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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일한 글을 두 번이나 옮기게 된다. 글을 쓴 것은 1997/2/11, 그걸 창고 4로 옮긴 것은 2005-09-07. 아래 글이 그것이다. --> http://goo.gl/5U99pO

(처음엔 아들 현근이에게 읽히려고, 이번엔 조카 정아가 물어보기에 걔에게 읽히려고...)

 

 


 

글쓴 날짜 1997/2/11, 00:38:11
제 목 [옛 얘기] 영어의 왕도 - 1

- 지난 토요일(8일)에 구정을 맞아 내가 존경하는 이원설 박사님 댁을 찾아갔다. 거기서 그분의 장남인 명지대학교 영문과의 이기한(Dr. John Kyhan Lee) 교수를 만났다. 그와 예전 얘기를 하다가, 그가 등장하는 나의 글 하나를 이 웹 페이지에 싣기로 했다. 바로 아래의 글이다. 1991년도 9월 3일에 쓰여진 글이다.

 

마구잡이식 영어 공부에 관하여
-- Spark's Royal Road to Mastering English --

Spark, Sept. 3, 1991



벌써 오래 전의 얘기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니던 당시 이미 고등학생이던 큰형이 어느 날 친구와 얘길하면서 자긴 영어 때문에 고민 중이라는 소릴 했다. '그 놈의 영어가 뭔데 공부 잘하는 형도 그 걸 갖고 고민을 하나?'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당시 난 공부와 담을 쌓은 둔재였고, 형은 우등생이고, 모범생이었으며, 장학생이기도 했다. 특히 형은 수학을 워낙 잘해서 항상 100점을 받았기 때문에 산수가 싫었던 내겐 하늘같은 존재였다. 그러니 형이 두려워하는 과목이 있다는 것에 대해서 상당한 의문을 가졌던 것이다.)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에 스케이트를 타다 사고로 죽은 후 난 그가 공부하던 영어 참고서가 꽤 많다는 것을 알았다. 그 중 두 권의 제목이 아직도 기억에 남아 있는데, 둘 다 안현필 씨의 전설적인(?) 영어 참고서인 {기초오력일체}와 {영어실력기초}였다. 난 형을 잊으려는 부모님들이 형의 책을 모조리 불살라 버릴 때 그 책 둘만은 감춰 두었다. 그 책 안의 다른 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지만 안현필 씨 특유의 유모어가 "잔소리"란 타이틀 밑에 재미있게 쓰여 있었던 때문이다. 이와 함께 기억나는 것은 우리 형이 공부한 영어 책들이 모두 앞부분에만 공부한 흔적이 남아 있고, 뒤쪽은 깨끗했다는 점이었다.

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약 3개월의 공백이 있었다. 국민학교와 중학교 공부의 차이가 영어 공부 차이라는 얘길 듣고서, 난 '이 문제의 과목'에 대해서 준비하지 않으면 나중에 애로가 있을 것임을 간파했고, 곧 영어 학원을 다니기로 마음먹었다. 동네에 하나 있던 영어 학원에 등록해서 열심히 공부했다. 워낙 공부를 않다가 학원에 나간다니 어머니가 특히 좋아하셨다.(내 기억에는 이 게 최초의 효도가 아니었는가 싶다.) 영어는 생각보다 쉬웠다. 일단 처음 보는 글자인데다가 몇 번 그려보니(?) 그릴 만 했고, 그려 놓고 나면 보기에 그럴 듯 해서 난 영어가 참 좋아졌다.

특히 그 영어 학원에서는 영어는 무조건 외우면 된다고 하기에 난 외우라는 건 모조리 외워 버렸다. 그랬더니 학원이랍시고 우습게 알고 예습 복습을 안 해 온 사람들은(거긴 나 같은 애들은 거의 없었고 영어를 모르는 어른들을 위한 특별 교습 학원이었다.) 모두 선생님께 심한 꾸중을 들었다. 몇 사람은 "아무리 외우려 해도 외워지지 않는 걸 어쩝니까?"하고 선생님께 하소연을 하곤 했다. 하지만 난 외우려고 해서가 아니고 재미있어서 몇 번 읽다 보면 외워졌다. 나중엔 매번 진도에 따라서 외워 나가는 것이 귀찮아서 학원에서 내어 준 교재에 있는 내용 전부를 한꺼번에 다 외워 버렸다.(어릴 적엔 모두 기억력들이 비상하기 마련이 아닌가?)

일단 이렇게 3개월을 보내고 나서 중학교에 들어가니 다른 시간은 몰라도 영어 시간은 참으로 즐거웠다. 그 당시에 다른 아이들은 영어를 미리 배우고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펜맨쉽(Penmanship: 요즘도 이런 걸로 글씨 쓰기를 배우는지 모르겠지만 이 땐 오선지 비슷한 데다 펜촉에 잉크를 매번 찍어서 쓰는 펜맨쉽용 펜으로 열심히 영문자를 그리게 했다.) 교본부터 시작을 했다. 물론 난 알파벳을 미리 배웠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애들처럼 그 교본을 메워 나가는 일을 했다. 그러나 그 걸 끝내자 내 세상이 왔다. 학원에서 3개월 정도 매일같이 배운 것은 중학교 2학년을 끝마친 수준 정도는 되었기 때문에, 난 졸면서도 영어 수업을 따라갈 정도였던 것이다. 그 덕에 난 영어 선생님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 일단 책에 있는 내용은 다 아는 것이고, 좀 어려운 질문을 선생님이 하셔도 난 회심의 미소만 짓고 있다가 "그럼, 순백이가 말해 봐라!"라고 말씀하실 때 우쭐대며 일어나서 알고 있는 내용을 한 번만 읊어대면 되곤 했던 것이다.

