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10.04 15:11
[이탈리아 자동차 여행 XXI] 베로나(Verona), 25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예술의 도시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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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자동차 여행 XXI] 다섯 째 날(6/1, 화)
베로나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B.C. 89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곳이며, 이탈리아와 북유럽을 잇는 요충지대로서 크게 성장한 도시입니다. 일찍이 로마 식민지가 된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 중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1797년 나폴레옹은 베로나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게 되고, 베로나는 결국 1866년에 이탈이라 왕국에 합병됩니다.
중세의 아름다운 성곽과 로마 시대의 유적이 그대로 살아있고, 깔끔하고도 세련된 도시 분위기를 갖춘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 베로나. 아디제(Adige) 강이 시내 북서쪽을 큰 S자 형태로 휘감아 돌아 흐르고 있는 베로나는 볼수록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 아디제 강이 베로나 시내를 휘돌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 아디제 강 기슭의 베로나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만났던 괴테(Goeghe, 1749~1832)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이탈리아에 대한 잔잔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로나의 원형극장 아레나에 대해 극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림과 글로 엮어진 이탈리아 기행은 제가 이탈리아 여행에 앞서서 약간이나마 이탈리아에 대해 눈뜨게 한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예술가 기행문의 영원한 고전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래는 괴테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 '이탈리아 여행'의 표지입니다.
- 베로나 원형극장. Eugen Spiro 작, 19세기 중엽.
‘이곳 사람들은 아주 활기차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며, 특히 상점들과 수공예품 가판대가 밀집해 있는 몇몇 거리는 정말 유쾌해 보인다.......
장날이면 광장마다 야채와 과일이 가득 들어차고, 마늘과 양파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쌓인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노닥거리거나 노래를 한다. 그러다가 싸우기도 하고 끊임없이 환성을 지르고 웃어댄다. 온화한 기후와 값싼 음식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용이하다.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밖에 널려있다.
밤이 되면 노랫소리와 소란스런 소리가 더욱 커진다. 어느 거리에서나 말버로의 민요가 들려오고 여기저기서 덜시머(현이 달린 타악기)와 바이올린 소리도 들린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온갖 새소리를 흉내 내려고 애쓴다. 감정으로 충만한 그러한 생활은 가난한 삶에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드리워준다. 이 민족의 이런 성정은 존경할만하다.‘
세세하면서도 차분한 묘사력과 사랑이 스며있는, 1786년 대문호의 눈을 통해 보는 이탈리아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 베로나. 우물가의 아낙들과 주변 풍경. Goethe 작.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그린 1,000매에 달하는 스케치 중 하나.
- '이탈리아 여행'에 실려있는 수채화 한 점. 티롤 인스부르크. Charles D'Oyley 작. 1840. 역시나 현대의 모습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 이탈리아의 대시인이며 문장가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피렌체 출신인 단테는 1290년대에 피렌체와 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파 싸움에 가담하였고,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의 세력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옹호하는 구엘프(Guelf)당을 지지하여 교황을 받드는 기벨리니(Ghibelline)당과 적대관계에 놓입니다. 그 후 구엘프당의 승리로 두 당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구엘프당이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어져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어 흑당은 단테를 추방해 단테의 길고 긴 망명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후 1302년 피렌체로부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 사면을 내려주겠다는 조건부의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겐 더할 수 없는 치욕이라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피렌체는 단테가 없는 상태로 재판을 열어 단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Wikipedia 참조)
