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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잠시 마주하였더라도, 어떤 대상을 만나면 곧장 연결시켜 생각하게 만드는 호흡이 긴 작품이 있다.오랜 시간이 흘러도 변함없이 지닌 품성이 변하지 않고, 오히려 세월의 벽을 뛰어넘어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는 향기 그윽한 문화적 충격을 경험하게 만드는 작품들이 그렇게 긴 호흡으로 말을 건넨다.

 

이는 제 위치를 잡고 안정된 상태로 대상에게 말을 거는 지혜로움과 같은 것으로, 미리 일러주지 않아도 누구나 거기에서 스스로 얻고자 하는 해답을 들을 수 있다. “무엇을 구하느냐?” 따위의 질문도 필요 없고, “이것을 찾느냐?”는 답을 서둘러 제시할 필요 또한 없이 마주보는 것만으로 충분히 질문하고 대답을 들을 수 있다.

 

현대사회에서는 저마다 정도의 차이는 존재하지만 복잡다양한 문화의 부침에 따라 이끌리거나 이끄는 입장에 서거나 마찬가지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 많은 이들에게서 보편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은 보다 간결하고 단순한 형태로 의미전달이 보다 용이한 작품들에 이끌린다. 복잡하거나 그 자체를 보거나 듣는 행동만으로는 이해될 수 없거나 판단을 내리기 어려우면 외면당한다.

 

그런 순간적 호기심에 가까운 관심을 끌던 작품들은 한순간 소용돌이 속에 휘말려 날려가는 낙엽처럼 어느새 우리 곁에서 더 이상 함께 호흡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단순하고 간결하게 다듬어진 작품들이 모두 생명이 짧다는 뜻은 아니며, 작가의 정신과 사상이 풍부하게 작품 속에 녹아있다면 오랜 세월이 흘러도 지치거나 멈추지 않고 긴 호흡으로 우리에게 큰 감동을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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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양양군 서면 오색1리 백암마을의 사기막골에 흔하게 발견되는 백자 파편들 ⓒ 정덕수

 

고려청자가 보다 화려하고 숙련된 장인의 예술적 감각이 스며있다면 후대에 나타난 백자는 보다 간결하면서도 편안하다. 이는 시대적 현상에 따라 도공들의 의식의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대부분 이와 같은 도자기를 빚고 구웠던 분원들은 경기도의 광주와 여주, 이천에 몰려 있었고 그곳만이 도자기를 생산한 장소로 알고들 있다. 그러나 도예를 하는 이들을 통해 강원도에서도 몇 곳 분원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대표적으로 양구군에서 생산되는 백자를 ‘양구백자’라 하여 비교적 높은 가치를 매겼음을 알 수 있다.

 

양구백자에 관한 가장 이른 기록은 세종실록 지리지의 ‘토산(土産)’(1432)에 나타나 있음을 확인했다. 이에 따르면, 전국의 139개 자기소 가운데 강원도에는 강릉도호부 1곳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고, 울진현(현재의 경상북도 울진군)에 1곳이 있으며 양구현에 2곳의 자기소가 있다고 한다.

 

양구 현청(縣廳)의 북쪽 ‘건천(乾川)’과 방산의 동쪽 ‘장평(長坪)’이 그곳으로 각각 중풍(中品)이라고 밝히고 있다.

 

여기에서 ‘방산의 동쪽 장평’은 지금의 평창군의 장평으로 오인 할 수도 있겠으나 ‘양구군 방산면 장평리’를 이르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양구의 현청 북쪽 ‘저을리(貯乙里)’에는 도기소도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자기소와 도기소의 차이를 먼저 짚고 넘어간다. ‘자기소’는 유약을 입혀 구워낸 사기그릇(청자·백자·분청)을 만들던 가마를 이르고, 도기소는 민간에서까지 널리 사용되던 도기를 굽던 가마를 이른다.

 

이후 중종 25년(1530)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토산조’에는 전국의 자기 생산지 32개소 가운데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양구현’만이 명시되어 있었다. 세종실록 지리지와 신증동국여지승람 두 내용을 종합해 보면 조선 초기엔 139개소에 달했던 자기소가 16세기로 넘어오면서 오히려 줄어 32개소로 축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강원도에서는 유일하게 양구만이 기록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15-16세기 양구지역은 도자기 생산의 요지였음이 분명하다.

