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04.30 10:44
죽어서 무덤까지 갖고 가는 타이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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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 역시 그 시절의 감회가 새로워 옮겨 봅니다. 가끔은 지나간 글들이 사람을 즐겁게, 때론 가슴 아프게, 생동감 있게 만들어 주나 봅니다.
날짜 2000년09월09일(토요일) 22:04:13
글쓴이 고성애
아침에 '내 강의를 대신한~'이란 글을 올리다가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갈까?'에 추천 5란 숫자가 눈에 들어 왔다. '추천이란 것이 얼마나 냉정한 것인데???' 그런데 자기소개(사진)도 아닌 '살아가는 얘기들'에서 추천 다섯이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자 떠오르는 생각을 갑자기 쓰고 싶어졌다.
예로부터 관직에 대한 폐해는 말이 필요치 않을 지경이다. 특히 당쟁이 일어 난 배경에 있어서랴! 중국은 당쟁의 폐해를 없애고자 3대를 멸해 수많은 사람이 당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씨를 말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당쟁이 그 같은 양상을 나타낸 이유로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적인 답이 있다.
먼저, 주자학적 명분론의 과격성에 큰 원인이 있다.(이거 완전 강의로 나가네. 지루해 지려나? 한자까지 등장? 갈수록 태산?) 대개 왕실의 상복제인 예론(禮論)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대비가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 등, 둘째, 인사의 천거권을 쥔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자리다툼 등, 셋째, 무엇보다도 대외 발전이 막힌 환경에서 한정된 관직과 늘어만 가는 양반 계급의 수효와의 모순이 빚어 낸 비극이었다.
당시는 과거제도에만 출세의 길이 달려 있었다. 귀족들은 모두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교과서적 답 이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높은 관직에 오르느냐가 그 가문을 빛내 주는 열쇠가 되었다. 한 번 높은 관직에 오르면 예로써 대감이나 정승등 그 명칭은 무덤 속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어서도 그 관직명은 살아남아 있는 불멸의 것이었다. 그것을, 그 타이틀을 얻으려고 옛날부터 피흘려 가며 목숨을 건 쟁탈전을 불사했던 것이다.
나와 Spark가 가장 존경하는 분! 이원설 박사님! 경희대학교 대학원장과 한남대 총장을 역임하셨던 정말 멋진 분! 그 분을 닮고 싶었고 그 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 난 2년간 대학원 조교로, 1년은 세계 대학 총장 회의(IAUP) 사무총장 Secretary로서 그 분을 모시고 있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그 분은 대학원장으로서 단상 위에서 하나 하나 학위를 수여하시는 일 외에, 끝나고도 몹시 분주한 일정으로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은 단상 아래로 나를 찾아 오셨다. 나를 위해서...그리고 꼬옥 안아 주시는 거였다. "고생 많이 했다." 하시면서...
나이 지긋하신 학자님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그 분은 내 소개를 하곤 하셨다. 늘 상 꼭 같은 단어를 사용하시면서..."이 쪽은 Dr. 고이고..." '아이구 원장님 대강 좀 하시지요.' 너무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분이 총장님이 되신 이후에도 나는 3년 이상 입에 붙어 버린 '원장님'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원장님보다는 총장님이라고 하시는 것이~' 나는 타의 반으로 어색한 '총장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근이가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논문 후반부를 쓰느라고 도서관에 가던 일을 중지하고 내 방에서 씨름하고 있을 때 였다. 그 애는 엄마가 분명히 그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그것이 안 통하자 그 애는 자신의 머리를 방문에 부딪히기 시작했다."꽈 광~쾅~"으악~~ 가슴이 찢어져 왔지만 난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가 깨져서 피가 터져도 난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애에게 져서 한 번 나간다면, 그 걸 알아 채 버린 아이가 방문에 머리를 부딪힐 때 마다 달려 나가야 했을 테니까... 난 그런 나쁜 엄마였다.