단테는 첫사랑 베아트리체가 갑자기 죽자 신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서사시 '신곡(La Divina Commedia)'은 중세의 주류 언어이자 상류층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당시 피렌체의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일개 지방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피렌체어(토스카나어)로 씌여졌습니다. 이것을 통해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세속어로도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주류 문화에 대한 반항의 의미도 들어가 있었고, 민족언어에 대한 애착도 포함되고 있었습니다. 14세기 이래 피렌체어로 쓰여진 신곡이 전 이탈리아로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은 '신곡'에서 사용된 언어가 오늘날 현대 이탈리아어의 근본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9C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Gustave Dore의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삽입된 일러스트. 신과 인간, 악마의 특징을 예리하게 잡아내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베로나에서 6년간 머물며 신곡을 집필해 ‘지옥’편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떠돌던 단테는 마지막으로 찾은 라벤나(Ravenna)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아 그가 그토록 바라고, 심혈을 기울였던 신곡의 ‘천국’편을 완성하게 되고,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5년에 걸친 그의 눈물겨운 망명생활은 신곡의 연옥과 지옥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에 고스란히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마저 그의 시신은 그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합니다. 피렌체가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무덤을 그가 태어난 피렌체로 돌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라벤나는 단테가 단테일 수 있었던 것은 라벤나에서 ‘신곡’을 완성했기 때문이고 단테의 영혼을 위해서도 결코 그럴 수 없노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 피렌체를 배경으로 단테가 그의 작품 신곡(Divine Comedy)을 들고 있습니다. 단테는 시인의 영예인 월계관을 쓴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단테는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잠들어있고, 단테 기념관 입구의 단테 동상 아래에는 ‘단테, 유럽인’이란 문구가... 피렌체 산타 크로체의, 단테의 비어있는 무덤 앞에는 고향으로 돌아올 단테를 기다리는 등불만이 외로이 지키고 있습니다.
라벤나와 피렌체의 단테 시신의 쟁탈전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탈리아인들의 서가에 단테의 신곡만은 꼭 한권씩 꽂혀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의 단테에 대한 사랑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 단테의 상이 있는 시뇨리 광장(Piazza dei Signori)입니다.
- 시뇨리 광장 앞의 단테의 동상입니다.
시뇨리 광장의 단테 상은 턱을 괸 채로 이 세상의 온갖 고뇌는 다 짊어진 표정을 짓고 서서, 시뇨리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어했던 자신의 사랑하는 고향, 피렌체에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단테의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모습의 동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애잔함을 느끼게 합니다.
자, 베로나 여행의 출발 지점입니다. 포르토니 델라 브라(Portoni della Bra, city gate)를 지나면 중세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아기자기한 건물, 좁은 골목길, 사랑스런 엽서와 돌로 만든 앙징맞은 작품들과 중세와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이 믹스가 된 과거의 풍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브라 광장에서 이어지는 마찌니 거리를 걷다 보면 금새 에르베 광장이 나타납니다. 에르베 광장은 도시의 심장부에 있고, 고대 베로나 시절에도 삶의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장터였습니다. 이 광장은 과거 로마 인들의 포럼(Forum, 공적인 집회 장소로 쓰이던 광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일찍이 로마시대의 포럼이 있던 곳에서는 4륜 경마차 경주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베니스를 거쳐 베로나로 온 허브, 향료, 커피 콩, 실크 등을 거래하는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요. 현재는 토마토, 그린 샐러드, 맛있는 과일 등을 팔고, 카페와 다양한 샵들이 많은 예쁜 노천 시장입니다.
- 에르베 광장은 예나 지금이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고 있으며 생동감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팔고 있던 피노키오들. 원래 피노키오의 고향은 피렌체인데...^^;
- 예쁜 손녀딸 "예솔이"를 위해 사지 않을 수 없는 피노키오였어요.
- 에르베 광장 한 켠에서는 즐거운 기타 연주가 열리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계단에 걸터앉아 콜라와 빵을 마시며 즐기고 있습니다.
- 베네치아에서 많이 보던 가면들이 이곳에도 가득합니다.
- 특정 지역을 고향으로 하는 가면들이나 피노키오들이지만, 이탈리아 각 지역에서 모두 파는 것 같습니다.
