인 165cm(월드컵 회전스키의 공인 길이)를 채택하지 않는다. 아래의 남성용 스키가 회전반경으로 보면 회전 스키이지만 길이는 166cm로 살짝 별나게(?) 만든 것하며, 앞뒤로 락커를 채택하여 아주 다양한 회전반경이 나올 수 있게 만든 걸 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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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 상단부(선단)의 락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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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슬러는 뒤에도 락커링 시스템을 채용하고 있어서 테일쪽에서 매우 부드러운 스킹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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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스키의 선단을 보면 많이 꼬여올라가지도 않아 보이는데...

 

케슬러의 스키들은 탑벤드(topbend)가 높아보이지 않지만 실은 락커링이 살짝 뒤에서부터 시작되었으므로 그 높이는 다른 회사의 것들과 비교해서 별 차이가 없다. 하지만 스키의 앞뒤에서 설면에 닿는 부위인 접설길이(contact length)를 보면 이 스키는 다른 스키들에 비하여 짧은 느낌이 든다. 실제로 스키를 타봐도 그렇다. 흔히 "스키 앞부분이 훨씬 더 짧게 느껴져서 다루기 편하다."는 것은 이런 락커링의 마술이다.

 

Kessler Shape Technology

 

그리고 이 스키는 최장 16m의 반경을 보여주고 있지만, 이 스키를 기울이는 각도에 따라 6, 8, 10, 12, 14m의 회전반경을 구사할 수 있게 만들어진 것이고, 그게 바로 KST(Kessler Shape Technology)란 기술의 실체이다. 케슬러는 가장 오래된 공법으로 만들어진 스키이나, 최첨단 기술을 내장한 스키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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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공들여 만든 스키에 흠집이 나니 그걸 만든 장인들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이다.^^; 그처럼 큰 스키를 마치 보석을 세공하는 듯한 정성으로 만들어낸 그 장인들에게...^^ 근데 이 스키를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노고에 대하여 이미 비싼 가격을 치렀으므로 그걸로 보답하는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스키를 비싼 값에 사주는 사람들 덕분에 스폰서링 받는 나 같은 스키어의 입장에서는 보답하는 것이 열심히 스킹하는 것이고 난 그렇게 해 온 것인데... 그래서 흠이 나는 건 당연한 일인데도 하여간 좀 미안함 감이 든다는 것이다.^^; 

 

-10도의 날씨에서도 추위에 약한 한 남자가 잘 버틴 이유는...

 

아침의 기온이 -10도였고 전날도 추운 날씨였기에 설질은 기막히게 좋았다. 아래 사진을 통해 보는 설면 상황으로도 그것이 느껴질 것이다. 근데 9시가 조금 넘은 시각인데 개장시간인 8시부터 탄 매니아들에 의해서 설면은 온통 수많은 쉬푸르(spur/스키 자국)로 덮여있다. 대단한 스키광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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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람도 많지 않고, 설질은 좋고... 스키어들에게는 이런 곳이 천국이지 다른 곳이 천국이겠는가?

 

