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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문학
2015.03.06 10:53

내 어머니의 고리짝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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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564 추천 수 0 댓글 2

여섯 살 적 늦여름 어머니는 아버지의 폭력에 견디지 못 하시고 집을 나가셨다.
폭력의 시작은 손님들이 오셨는데 저녁상이 늦었다는 단순한 문제에서 시작되었다. 방안에 몇 가지 옷가지와 집기를 집어던지는 것으로 시작해서, 급기야 찬장이 넘어가고 하얗게 뜸이 들어가던 무쇠밥솥에 돌을 들고 와 던져 솥뚜껑이 깨졌다.
어린 기억으로 아버지의 그날 모습은 아귀가 있다면 꼭 그런 모양일 거라 생각할 정도였다. 카키색 항공점퍼를 입고 신발을 신은 발로 자식들이 두려워 떨고 있는 방으로 들어서 호야(남폿불)의 심지를 올려 담뱃불을 붙이고, 형에게 “니 에미 어디 갔는지 찾아와!”라 외쳤다.
그것이 어머니와의 이별일 줄이야 꿈엔들 생각이나 했겠는가. 
 
그로부터 9년간 어머니의 고리짝은 한 여자가 몰래 가져간 어머니의 한복 세 벌 외엔 늘 함께 이사를 다녔다.
어머니가 보고 싶을 때면 아버지 몰래 고리짝을 열어 어머니의 체취를 맡았다.
그랬던 어머니의 치마와 몇 마름 양단 원단이 이불이 되고, 요로 만들어지는 걸 지켜보다 냇가에 나가 앉았을 때, 왜 그리도 서글프고 눈물이 쏟아지던지… 
 
양단 몇 마름 - 박은옥 (정태춘) 
 
시집 올 때 가져온 양단 몇 마름
옷장 속 깊이,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펼쳐만 보고, 둘러만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시집 올 때 가져온 꽃신 한 켤레
고리짝 깊이 깊이 모셔 두고서
생각나면 꺼내서 만져만 보고
쳐다만 보고, 닦아도 보고
석삼년이 가도록 그러다가
늙어지면 두고 갈 것 생각 못하고
만져 보고, 쳐다 보고, 닦아만 보고
만져 보고, 펼쳐 보고, 둘러만 보고 
 osaekri2015-at0111a.JPG


경하씨의 목소리로 양단 몇 마름 들으며 내내 그 시절 풍경이 스쳐간다.

누구에게나 이런 추억들 하나 없겠는가.

오늘 경하씨는 아버님의 병간호로 노년을 고단하게 살아가시는 어머님을 모시고 지리산으로 가신다는 소식을 들었다. 언양시에서 화순으로 갔다 다시 지리산 자락을 들려 마음 다잡아 좋은 인연들을 위해 노래를 부른다고 했다. 그리고 여수로 가서 내일도 노래를 부르고 부모님을 화순으로 모셔다드리고서야 언양으로 간다는 고단한 여정에 양단 몇 마름 동영상 제작으로 인사를 대신 전한다.

나는 내 어머니에게 경하씨가 부모님께 하는 것과 같은 효도를 할 방법도 없었고 길도 없었다.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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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순백 2015.03.08 22:21

    아버님, 어머님과 관련된 이 이야기는 처음 듣습니다.

    그래서 어머님이 인제, 원통 쪽으로 가신 것이고

    정 선생님이 한계령에 올라 그 쪽을 보며 회한의 눈물

    을 흘리곤 하셨던 것이로군요.-_-


    '참 사는 게 뭔지???ㅜ.ㅜ'  부모님들이 다 안계시는 이

    제는  그런 생각도 드실 듯합니다. 그런 미움, 슬픔도

    세월이 가져갈 수 있다는 게 신기합니다.


    저의 경우, 미움이나 슬픔은 사라지는 걸 알았는데 제

    가 한 나쁜 짓들에 대한 부끄러움은 절대 사라지지 않

    더군요. 그리고 이젠 그런 부끄러운 기억이 계속 살아

    남아 죽기 전까지 덜 부끄러운 저를 만들어줬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 profile
    정덕수 2015.03.11 18:59
    박사님께서 한글과 컴퓨터 부사장으로 계실 때 처음 뵈었는데 그때는 박사님과 지금처럼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입장은 아니었습니다. 박사님의 오래전 붓 가는 대로에 글을 남기면서인데 첫 글은 엉뚱하게도 ‘더 이상 글을 여기에 쓰지 마십시요’를 못 보고 그곳에 썼습니다.
    그리고 얼마간 시간이 흘러 드림위즈가 만들어지며 박사님을 드림위즈로 찾아가 뵈었습니다.
    남양주에 가끔 들렸을 때 우연히 뵙던 모습이나 다름없이 예의 몸에 밴 친절함으로 하여 머지않아 20년 인연이 되어갑니다.
    그때 이미 어머니께서 세상을 떠나신지 15년이 다 되었던 때라 어머니에 대한 말씀 굳이 드릴 일이 없었습니다. 한동안 의절하다시피 한 아버님에 대해서만 약간 비쳤었습니다. 사실 어머니를 모셔와 돌아가신 뒤의 여파로 그리되었던 것입니다.
    이젠 아버님도 돌아가신지 10년이 넘었습니다.
    문득 경하씨가 부른 ‘양단 몇 마름’의 방송분에 오류가 있어 노래 부분만 잘라 편집을 하다보니 어머니의 고리짝에 대한 기억이 되살려진 것입니다. 처음으로 11살 어린 나이로 넘었던 고갯길에 얽힌 사연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천천히 그 지난 이야기 조금씩 이렇게 정리할 기회를 가지려 합니다.
    부모님께 효도를 할 수 있는 입장이 아닌, 참으로 난감했던 지난 날들이지만 이제는 얼마쯤 이야기를 꺼내도 힘들지 않게 되었으니 세월이 약이란 말 맞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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