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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즐기는 내 모습을 보고 던지는 질문이 “매일 술만 쳐 먹고 사느냐?”고는 못하고 주유천하하지 않느냐?



지난 밤 봄바람 맞으며 밖을 한참 돌았던 탓인지 일찍 잠이 들었다. 다시 깬 시간이 12시 반이 조금 넘었을 때다. 다른 때라면 글을 쓰거나 책을 읽었겠지만 3월 19일 약속된 행사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매년 10월 31일 밤 7~80명이 넘는 사람 앞에서도 태연했고, 몇 백 명이 앞에 있어도 뻔뻔하게 할 말 다할 줄 알지만 이번엔 무엇을 해달라는 말이 없다보니 자연스럽게 무얼 말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이다.
문득 몇 번 사람들에게 받았던 질문들이 있었다는 걸 깨닫고 당시 정리했던 글이 있어 살펴봤다.
주로 아래와 같은 질문이 많았다.

“한계령이라는 시를 쓰게 된 동기는 뭡니까?”

“오색약수터에서 사신다고 들었는데, 산신령 같은 느낌이 들어요. 뭘 드시고 사시는 지요? 혹시 이슬만? 생계수단은 어떻게 살아가시는지 궁금합니다.”

“인생을 한 마디로 정의해주신다면?”

“혹시 주유천하 하시지 않는지요?”

“사회에 하고 싶은 얘기는?”

습작기를 거치는 시인지망생들이라면 의당 “시를 어떻게 써야 하나요?”나 “시는 주로 어떤 상황에서 쓰죠?”가 궁금하겠지만 일반적인 이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아는 노래를 아직은 젊은 사람이 썼다는 사실에 그걸 첫째로 궁금해 한다. 그리고 생계문제는 필연적이고, 나이가 많고 적고를 떠나 인생에 대한 무언가 철학적 심오한 답변을 기대하며 던지는 질문도 있다.
그리고, 사람과 어울리면 차보다는 술을 더 즐기는 편인 내 모습을 보고 던지는 질문이 “매일 술만 쳐 먹고 사느냐?”고는 못하고 주유천하하지 않느냐다.


설월(雪月)이 만정(滿庭)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번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행여 긴가 하노라


작자미상의 이 시조에서 만정은 만창(滿窓)으로도 쓴 경우를 보았는데, 개인적으로 만창보다는 만정이 더 지극하다 생각한다. 창 가득히 달빛이 들어오면 외로움이지만, 뜰 가득히 달빛 쏟아지면 진정으로 술상을 차릴 흥이 나는 까닭이다. 이 시조를 해묵은 메모에서 찾은 것도 사연이 있다. 술에 대한 이야기를 쓰려고 몇 가지 술에 대한 시(詩)를 준비하던 중이었다. 그러다 ‘예리성’이란 말을 사용해 제가 형님이라 하는 정운현 선생께서 글을 한 편 쓰신 걸 보고 해묵은 수첩을 뒤적여 찾았다. 이 예리성(曳履聲)이란 말은 ‘짚신 끄는 소리’란 뜻이다. 짚신 끄는 소리가 들리는 정취를 그려보는 것만으로 아름답다. 하물며 님이 신고 살며시 찾아오는 소리임에야…
정운현 선배께서 “정확친 않소만 기생출신 여류 시인이 아닌가 싶소”라 제가 작자를 찾지 못하는 시조라 하니 답을 주셨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답이다.
기생이라고 사랑을 하지 말라는 법도는 없고, 아무도 찾지 않는 달빛 환한 밤 눈밭에 바람 한 줄기 쓸려가는 소리나, 댓잎이 바람에 서걱이는 소리만으로도 임의 짚신 끄는 소리라 생각될 수 있으니 말이다.

마산에 가면 통술집이 많다. 2012년 9월 22일 처음으로 말로만 듣던 통술집을 가게 됐다. 그리고 저녁 제법 늦은 시간 들렸던 마산의 만초집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만초(蔓草)가 무엇인지부터 설명을 해야 될 거 같다. 마산의 김훤주 기자에게 안내를 받아 만초(蔓草)란 간판을 보고 덩굴식물을 이르는 말이란 걸 알고 나름의 기대를 하며 들어갔다. ‘만초’란 담쟁이나 매꽃 등 덩굴성 식물을 통칭하여 가리키는 말이다. 
담쟁이를 보면 망부가로 세상의 많은 이들 가슴 쥐어뜯으며 눈물짓게 한 시인이 떠오른다. 도종환 시인, 그는 ‘접시꽃 당신’이란 시에 아내를 묻고 돌아오는 옥수수밭가를 노래했다.
이와는 반대로 만삭의 아내를 두고 떠날 처지의 남편을 위해 스스로 배를 열어 아이를 세상에 나오게 한 아내가 쓴 시도 있다. 벌써 십오 년도 훌쩍 넘은 세월이지만, 강민숙이란 친구의 이야기다. 그녀는 그리 오래지 않아 태어날 아기를 남편에게 보여주어야만 된다는 생각으로 기꺼이 수술대 위에 올랐었다.
전자 도종환의 시가 망부가(亡婦歌)라면 후자인 강민숙의 시는 망부가(亡夫歌)가 되겠다.
그 친구 강민숙의 시 중엔 다음과 같은 시가 있는데, 담쟁이의 모습이 때로는 이런 절절한 통증이 되기도 한다는 걸 보여준다.


osaekri2015-at0220.jpg



담쟁이덩굴 앞에서


벽을 다오
나에게
다시는 무너지지 않을
잎새 한 장 기대어 볼
벽 하나 돌려 다오


맞바람에
숭숭 뚫려 버린 가슴
가누어 갈
벽 하나 내어 다오


얽히고 설킨 세상살이
내 어쩌다
밑동째 뽑혀 버리고
타는 입술이어야 하는가


담쟁이덩굴처럼
그대 곁에
다시
안기고 싶은데.