특히 한 여선생님의 나에 대한 사랑은 정말 극진했다. 그분은 매우 까다로운 성격을 가진 분이어서, 공부 시간에 떠들거나 늦게 들어오기만 해도 정말 불같이 화를 내며 매를 드시곤 하던 분이다. 어느 날 나는 노는 데 정신이 팔려서 몇 친구들과 같이 영어 시간에 늦게 들어가는 실수를 저질렀다. 눈앞이 노래졌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교실문 앞에 섰는데, 아 이 친구 놈들이 내가 제일 먼저 들어가야 한다며 내 뒤에 늘어서는 것이 아닌가? 난 한사코 뒤로 빠지려 했지만 친구들이 워낙 강권을 하는 바람에 사르르 문을 열고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 검정 안경테 속에서 빛나는 매서운 눈초리, 하이 피치(high pitch)의 쟁쟁대는 그분의 목소리를 각오하면서 선생님을 쳐다봤다. '이 게 웬 일?' 그분은 전에 없던 자애로운 눈으로 날 쳐다보시며, "빨리 들어가 앉아라..."하시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수업을 계속하시는 것이었다. '오, 세상에..... 이 게 바로 말 로만 듣던 편애란 거로구나!' 난 그 자리에서 세상의 한 부분을 깨닫게 되었다.

내 친구 놈들의 영악함. 날 먼저 들여보내면 자기들도 무사할 수 있다는 바람이 이뤄진 것에 대하여 이 놈들은 축배를 들고자 했었다.(난 그 덕에 이 녀석들이 돈을 걷어서 사준 라면 한 그릇을 그 날 방과후에 먹었다. 라면이 나온 지 몇 해 안 되었던 당시에 친구들로부터 라면을 대접받는다는 것은 그리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 후에도 신나는 일이 많았다. 조는 아이들이 있으면 칠판 앞으로 불러내어 물구나무서기를 시키는 그분은 내가 어쩌다 졸면 슬그머니 내 곁으로 오셔서는 "공부하느라고 너무 늦게 잤나 보구나. 저런......" 하고 어깨를 툭툭 쳐주시고는 다시 강단으로 올라가셨던 것이다.

그러나 아뿔싸. 난 영어를 너무 우습게 알고 있었다. 중학교 2학년 때부터 난 다해 놓은 공부라고 생각하고, 영어 시간에 소설책을 읽기 시작했던 것이다. 3학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중에 알았지만 2학년 후반부에서 문법 공부가 시작되고 있었는데, 난 그에 대해서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던 것이다. 3학년 1학기에 이미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시험에 문법 문제가 나오면 난 여지없이 틀리고 있었다. 그러다 보니 영어에 점점 흥미가 없어지고 영어 시간이 싫어지기 시작했다. 2학기에는 (고등학교 입학시험을 앞두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영어가 싫어서 영어 시간이 되면 자학적으로(?) 다른 책을, 특히 전자기술에 대한 책을 보았다.(이 때는 지금의 {전자과학} 잡지가 {전파과학}과 {전자기술}이라는 두 개의 잡지로 나오던 시절인데, 난 영어 시간이면 이 잡지들을 읽곤 했다. {원앙선}이니 {꿀단지}니 하는 못된 책들도 이 때 보았음을 이 자리를 빌어서 고백한다. 신세대들은 이 소설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 하겠지만...)

정말, 단지 영어 시험을 완전히 망치는 것으로 인하여 고등학교 입시의 1차 시험에서 떨어지고 마는 일이 생겼다. 2차 시험을 보아서 경희고등학교에 들어갔다. 정말 기가 막혔다. 하지만 내 특유의 오기(?)가 있어서 그 때 나의 단호한 마음가짐은 '이 놈의 영어 공부 다신 안 한다. 네 놈 때문에 내가 1차를 떨어졌는데 네가 죽나 내가 죽나 어디 해보자!'하는 얼토당토않은 것이었다. 고등학교 시절에 정말 영어는 치가 떨려서 멀리했다. 영어는 진짜 꼴도 보기 싫었기에, 제2외국어인 불어를 열심히 했다. 그러면서 3학년이 되었을 때 난 다시 입시를 생각했다. 다른 과목은 괜찮았다. 또 그 놈의 원수 같은 영어 때문에 내 인생이 변할 것을 생각하니 치가 떨렸다. 다행히 대학에는 합격이 되었다. 예비 고사를 보면서 영어에서 부족한 점수를 다른 과목에서 보충하느라고 애로가 많았다. 그 때 비로소 난 영어라는 것이 나만의 적이 아니라 우리 집안의 원수라는 걸 알게 되었다. 영어는 한 때 내 형을 괴롭혔고, 이젠 내게까지 그 마수를 뻗치고 있었던 것이다.

대학에 다니면서도 오기로 영어는 돌아보지 조차 않았다. 결과는 뻔했다. 신문방송학과에는 특히 영어와 관련된 과목이 많았고, 많은 영문 원서를 읽어야 했는데 당장 신문 영어 과목에서 낙제점이 나왔다. 대학 2학년에 배운 교양 중급 영어에서도 같은 결과가 나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영어 넌 내게 찍혔다! 너와 난 서로 볼일이 없다!' 하면서 엉뚱한 결별 선언만을 되풀이했을 뿐이다. 그리고 군에 갔다. 연대장 당번병이 보직이었던 군에서는 시간이 나서 많은 책을 읽었지만 영어에 관련된 책을 읽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제대 말년에 이르렀다. 난 그 때 내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커다란 획을 그어준 책 한 권을 읽고 또 읽었었다. 그것은 교양학부 시절 현대사 시간에 교재로 쓰였던 책이었다. 이원설 박사 (전 대전 한남대 총장. 당시 경희대 정경대학장)가 저술한 {혁명시대의 미래관}이란 책이다. 난 미래학(futurology)에 관한 이 책을 읽고서 대학 교육이 중고교의 교육으로부터 구별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몇 가지 과목에 대해서 커다란 관심을 가지게 되었었다. 즉, 철학, 논리학, 역사학, 그리고 사회학에 대한 관심이었다. 군에 있던 3년의 시간 동안에 난 {혁명시대...} 안에서 인용된 대부분의 책을 다 구해 읽었다. 나의 이원설 박사에 대한 존경심은 하늘 높은 줄 모를 정도였다. 군 생활을 마감해 가는 시점에서 난 그분에게 편지를 썼다. 그분을 내가 얼마나 존경하고 사랑하며, 그분의 책으로부터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배웠는가에 대한 감사의 말씀을 드렸다.