그리고 앞서 내가 추운 날임에도 추위를 느끼지 못 한 이유를 뒤늦게 알게 되었다. 그건 이 날부터 처음 입은 스키복인 퓨잡(Fusalp) 때문이었다. 이 스키복은 퓨잡의 top of the line 계열은 아니지만, 내가 원하는 디자인이기에 원하는 색깔인 빨간 재킷을 고른 것이다. 바지는 변화를 주기 위해서 세트로 나온 검정색을 택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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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프트에서 찍은 사진이라 좀 이상하게 나왔지만 이 퓨잡 아보리아즈 재킷은 유럽의 전형적인 스키복 스타일이다. 고산 스키장이 많은 유럽의 스키복들은 비교적 단순한 디자인에 스키복으로서의 기능성을 많이 고려하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퓨잡은 1952년에 창립한 이래 자주 변하는 스키복 스타일을 따라가지 않고, 고집스레 처음에 가진 정신을 유지한 회사로 유명하다. 처음엔 스키복 만으로 시작한 회사이나 이제는 다양한 아웃도어 의류는 물론 캐주얼한 의류까지 취급하므로 프랑스 곳곳엔 Fusalp Shop들이 단독으로 존재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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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다이내믹한 실루엣이면서 프랑스풍의 우아함을 간직하고, 나아가 날씬한 라인을 보여주지만 스포티해 보이는 스키복은 오래전부터 퓨잡이 추구해 온 스키복의 전형이다. 그러면서도 스타일과 컷을 유지하면서도 활동성과 편안함을 주겠다는 생각은 지금도 여전하다. 특히 이런 퓨잡의 이념은 남자 스키복보다는 여성 라인에서 두드러진다. 퓨잡이 여성용 스키복에 좀 더 신경을 쓰는 그런 회사라는 건 여성 의류를 보면 바로 알 수 있을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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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 퓨잡 스키복을 입은 손현수 전 데몬스트레이터. 매우 여성스러운 레트로형의 스키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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퓨잡이 위와 같은 개념에 입각해서 스키복을 만든다는 건 일찍부터 알고 있었지만, 직접 이 스키복을 입어본 적이 없어서 몰랐던 것은 그들이 대단히 좋은 소재를 사용하고 있고, 방풍 쪽에서 정말 발군의 기능을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느낄 수 있었고, 방수 및 발수 기능도 우수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 기능은 스키장이 3,000m 봉 위에 만들어진 프랑스에서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하면 당연한데, 그래도 고산용 등산복이 아닌 스키복이 이처럼 따뜻하다는 건 믿을 수 없을 정도였다. 항상 추위에 약한 내게는 딱 맞는 스키복이지만 그래도 영상의 온도에서 스킹할 때는 나조차도 너무 더워서 문제일 듯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앞에서 말한 바 있지만 얇은 미들웨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더운 걸 보면 온도가 영상으로 올라가면 그것조차 벗고, 이너웨어 위에 재킷을 입어야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주어지는 스키, 추구하는 스키, 그리고 엑셀시오(Higher and Higher)

 

원래는 이 주말 스킹 후기에서는 이 글의 제목에서처럼 "주어지는(?) 스키와 추구하는 스키의 차이는?"에 관해 얘기하려던 것인데... 이 주제와 관련해서는 스키 타는 꼬마 하나에 관한 얘기를 해야한다. 스타스키스쿨 유년부의 64번 학생에 관한 얘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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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부형인 64세 할머니의 도움을 받고 있는 64번 비브의 학생 (박)예솔이. 얘는 스키를 제가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부모와 조부모가 원해서 시작했다. 다행히 애가 그걸 거부하지 않았고, 아직까지는 자신도 즐거워하면서 스키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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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생은 그렇게 주어진 환경에서 스키를 즐기고 있는데, 같은 환경에서 태어난 또 한 아이는 아직 스키를 시작하지 못 했다.(걔는 뱀띠고, 나도 뱀띠로 같은 띠이다. 12년 띠동갑을 다섯 번 거슬러올라야 하는...ㅋ) 언니는 자신의 나이적에 이미 스키를 타고 있었는데... 그 애, (박)예린이는 작년에 유아용 하네스(harness)를 이용하여 스키를 배웠다. 능숙하지는 못 하지만 어느 정도 스키의 기본을 익히기는 했고, 이번 시즌에 본격적으로 스키를 배우기로 했는데 다른 문제(?)가 생겨서 스키를 시작하지 못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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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장에 아빠랑 와서 언니 스키 타는 것을 구경만한 한 (박)예린이의 평범한 모습.

 