 

이는 도자기를 빚는데 반드시 있어야 하는 흙의 생산과 밀접한 연관을 지닐 수밖에 없다. 사료에서 양구는 도자기 이외에도 ‘백토 산지’로 기록되고 있어 이와 같은 조건을 충족시킨다. 이 부분에 대해 숙종 27년(1701)의 기록에 양구백토에 관한 내용이 있고, 숙종 35년(1709)에는 “이전에 양구에서 백토를 채취하였으나 힘들고 고되어 다른 지역에서 백토를 옮겨 오도록 하였으나 분원 백자 생산을 책임지던 사옹원에서 양구백토가 아니면 그릇이 몹시 거칠고 흠이 생기게 된다”고 하여 “다시 양구백토를 가져다 쓸 것을 주청”한다.

 

그리고 몇 년 뒤인 숙종 39년(1713)에도 양구에서 굴취하던 백토를 다른 지역으로 옮겼으나 이 또한 폐단이 많아 대책을 논의한다.

 

그리고 숙종 40년(1714)년에는 ‘양구백토’를 굴취하는 과정이 매우 힘든 노역(奴役)이었음을 보여주는 기사가 있다.

 

이후에도 영조 17년(1741), 양구에서 백토 캐는 작업의 폐단을 왕이 개선하도록 명하는 대목이 있으며,영조 19년(1743)에는 백성들에게 끼치는 민폐를 덜기 위해 사옹원 분원의 낭관(郎官)을 파견하고 상정미(詳定米)를 나누어 주면서 백토를 캐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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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비교적 형태가 온전하게 나온 술잔과 작은 접시로 술잔은 유약을 입히지 않은 상태다. ⓒ 정덕수

 

이와 같은 내용들을 찾으며 자연스럽게 의문이 하나 생겼다.

 

지명(地名)을 보면 유구한 역사적 사건이나 현상들을 만날 수 있다. 자연적인 현상을 차용하여 지명으로 사용한 경우도 있으나 생산되는 물자에 따라 지명이 정해지는 경우도 있다.

 

이곳 오색리를 최근에 오색1리와 오색2리로 나누었으나 예전에는 송어리와 가라피, 백암, 관대문, 마산,관터, 오색 등으로 자연부락에 따라 각각 고유하게 불렸다. 관대문과 관터는 말 그대로 관청의 터였거나 그 관청을 들고나는 길목이었음을 유추해 볼 수 있고, 마산으로 불리는 곳은 원래 박달역으로 추정할 수 있는 주막이 70년대 초까지 있었고 지역에서는 ‘박다럭’으로 불렀다. 이는 박달역이 와전되어 그리 불리었음을 충분히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왜 이곳이 ‘마산’으로 불리게 되었을까?

 

이는 이치적으로 보았을 때 지금의 인제군 기린면으로 넘어가는 단목령과 한계령으로 불리는 오색령의 길목에 자리하여 많은 이들이 이곳 역참에서 묵어야 했다. 자연히 물자가 많이 오고갈 때는 말이 이 마을에 많이 머물었을 일이다.

 

무언가 많음을 이야기할 때 ‘산처럼’이라 한다. ‘말이 산처럼 많이 머무는 마을’이었고 그에 자연스럽게 마산(馬山)이라 하였으리란 정도는 누구라도 유추할 수 있는 일이다.

 

그렇다면 ‘가라피’야 양양군지에서도 밝혀놓았듯 가래나무(가라목)이 많아 그렇게 불린 마을이라 했을 때‘백암’은 오롯이 의문점으로 남게 된다.

 

이곳 백암마을엔 어른들의 이야기를 통해 ‘하얀 흙이 있었다’는 것과 ‘사기막골’이라는 지명 하나를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다. 옹기를 굽는 도기소가 있었다면 사기막이라 하지 않을 것이다. 자기를 구웠기에 사기막이라 불렸을 일이니 이를 먼저 확인할 필요를 느꼈다.

