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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1981년이면 몇 살에 그걸 쓴 건가요? 계산이 안 되네요.”

노래로 불려지는 한계령의 원작인 한계령에서를 낭송하는 장소에서 종종 듣는 말이다.
1981년이면 대채로 질문을 하는 사람도 10대였거나 막 10대에서 20대로 접어든 나이였을 것이다. 요즈음에 비하면 당시는 시나, 세계명작들을 몇 권 정도는 독파해야 어디에서나 이야기를 할 수 있던 분위기였다. 심지어 이런 우스개도 있었을까.
맞선을 본 자리에서 여자가 남자에게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하기야 너나없이 그의 책 한 두 권 정도는 읽었을 시절이니 의당 남자도 그의 작품 중 한 권 정도는 읽었으리라 생각하고 던질 질문이고, 대화를 그래도 좀 나누어나 볼 배려였을 것이다.
남자가 오래전에 읽었다며 잠시 생각을 하는 듯 하더니 화장실 좀 다녀오겠다며 밖으로 나가더란다. 잠시 후 돌아와서 그는 까라마조프카의 형제들을 읽었다고 했다. 여자는 자신은 그 책은 조만간 읽을 생각이라며 죄와 벌을 읽었노라며 “그 책은 도스토예프스키의 많은 책들 중 우리나라에서는 가장 널리 알려진 책이니 읽으셨겠지요”하고 물었다. 남자가 다시 화장실을 다녀 온다며 밖으로 나갔다. 여자도 이젠 짐작을 했고 그들은 결과적으로 시간만 낭비한 셈이 되고 말았다.
그만큼 그 시대엔 남자와 여자가 처음 만나서 나누던 대화가 세계문학이나 한국의 소설, 단편 등 문화적인 취미를 주제로 사람의 성품을 알아내려 했다. 명언이나 읽은 책 중에서 어느 한 문장을 그대로 암기하고 다니며 자신이 제법 유식하다는 걸 보여주는 방법으로 이용하는 사람들도 많았다. 가령 ‘물질적 상상력은 문학적 이마쥬와 실체를 합체시키는 유연한 매개체이다. 우리는 물질적으로 자신을 표현함으로써 모든 삶을 서로 변화시킬 수 있는 것이다. -가스똥 바슐라르의 물과 꿈’과 같이 몇 구절 정도의 각 사상가나 철학자의 이야기들을 기억해 두었다가 늘 써먹었다.
만약 부모님이 40대 후반을 넘긴 이들이라면 여쭈어 보면 그런 시절에 대한 대답을 들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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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명작에 국한된 건 아니다. 더러 미술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으나 음악도 빠지지 않는 대화의 소재로 등장했다. 당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안다고 한 곡이 클래식은 베토벤 교향곡 5번 ‘운명’이다. 쇤베르스크라던가, 헨델, 슈만, 바흐와 같은 식으로 어느 음악가를 이야기 하는 경우는 없었고, 한 특정 곡으로 그 음악가의 모든 걸 아는 듯 내세웠다. 외국의 소설 중 가장 많은 이들이 읽었다고 한 작가가 톨스토이가 아닌 그의 책 하나인 ‘부활’로 그 책의 주인공이 ‘카츄샤’란 사실은 모르고 카츄샤를 이야기 하면 미군부대에 근무하는 한국인 군무원을 이야기 하는 줄 알고 자신도 아는 카츄샤가 있다고 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시는 어떻게 이야기들을 했을까.
당연히 푸쉬킨이나 라이너 마리아 릴케, 헷세와 같이 작가를 알기 보다 대부분 어느 한 작가의 시 한 편을 이야기했다. 한국 사람이 가장 많이 안다고 하는 시나 애송시라고 한 외국시인의 시가 푸쉬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였다. 그 당시 1983년 원통에서 잠시 들린 다방에서 차를 내 주던 여직원이 일행과 이야기를 하던 나한테 기욤 아폴리네르의 미라보다리를 이야기하며 암송을 하는 걸 처음으로 만났다. 그 뒤로 1년 정도 원통을 일부러라도 들려 내가 읽은 책을 선물로 주기도 하고 몇시간이고 그녀와 문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당연히 배달을 다녀야 하는 여직원이 자신이 찻값을 내기도 하며 한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니 마담이나 주인이 곱게 보아줄리 없었다. 내가 그녀를 특별하게 보게 된 것은 미라보다리를 그녀가 암송을 하는 모습이나 그 시를 아는 게 아니라 기욤 아폴리네르를 안다는 사실에 반했던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그녀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다고 내세우는 시인들이나 시만 아니라 한국의 명시 200편 정도는 암송을 할 정도였고 당시로써는 상당히 고가에 속하는 김희보편저의 한국의 명시와 세계의 명시를 선물로 보내기도 했다.
만약 내가 이성에 대한 생각으로 그녀를 만났다면 어떻게 되어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간혹 헛헛한 웃음이 얼굴에 나도 모르게 번지곤한다. 분명히 그녀도 여전히 시를 공부하고 있을 것이나 어찌된 영문인지 당시 그녀의 모습과 비슷한 여류들은 만나지 못했다.
 