그분으로부터 답장이 왔다. 그런데 이 건 뭔가? 그분이 내게 보낸 편지는 경희대 대학원장의 직함이 적힌 영문 편지지에 영문으로 타자된 것이었다. 좀 기가 막히기는 했지만 대충 읽어보니 그분의 기쁜 마음을 표현한 것과 나를 격려하는 내용, 그리고 한 번 찾아오라는 내용임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편지의 중간 부분에 있는 내용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영어를 잘 못한다는 것이 그처럼 괴로울 수 없었다. 당시 내가 근무하던 부대(철원 6사단 2연대)에서 경영하는 야학(고등학교)의 영어 선생을 찾아가서 좀 해석을 해 달라고 했는데, 이 친구도 그 편지의 내용을 번역하면서 헤매고 있었다. 그 친구가 엉터리 선생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으므로, 그에 대한 원망을 할 수는 없었다. 그 친구는 그 서신이 매우 세련된 영어로 쓰여 있고, 상당히 난삽한 문장이라고 했다. 어쨌거나 난 그 편지의 내용을 적당히 이해하는 상태에서 그분을 찾아뵙기로 했다.(이 편지는 지금도 집에 표구를 해서 걸어 놓았다.)

 

IMG_3295.JPG

- 2015-03-02 comment: 이 편지는 표구되어 "초당"에 걸려있다.

글쓴 날짜 1997/2/11, 00:39:57
제 목 [옛 얘기] 영어의 왕도 - 2

그분의 사무실에 군복을 입고 들어서면서 난 상당히 긴장하고 있었다. 사실 그분의 강의를 교양학부 시절에 들은 바 있으므로 난 그분이 어떤 분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전혀 모르는 어떤 두려운 존재를 찾는 듯한 기분으로 그의 사무실을 들어섰다.

"까라라락......" 무슨 소린지 모르지만 뭔가 째어지는 듯한 소리가 들려 오고 있었다. 노크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무슨 일인가를 하시느라고 못 알아들으신 듯 했다. 그분은 멀리 떨어진 대형 테이블 위에 전동 타자기를 놓고 뭔가를 쓰고 계셨다. 거기 조금 서 있다가 인기척을 느낀 그분이 날 쳐다보시는 바람에 처음으로 인사를 드렸다. 그분은 자신의 열렬한 추종자 하나를 발견한 기쁨이 참으로 크셨던 것 같다. 거기서 많은 대화를 나눴다. 얘기가 진행될수록 그분은 신바람이 나셨다. 요즘에 쓴 글들이라며 몇 개의 글을 주셨다. 이 게 웬 일? {코리아 헤랄드}에 실린 칼럼이었다. 그분은 코리아 헤랄드에 매주 칼럼을 기고하고 계셨다. 물론 영문 칼럼이었다. "Creative Response"란 제목의 칼럼이었는데 난 그 때 당황해서 그 글이 어떤 것인가를 살펴볼 겨를이 없었다. 그분은 캐리지 리턴(carriage return)을 세계 최초로 기어(gear) 방식으로 채택한 시티즌 전동 타자기를 사용하고 계셨다. 글씨체는 옥스포드 파이카체(지금은 쿠리에로 불리는 서체)였다. 타자된 몇 개의 영문 칼럼의 초고(드래프트)도 얻어 왔다.

대책이 안 서는 충격을 느끼며, 난 다시 제대를 며칠 남기지 않은 군으로 돌아갔다. 3년간의 복무를 마치고 1976년에 제대를 했다. 우선 제대하면 곧바로 찾아오라고 하신 그분을 찾아갔다. 그분은 다시 몇 개의 글을 읽어 보라시며 그것을 카피해 주셨다. 사실 난 그 전에 받은 글조차 읽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무척이나 찔렸다. 난 오랫동안 그저 망연자실하고 있다가 다시 몇 개의 글을 받은 것이었다. 문제는 그분이 상당수의 교양 도서를 읽어서 좀 아는 체를 하는 놈이 영어까지 잘할 것이라고 지레 짐작을 하고 계셨다는 것이었다. 난 할 수 없이 영어 공부를 해야 했다.(영어 공부를 해야 할 또 하나의 이유는 졸업 후에 취직을 해야 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그분을 실망시키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우선하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어디서부터......

그 때 그분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이 있었다. 위의 코리아 헤랄드 칼럼의 제목과 같은 제목의 책이었다. {Creative Response}. 난 그 책의 제목이 어디서 따온 것인가를 알고 있었다. 역사학자이며, 정치학자인 그분이 토인비의 도전과 응전의 가설로부터 "창조적인 응전(반응)"을 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그런 제목을 붙였을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집에 돌아와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려고, 어떤 영어 참고서를 꺼내 들었다. 하필이면 그 서문에 이런 말이 있었다. "There is no royal road..." "영어 공부를 하는 데는 왕도가 없나니라......"로 시작하는 그 서문을 읽으면서 난 다시 절망하고 있었다.

그래서 일단 그분의 책을 손에 들어보았다. 기가 막혔다. 내가 그렇게나 두려워하는 영어로 쓰인 책. 그것도 내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분이 쓴 책. 영어로 쓰이긴 했지만 그분의 또 다른 책을, 그분의 사상이 담긴 그 책을 읽고 싶었다. 정말 그 건 강렬한 바람이었다. 난 다른 참고서를 볼 시간이 없었다. 그분의 책을 읽어야 했다. 서문을 읽으려 했으나 도저히 방도가 없었다. 핑계도 좋지. '서문이야 안 읽으면 뭐 큰 일이 나나?' 이런 생각으로 그 건 지나치고, 맨 처음으로 실린 칼럼을 읽기로 했다. 물론 사전을 준비했다. "Nothing to fear, but fear itself" '오, 이 게 뭔 소린가?' - 난 "두려워 할 것이 아니오, 두려움 그 자체를 두려워하라"는 이 로오즈벨트(루즈벨트의 원전 발음.)의 연설에서 나오는 한 문구를 제목으로 한 그 글을 보는 순간 또다시 좌절했다. 당시의 내 실력으로는 그 제목의 의미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일단 모르는 것은 넘어가자!' 난 사전을 펼쳐 들면서 내 자신에게 말했다.