에르베 광장 북쪽 끝에는 1630년에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마페이 궁(Palazzo Maffei)이 있고, 지붕 위에는 왼쪽부터 헤라클레스, 쥬피터, 비너스, 머큐리, 아폴로, 미네르바 등 6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왼쪽에는 1370년에 세워진 Torre del Ore라고도 알려진, 가장 오래된Torre del Gardello 탑이 있고, 광장에는 16세기 당시 법령이나 율령을 포고하던 연단(capitello)도 있습니다.
마페이 궁 앞에는 코로나 디 산 마르코(Colonna di San Marco)라는 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코로나 디 산 마르코는 꼭대기에 베니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를 곁들인 기둥입니다. 그것은 1523년에 세워졌는데 1886년 베네치아 제국의 몰락 후에 끌어내려졌지만, 나중에 꼭대기에 새 사자를 올려놓고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 마페이 궁과 날개 달린 사자 기둥.
위의 글을 쓰다 보니, 병자호란 뒤 인조가 항복당했던 자리에 세워졌던 치욕의 비 삼전도비가 생각납니다. 청일전쟁 후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 후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예속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지요. 이 비를 지역 주민들이 땅 속에 매몰하였다가 1963년에 대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문교부에서 원 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 확장으로 현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여겨 그것을 땅 속에 파묻어 버리고 강물 속에 던져 버린다고 해서 그 역사가 묻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광장의 중앙에는 도시의 사랑스런 심벌 중 하나인 마돈나 베로나(Madonna Verona) 분수가 서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유적과 폐허에서 나온 것들로 세워졌는데, 세면기는 세인트 아나스타샤(Saint Anastasia)의 뜨거운 욕조에서 가져온 것이고, 동상은 의사당(캐피톨)에서 온 것입니다. 1368년에 칸시뇨리오 델라 스칼라(Cansignorio Della Sscala)가 동상에 연못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 마돈나 베로나 분수.(베로나 시 홈 참조)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수로가 발달하였기에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분수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나는 분수는 그 뜨겁고도 견디기 어려운 이탈리아의 태양을 식혀줄 수 있기에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반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본 높이 84m의 람베르티 탑. 하늘까지도 그림 같은 연출을 해 줍니다.
까사 마짠티(Casa Mazzanti, 마짠티의 집)는 동쪽에 있는데, 스칼리제리가(Scaligeri family)는 이 빌딩을 곡식 창고로 사용했습니다. 거기엔 153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까발리에 의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있지요. 이들 프레스코화는 무지, 선한 정부, 그리고 시기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오른쪽이 마짠티의 집.
- 정면의 사진.
- 마짠티 집의 프레스코화.
- 이것은 에르베 광장에서 시뇨리 광장으로 연결되는 아치 ‘Acro della Costa'입니다. 작은 아치 하나에도 이름이 있는 이탈리아.
- 두 사람이 지나가려는 곳은 시뇨리 광장에서 에르베 광장으로 연결되는 아치입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아치를 통과하니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시뇨리 광장입니다.
- 주위의 모두가 궁정과 법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진의 정면은 12세기의 스칼리제 가의 델피노(Palazzo Delfino) 궁이고 왼쪽 노란 건물은 초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회랑인 로지아 델 콘실리오(Loggia del Consiglio, 1476-1793)입니다.
- 델피노 궁의 아치 문 위에도 베네치아 통치 시절을 시사하는 날개달린 사자상이 보입니다.
시뇨리 광장은 광장 중앙에 시인의 동상이 있기 때문에 단테 광장이라고도 불립니다. 단테 광장은 베로나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우아한 귀족적인 장소이고, 대개 ‘Verona's salon’이라고 불립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건축물이 섞여있는 곳으로 왼쪽에는 라지오네 궁(Palazzo della Ragione)으로도 불리는 12세기의 시청사 건물이 있습니다. 시청사 건물은 트리뷰날리 궁(Palazzo dei Tribunali)과 아치형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트리뷰날리 궁은 과거 통치자가 거주하였던 카피타노 궁(Palazzo del Capitano)으로 지금은 법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1172년에 건축된 람베르티 탑(Torre dei Lamberti)도 그곳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 단테의 거리를 보수하고 있었습니다.