이제 한계령 노래가 된 시 한계령에서를 18살 이라는 나이에 쓸 수 있었던 당시의 문화적 사회구조는 어느 정도 설명이 된 거 같다. 다른 한 가지는 고향이 바로 한계령 자락의 오색이라는 것과 어머니와 내가 넘어야 했던 최초의 외부로 나가는 길목이 한계령이었던 까닭이다. 분명한 것은 열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시를 쓰기 위해 많은 시간을 습작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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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시 한 편으로 바다의 내음을 그대로 담아내고 싶고, 폭풍우 같은 젊의 날의 고뇌와 사랑과 열병을 담아내고 싶어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사춘기로 접어들면서 많은 청소년들이 당시에는 제법 문학소녀가 되고 문학소년이 되곤 했으나 조금 더 성장을 하면 까마득히 자신의 문학적감성을 잊어버렸다. 대학을 가면 더 많은 책들을 만날 수 있고 원전을 해독하고 국어책 읽듯 읽을 수 있는 능력도 길러질 일인데, 사춘기시절에만 아주 잠시 열병처럼 앓고 지나가는 모양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어느 정도 서서히 결혼생활에 이골도 날 무렵 많은 여성들이 문학에 대한 꿈을 다시 가슴에 품는데, 내가 본 바로는 순수한 문학적 열정이라기 보다 일종의 시인이나 수필가가 되는 걸 하나의 자격증이나 명예직 정도로 생각하는 거 같다. 매년 천여명 이상의 시인들이 양산되는 시대에 살면서도 시집이 팔리지 않는 모순된 구조도 그들은 정작 시인이 되기 위해서라도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 가운데 하나인 독서조차 제대로 하지 않는다는 답이 나오게 된다. 책을 읽지않는 시인들, 더구나 스스로 돈을 내고 책을 출판하는 시인들의 자비출판을 통해 책을 내더라도 그저 누군가에게 선물로만 주어지는 구조가 현실이다. 그런 상태에서 과연 시인이라는 명함을 당당하게 꺼내들고 마치 자신들이 가장 시인다운 시인 이라도 된 듯 행동을 하는 것이 진정으로 명예로우며 그토록 자부심을 느낄만한 일인가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 식으로 받은 책 몇 권을 본 내 느낌은 ‘언어의 유희에 불과하고 화려하게 치장을 한 창부(娼婦)를 보는 것에 다름 아니다. 일종의 교양미라던가 잔잔한 여운을 남기는 감동이 없다’로 평가할 수밖에 없다. 되는 대로 지껄여 놓은 듯 살아 움직이는 생동감이라곤 찾기 힘들다. 생기없는 조화를 꽂은 꽃병을 놓은 빛 없는 책상앞에 앉은 느낌을 들게 만드는 그런 시들을 시라고 이야기하는 배짱 하나는 인정한다.