그 앤 선언했다. "엄마! 난 이 담에 커서 논문같은 거 절~대 안 쓸 거야!!!" 논문이란 게 그애에겐 끔찍하기만 한 것이었다. 논문이란 게 뭔지도 모를 나이에 그 애는 이미 학자의 길을 포기한 셈이었다.(우리 가문에 학자, 이미 그 때 끝장났나 봐!)(^.^)
그렇게 어렵사리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따 낸 학위라는데 사람들은, 특히 자신이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그 노고를 인정해 주고 싶은 배려에서 위와 같이 'Dr.'라고 불러 주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에서도 그 타이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로 Doctor라는 것, Professor라는 것은 남들이 인정해 주는 지위의 상징이 되고 있다. 특히 어느 나라인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남편이 학위를 따면 그 부인에게도 똑 같이 닥터라는 호칭을 붙여 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학위를 세 개 땄다고 하면 그 세 개의 명칭을 부인의 이름 앞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이 학위를 땄다고 해서 남편에게는 닥터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사를 그냥 Doctor라고 하고, 이를 사람 이름 앞에 호칭으로 붙일 땐 줄여서 Dr.로 표기한다. 이름 뒤에 붙일 때는 "아무개, Ph.D."라고 붙이는데, 그 Ph.D.라는 것은 Doctor of Philosophy를 의미한다. 단어 그대로 보면 철학박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학박사의 경우도 명예학위(Honorary Doctor)가 아니면, "아무개, Ph.D., M.D."라고 붙인다. Litt.D.(명예 문학박사의 표기) 등의 명예학위가 아닌 논문을 내고 시험에 통과한 박사란 것을 의미하기 위해 Ph.D.가 붙은 것이고, M.D.는 Doctor of Medicine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 게 시험에 통과하고 논문을 제출해서 받은 의학박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Ph.D.라는 것은 진짜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그렇게 표기하지만, 대개는 철학박사가 아닌데도 그렇게 붙이게 된다. 학위를 역사학으로 했던 언론학으로 했던 간에 모두 철학박사의 칭호가 따라 붙는 것이다. 그 건 학문의 깊이가 깊으면 철학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원래는 그 철학박사 학위에서부터 박사학위가 시작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그렇게 내려 온 것이다.)
미국의 학자들은 그 Ph.D.를 농담삼아 다르게 해석한다. 그 게 Doctor of Philosophy의 줄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건 바로 'Pushing Husband Degree', 즉 '부인의 내조에 힘입은 바 커서 딴 학위'라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큰 의미가 내포된 농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Pushing Wife Degree'(이런 말은 들은 바 없지만~)에 속한다. 정말 여자로서 공부한다는 것이 보기처럼 말처럼 쉬운 일인가?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 중도에 그만 두고 싶었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아이가 아플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의지할 그 흔한 친정조차 먼 이국 땅에 있는 상황에서...) Spark가 내게 싫은 소리라도 한 마디 했더라면 아마 나는 그 당장에 공부하는 거 집어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내게 "참~ 잘했다. 힘들지? 쉬어라." 따뜻한 말로 감싸주었었다.
아침에 그 글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가 아니더라도 읽는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기 위한 디지털 조선일보의 상술일 수도 있는 것이다. 'XXX박사'. 글 맨 끝에 실려 있는 짤막한 이 하나로 독자들은 그 글을 쓴 사람을 신뢰하고 그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 필요 없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글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을 신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련만...
날짜 2000년09월09일(토요일) 22:04:13
글쓴이 고성애
아침에 '내 강의를 대신한~'이란 글을 올리다가 '나는 어떤 이름으로 살아갈까?'에 추천 5란 숫자가 눈에 들어 왔다. '추천이란 것이 얼마나 냉정한 것인데???' 그런데 자기소개(사진)도 아닌 '살아가는 얘기들'에서 추천 다섯이라...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그 글을 읽자 떠오르는 생각을 갑자기 쓰고 싶어졌다.
예로부터 관직에 대한 폐해는 말이 필요치 않을 지경이다. 특히 당쟁이 일어 난 배경에 있어서랴! 중국은 당쟁의 폐해를 없애고자 3대를 멸해 수많은 사람이 당쟁으로 인해 목숨을 잃었다. 일본은 씨를 말렸다고 한다. 조선시대의 당쟁이 그 같은 양상을 나타낸 이유로 우리가 잘 아는 교과서적인 답이 있다.