- 아래의 그림과 같이 말끔하게 단장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베로나는 밀라노와 베네치아의 중간에 위치해 있는 도시로서 B.C. 89년에 로마의 식민지가 된 곳이며, 이탈리아와 북유럽을 잇는 요충지대로서 크게 성장한 도시입니다. 일찍이 로마 식민지가 된 이유 때문이었을까요? 베로나는 이탈리아 북부의 도시들 중 로마 시대의 유적이 많이 남아 있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1797년 나폴레옹은 베로나를 오스트리아에 넘기게 되고, 베로나는 결국 1866년에 이탈이라 왕국에 합병됩니다.
중세의 아름다운 성곽과 로마 시대의 유적이 그대로 살아있고, 깔끔하고도 세련된 도시 분위기를 갖춘 이탈리아 북동부의 도시 베로나. 아디제(Adige) 강이 시내 북서쪽을 큰 S자 형태로 휘감아 돌아 흐르고 있는 베로나는 볼수록 매력적인 도시입니다.
- 아디제 강이 베로나 시내를 휘돌아 감싸 안고 있는 모습입니다.
- 아디제 강 기슭의 베로나
이탈리아로 떠나기 전에 만났던 괴테(Goeghe, 1749~1832)의 ‘이탈리아 여행’은 그의 이탈리아에 대한 잔잔한 사랑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었는데, 그는 베로나의 원형극장 아레나에 대해 극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림과 글로 엮어진 이탈리아 기행은 제가 이탈리아 여행에 앞서서 약간이나마 이탈리아에 대해 눈뜨게 한 소중한 책이었습니다. 이 책이 예술가 기행문의 영원한 고전이라는 평가가 괜히 나온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래는 괴테가 쓴 글의 일부입니다.
- '이탈리아 여행'의 표지입니다.
- 베로나 원형극장. Eugen Spiro 작, 19세기 중엽.
‘이곳 사람들은 아주 활기차게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으며, 특히 상점들과 수공예품 가판대가 밀집해 있는 몇몇 거리는 정말 유쾌해 보인다.......
장날이면 광장마다 야채와 과일이 가득 들어차고, 마늘과 양파들이 아무렇게나 잔뜩 쌓인다. 사람들은 하루 종일 소리를 지르고 노닥거리거나 노래를 한다. 그러다가 싸우기도 하고 끊임없이 환성을 지르고 웃어댄다. 온화한 기후와 값싼 음식 때문에 살아가는 것이 용이하다. 누릴 수 있는 모든 것이 밖에 널려있다.
밤이 되면 노랫소리와 소란스런 소리가 더욱 커진다. 어느 거리에서나 말버로의 민요가 들려오고 여기저기서 덜시머(현이 달린 타악기)와 바이올린 소리도 들린다. 그들은 휘파람을 불며 온갖 새소리를 흉내 내려고 애쓴다. 감정으로 충만한 그러한 생활은 가난한 삶에도 부드러운 분위기를 드리워준다. 이 민족의 이런 성정은 존경할만하다.‘
세세하면서도 차분한 묘사력과 사랑이 스며있는, 1786년 대문호의 눈을 통해 보는 이탈리아는 더욱 흥미롭습니다.
- 베로나. 우물가의 아낙들과 주변 풍경. Goethe 작. 괴테가 이탈리아에서 그림 공부를 하며 그린 1,000매에 달하는 스케치 중 하나.
- '이탈리아 여행'에 실려있는 수채화 한 점. 티롤 인스부르크. Charles D'Oyley 작. 1840. 역시나 현대의 모습이 살아남아 있습니다.