이 다섯 살 아가는 아동복 모델과 CF 모델로 일하고 있고, 아이답지 않게 바빠서 그렇다. 굽네치킨, LG 가전,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동화약품 후시딘, 두 개의 SK 텔레콤, 환경부, 한양사이버대학교, 녹십자, 스타필드 토이킹덤플레이, 샤오링 프렌즈, 리틀파크 영어, 구글 어시스턴트 등 메이저 업체의 TV 광고 16개를 2017년 3월부터 12월 사이에 찍느라 그랬다. 아이가 그걸 즐기고 있다니 다행이긴 하지만, 그 나이에 걸맞은 일이 아닌 걸 하는 게 안쓰럽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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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런 스튜디오 사진을 찍은 걸 보면 조금 더 큰 애처럼 보이긴하는데, 그래도 여전히 5세 아동인 건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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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사람과 나는 아이의 부모가 스키를 가르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안다. 원래 가족끼리는 뭘 가르치려 하면 안 된다. 잘 아시다시피 아내에게 운전을 가르치려다 이혼할 뻔한 남자들이 얼마나 많은가?ㅋ 칭찬을 해서 용기를 주어야 배우는 사람이 잘 배울 수 있는데, 모르는 사람에겐 친절하던 남자도 엉뚱한 짓(?)을 하는 아내를 보면 부아가 나서 소리부터 치기 마련이다. 그러니 올바른 교육이 될 리 없고... "아니 그것도 못 하냐? 으이그 답답해, 아니 운전을 이따위로 하다니..."란 소리에 "넌 얼마나 잘 하는데? 넌 안 배우고 처음부터 잘 했냐???"로 응수하면 그 때부터는 파국인 것이다.

 

아내는 그런 응수라도 하지 스키를 처음 배우는 아이에게 못 한다고 야단을 치면 애는 찍소리 못 하고 기가 죽어버릴 뿐이고, 그래서 그 놈의 스키가 지겨워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스키장에 가기를 꺼려하는 사태가 터지면 그건 큰 일이다. 시작은 온 가족이 함께 스키를 타자는 좋은 취지에서 시작한 것인데 말이다. 부모와 자식 2대가 함께 스키를 타는 걸 보면 보는이도 다 즐거워진다. 그러므로 3대가 함께 스키 타는 건 스키를 타는 모든 사람들의 꿈이 된다. 우리가 그런 상황에 접어들면서 우린 한 세대를 건너뛰어 가르치는 것이고, 우린 이제 자제할 수 있는 나이에 달해 있으므로 아이를 가르칠 수 있다고 생각했고, 역시 그 생각은 틀리지 않았다. 그래서 이 64번 학생은 스키의 기초를 잘 뗄 수 있었고, 즐거워했으며, 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이 되었다.

 

하지만 아이에게 계속 매달리다보면 스키를 탈 시간도 줄어드는 문제도 있고, 아이에 대한 기대가 자꾸 커지기 때문에 문제가 될 수 있다. 기초는 누구라도 쉽게 뗄 수 있지만 중급 단계 이상으로 올라가면 목소리가 높아질 가능성도 있는 것이다. 이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스키 교육을 남에게 맡기는 것이다. 바로 스키스쿨에 등록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럼 아이는 함께 배우는 친구들과 사귀어 가면서 강사에 대한 복종심도 배우고, 학생으로서의 본분에 충실하려는 노력도 하게 되는 등 여러 모로 바람직한 현상들에 맞닥뜨리게 된다. 64번 학생은 그렇게 재탄생한 스키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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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나이대가 비슷한 친구들 혹은 언니, 오빠들과 함께 스키를 배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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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이 타는 걸 보면서 배우고, 자기 차례가 오면 남들이 보는 가운데 스키를 타게 된다. 이런 1:다(多數)의 강습을 통해 스키를 배운 아이들은 남이 본다고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남이 봐줘야 더 스키를 잘 타는 애들로 변하는 경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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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자로 스키를 타던 이 64번 학생은 지난 시즌 말부터 패러렐로 스키를 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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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배울 때 썼던 스키는 2년 만에 길이가 40cm가 늘어난 다른 스키로 바뀌었고, 부츠도 더 큰 것으로 교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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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학생은 어쩌면 태어날 때부터 스키를 탈 운명이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오히려 이 학생의 아빠는 이제 스키를 잘 안 타는 게 문제인데, 그래도 제 딸이 스키를 배워야한다는 생각과 잘 타야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책임을 제 부모에게 떠넘기고 자긴 속편히 지내고 있다.^^

 

이 아이는 스키를 타서 행복한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우리가 이 아이와 스키를 타는 걸 보면서 부러워한다. 심지어는 이 아이를 부러워한다. 맘껏 스키를 탈 수 있는 집안에 태어난 게 이 아이의 행운처럼 생각하기도 한다.(특히 조부모에게 스키를 배우는 건 쉽지 않은 일이라면서...) 그건 내가 입장을 바꾼다고 해도 그럴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스키를 타고 싶었던 어린 시절에 부모 잘 만나 스키를 일찍 타고 있었던 내 친구를 무척 부러워했었다.(내 고교 친구 채윤병이는 아버지가 당시 횡계 대관령스키장의 제3슬로프에 있는 스키 산장인 오수도리산장을 만든 분이었고, 그의 남동생은 국가대표 알파인 선수였고, 여동생 역시 스키 선수였다.)