합평회를 갖는다며 참석해달라는 연락을 받고 어느 식당으로 지정된 시간에 나갔다. 내가 도착하였을 때 총무만 먼저 나와서 안절부절 못하고 이리저리 전화를 걸고 있었다. 잠시 뒤 몇 명의 회원이 모이고 서로 일상적인 인사를 나누고 여닫이문이 있는 방을 하나 안내를 받아 들어갔다. 2003년에 시인이 되겠다며 개인적으로 공부를 시켜줄 수 없느냐던 사람이 자신이 낸 책이라며 한 권 건네주는 걸 받는데 그 모습이 상당히 거만스러웠다. 아마도 다른 회원들에겐 모욕감까지 느끼게 만든 일도 있었던지 외면을 하는 회원도 있었다. ‘사람이 사람다워야 사람’이란 유행어가 있다. 시인은 시인다워야 한다. 몸이나 입으로 말하지 않아도 시인은 글로 말을 할 수 있다.
책은 그의 문장이 아닌 다른 시인의 문장으로 가득 메워져있다. 적당히 도움을 받으며 쓴 시들이 아니라 아예 뜯어 고쳐 준 시들을 자신의 시라고 엮은 책이었다. 그러니 그런 내막을 모르는 외지의 문인들은 이 책을 그대로 그의 시로 엮은 시집으로 보고 그에 상응하는 예우를 해주었을 것이다. 으례 합평을 한다면 새로 쓴 자신의 초고나 한 두 번 합평을 거친 작품들을 가지고 나오게 마련이다. 그는 자신은 책에 실은 시 아무거나 함께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난 그에게 그럼 본인이 무엇을 함께 합평을 할 것인지 먼저 이야기를 하라고 한뒤 다른 이들의 글들을 하나씩 살펴나갔다.
그의 차례가 되기 전 슬그머니 책을 내밀며 오늘 합평을 하고자 하는 시가 어느 거냐고 하자 여전히 아무거나란 대답만 돌아왔다. 결국 그의 차례가 되자 한 회원이 그래 아무거나 무엇이냐며 자신의 책에 실린 걸 합평을 받은 들 무슨 소용이 있느냐는 볼멘소리를 하고 말았다. 그는 한 페이지를 펼치더니 혼자 감정에 북받인 음성으로 읽었다.
그가 자리에 안은 뒤에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의견이나 이야기를 해 보라고 했으나 아무도 단 한마디의 말도 없이 앉아있다. 최대한 조용한 어조로 그가 읽은 글이 실린 페이지를 펼쳐들고 한 연씩 내가 낭독을 하며 의견을 밝혔다. “이 시는 남대천을 이야기하고 동해바다를 이야기 하는데 서해의 낙조가 그려진다. 그리고 남대천에 연어는 있으나 그 연어의 죽음만 비통할 뿐 아무런 여운을 남겨주지 못한다. 마치 나대천이나 연어, 동해바다를 단 한 번도 직접 만나본 적이 없는 사람의 글을 읽는 거 같은 생각이 든다.” 여기까지 말을 하는데 그는 니까짓게 무얼 안다고 말을 하냐는 투로 나왔다.
 
“이건 유명한 시인이 다시 손을 보아준거다. 그 시인이 이 정도면 정말 훌륭한 작품이라고 했는데 이게 뭐가 문제냐.”
 
난 그에게 말했다. “그 유명한 시인이 OOO이 아니요? 나와 같이 습작기를 가졌고 나로 인하여 이 고장을 몇 번 들렸던 그가 아니길 정말 진심으로 바랍니다.”라며 그에게 말한 그대로 그는 아니라는 말이 들리길 기대했으나 여지없이 무너지고 만다. 그가 자신을 이곳과 서울에서 개인지도를 해주고 등단을 시켰다는 것이다.
더 이상 그 문제로 자리를 불편하게 할 이유도 필요도 없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고 내가 들고간 원고를 나누어주었다.
 