- Dr. Won Sul Lee가 저술하신 책들. 이것은 회사의 내 서고에 꽂혀있는 책들이다. 물론 이 박사님의 저서는 이것의 몇 배 정도 된다.(한글로 쓰여진 저서도 꽤 많다.) 단지 여기 있는 것은 1976년부터 1998년까지 코리아 헤랄드의 Creative Response 칼럼(Won Sul Lee Columns)에 실렸던 글들만 모은 것으로서 책 한 권이 대략 450쪽 정도 된다. 코리안 엑소더스는 이 박사님이 쓰신 픽션(소설), 그리고 "Write the Vision - It will surely come"은 이 박사님이 쓰신 영문 자서전이다.(의미는 제목 그대로 "꿈을 가지면 필시 이루어지리니..."하는 것이다.)

첫 번째 단락에서 난 정말 두서너 단어만 지나가면 새로이 나타나는 낯선 단어에 맞닥뜨려야 했다. 단어장을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모르는 단어가 끝이 없는 바람에 기가 죽어서 당장 포기하고 싶은 생각만 들뿐이었다. 한 페이지를 읽는데('읽는데? 읽긴 뭘 읽어, 그냥 쳐다보는 거였지.') 도대체 몇 시간이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였다. 몇 페이지를 넘기면 어머니가 밥 먹으라고 하신 기억이 난다. 그런 기억을 더듬어 볼 때 그 몇 페이지를 읽는 데 하루 이상의 시간이 지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글을 읽으면서('읽으면서? 그 게 읽은 건가?') 난 은근히 부아가 났다. '이 건 해도해도 너무 하시지 않았는가? 좀 쉽게 쓰신다고 뭔 일나나? 너무 어려운 단어들. 내가 아무리 영어 공부를 안 했다고 하지만 그래도 생판 처음 보는 단어가 속출하는 데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문장은 왜 그리 긴지. 두어 단어 건너뛰면 모르는 단어가 나오는 가운 데 콤마(,)가 많이 쓰인 복잡한 구문들이 끝도 없이 나오는 바람에 도저히 문장을 분석하는 것조차 힘들었던 까닭이다. 글의 내용 파악? 그 건 애시당초 불가능한 주문이었다. 난 내용을 파악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단어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다 보니 문장의 내용을 볼 시간이 어디 있었겠는가?

다음 날. 나는 이 공부를 계속할 것인가? 아니면 그분(이원설 박사)을 포기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했다. 존경도 좋지만 우선 사람이 살고 볼일이 아닌가? 하지만 결론은 이미 난 상태에서 난 그런 앙탈(?)을 한 것뿐이었다. 할 수 없이 영어 공부를 하기로 했다. 기왕지사 그 책의 내용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시작한 것이니 만치 난 그 책을 조 금씩 번역해 가면서 보기로 했다. 단어를 찾느라고 고생하느라 내용을 파악할 시간은 없었으니 일단 억지로라도 번역을 해 놓고,(사실은 그 정확한 내용이 아니고 뜻을 찾은 단어만 배열해 놓은 글이니 번역은 아니다.) 시간이 나면 그 내용에 대해서도 짐작(?)해 보기로 한 것이다. 그런데 일을 시작하고 보니 또 다른 난관이 있었다. 첫 날은 단어 찾는 재미(?)에 번역은 않았었는데, 번역을 하고 나서 이 걸 공책에 옮겨 적으려니 시간이 보통 많이 걸리는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한 단락을 번역해서(옳게 번역된 것인지 어떤 것인지도 모르는 그 글을) 옮겨 적으려니 - 말도 안 되는 걸 적는 것 같아 - 양심이 찔려서 그 걸 확인하고 또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바로 거기에 있었다. 중학교 때 간과한 문법의 문제가 거기서 나타나고 있었던 것이다. 난 그제야 언어라는 것이 단어만 나열해서는 뜻을 가질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꽤나 일찍도 깨달았던 것이다.) 그 각각의 단어들이 문법의 규칙에 따라 제 자리를 찾아가야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음을 안 것이다.(난 이 때 그 흔히 듣던 목적어니, 보어니 하는 것들이 어떤 특정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Eureka!!! 나로서는 대단한 발견이었다. 강요에 의해서 문법의 의미를 안 것이 아니고 나 스스로 그것의 의미를 알기까지 이렇게나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다.) 일단 책의 번역을 시작한 상황에서 다시 문법 공부를 하기 위해 참고서를 볼 수는 없었다. 일단 문법은 무시하고(?) 단어만 찾아서 글의 내용을 대충 짐작만 하고 넘어가는 것으로 하기로 했다.

며칠간 이 말도 안 되는 작업은 계속되었다. 한 번 찾았던 단어도 그 걸 찾아봤는지 조차 알 수가 없어서 서너 번씩 찾곤 했다. 복잡한 단어들이 많았고, 또 흔히 쓰이지 않는 단어들이 많았다. 이 박사님의 글에는 동의어를 여러 번 사용한 흔적들도 있었고, 반의어가 의도적으로 동원되는 일도 있음을 알았다. 그 때까지도 단어를 찾아서 뜻을 알아 놓고, 일단 그 단어들을 얼기설기 엮어서 말을 만드는 그야말로 완벽한 재창조 작업(흔히 번역은 "반역" 혹은 "재창조"라고 하는데, 당시의 나야말로 아주 확실한, 누구도 미친 짓이라고 생각할 반역)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한 20여 페이지를 그 작업을 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앞에서 썼던 표현이 드문드문 반복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콤마로 분리된 그런 복잡한 글들도 자꾸 보다 보니 친숙해져서 겁이 없어지게 되었다.(이런 것들은 부연을 위한 동격 처리인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이젠 너무 많이 찾다 보니 저절로 뜻이 외워진 단어들이 많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다. 신바람이 나서 그런 부분에서는 작업의 속도가 빨라졌다.