 

만약 이곳에 백토가 생산되었고 자기소가 있었다면 양양군의 역사를 기록한 ‘양양군지’부터 새로 편찬해야 할 정도로 중요한 사건이다. 한 고장의 역사 자체가 어떤 과정에서 누락되었으며, 그러할 수밖에 없는 필연적 이유가 있었다면 이 또한 밝힐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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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기막골 사기 파편들을 발견했던 흔적과, 오래전부터 불리워 온 지명을 따라 임헌자 도예가 교수와 장의숙 도예가 등 일행들과 지난 7월 23일 무더위 속에 가마터를 찾아 나섰다. ⓒ 정덕수

 

마을 사무장을 보고 있으니 마을에 얽힌 다양한 사료들을 찾는 것 또한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마침 마을 이장을 맡아 활동하시는 임승엽 이장께서도 이 내용에 대해 깊은 관심을 보였다.

 

오색초등학교 선배 한 분인 양출용씨가 이곳 사기막골에 대해 이야기를 하여 함께 나섰다.

 

“혹시 제대로 된 물건 하나 찾을까 싶어 가봤는데 다 깨진 것밖에 없었어.”

 

이 말에, 깨진 것이라 하더라도 어떤 그릇을 생산하던 곳인지는 충분히 알 수 있겠단 판단에 도예를 전문으로 하는 분들과 함께 지난 7월 23일 시간을 냈다.

 

엇비스듬하게 산비탈을 거슬러 오르며 예전에 주어 돌 위에 올려놓았던 사기그릇 밑부분 하나를 주어 일행들에게 내밀었다. 팔각으로 다듬은 사기조각이라 뭔가 특별하다 싶어 흙속에 빠져나온 것을 주워 돌 위에 올려두었던 것이다.

 

“백자네요.”

 

“여기 그럼 정말 백자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단 이야기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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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자 가마터 사기막골로 불리던 지명이 있는 곳으로 백자 가마터를 찾아 가파른 산비탈을 거슬러 오르는 일행들. ⓒ 정덕수

 

다시 조금 전보다 더 가팔라진 산비탈을 오르며 한 분이 말했다.

 

이런 곳에 가마터가 있었을 리가 없는데…”

 

“맨몸으로도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흙을 지고 이곳으로 다녔겠어. 이곳이 아니라 다른 곳을 말하는 거 아닐까?”

 

“저도 어렸을 때 지게질을 해봤지만 예전엔 어른들께서 쌀 한가마니 정도는 거뜬히 지고 산길을 넘나들었습니다. 심지어 지금이야 용대리로 내려가 계시지만 수렴동 대피소를 운영하시던 이경수 선배님은 속초에서 쌀 한 가마니를 지고 저항령을 넘어 수렴동으로 다녔습니다.”

 

“저항령은 어디예요?”

 

“속초 설악동에서 보면 가장 낮은 산골짜기가 보입니다. 그 골짜기가 저항골인데 비선대를 가는 길목 중간쯤에 골짜기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백담사 방향으로 연결된 고개 이름이 저항령인데 이곳을 넘어 길골로 내려가면 백담사와 수렴동 중간 정도가 됩니다. 미시령이나 마등령보다 상대적으로 낮기도 하고, 가장 짧게 속초와 인제를 연결할 수 있는 산길이었겠지요. 이곳과는 상관없지만 이정도 산길은 얼마든지 지게질을 했다는 걸 말씀드리는 겁니다.”

 

앞서 걷던 양출용 선배가 걸음을 멈췄다.

 

여기서부터 그릇 깨진 게 보일텐데.”

 

주변은 가마터로 보기엔 무리였다. 가마터에서 잘못 된 그릇을 깨 버린 걸 보았단 이야기일 수 있다.

 

“조금 더 오르면 되겠군요.”

 

몇 걸음 더 옮기자 본격적으로 사기조각들이 나타났다. 몇 개 주워 뒤 따라 올라온 임헌자 교수께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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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파편과 도예가들 임헌자 교수를 비롯해 장의숙 도예가 등 4명의 도예가들이 양양군 서면 오색리 백암마을 사기막골에서 백자 파편들을 살펴보고 있다. ⓒ 정덕수

 

“양구백자와 같네요.”

 

“그런가요?”

 

“네. 그런 거 같아요. 좀 더 확인해봐야 되겠지만 형태나 모든 점에서 양구백자와 같은 백자로 보입니다.”