5월 해당화 피는 날엔
-남대천 강변에 해당화 피는 5월이면
 
해당화 피는 날 기다려
손잡고 달리던 강변으로
아우를 부를까
 
그 시절
코 흘리던 아우보다 훌쩍 커버린
조카를 부를까
 
아직 어린 딸아이
아빠 맘 알까 몰라
누구와 함께 그 언덕에서
다시 어머닐 그릴까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꽃망울 빨갛게 터지는데
 
해당화 피는 날 기다려
손잡고 달리던 강변으로
아우를 부를까
 
그 시절
코 흘리던 아우보다 의젓한
조카를 부를까.
 
초고 그대로 아직도 간직하고 있는 글이다. 다시 다른 한 편을 넘겨 낭송 했다.
 
오색령에서 Ⅴ
 
불러 본 적 없다하였건만
부득부득 불러 보란다.
한계령 노래 원작자가 그것도 못 하느냐다.
세상 참
제목 잘못 붙여 놀림 당 할 일 두려운데
바꿀 길 없는 제목인 줄이나 아는지
내 삶의 그 어느 한 때로만 돌아갈 수 있다면
당연히 먼저 오색령에서가 되었어야 할
사연 많은 한계령에서
누군가의 말처럼
‘내 탓 이요.’ 하려니
그도 궁색하기 그지없음은 내 모습 그대로
 
오가피나무 가시가 손톱을 휘저었단 시어에
오가피나무에 가시가 어찌 생겼냐는 사람
그 말 서글퍼 메스처럼 가슴 휘졌는데
또 한 해 저무는 길목
향리(鄕里)엔 여전히 이름처럼 고운
오색단풍 물결이 진저리 치고
삭이지 못 할 한(恨) 묻어두고 떠난 이들
산자락 어느 모퉁이 새처럼 날지 않을까 싶어
문득 돌아보건만
바람에 우수수 지는 나뭇잎들
부치지 못한 연서처럼 은근하기만 한 오색령 가을
그리움이 그만큼 깊었는가.
 
한 회원이 그랬다. “맞아 우리도 정시인님 만나면 한계령을 부르시라고 그랬어. 당연히 작사자니까 부르실 줄 알고······” 나중 낭송한 시에 대한 반응이었다. 난 그들에게 먼저 내가 낭송했던 글들에 고칠점이나 표현에 대해 지적할 사항들을 물었다. 늘 그렇듯 그들은 그냥 좋다고만 했다.
아무리 널리 알려진 시인의 시라도 흠결은 있게 마련이다. 초기 습작과정에서는 어느 정도 합평도 하지만 대부분의 시들이 그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시인의 육필원고 그대로 출판이 된다. 자연히 조금만 더 다듬었으면 어땠을까 싶은 부분들은 눈에 띄게 마련이다. 결국 난 내 글에 대해 어떤 말 하나도 듣지 못했다.
 
시란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와 그 언어들이 지닌 단어의 의미들을 조합한 단순한 구조다. 하지만 단순한 그 구조도 치밀하게 조직을 짠 섬유가 같을 때 제 기능을 발휘하게 마련이다. 더러 아이들의 옷감으로 적합한 천이 될 수도 있겠고, 더러는 수의를 만들 삼베도 될 수 있다. 여인들의 여름옷으로 적합한 천이나 남성의 여름옷으로 적합한 천이 같을 수도, 때로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는 거와 마찬가지로 다양한 느낌으로 시는 창조되는 것이고 조직을 구성한다.
시를 다듬지 않고 그저 감정에 도취되어 곱고 아름다운 단어들로만 조합을 했다고 좋은 시가 될 수는 없다. 구성을 이루는 방법이 필요한 것은 비단 시창작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니겠으나, 도리어 드러난 부분보다 숨겨진 구조제가 더 아름다운 집을 짓는 기초가 되는 거와 마찬가지로 해석을 할 수도 있다.
 