100여 페이지를 넘어 가면서는 세 가지의 희한스런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하나는 아주 겁이 없어져서 하게 된 생각인데 '아무리 영어를 잘해도 한 사람이 많은 글을 쓰게 되면 거기서 한계가 나타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자주 보는 단어들, 다시 말해서 이젠 내가 다 아는 단어들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었고, 어떤 능력, 즉 내 나름의 문장 분석력이 생겨서 나름대로의 번역이 가능하게 된 점, 또한 확실치는 않지만 내 나름으로 이 문장들이 어떻게 구성된 것인가를 파악하는 분석적 사고가 가능해 졌던 것이다. 즉, 문법에 대한 눈이 보다 확실히 뜨이게 된 것이다. 그 때는 어떤 자리에 어떤 단어가 어떤 형태로 들어간다는 것을 알 수 있게 되었다. 난 단지 그 각각의 단어들이 영문법에서 어떤 이름으로 불리는 지에 대해서만 모르고 그 역할에 대해서는 알게끔 되어 있었던 것이다. 거기서부터는 단어를 찾을 것도 없었고, 매일 보던 문장의 친숙한 구문이어서 번역하기도 좋았다. 거기서부터 295 페이지가 마지막 페이지인 그 책을 번역하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난 그 책을 다 번역할 필요가 없었다. 다 번역하기 이전에 그 책의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면서 읽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 도사 같은 영어 선수인 이원설 원장께서 쓰신 글 중에서 어떤 단어의 뉘앙스가 틀린 채로 사용되고 있다는 사실이 눈에 띠기도 했다.(난 이런 문제를 깨 놓고 원장님께 지적해 드림으로써 그 책의 수정 2판이 나오는 데 약간 기여했다. 이원설 원장님은 그 걸 무척 재미있어 하셨다.)


- 꿈을 가지면 이뤄지리니... 근데 소제목 The Odyssey of a Korean Young Man이란 것 중에 오딧세이가 끼어 있다. 역시 이 박사님이 이 단어를 좋아하신다.^^ 사진은 이 박사님의 어린 시절 모습.

나중에 난 내가 시험해 본 이 무식한 방법이 - 사실은 다른 대안이 없어서 시도한 것이지만 - 매우 효과적인 영어 공부 방법임을 깨닫게 되었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적당히 단어만 찾아가면서 보았더라면 영문을 분석적으로 보려는 노력을 안 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없는 실력에 번역을 해서 공책에 옮겨 적으려는 과정에서 난 각 단어들이 가진 역할의 중요성에 착안하였고, 그것들이 문법에 의해 쓰여야 한다는 걸 알았으며, 문법을 알기 전에 단어의 문법적인 역할에 대해서 알게 되었던 게 아닌가? 과연 누가 이런 방식의 지루하고, 무모한 방법으로, 마치 영어라는 남의 나랏말을 어린아이들이 몇 개의 단어를 토대로 보다 많은 말을 배워 가듯, 모르는 단어를 찾아 익혀 가면서, 문법에 대한 개념조차 없이 배워 갈 수 있겠는가?(머리가 커서 논리가 생기면 오히려 이런 방법에 한계가 있다는 것을 우린 교육심리학 강의를 통해서 알고 있지 않은가?) 오히려 논리적인 방법을 채택했더라면 중간에서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었다. 특히 책 한 권을 선택하여 그 걸 끝까지 물고 늘어졌던 것은 옳은 방법이었다고 생각된다. 만약 여러 개의 참고서를 전전했다면 옛날의 내 형처럼 새 참고서를 사서 앞부분만을 줄을 쳐가면서 보고, 어려우면 다른 참고서로 옮기는 우를 범했을지 모른다. 매일 같이 그런 책의 앞에 있는 명사 부분만 공부한다고 하면 실제로는 명사 하나에 조차도 도가 트일 리 없는 것이라 하겠다. 왜냐하면 명사마저도 다른 문장의 요소들과의 일정한 관계에 의해서 그 역할이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삼위일체"(문법, 해석, 작문)로 보는 사람도 있지만, 실은 이것은 그보다 훨씬 복잡하고, 많은 요소가 결합된 시스템적인 요소를 가진 것이다. 말 그 자체가 극히 복잡한 문화의 한 측면으로서 시스템이 아닌가?

글쓴 날짜 1997/2/11, 00:41:15
제 목 [옛 얘기] 영어의 왕도 - 3

난 영어 공부를 한답시고 영문 타자기를 샀다. 올리베티 사의 "스튜디오 46"이란 기종이었다. 그 타자기는 이원설 박사님께서 이사장으로 계시던 유유문화재단에서 주신 장학금으로 샀다. 그 장학금은 이 박사님께서 날 격려하기 위해 주선해 주신 것이었다.

난 그 후 대학원에 들어가서 진짜 실력으로 받은 (당시 가장 많은 액수의 장학금을 주던) 산학협동재단의 장학금으로 그분이 사용하시던 것과 같은 시티즌 전동 타자기를 샀다. 동일한 타자기를 쓰면서 존경하는 분의 발뒤꿈치라도 닮아 보려고 발버둥을 친 것이라 하겠다. 그 영문 타자기를 사고나서는 아침 잠이 없어져서(마치 도시바 사 최초의 노트북 컴퓨터를 사 놓고 나니 한 동안은 새벽 4시에 잠이 깨어졌던 것처럼) 새벽에 일어나서 난 알지도 못하는 단어로 꽉 찬 이 박사님의 칼럼집의 내용을 그저 두드려 보았던 것이다. 그 덕에 타자 속도도 늘고, 뜻을 모르는 단어임에도 그 걸 스펠(spell)할 수 있는 희한한 단어 실력까지 갖추게 되었다.

이 박사님의 영문 저서 한 권을 다 공부했을 때, 즉 그 책의 내용 전체를 번역해서 노트 한 권에 옮겨 놓았을 때, 난 최소한 내가 알고 있는 단어들을 주워 맞춰서 어떤 종류의 영작이라도 할 수 있는 정도의 실력을 갖출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대충 이 때가 군에서 제대한 후 5내지 6개월 정도였다.(이 무모한 짓을 하는데 여러 번 코피를 흘렸다). 이미 내가 외워 버린 단어의 수가 꽤나 많았다. 이원설 박사가 사용하시던 단어들은 일상생활에서의 일과 골치 아픈 철학, 사회학, 정치학, 역사학에 관한 칼럼을 쓰는데 사용될 수 있을 정도로 별별 희한한 것이 다 많았던 까닭이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표현을 영어 단어들을 동원해서 글로 옮기는데 (즉, 영어로 번역하는데...) 단어가 부족한 일이 없었다.