먼저, 주자학적 명분론의 과격성에 큰 원인이 있다.(이거 완전 강의로 나가네. 지루해 지려나? 한자까지 등장? 갈수록 태산?) 대개 왕실의 상복제인 예론(禮論)이 주요 쟁점이 되었다. 대비가 몇 년 상을 해야 하는가 등, 둘째, 인사의 천거권을 쥔 이조(吏曹) 전랑(銓郞)의 자리다툼 등, 셋째, 무엇보다도 대외 발전이 막힌 환경에서 한정된 관직과 늘어만 가는 양반 계급의 수효와의 모순이 빚어 낸 비극이었다.
당시는 과거제도에만 출세의 길이 달려 있었다. 귀족들은 모두 중앙에 진출하여 관리가 되는 것을 인생 최고의 목표로 삼고 있었다.
그러한 교과서적 답 이외에도 조선시대에는 얼마나 높은 관직에 오르느냐가 그 가문을 빛내 주는 열쇠가 되었다. 한 번 높은 관직에 오르면 예로써 대감이나 정승등 그 명칭은 무덤 속에까지 가지고 가는 것이며,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죽어서도 그 관직명은 살아남아 있는 불멸의 것이었다. 그것을, 그 타이틀을 얻으려고 옛날부터 피흘려 가며 목숨을 건 쟁탈전을 불사했던 것이다.
나와 Spark가 가장 존경하는 분! 이원설 박사님! 경희대학교 대학원장과 한남대 총장을 역임하셨던 정말 멋진 분! 그 분을 닮고 싶었고 그 분과 같은 삶을 살고 싶은 게 소원이었다. 난 2년간 대학원 조교로, 1년은 세계 대학 총장 회의(IAUP) 사무총장 Secretary로서 그 분을 모시고 있었다.
내가 박사 학위를 받았을 때 그 분은 대학원장으로서 단상 위에서 하나 하나 학위를 수여하시는 일 외에, 끝나고도 몹시 분주한 일정으로 스케줄이 꽉 차 있었다. 그런데도 그 분은 단상 아래로 나를 찾아 오셨다. 나를 위해서...그리고 꼬옥 안아 주시는 거였다. "고생 많이 했다." 하시면서...
나이 지긋하신 학자님들이 즐비한 자리에서 그 분은 내 소개를 하곤 하셨다. 늘 상 꼭 같은 단어를 사용하시면서..."이 쪽은 Dr. 고이고..." '아이구 원장님 대강 좀 하시지요.' 너무 쑥스러울 지경이었다.
그 분이 총장님이 되신 이후에도 나는 3년 이상 입에 붙어 버린 '원장님'이란 용어를 사용하고 있었다. 주위에서 다들 한마디씩 거들었다. '원장님보다는 총장님이라고 하시는 것이~' 나는 타의 반으로 어색한 '총장님'이란 단어를 사용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근이가 다섯 살 때의 일이었다. 논문 후반부를 쓰느라고 도서관에 가던 일을 중지하고 내 방에서 씨름하고 있을 때 였다. 그 애는 엄마가 분명히 그 방에 있다는 사실을 알고 빨리 나오라고 소리치며 울어대는 것이었다. 그것이 안 통하자 그 애는 자신의 머리를 방문에 부딪히기 시작했다."꽈 광~쾅~"으악~~ 가슴이 찢어져 왔지만 난 나가지 않았다. 아이의 머리가 깨져서 피가 터져도 난 나갈 수가 없었다. 내가 그 애에게 져서 한 번 나간다면, 그 걸 알아 채 버린 아이가 방문에 머리를 부딪힐 때 마다 달려 나가야 했을 테니까... 난 그런 나쁜 엄마였다.