 

양구와는 요즘에야 1시간 남짓 시간이 걸리지만 예전엔 차로 달려도 2시간이 훌쩍 넘는 시간이 걸렸다.걸어서는 이틀은 족히 되는 거리, 그것도 높은 고개가 두 개나 되는 거리를 두고 같은 형태의 백자를 생산하던 흔적이라니…

 

산의 형태를 살피며 멀리서 보았을 때 산의 능선 언덕에 해당되는 부분에 돌무더기를 가리키며 말했다.

 

“가마의 굴뚝에 해당되는 부분이 북쪽에 해당되는 저 돌무더기겠지요? 그리고 저 돌도 가마 주변을 둘러쌓았던 흔적일 거고요?”

 

“네 그런 거 같네요. 아주 큰 규모는 아니지만 파편들을 보아서는 제사를 지낼 때 사용하는 제기를 주로 생산했던 가마 같습니다.”

 

가마에서 재를 버렸음직한 자리를 살폈다. 그곳엔 찌그러져 버렸던 것으로 보이는 제법 완전한 형태를 갖춘 자기들과 함께 유약을 바르지 않은 상태의 온전한 술잔이 하나 나왔다.

 

자기의 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단서가 됨직한 파편 몇 개와 깨진 굽이지만 형태가 다른 것들을 주워 하산하기로 했다.

 

“여기에 백자를 굽던 가마터가 있었다면 백토도 어딘가 나왔다는 이야긴데 그건 어디서 찾을 수 있죠?”

 

“여기 마을 이름이 백암이잖아요. 말 그대로 하얀 돌이 있어서 그렇게 불린 거 같습니다. 그리고 어른들이 예전에 집을 짓고 회벽대신 그 하얀 흙을 퍼다 벽을 발랐다고 하더군요.”

 

“그럼 지금도 그 하얀 흙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네요.”

 

“네, 저도 그 이야기를 듣고 찾아다니다 냇가에서 찰진 하얀 흙을 봤습니다.”

 

“그곳 좀 알려줄 수 있어요?”

 

“맨 입엔 안 되죠.”

 

일행 모두 맨 입엔 안 되겠다는 말에 웃었다.

 

“오늘은 피곤하시죠? 우선 오늘 이 사기막골에 대해 먼저 정리하고 다시 한 번 기회를 만들어 함께 하시죠. 그때 백자를 빚을 수 있는 백토인지는 확인하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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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백자 제기를 생산한 것으로 유추되는 양양군의 오색마을 사기막골에서 발견된 주발과 술병의 주둥이로 보이는 파편과 , 팔각의 깎은 굽이 특이한 백자 파편이 많다. ⓒ 정덕수

 

가마터가 확실하다는 것이 확인되었고, 백자를 빚던 백토인지는 알 수 없으나 찰지고 하얀 흙과 돌이 작은 골짜기에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별도로 조정에서 명을 내려 제작을 해 진상하던 것은 아닐지라도, 양구분원에서 백토에 대해 배웠고 백자를 빚는 법까지 습득한 누군가에 의해 이곳에 백자를 빚고 굽는 가마가 세워졌을 수도 있다.

 

정조시대에 다음과 같은 기록을 하나 찾았다.

 

정조 15년(1791) 강원도사 윤치성(尹致性)이 관동지방의 민폐 4조항을 조정에 아뢰는데 그 가운데 두 번째 조항이 양구에서 나는 백점토의 값을 올려주자는 내용이다.

 

이에 왕은 “백성을 고통스럽게 하면서 굴취한 양구의 백토가 분원에 와서 사번(私燔)에 사용됨으로써 진상품을 제작하는데 사용되지 못하고 사치한 물건을 만드는데 소용되는 것”을 지적하면서 사옹원 감번관(監燔官)을 양구에 배치하도록 명했다.

 

사사로이 사치품을 만들고자 했다면 제기(祭器)를 빚고 굽지는 않았을 터, 왜 아직 양양지역에서 백토가 생산되었으며 백자를 구웠다는 이야기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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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2'
  • profile
    한상률 2016.09.05 11:04

    이런 이야기 참 재미 있습니다. 뒷 이야기가 궁금합니다.

  • profile
    정덕수 2016.09.06 00:33
    몇 편으로 나뉘어 이 정조시대부터의 도자사를 써야 할 것 같군요.
    그리고 마을 어르신들께서 도자기를 배우는 이야기도소개할 것이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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