그리고 이 시점에 이르기 직전에 결국 영어 참고서를 보게 되었다. 거기서 영문의 형식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3형식, 4형식의 차이니 뭐니 하는 것들이 있는 줄은 알았지만, 그런 것들이 일목요연하게 설명되어 있어서 그 책을 쓴 사람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난 당시에 이 같은 구문 형식에 대한 인식이 없었지만 이미 작문을 함에 있어서 앞에서 어떤 식으로 작문이 시작되었는가에 따라서 자동적으로 형식에 맞는 문장을 쓰고 있었기 때문에 문장의 형식은 따져 보지 않아도 좋았다. 단지 그 영문 참고서를 보고 나니 친구들과 - 시험을 보기 위한 - 영어 공부를 할 때 영문법에서 사용하는 정확한 용어를 들춰 가며 "이 건 3형식이므로, 목적어를 ....." 어쩌고 하면서 말하기에 편해서 좋았다. 그렇지 않으면 "왠지는 모르지만 이 건 이렇게 써야 되잖니?"라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었을 것이다.

가끔 영자 신문을 보았다. 사설 위주로 기사를 오려 놓고는 이를 번역을 해 가면서 공부를 했는데, 모르는 단어는 몇 개 없었고, 그 단어를 찾지 않아도 해석은 별 문제가 없었다. 그 걸 한글로 번역해 놓고서 다시 영문으로 옮겨 보는 훈련도 했다. 거의 원문과 비슷한 번역이 되곤 했다. 맞는지 틀리는지에 대해서, 또는 세련되게 옮겼는지에 대해서는 알 수 없었지만 옮긴다는 사실에 있어서만은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러다 외국인들도 the나 a 같은 정관사와 부정관사의 사용 등에 있어서는 가끔 우리보다도 실력이 못 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 건 당시 세계대학총장회의 사무총장을 하시던 이원설 박사님에게 오는 외국 서신들을 통해서 안 것이다.) 그들도 용법 상 틀리는 영어를 많이 쓰고 있었다. 그래도 그들이 내로라는 총장(아니면 그 총장을 대신해서 영문 correspondence를 담당하는 사람)인데 그들이 영어를 틀리게 쓰고 있는 것이었다. 난 이런 사실을 확인하면서 영어에 대하여 상당한 안도감을 가지게 되었다. 배짱이 늘었다. '제 나라 말인데도 틀리는데, 내가 남의 나랏말을 틀리게 쓴다고 해도 그게 문제가 되겠나? 그 건 당연지사지?'

학과에서 영어 과목의 시험을 몇 번 보게 되었는데, 난 문제를 잘 이해하고, (우리말로) 번역하고, 또 영작을 했다.(난 이 때 몇 개의 영문 수필을 써서 학교의 영자 신문 University Life에 기고를 하곤 했다. 그것은 한 번 해보자는 마음으로 억지로 쓴 것이었지만, 가끔 자발적으로 영어로 수필을 써 보기도 했다.) 다행히 그 때는 친구들 사이에 내가 이미 영어를 잘 하는 사람으로 알려지고 있었다. 그러던 중 한 편으로는 자존심이 상하고, 한 편으로는 기뻤던 일이 있었다. 영문 기사 과목을 가르치는 교수님께서 내가 영어 과목을 펑크내고 군에 갔던 놈이란 것을 기억해 내신 것과 관련된 일이다. 그분의 영어 과목(영문 기사 작성법)에서 매우 높은 점수가 나왔는데, 그 점수를 그분이 믿을 수 없으셨던 모양이다. 시험 성적을 발표하기에 앞서서 그분은 일부러 날 호출하시고는 강단 앞에서 그 날짜 영자 신문의 일부 내용과 원서의 일부 내용을 번역해 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약간 기분이 상했지만, '이까짓 걸......' 하는 생각으로 다행히 잘 해치웠다.(영자 신문의 칼럼을 한글로 느리게 읽듯 앞에서 뒤로 번역을 해 버렸다.) 신기해하는 그 교수님 앞에서 난 의기양양했다.(이분이 내가 나중에 박사학위 과정을 할 때 지도교수를 자청해 주신 한병구 교수님이다.)

그러다 또 일이 터졌다. 이원설 박사님의 장남이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그와 관련된 일이었다. 이 친구가 미국에서 태어나 거기서 국민학교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왔는데 고등학생이 되어서 까지 생각을 영어로 하는 일 때문에 생긴 문제였다. 그러니 그의 국어 실력은 정말 문제가 많았다.(프라이버시 문제로 여기서 그의 당시 평균 국어 점수를 밝힐 수는 없다.) 이 박사님처럼 세상에 아무런 걱정이 없을 것으로 뵈는 분도 인간이라 고민거리가 있으셨다는 게 신기했다. 가장 큰 걱정은 대학 입시를 앞둔 큰아들의 국어 점수 문제였던 것이다. 이분의 걱정을 덜어 드리고자 난 국어 가정교사를 자청했다. 물론 고교 시절의 내 국어 실력도 별로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었으므로 미리 자습서라도 보고 공부를 하고 가서 그를 가르친다면 그 걸 못할 것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것이 이 박사님께 기쁨을 드리는 일이라면......

그러나 처음으로 이 박사님의 댁에 들렀을 때 난 나를 탐탁지 않은 눈으로 쳐다보는 그 친구를 보면서 '잘 못 걸렸구나!'하고 생각했다. 고교 생활을 "새장 속의 삶"으로 규정한 그는 공부하라는 말과 관계된 모든 충고를 하는 이들을 모두 혐오의 대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그런 일과 관련된 주위 사람들을 모두 그의 적으로 돌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새로운 적인 나를 만난 것이었다. 난 우선 그가 가진 적대감의 벽을 허물어야 만 했다.