안에 감추어진 뼈대부터 견고하고 바르게 자리를 잡아야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름다움을 그대로 유지하는 집과 같은 견고함과 은은한 멋을 풍기는 것이 바로 시며 문학이다. 김치란 여러가지 양념과 재료들이 조화롭게 버무려져야 김치다운 맛이 나며 입이 즐거운 법이다. 시란 이와 같은 맛을 지녀야 한다. 어디 비단 이런 구조적인 요소가 시에만 국한 되겠는가. 모든 예술과 생활 전반에 거쳐 필요할 것이며 사람의 인생 그 자체도 그러해야 향기가 나는 삶이 된다.
시는 때로는 수학적 공식의 모범답안이 되며, 세상의 모든 철학과 사상의 근간인 동시에 미술과 연극 등 전 분야에 거쳐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그런 시를 한 편 남기는 일이 시인의 역할이고 이 사회에 할 기능인 것이다.
시인의 명예는 그 다음에 자연히 돌아온다.
 
끝으로 마이너 마리아 릴케의 편지 하나를 소개하며 이 글을 맺는다.
 
1926년 3월 17일
 
이미 한 달 전에 보낸 당신의 편지가 이제야 내 손에 들어온 것은 순전히 내 잘못 때문만은 아닙니다. 그 편지는 파리로 갔다가 다시 내가 늘 있던 주소로 가는 동안 줄곧 나의 뒤를 따라다닌 셈입니다. 사정이야 어쨌든 이제야 겨우 당신의 편지가 내 손에 들어왔습니다.
나는 기꺼이 나의 과거에 있었던 몇 가지 일에 대해 말씀드리려 합니다. 그것이 나의 작품을 읽는데 도움이 된다고 하니 말입니다. 그런데 어떤 것부터 써야 할까요? 어린 시절과 여행에 관해 먼저 말해야 할 거 같기도 하고, 여러 도시에서의 만남과 사랑에 대한 얘기부터 꺼내야 할 거 같기도 합니다.
당신도 짐작하겠지만, 되풀이되는 초조감과 운명적인 권태감 속에서도 내가 단순한 여행이 아니라 그 나라들의 현재와 과거를 생생하게 느끼면서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그곳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열 여덟 살 때부터 이탈리아를 알고 있었고, 또 그 나라를 좋아했습니다. 이탈리아는 내게 다양한 것들로 가득 찬 우화 같은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결정적인 것은 러시아였습니다. 러시아는 1899년과 1900년 사이에 여행한 내게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세계를 열어주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라가 가진 인간적인 환경은 나로 하여금 다른 사람과의 사이에서 형재애 걑은 감정을 가지도록 해주었습니다. 외아들이었던 나는 부모님께 받은 영향 때문에, 그때까지만 해도 인간과 인간 사이의 참된 교류는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당신도 내 책에서 읽었겠지만, 러시아는 나의 체험과 감수성의 기본 요소가 되었습니다. 1902년 이후부터는 파리가 내 창작 의지의 기초가 되어 주었듯이 말입니다.
나는 파리에서 우대한 로댕의 영향 아래, 화가나 조각가처럼 자연을 앞에 두고 자연을 이해하며 자연을 모방하면서 창조하는 법을 배웠지요. 로댕은 나로 하여금 서정적인 값싼 감정에서 빠져나오게 해주었습니다. 그런 엄격한 훈련 과정에서 얻은 최초의 체험이 바로 <표범>이라는 시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1902년부터 파리에 거주했지만, 그렇다고 다른 나라를 여행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틈이 날 때마다 이탈리아와 스칸디나비아(덴마크, 스웨덴)에서 몇 달씩 머물렀고, 프랑스 식민지인 알제리와 튀니지. 그리고 이집트를 여행했습니다. 그러나 내게 가장 뜻 깊은 여행은 역시 러시아와 파리였습니다.
스페인 여행도 물론 좋았는데, 톨레도를 지나 1912년 겨울은 스페인에서 지냈습니다. 이런 다양한 체험들을 글로 처음 묶은 것이 「오르페우스에게 드리는 소네트」이며, 그 다음이 가장 어렵다는 「두이노의 비가」입니다. 「두이노의 비가」는 1912년부터 스기 시작했으나, 전쟁 때문에 오랫동안 중단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 짧은 편지 속에 더 이상의 글을 담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이 편지가 비록 간단하기는 하지만, 어느 정도는 당신의 관심사를 충족시켰으리라 생각합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 릴케의 편지에서 당신이라고 하는 사람은 14살 연상이었던 안드레아스 살로메로 생각된다. 그녀는 니체의 약혼녀였고  뮌헨에서 릴케를 만나 러시아 여행에 동행했다. 릴케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안내자였던 그녀였기에 릴케가 보낸 이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안드레아스 살로메로 보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에서와 같이 시인들은 다양한 경험에서 시적 영향력과 전환점을 얻는다.
릴케는 1875년에 독일의 보헤미아 프라하에서 태어났고 1926년 폐혈증으로 바몽드 요양소에서 12월 29일 생을 마쳤다.
Comment '5'
  • profile
    Dr.Spark 2014.06.23 16:04