- 이탈리아의 대시인이며 문장가인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피렌체 출신인 단테는 1290년대에 피렌체와 피사를 중심으로 일어난 당파 싸움에 가담하였고, 단테는 피렌체가 로마 교황의 세력에 들어가지 않게 하기 위해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를 옹호하는 구엘프(Guelf)당을 지지하여 교황을 받드는 기벨리니(Ghibelline)당과 적대관계에 놓입니다. 그 후 구엘프당의 승리로 두 당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구엘프당이 흑당과 백당으로 나뉘어져 다시 전쟁을 벌이게 되어 흑당은 단테를 추방해 단테의 길고 긴 망명생활이 시작됩니다. 그 후 1302년 피렌체로부터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면 사면을 내려주겠다는 조건부의 사면령이 내려졌지만, 그것이야말로 자신에겐 더할 수 없는 치욕이라 생각하고 응하지 않았습니다. 피렌체는 단테가 없는 상태로 재판을 열어 단테에게 사형선고를 내리게 됩니다.(Wikipedia 참조)
단테는 첫사랑 베아트리체가 갑자기 죽자 신곡을 쓰기 시작합니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의 서사시 '신곡(La Divina Commedia)'은 중세의 주류 언어이자 상류층 언어인 라틴어가 아니라 당시 피렌체의 일반인들이 사용하는 일개 지방언어에 지나지 않았던 피렌체어(토스카나어)로 씌여졌습니다. 이것을 통해 단테는 라틴어가 아닌 세속어로도 철학과 사상을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주려 했다고 합니다. 또한 주류 문화에 대한 반항의 의미도 들어가 있었고, 민족언어에 대한 애착도 포함되고 있었습니다. 14세기 이래 피렌체어로 쓰여진 신곡이 전 이탈리아로 퍼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읽은 '신곡'에서 사용된 언어가 오늘날 현대 이탈리아어의 근본이 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 19C 세계적으로 유명한 일러스트레이터 Gustave Dore의 단테의 신곡(Divine Comedy)에 삽입된 일러스트. 신과 인간, 악마의 특징을 예리하게 잡아내어 표현하고 있습니다.
단테는 피렌체에서 추방되어 베로나에서 6년간 머물며 신곡을 집필해 ‘지옥’편이 탄생하게 됩니다. 그렇게 떠돌던 단테는 마지막으로 찾은 라벤나(Ravenna)에서 정신적 안정을 찾아 그가 그토록 바라고, 심혈을 기울였던 신곡의 ‘천국’편을 완성하게 되고, 라벤나에서 생을 마감하게 됩니다.
15년에 걸친 그의 눈물겨운 망명생활은 신곡의 연옥과 지옥에 이르는 험난한 여정에 고스란히 표현될 수 있었습니다. 죽은 후에마저 그의 시신은 그의 삶만큼이나 파란만장합니다. 피렌체가 라벤나에 있는 단테의 무덤을 그가 태어난 피렌체로 돌려달라고 강력히 요구하고 나선 것입니다. 라벤나는 단테가 단테일 수 있었던 것은 라벤나에서 ‘신곡’을 완성했기 때문이고 단테의 영혼을 위해서도 결코 그럴 수 없노라며 단호히 거절했다고 합니다.
- 피렌체를 배경으로 단테가 그의 작품 신곡(Divine Comedy)을 들고 있습니다. 단테는 시인의 영예인 월계관을 쓴 모습으로 자주 등장하곤 합니다.
단테는 라벤나의 성 프란체스코 대성당에 잠들어있고, 단테 기념관 입구의 단테 동상 아래에는 ‘단테, 유럽인’이란 문구가... 피렌체 산타 크로체의, 단테의 비어있는 무덤 앞에는 고향으로 돌아올 단테를 기다리는 등불만이 외로이 지키고 있습니다.
라벤나와 피렌체의 단테 시신의 쟁탈전은 현재도 계속되고 있지만, 이탈리아인들의 서가에 단테의 신곡만은 꼭 한권씩 꽂혀있다고 하는 대목에서는 이탈리아인들의 단테에 대한 사랑을 가늠할 수 있겠습니다.
- 단테의 상이 있는 시뇨리 광장(Piazza dei Signori)입니다.
- 시뇨리 광장 앞의 단테의 동상입니다.