그 앤 선언했다. "엄마! 난 이 담에 커서 논문같은 거 절~대 안 쓸 거야!!!" 논문이란 게 그애에겐 끔찍하기만 한 것이었다. 논문이란 게 뭔지도 모를 나이에 그 애는 이미 학자의 길을 포기한 셈이었다.(우리 가문에 학자, 이미 그 때 끝장났나 봐!)(^.^)
그렇게 어렵사리 뼈를 깎는 고통을 겪고 따 낸 학위라는데 사람들은, 특히 자신이 경험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그 노고를 인정해 주고 싶은 배려에서 위와 같이 'Dr.'라고 불러 주고 싶은 모양이다.
외국에서도 그 타이틀을 중요하게 여기는 것은 마찬가지로 Doctor라는 것, Professor라는 것은 남들이 인정해 주는 지위의 상징이 되고 있다. 특히 어느 나라인가 기억이 안 나긴 하지만, 남편이 학위를 따면 그 부인에게도 똑 같이 닥터라는 호칭을 붙여 준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남편이 학위를 세 개 땄다고 하면 그 세 개의 명칭을 부인의 이름 앞에 무슨 일이 있더라도 붙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인이 학위를 땄다고 해서 남편에게는 닥터라는 명칭이 붙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박사를 그냥 Doctor라고 하고, 이를 사람 이름 앞에 호칭으로 붙일 땐 줄여서 Dr.로 표기한다. 이름 뒤에 붙일 때는 "아무개, Ph.D."라고 붙이는데, 그 Ph.D.라는 것은 Doctor of Philosophy를 의미한다. 단어 그대로 보면 철학박사라는 것이다. 그런데 의학박사의 경우도 명예학위(Honorary Doctor)가 아니면, "아무개, Ph.D., M.D."라고 붙인다. Litt.D.(명예 문학박사의 표기) 등의 명예학위가 아닌 논문을 내고 시험에 통과한 박사란 것을 의미하기 위해 Ph.D.가 붙은 것이고, M.D.는 Doctor of Medicine을 의미한다. 그러니 그 게 시험에 통과하고 논문을 제출해서 받은 의학박사임을 의미하는 것이다.
Ph.D.라는 것은 진짜 철학을 전공한 사람도 그렇게 표기하지만, 대개는 철학박사가 아닌데도 그렇게 붙이게 된다. 학위를 역사학으로 했던 언론학으로 했던 간에 모두 철학박사의 칭호가 따라 붙는 것이다. 그 건 학문의 깊이가 깊으면 철학의 경지에 이른다는 의미로 해석해도 좋을 것이다.(원래는 그 철학박사 학위에서부터 박사학위가 시작했기 때문에 전통적으로 그렇게 내려 온 것이다.)
미국의 학자들은 그 Ph.D.를 농담삼아 다르게 해석한다. 그 게 Doctor of Philosophy의 줄인 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건 바로 'Pushing Husband Degree', 즉 '부인의 내조에 힘입은 바 커서 딴 학위'라는 그런 의미로 해석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큰 의미가 내포된 농담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나는 'Pushing Wife Degree'(이런 말은 들은 바 없지만~)에 속한다. 정말 여자로서 공부한다는 것이 보기처럼 말처럼 쉬운 일인가? 정말 하루에도 수십 번 중도에 그만 두고 싶었었다. 너~무 힘이 들어서...(아이가 아플 때나 어려운 일이 있을 때 의지할 그 흔한 친정조차 먼 이국 땅에 있는 상황에서...) Spark가 내게 싫은 소리라도 한 마디 했더라면 아마 나는 그 당장에 공부하는 거 집어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항상 내게 "참~ 잘했다. 힘들지? 쉬어라." 따뜻한 말로 감싸주었었다.
아침에 그 글을 읽으면서 많은 사람들이 그 글에 공감한다는 사실을 느꼈다. 그러나 그것은 자의가 아니더라도 읽는 독자들에게 신뢰감을 심어 주기 위한 디지털 조선일보의 상술일 수도 있는 것이다. 'XXX박사'. 글 맨 끝에 실려 있는 짤막한 이 하나로 독자들은 그 글을 쓴 사람을 신뢰하고 그 글을 읽게 되는 것이다.
그런 필요 없는 타이틀이 아니더라도 글 하나 만으로 그 사람을 신뢰하고 판단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더 살기 좋은 세상이 되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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