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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문화지 "유심" 9월호 기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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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10월을 목전에 두었다.

누구에게나 특별히 애착이 가는 계절이 있고 12달 중에도 그러한 달이 있다. 내겐 특별히 어느 달이 좋으냐 묻는다면 딱히 꼬집어 어느 달이 좋다고는 하지 못한다. 물론 계절도 그러하다.

그러나 반드시 한 계절과 특정한 달 하나를 예로 들으라면 “산 찾기 좋은 10월이 아니겠느냐” 되물을 것 같다.

 

한계령에서 1

 

온종일 서북주릉(西北紬綾)을 헤매며 걸어왔다.

안개구름에 길을 잃고

안개구름에 흠씬 젖어

오늘, 하루가 아니라

내 일생 고스란히

천지창조 전의 혼돈

혼돈 중에 헤매일지.

삼만육천오백날을 딛고

완숙한 늙음을 맞이하였을 때

절망과 체념 사이에 희망이 존재한다면

담배 연기빛 푸른 별은 돋을까

 

저 산은,

추억이 아파 우는 내게

울지 마라

울지 마라 하고

발 아래

상처 아린 옛이야기로

눈물 젖은 계곡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저 산은,

구름인 양 떠도는 내게

잊으라

잊어버리라 하고

홀로 늙으시는 아버지

지친 한숨 빗물 되어

빈 가슴을 쓸어 내리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온종일 헤매던 중에 가시덤불에 찢겼나 보다

팔목과 다리에서는 피가 흘러

빗물 젖은 옷자락에

피나무 잎새 번진 불길처럼

깊이를 알 수 없는 애증(愛憎)의 꽃으로 핀다

찬 빗속

꽁초처럼 비틀어진 풀포기 사이 하얀 구절초

열 한 살 작은 아이가

무서움에 도망치듯 총총이 걸어가던

굽이 많은 길

아스라한 추억 부수며

관광버스가 지나친다.

 

저 산은

젖은 담배 태우는 내게

내려가라

이제는 내려가라 하고

서북주릉 휘몰아온 바람

함성 되어 지친 내 어깨를 떠미네

아,

그러나 한 줄기

바람처럼 살다 가고파

이 산,

저 산 눈물

구름 몰고 다니는

떠도는 바람처럼

 

어느 문예지 조사에서 한국 시인이 가장 애창하는 노래의 하나로 〈한계령〉이 뽑혔다고 한다. 그도 그럴 것이 가끔 출판기념회 같은 문인모임 후 뒤풀이로 노래방에 가다 보면 심심찮게 들리는 노래이다 보니 꽤나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이 노래는 정덕수 시인이 설악산 오색약수터 근처 오색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열여섯 살에 가출하여, 서울로 상경해 봉제공장, 철공소 등을 전전하며 살다가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으로 1981년 설악산 산행 중 쓴 시 〈한계령에서〉 연작 중 1편에 속한다.

 

정덕수 시인의 말에 의하면 힘든 서울 생활 속에서도 휴일이면 당시에 유행하던 음악다방을 찾았는데, 그 이유는 음악다방 DJ를 통해 자신의 시를 낭송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어느 날 우연히 그 다방을 찾아온 가수이자 작곡가인 ‘시인과 촌장’의 하덕규가 시 낭송을 듣게 되었고 그런 인연으로 〈한계령〉이라는 노래가 만들어졌다. 정덕수 시인의 인터뷰 기사에 의하면 “노래를 먼저 들었는데 가사를 따라 부르다 보니까 가사가 귀에 많이 익더라고요. 그 노래 자체가 태연하게 가슴에 와 닿는다 이런 느낌이었어요. 이게 뭐지, 뭐지 하며 제 원고를 다시 뒤져 봤어요. 내 시를 약간 변형한 것이었어요.”라고 증언했다. 그런 연유로 하덕규와의 오랜 분쟁 끝에 가사 저작권의 절반을 찾아왔다고 한다.

 

사실 이 노래는 하덕규가 부르기도 했지만 1970, 80년대 통기타와 청바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의 상징이었던 가수 양희은이 부르면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이후 당대 청년층에 가장 큰 영향력을 줬던 민중문화의 상징인 김민기가 작사 작곡한 〈아침이슬〉과 함께 양희은이 부른 대표적인 노래가 되었다. 생각해보면 이 노래는 1970, 80년대에 작사가나 가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대학가 시위 현장에서 많이 불렸던 노래이기도 하다. 또한 한껏 멋을 내고 나간 명동에서 시원한 생맥주 한 잔과 함께 친구들과 듣던 노래이다. 어느 때 어느 곳이 되었든, 젊은 날의 양희은은 젊은이를 대변하는 신선하고 청순함을 주는 친숙한 청량제와 같은 존재였음이 분명하다. 좋은 가수가 좋은 곡을 적절한 시기에 만났을 때 명곡은 탄생하는 것이다.

 

소위 386세대로 불리던 사람들이라면 이 두 곡과 함께 질풍노도 같았던 젊은 날들을 함께 했을 것이다. 〈아침이슬〉이 청년 시절의 고뇌와 희망을 함께 한 노래였다면, 〈한계령〉은 중년을 지나고 어언 노년을 향해가는 세대들에게 세파에 지친 삶을 저만큼 내려놓고 조용히 자신의 삶을 성찰하게 하는 치유의 노래이다. 역설적이게도 정덕수 시인이 젊은 날 겪었던 고뇌와 상처의 노래가 설악산 한계령처럼 어머니의 품이 되어 아련하게 많은 이들의 가슴을 다독이고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네 삶이란 홀로 여행을 떠나는 것이며 마음속 외로움을 그리움이라는 풍경으로 채우는 과정이 아닐까.

 

자, 이제 여행을 떠나보자. 기억의 트렁크 속에 가득 찬 잊힌 친구의 이름, 희미해져가는 옛사랑의 추억을 다시 한 번 더듬으며 동해, 설악산을 향해 차를 몰아보자.

 

osaekri20150916a 049.JPG

 

 


 

정덕수:

 

'누군가의 아련한 한을 치유하는 노래’라는 제목으로 백담사 만해마을과 연관이 있는 곳인 듯한 ‘유심’에서 9월호에 ‘한계령에서 1’이 기획특집으로 다루어진 모양이다. 지난 금요일 낮엔 다시 EBS에서 노래가 되어진 시를 주제로 특집을 만든다며 작가로부터 연락이 왔다.

“언제가 편하겠느냐” 묻기에 “교육방송에서 직접 작가의 이야기와 일상을 담는다면 언제고 마을회관으로 오면 시간을 낼 수 있다”고 대답을 했는데 오늘 다시 연락이 와서 “제작진이 지난 작업이 밀려 시간이 없으나 추석 전 언제가 좋겠느냐” 묻기에 “차라리 시가 처음 쓰여진 10월 초인 5일쯤이면 한계령엔 단풍이 올해는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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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지난 5월 울산에서 발표된 ‘다시 한계령에서’를 들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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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1'
  • profile
    박순백 2015.09.22 17:29

    "유심"의 글,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입니다.

    아픔을 참으며 쓴 시이기에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은 것이구요.

    그 나이에 저런 엄청난 시를 쓰시다니 그게 다시금 놀랍습니다.

    저 처절한, 밟은 자국마다 피가 고일 것 같은 한계령에서의 정 시인

    님의 그 발걸음이 지금 제 가슴에도 찍힌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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