시뇨리 광장의 단테 상은 턱을 괸 채로 이 세상의 온갖 고뇌는 다 짊어진 표정을 짓고 서서, 시뇨리 광장을 오가는 수많은 사람들을 묵묵히 바라보며 인고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나 돌아가고 싶어했던 자신의 사랑하는 고향, 피렌체에 끝내 돌아갈 수 없었던 단테의 심정을 고스란히 표현하고 있는 모습의 동상은 보는 이로 하여금 가슴 밑바닥으로부터 차오르는 애잔함을 느끼게 합니다.
자, 베로나 여행의 출발 지점입니다. 포르토니 델라 브라(Portoni della Bra, city gate)를 지나면 중세의 아름다운 도시들이 눈 앞에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아기자기한 건물, 좁은 골목길, 사랑스런 엽서와 돌로 만든 앙징맞은 작품들과 중세와 르네상스의 건축물들이 믹스가 된 과거의 풍광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브라 광장에서 이어지는 마찌니 거리를 걷다 보면 금새 에르베 광장이 나타납니다. 에르베 광장은 도시의 심장부에 있고, 고대 베로나 시절에도 삶의 중심지였으며 유명한 장터였습니다. 이 광장은 과거 로마 인들의 포럼(Forum, 공적인 집회 장소로 쓰이던 광장)으로 이용되었던 곳으로 일찍이 로마시대의 포럼이 있던 곳에서는 4륜 경마차 경주가 열리기도 했습니다. 베니스를 거쳐 베로나로 온 허브, 향료, 커피 콩, 실크 등을 거래하는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했지요. 현재는 토마토, 그린 샐러드, 맛있는 과일 등을 팔고, 카페와 다양한 샵들이 많은 예쁜 노천 시장입니다.
- 에르베 광장은 예나 지금이나 시장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해 내고 있으며 생동감있고 활기가 넘칩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팔고 있던 피노키오들. 원래 피노키오의 고향은 피렌체인데...^^;
- 예쁜 손녀딸 "예솔이"를 위해 사지 않을 수 없는 피노키오였어요.
- 에르베 광장 한 켠에서는 즐거운 기타 연주가 열리고 더위에 지친 사람들은 계단에 걸터앉아 콜라와 빵을 마시며 즐기고 있습니다.
- 베네치아에서 많이 보던 가면들이 이곳에도 가득합니다.
- 특정 지역을 고향으로 하는 가면들이나 피노키오들이지만, 이탈리아 각 지역에서 모두 파는 것 같습니다.
에르베 광장 북쪽 끝에는 1630년에 건립된 바로크 양식의 마페이 궁(Palazzo Maffei)이 있고, 지붕 위에는 왼쪽부터 헤라클레스, 쥬피터, 비너스, 머큐리, 아폴로, 미네르바 등 6개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왼쪽에는 1370년에 세워진 Torre del Ore라고도 알려진, 가장 오래된Torre del Gardello 탑이 있고, 광장에는 16세기 당시 법령이나 율령을 포고하던 연단(capitello)도 있습니다.
마페이 궁 앞에는 코로나 디 산 마르코(Colonna di San Marco)라는 기둥이 하나 서 있는데, 코로나 디 산 마르코는 꼭대기에 베니스의 상징인 날개 달린 사자를 곁들인 기둥입니다. 그것은 1523년에 세워졌는데 1886년 베네치아 제국의 몰락 후에 끌어내려졌지만, 나중에 꼭대기에 새 사자를 올려놓고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 마페이 궁과 날개 달린 사자 기둥.
위의 글을 쓰다 보니, 병자호란 뒤 인조가 항복당했던 자리에 세워졌던 치욕의 비 삼전도비가 생각납니다. 청일전쟁 후 이 비를 강물 속에 쓰러뜨렸으나 일제 강점 후에 일제가 우리 민족이, 다른 민족에게 예속되어 왔던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다시 세워 놓았지요. 이 비를 지역 주민들이 땅 속에 매몰하였다가 1963년에 대홍수로 그 모습이 드러나게 되었는데, 문교부에서 원 위치보다 조금 동남쪽인 석촌동으로 옮겼다가 송파대로 확장으로 현 위치에 서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운 역사라고 여겨 그것을 땅 속에 파묻어 버리고 강물 속에 던져 버린다고 해서 그 역사가 묻혀지는 것은 결코 아니지요.