 

물론 내 부모님도 내가 스키를 탈 수 있게, 그것도 스키어가 2000명도 안 되던 시절인 내 고교시절에 스키를 시작하게 해 주셨지만, 난 내 친구를 부러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건 한 때 유아세례를 받고, 아버지가 교회의 장로인 애들을 부러워했던 것과 별로 차이가 없는 일이고, 이와 비슷한 일은 이 사회 어디나 존재한다.

 

다행히 내가 부모가 되고, 조부모가 된 시점에서 난 내가 어릴 때 꿈꾸던 일을 내 유전자를 물려받은 애들이 누리고 있음에 만족하고 있다. 하지만 어릴 때 스스로가 원해서가 아니라 스키 타는 부모 아래 태어나 오랫동안 스키를 탄 아들놈이 이젠 스키 타는 걸 포기하다시피 한 걸 보면 생각이 달라진다. 걘 부모에 이끌려 그냥 해야할 일 하나를 했던 것이고, 그래서 스키가 재미 없어진 것일 게다. 그에 비해서 난 스스로 스키어가 되기를 원했고, 더 나은 상황을 부러워했으며, 내가 원했던 일을 자식에게 베풀어주자는 생각을 했던 것. 원한 것이기에 난 기회가 왔을 때 그걸 잡았고(물론 그 기회는 부모님이 만들어 주신 것이지만...), 열심히 스키를 탔으며, 반세기가 지난 지금까지도 열심히 스키를 타고 있다. 분명히 난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엑셀시오(Excelsior - Latin word meaning "Higher and Higher" / "Ever Upward" / "Still Higher")를 외치며 살 것이 분명하다.

 

스키는 정말 "높이, 더 높이" 추구해야할 대상이다. 하지만 64번 학생에게 그건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건 그 아이가 추구한 대상이 아니었고, 그냥 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아이에겐 스키가 절실한 것이 아니다. 하지 않으면 죽을 것처럼 느껴지는 대상이 아니다. 그리고 이 아이가 영원히 그렇게 느끼지 못 할 것이 바로 그런 중요한 감정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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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키 2세대의 아들놈(박)현근이는 세 살때부터 스키를 탔지만 이젠 어쩌다 한 번 연례행사처럼 스키를 탈 뿐이다. 그래도 제 딸은 스키를 배워야하고, 또 잘 타야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걸 가지고 있다. 이 날도 아들놈은 바빠서 스키를 못 타고 있는 둘 째 딸과 함께 첫 째를 응원하러 스키장에 왔다.(작은 애는 턱이 뭔가에 쓸려서 밴드를 붙이고 있다.)

 

난 가끔 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대견한 학생들의 얘기에 감탄하고, 감동한다. 정말 우연히 접한 스키에 빠져 스키를 사려고 아르바이트를 했고, 이제 스키를 살 돈을 모았지만, 넉넉지 않아 장터를 기웃거리고 있다는 등의 스토리들이다. 그런 친구들을 보면 그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내가 가진 여분의 장비를 보내주기도 한다. 그런 친구들은 미래에 나 같은 스키어가 될 것이고, 또 나의 정신을 또다른 세대에게 물려줄 진정한 스키어가 될 것이다.