난 고등학생이 관심을 가지거나, 의문을 가질 만한, 그리고 호기심을 가질 만한 일들을 찾아내어 그에게 얘기해 주고, 나의 고민과 부끄러움을 터놓기도 했다. 그의 부모를 그와 나의 공동의 적(?)으로 삼음으로써 나에 대한 그의 경계심을 풀고자하는 시도도 했다. 있지도 않은 이원설 박사님에 대한 불만을 그에게 털어놓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가 날 친구로 받아들여가는 걸 알게 되었다. 그가 드디어 나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을 때 난 새로운 일을 경험하게 되었다. 그는 매우 내성적이어서 부모에게도 숨기는 것이 많았었는데 내게 마음을 터놓게 되자 나에게 뭔가 자랑하고 싶어하는 것이었다. 그가 꺼내 놓은 것들은 원고 뭉치였다. 그는 {분노의 포도}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의 작가 존 스타인벡을 좋아했다.(그의 동생이 그 해에 자신에게 생일 선물로 사준 책이 포켓북인 스타인벡의 "Moon is Down"이라고 했다. 근데 그 책은 이미 자기가 산 것이었다면서 생일 선물로 받은 새 책을 내게 선물로 주었다.)

존(미국 시민권을 가진 그의 영어 이름은 존이었다.)이 영어로 쓴 시(poem)에 동생이 작곡을 하여 부르는 팝송 풍의 노래를 듣고 난 완전히 기가 죽어 버리곤 했다. 그가 어느 날 꺼내 놓은 그 원고들은 - 정말 기가 막힌 일이었는데 - 영시(英詩)들이었다. 이것은 나중에 교학사에서 영시집으로 출간되었는데, 바로 그 원고들 중 하나였다.(대학 입시생의 비애를 그린 {Life in a Cage}(새 장 속의 삶)란 시도 그 안에 끼어 있었다.) 그리고 아가사 크리스티의 추리소설을 좋아하는 그는 직접 자신이 쓴 두 권 분량의 영문 추리소설도 보여 주었다. 그가 국민학교에 들어갔을 때 아버지가 선물로 사준 것이 올리베티 사의 타자기였다고 한다.(그 건 내가 산 스튜디오 46이란 올리베티 타자기보다 훨씬 작고 귀엽게 생긴 타자기였다.) 그리고 그는 그것으로 일기를 써야만 용돈을 받을 수 있었으며, 그러는 중에 그의 문장 실력은 나날이 늘어간 것 같았다.(그 형제들은 얘길 하다가 화가 나거나 성질이 급해 지면 영어로 떠들곤 했었다.)

국어 공부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는 자신의 국어 실력이 올라가지 않는 한 그가 좋아하게 된 내가 곤란을 당한다(?)는 사실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날 위해서 그는 열심히 국어 공부를 해주었다.(존은 정말 나의 사랑하는 친구였다.) 난 집에서 열심히 국어 공부를 하고 존의 집으로 갔다. 그 친구를 만나고 나서는 난 영어에 대한 강박관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국어 참고서를 읽어보면 그 내용이 안 들어 왔다. 왜 그럴까 생각하다 보면 난 그 참고서에 실린 내용을 머릿속에서 영문으로 번역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곤 했다. 그러다가 '아차!'하고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차에 올라타면서도 눈에 뜨이는 것에 대하여 영어로 말을 만들어 보곤 했다. AFKN을 틀어 놓고 자다가 영어로 꿈을 꾸기도 했다. 상대의 말에 대해서 영어로 대답을 하는데 나중에 상대가 앞뒤가 안 맞는 이상한 대답을 한 적이 있었다. 전혀 대화가 될 수 없는 말을 해 와서 의아해 하다가 그 게 꿈이라는 걸 알고 깨기도 했다.(생각해 보라. 나와 말하던 상대가 갑작스레 TV의 앵커맨처럼 뉴스 보도를 해댔으니......)

그렇게 여러 날이 흐르면서 난 영어를 읽고 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대체 말을 하려면 머릿속에서 작문을 하고 있어야 하니...... 회화를 잘 하는 사람으로부터 영어로 일단 말을 시작해 놓고서 그 말을 이어가라는 충고를 받았다. 하지만 그 건 역부족이었다.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데 실패하고 있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내가 알아들은 말에 대해서는 어떻게든 내 의사를 전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상태에서는 아무 것도 되지 않았다.


- 이 박사님의 칼럼집 중 한 권.

4학년 때 결국 회화 테입을 구해서 듣게 되었다. 하지만 그 건 하나도(?) 도움이 되지 않았다. 테입에서 들리는 소리들은 너무나도 우리가 듣기 편하게, 너무도 똑 떨어지는 발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인이 말하는 걸 들으면 몇 마디밖에는 아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데 회화 테입에선 그렇지 않았으므로 '이 건 아니다!'라고 결론지었다. 그래도 다른 대책이 없어서 다양한 테입들을 구해서 들었다.(조금은 도움이 되었으리라.) 이 때엔 아무리 노력을 해도 회화는 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

졸업을 하고 대학원에 가서도 영어 공부를 계속했다. 원서는 어차피 공부를 해야하니 봐야 했고, 소설이니 잡지니 모두 영어로 된 것만 보았다. 차라리 편했다. 영어로 표현된 것을 보면서 우리말로 옮길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음을 알았다. 영어의 독특한 세계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으며, 글 쓴 사람에 따라서 문장의 맛이 다르다는 걸 느끼기 시작했다.(특히 여러 영문 잡지에 실린 광고 문안의 아름다움에 반하곤 했다. 또 그 때 가끔(?) 보던 미국의 {플레이보이} 지가 작가 노먼 메일러와의 인터뷰를 실을 정도의 고급지라는 걸 알고서, 그 문장들을 뜯어본 바 이의 수준이 상당함도 알게 되었다. 정말 {플레이보이} 지의 글 중 일부는 플레이보이 상표를 단 되게 비싼 넥타이 핀이나 안경 등처럼 매우 고급스런 것들이었다.) 어떤 문장이 어떤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이라는 걸 신문이나 잡지를 보면서 구별해 낼 수도 있게 되었다. 이 때 영작문은 거의 아무런 부담도 되지 않았다.(지금 생각하면 엉터리 작문이었지만...)