광장의 중앙에는 도시의 사랑스런 심벌 중 하나인 마돈나 베로나(Madonna Verona) 분수가 서 있습니다. 이것은 로마의 유적과 폐허에서 나온 것들로 세워졌는데, 세면기는 세인트 아나스타샤(Saint Anastasia)의 뜨거운 욕조에서 가져온 것이고, 동상은 의사당(캐피톨)에서 온 것입니다. 1368년에 칸시뇨리오 델라 스칼라(Cansignorio Della Sscala)가 동상에 연못을 덧붙였다고 합니다.
- 마돈나 베로나 분수.(베로나 시 홈 참조)
이탈리아는 로마시대부터 수로가 발달하였기에 다른 나라에 비해 유난히 분수가 많습니다. 이탈리아 광장에서 만나는 분수는 그 뜨겁고도 견디기 어려운 이탈리아의 태양을 식혀줄 수 있기에 언제 어디서 만나더라도 반갑기 그지 없었습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본 높이 84m의 람베르티 탑. 하늘까지도 그림 같은 연출을 해 줍니다.
까사 마짠티(Casa Mazzanti, 마짠티의 집)는 동쪽에 있는데, 스칼리제리가(Scaligeri family)는 이 빌딩을 곡식 창고로 사용했습니다. 거기엔 1530년 경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까발리에 의해 만들어진 아름다운 프레스코화가 있지요. 이들 프레스코화는 무지, 선한 정부, 그리고 시기심을 묘사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 오른쪽이 마짠티의 집.
- 정면의 사진.
- 마짠티 집의 프레스코화.
- 이것은 에르베 광장에서 시뇨리 광장으로 연결되는 아치 ‘Acro della Costa'입니다. 작은 아치 하나에도 이름이 있는 이탈리아.
- 두 사람이 지나가려는 곳은 시뇨리 광장에서 에르베 광장으로 연결되는 아치입니다.
- 에르베 광장에서 아치를 통과하니 이런 모습이 보입니다. 시뇨리 광장입니다.
- 주위의 모두가 궁정과 법원으로 둘러싸여 있습니다. 사진의 정면은 12세기의 스칼리제 가의 델피노(Palazzo Delfino) 궁이고 왼쪽 노란 건물은 초기 베네치아 르네상스 양식의 아름다운 회랑인 로지아 델 콘실리오(Loggia del Consiglio, 1476-1793)입니다.
- 델피노 궁의 아치 문 위에도 베네치아 통치 시절을 시사하는 날개달린 사자상이 보입니다.
시뇨리 광장은 광장 중앙에 시인의 동상이 있기 때문에 단테 광장이라고도 불립니다. 단테 광장은 베로나에서 가장 아름답고도 우아한 귀족적인 장소이고, 대개 ‘Verona's salon’이라고 불립니다. 중세와 르네상스 건축물이 섞여있는 곳으로 왼쪽에는 라지오네 궁(Palazzo della Ragione)으로도 불리는 12세기의 시청사 건물이 있습니다. 시청사 건물은 트리뷰날리 궁(Palazzo dei Tribunali)과 아치형 다리로 연결되어 있고, 트리뷰날리 궁은 과거 통치자가 거주하였던 카피타노 궁(Palazzo del Capitano)으로 지금은 법원이 들어서 있습니다. 1172년에 건축된 람베르티 탑(Torre dei Lamberti)도 그곳에 우뚝 솟아 있습니다.
- 단테의 거리를 보수하고 있었습니다.
- 아래의 그림과 같이 말끔하게 단장할 계획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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