높은 담장이나 나무를 거침없이 타고 오르는 담쟁이를 떠 올리면 경이로움을 넘어 숭고함마저 느껴진다.
그런 담쟁이와 닮은, 고단한 삶들을 어루만져 지탱하는 작은 술집이 만초집이다.
깊은 산엘 들어 종일 걷다 몸 지치고 갈증이 견디기 어려울 때 만난 샘물이 건넨 달콤함과 시원함 같은, 인정 없이 삭막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여전히 사람들 정이 깊은 술집이 ‘만초집’이라 생각된다.
마산 창동 예술촌을 둘러보고 저녁식사를 겸한 술을 마산 명물이라는 ‘통술’집에서 했다. 목화통술로 기억하는데, 이곳에서 적당히 취기가 오른 우린 술을 더 못 마실 이들은 숙소로 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지만 대부분 만초집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미 목화통술에서 안주보다 술을 더 많이 퍼 부은 정신으로 낯 선 골목을 어떻게 앞 선 일행을 따라갔던지는 기억을 할 엄두도 나지 않는다. 결과적으로 마산엘 갈 기회가 있어 혼자 나중에 다시 찾아간다면 혼자서는 불가능 한 일이겠으나, 워낙 많은 이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술집이라 물어물어 찾아간다면 만초집을 못 찾고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는 않으리라.

크게 꾸미지 않은 술집, 행사를 진행하는 이들이 미리 연락을 해두었던 모양인지 조금 어수선하지만 자리가 이내 마련되었다. 자리를 잡고 앉으니 갱상도 문화공동체 해딴에를 운영하는 김훤주 기자가 “여기는 안주는 따로 주문을 받지 않습니다. 주인이 주면 주는 대로 먹어야 합니다. 술은 맥주와 소주, 막걸리가 있습니다”라 했다.
술을 마실 때 안주를 별로 먹지 않는 나야 별 문제 될 일도 없는 일이고, 술만 얼마든지 마실 수 있으면 족한데 허술하기 그지없는 이 집을 굳이 많은 사람을 안내한 의도부터 궁금해졌다.
뭔가 사연이 있는 곳이니 일행들을 그리로 안내를 했겠는데, 안주를 선택할 권한이 손님에게 없고 주인이 주는 대로 가만히 있으라니 은근히 심통이 나는 건 사람인지라 감출 일도 아니다. 하기야 술 먹고 밥 먹는데 그 집이 근사하면 어떻고 초라한 들 대수겠는가.
외지에서 찾아간 처지에 제 아무리 낯짝에 철판 깔고 참견 곧잘 한다지만 가끔은 예외인 때도 있는 법이라 얼마간 사람들 표정을 보며 앉아 있었다.
술잔이 몇 번 채워지고 비워지기를 거듭한 뒤 그리 크지 않은 키의 주인아주머니가 자리에 앉으시더니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참을 수가 없도록
이 가슴이 아파도
여자이기 때문에 말 한 마디 못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설움 혼자 지닌 채
고달픈 인생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견딜 수가 없도록
외로워도 슬퍼도
여자이기 때문에 참아야만 한다고
내 스스로 내 마음을 달래어 가며
비탈진 언덕길을 허덕이면서
아 참아야 한다기에
눈물로 보냅니다
여자의 일생


osaekri2015-at0219.jpg



이미자의 ‘여자의 일생’을 부르는 만초집 안주인의 얼굴에 물든 나이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맑고 앳된 목소리가 사람들의 시선을 집중시켰다.
구성지게 꺾어 넘는 여자의 일생을 듣고 노래가 끝나자 모두 ‘앵콜’을 외치며 박수를 쳤다.

한 곡의 노래로 사람들의 생각을 싹 바꾸는 힘을 지닌 만초집 안주인, 과연 저 다섯 항목으로 이야기를 해서 사람들에게 ‘역시 18살에 한계령을 지을 정도군“이란 말을 들을 수 있을 것인가.
그리움으로 기억될 예리성같은 감동까지는 못 주더라도, ‘뭘 저런게’라 망신은 당하지 않았으면 싶어 달래와 냉이로 어찌해 볼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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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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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백 2015.03.25 11:58

    좋군요. 이거 두 개.

    설월(雪月)이 만정(滿庭)한데 바람아 부지마라
    예리성(曳履聲) 아닌 줄은 번연(判然)히 알건마는
    그립고 아쉬운 마음에 행여 긴가 하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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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사님께 선물 드릴 게 있다고 말씀 드렸던 경하씨 음반을 이번에 서명 받아 왔습니다.
    사실 경하씨가 1월 10일 이곳 오색에 왔을 때 1장은 서명을 해 제게 주면서 다섯 장의 음반을 더 주더군요.
    “선생님, 정말 드리고 싶은 분께 선생님께서 편하게 드리세요”라면서요.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박사님과 윤세욱 선생님, 그리고 역시 음악 좋아하시는 은광표 선생님이 생각이 났습니다.
    캐나다에 계신 윤세욱 선생님께서야 언제 오신다고만 하면 전하기로 하고, 박사님과 은광표 선생님께 드릴 음반은 서명을 받았습니다.
    조만간 서울에 가서 전해 드리겠습니다.kyeong-ha bak2015-a1202a.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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