 

주어지는 것보다 추구해서 얻는 것이 더욱 값지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라고 해서 그걸 다음 세대에게 강요할 수는 없다. 그 스스로가 그걸 좋아해 주길 바랄 뿐이다. 그래서 한 집안에서 단지 혈연으로 맺어지는 관계가 아닌 각자 훌륭한 스키어 동지로서 맺어지는 또다른 끈끈한 관계가 되기를 소망한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그 타협점은 우리 아이가 박지민 학생과 같은 경우로 성장하는 것이다. 스키 타는 부모를 두었지만, 주어진 환경에서 더욱 절실히 스키를 추구하는 인물로 성장한 그녀. 그래서 며칠 전에 레이싱 스쿨에서 심하게 달리다 날아가 현재 이런 모습이 되어 버린 사랑스런 그녀.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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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목에 깁스를 하고, 뚱한 얼굴로 찍은 이 사진의 지민이가 더 예뻐보인다.ㅋㅋㅋ 이젠 더 다치지 말고 꿈을 펼치길 기원한다.

 

주어지는 게 다 행복만은 아니다. 그 좋은 스키의 세계에 발만 담갔다가 멀어져 가고 있는 내 아들놈을 보면 그걸 알 수 있다. 걘 무슨 생각으로 제 아이가 스키를 타야하고, 잘 배워야한다고 생각했을까??? 그걸 물어본 적은 없다. 걔는 그냥 자기가 어릴 때 스키를 탔었고, 그 때 즐거웠던 기억으로 제 애도 그런 즐거움을 누려보게 하려던 걸까??? 아니면 '애들은 무조건 스키도 배우고, 인라인도 배워야 돼.'라고 생각하는 서울의 일부 학부형들처럼 변해 버린 걸까? 그 이유가 뭔지는 모르지만 어쨌든 스키를 시작한 우리 예솔이가 지민이처럼 스키를 사랑하면서 커가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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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참조:  스키를 꿈꾸는 고등학교 1학년입니다.

 

새 스키복을 입고 열심히 스킹한 날

 

주말답게 스키어들이 많은 날이었다. 리프트마다 스키어가 가득한 날, 리프트 라인 앞에서 기다릴 수 있어서 행복한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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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렇게 스키 베이스에서 때때옷을 입은 기념촬영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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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집사람이 해가 산 뒤로 넘어간 오후에 사진을 찍어줬다. 너무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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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래서 사진의 일부를 원본에서 오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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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뒤에 있는 두 패트롤이 '저 놈 어떻게 타나 보자!'는 식으로 지켜보고 있다.^^; 잘 타줘야 한다.ㅋ 사명감을 가지고 타야한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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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번 시즌에 들어서 세 번째의 스키복으로 바뀌었다. 프랑스제의 소위 "전지현 스키복"인 명품 퓨잡(Fusalp)의 스키복이다. 원래 내가 좋아하는 색인 빨간색으로 회귀했다. 희한한 게 내가 이번 시즌 초에서부터 지금까지 입은 것이 모두 프랑스제. 와츠, 선밸리에 이어 Fusalp까지... — 함께 있는 사람: 이경호

 

그렇게 또 한 번의 토요일을 보냈다.

 

KakaoTalk_20180110_094820680.png

- 한 곤충학자님의 의견.

 

Comment '5'
  • ?
    이수김 2018.01.09 23:14

    지난 주말의 스타힐 풍경이군요. 해마다 스타힐 개장부터 폐장까지의 모습을 다채로운 사진과 함께 소식을 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제가 지난해 4월 십자인대 재건수술을 해서 자주 가지는 못 하지만 드문드문 갑니다~. 박 박사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profile
    Dr.Spark 2018.01.11 09:51
    인대 수술을 하신 걸 몰랐네요.
    어서 완쾌되어 함께 스키를 타게 되길 빕니다.
  • ?
    한경덕 2018.01.11 07:59

    에고~ 포스팅을...

    생각없이 박사님께 댓글 쓰다보니...

    영어 스펠링이 틀렸네요.^^

    aclematization => acclimatization

  • profile
    Dr.Spark 2018.01.11 09:52
    워낙 어려운 단어이고, 처음 보는 것이라서 전 그게 틀린 건지도 몰랐습니다.ㅋ
    다른 분들도 대개는 그렇게 느낄 듯합니다.
  • ?
    째즈땡 2018.01.11 21:34

    네 저도요. 20년 넘게 미국 장사 했는데 첨 보는 단어네요.ㅠㅠ 좌우간 climate이 들어가니 의미가 더 확실히 이해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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