글쓴 날짜 1997/2/11, 00:42:00
제 목 [옛 얘기] 영어의 왕도 - 4

당시 세계대학총장회(IAUP) 회장이던 모교의 설립자 조영식 총장님이 영문 업무를 할 사람을 구하실 때 난 평소에 알고 있던 한 정외과 교수님의 추천으로 한 차례의 영어 테스트를 거친 후에 그 업무를 맡게 되었다.(영어 테스트는 {뉴욕 타임즈} 한 면을 번역해 내는 것이었다.) 그 때부터 난 영어에 파묻혀 살게 되었다. 매일 영문 편지를 쓰고, 문서를 작성하고, 또 세계대학총장회의 기관지 {Lux Mundi}를 편집하는 편집인이 되었다. 그 건 완전히 나 혼자서 만들어 낸 잡지였다. 외국에 원고 청탁을 하고, 그 걸 받아서 6개월에 하나씩 영문 잡지를 만들었다. 그러면서 많은 외국인을 만나게 되었다. 그 때도 영어가 잘 들려 오지는 않았다. 전화 통화를 하면서 실수를 하기도 했다. 특히 전화 통화를 하면서는 상대의 말을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하지만 점차로 이런 문제들이 극복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는 발음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기억되는 몇 가지 중 브라질과 이스라엘이란 단어의 발음에 관한 것이 있다. 상대가 "브라질"이라고 해도 못 알아듣고, "브러질"이라고 해도 못 알아듣는 것이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브라질의 위치를 가지고 설명하자 상대가 "브르지얼" 비슷하게 발음을 했다. "브리질," "브르질"의 중간 발음을 좀 짧게 발음하면 "브뤼지어"와 비슷한 발음이 나는데, 이것이 문제의 단어인 브라질의 정확한 영어 발음이 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도 마찬 가지였다. "이즈뤼엘"과 흡사한 발음을 해야만 상대가 알아듣는다. 우리들은 흔히 "P"와 "F"는 물론, "R"과 "L"의 발음까지 혼동해서 하곤 하는데, 그 경우에 영어 사용국에서 온 상대는 그 단어를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 이런 문제에 부딪혀 발음의 중요성에 대해서 알게 되었고 일부러 정확한 발음을 하고자 노력하게 되었다.

하여간 영어와 관련된 일은 별 걸 다했다. 총장님의 영문 스피치를 쓰는 것도 자주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이런 것도 여러 번 하다 보니 늘게 마련이어서 이제 어떤 경우(occasion)에 필요한 스피치라고만 가르쳐 주면 알아서 쓸 수 있게 되었다. 그런 일을 하다 보니 내 스스로 어디 가서 영어로 즉석 스피치를 해야 하는 경우에도 거의(내지는 전혀) 문제가 없게 되었다. 물론 아직도 헤매는 부분이 많다. 남의 나랏말인데 그 건 당연하기도 하고, 당하면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지 않은가? 그 당시 내게는 꿈이 있었다. 그건 {코리아 헤랄드}의 칼럼니스트가 되는 것이었다. 이원설 박사님과 같은 그런 멋진 칼럼니스트 말이다.(이미 글렀는지 아니면 앞으로 기회가 날지 아직 모른다. Who knows?)

물론 난 아직도 영어에 대해서 자신 있다는 소릴 못한다. 걸프전 이후 동시통역사로 하루아침에 유명 인사가 된 윤태현 씨 같은 사람도 있는 판국에 어디 나서서 그 따위 돼먹지 않은 소릴 하겠는가?(일단 상대의 말을 들으면서 이를 우리말로 옮겨야 한다는 문제, 즉 동시 통역의 어려움 때문에 이들은 실제로 통역할 말의 1/3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이들은 통역하고자 하는 말 중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만을 즉각적으로 판단, 선정해서 이를 비교적 정확히 우리말로 바꾸어 전달해 주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일이다. 역시 프로답다고 생각한다).

아직도 안정효 선생 같이 영어 실력이 출중한 분들을 보면 정말 압도당하고 만다. 특히 피터 현(Peter Hyun)의 더할 수 없이 아름다운 글들을 대한항공의 기내지인 {모닝캄} 등에서 읽을라치면 가끔 나의 형편 없는 영어 실력에 대하여 수치심을 느끼기도 한다. 나의 갈 길이 먼 영어 실력에 대해서 그분들이 무언의 자극을 주시는 것이다. 하지만 나도 좀 더 노력하면 {Creative Response} 칼럼에 있는 것과 같은 글들은 써낼 수 있지 않을까? 내가 가장 익숙한 구문들로 가득한 그 책의 내용들처럼 멋진 글들을...... 용기란 무식한 자의 것이 아닌가? 무식한 방법으로 시작한 영어 공부이니, 다시 그렇게 추구하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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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4'
  • ?
    최경준 2015.03.02 15:47

    아주 긴 글을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제가 영어와 원수진 삶을 살다가,

    은퇴 후 유럽으로 카라반 여행을 가기위해 출퇴근 시간을 이용하여 아이폰으로 영어회화를 시작한 지 1년 반이 되었는데 영화를 보면 아직도 잘 들리지가 않네요.

     

    그래도 짧은 문장은 개중 들리는 게 있으니 이것도 괄목할만한 성장입니다. ㅋ

  • ?
    신명근 2015.03.04 10:15
    이번에 클럽메드 야불리 다녀 온 후로 느꼈습니다.
    "영어는 (사랑의)힘!"
  • profile
    Dr.Spark 2015.03.04 10:19
    영어를 잘 하면 생각 자체가 글로벌해져서 아무에게나 얘기걸기가 쉬워지는 효과가...
    우리나라에서 신 선생이 여자에게 말을 걸면 다들 (인상만 보고서도) 치한으로 생각하고 피하지만,
    외국 여성에게 말을 걸면 일단 미소와 함께 좋은 대답을 해 주려는 태도를 보일 거에요.
    그 때 신 선생의 주특기인 "수작"을 걸면 돼요.ㅋ
  • ?
    밸런싱 2018.08.07 09:19

    언제나 관심 있는 것에 최선울 다해서 맞딱드리는 박사님 대단하십니다. 

    영어 공부에 대해 전 생존 영어라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중심잡기에서 언제나 목표가 커지는 것을 느끼고 사는 것처럼 영어 목표도 커리지를 기대하면서 열심히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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