    우리 어린 시절의 얘깁니다.^^

    제가 중학교 2학년 때 푸쉬킨의 대위의 딸 등이 섞여있던 세계문학전집을 거의 다 읽었었거든요.

    초등학교 시절에는 만화를 엄청나게 읽어대면서 글읽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만화읽다 지각을

    하여 선생님께 야단을 맞고 도서관의 동화책 읽기 벌을 받아 동화가 얼마나 재미있는가를 알게

    되고, 그 후에 소설의 재미에 빠지고...

    그래서 당시 교육에 뜻이 있는 사람들 집엔 꼭 몇 질씩은 있었던 세계문학전집이며, 단편문학전집을

    첫 권에서부터 마지막 권까지 다 읽곤 했었죠. 뜻을 알 만한 책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책들도

    있었는데, 그래도 읽기 시작한 책은 다 볼 때까지 놓지 않았었죠.

    근데 지금은 책을 안 읽는 시대가 되었으니 뭐... 이제 활자의 시대는 가고, 동영상의 시대가 된 거니까

    요. 세월이 가면서 생기는 변화에 대해서는 긍정을 해야겠지요.^^

  • ?
    한사정덕수 2014.06.24 00:42

    박사님 우정 그러신거죠?

    만화는 읽다가 아니라 보다 아닌가요?(이러면 누군가 또 다시 반격을 할 수도 있지만~)

    저는 책을 보고 싶어도 볼 수 없는(어려운) 환경이었습니다.

    어쨌거나, 그리고 좌우간 제 연애편지는 한 통도 못 섰지만 지금은 형수님이 되신 분들(절대 비밀을 다짐해야 할 일!)대필 만큼은 엄청 많이 썼습니다. ^^

    이게 다 책을 조금이라도 읽은 덕 아닐까 합니다.

  • profile
    Dr.Spark 2014.06.24 07:48
    일부러 읽다로 한 건 아닙니다.^^ 저도 만화는 본다고 표현하는데 여기서는 책을 읽는 것에 연결되는 것이라 자동으로 그렇게 쓴 듯합니다.^^
  • ?
    산바람 2014.08.03 17:58

    반갑습니다  여긱서뵙게되네요

  • profile
    일월여신|한상률 2014.08.22 13:12
    앗 여기서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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