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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애의 Naver 블로그 "디카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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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예산의 김정희(金正喜; 1786∼1856)의 생가는 야트막한 야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아주 평화로운 곳입니다. 이 집은 추사가 출생하고 어린 시절을 보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는데, 지나치게 화려하지 않은 반가(斑家/양반가) 주택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여덟 개의 계단 위에 큰 지붕을 한 채 위용 있게 우뚝 서 있는 솟을대문(대문채)과 사랑채, 안채, 사당채들의 질서 있는 공간 배치는 지난 세월의 영화를 한 눈에 떠 올려 볼 수 있게 하는 전형적인 명문 대가의 모습 그대로입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金漢藎)은 영조의 딸 화순(和順) 옹주와 결혼해 임금의 사위가 되면서 이 일대의 토지를 별양전으로 하사받았습니다. 이 집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칸씩을 맡아 모두 53칸짜리 대저택으로 지었고, 지금은 그 반쯤되는 규모로 축소하여 복원한 것입니다. 추사의 집안은 조선조 훈척 가문의 하나인 경주 김씨인데다 아버지 김노경(金魯敬)은 병조판서를 지냈습니다. 따라서 그의 가문은 추사가 과거에 급제하자 조정에서 축하를 할 정도로 권세가 있었습니다.

그는 일찍부터 천재성으로 명성을 떨쳤습니다. 3살 때 붓을 잡고 글씨 쓰는 흉내를 냈으며 6살 때 입춘첩을 써 붙였는데 이를 본 박제가가 “이 아이는 내가 가르치겠다."고 나설 정도였다고 합니다.



- 추사 선생 고택 안내도입니다.

고택 안에 걸려 있던 안내문입니다.(이 글들은 모두 green색 글씨로.)

추사의 학문과 예술

추사 김정희(金正喜)선생은 1786년 6월 3일 예산군 신암면 용궁리에서 영조의 부마이신 월성위 김한신의 증손이며 병조참판 김노경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김노영(金魯永)에게 입양하였다. 선생은 조선왕조시대의 실학자이며 대표적인 서예가로서 벼슬은 병조참판과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에 이르렀으며 당시의 당쟁에 휩쓸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에서 10여년간의 유배생활을 지내고 말년에는 생부 노경의 묘소가 있는 경기도 과천에서 71세를 일기로 1856년 10월 10일(철종 7년)에 작고하였다. 선생은 단순한 예술가에 그치지 않고 시대사조의 구문화 체제로부터 신지식의 기수로서 새로운 학문과 사상을 받아들여 노쇠한 조선왕조의 구문화체제를 탈피하여 신문화 전개를 가능케 한 실학자인 동시에 선각자이기도 하다.

선생은 북학파의 확실히 뛰어난 사람으로 청조의 고증 학풍을 도입하여 학문으로는 경학, 불교학, 금석학, 문자학, 사학, 지리학, 천문학에 이르기까지 박통하여 북한산 비봉의 비석이 신라진흥왕의 순수비임을 고증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완당집, 금석과안록, 실사구시설, 완당척독, 담연제집 등이 있다. 이와같이 광범위하고 철저한 학문과 천부의 재질을 바탕으로 한 추사의 예술은 시.문.서화.전각 등에도 뛰어났으며 서도는 추사체(秋史體)라는 독자일문을 열어 서예 사상 지고의 경지를 이룩하였다. 자는 원춘(元春), 호는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이다. 그밖에도 서화에 사용한 관식 예당(禮堂), 과피, 승련로인 등 210여종이 있고 낙관도 230여개이다.




- 추사 고택을 알려 주는 표지판입니다.



- 그 집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대문채의 모습입니다. 보통 남부 지방의 대가의 대문 모습은 아주 웅장한데 추사의 옛집은 그렇게 웅장하다고 할 정도는 아닙니다. Taken by Spark.

대문채에 들어서면 오른 쪽으로 사랑채가 있고 그 너머로 안채의 일부가 조금 보이고, 뒤편의 한 단 높은 곳에 사당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집들이 전체적으로 동향을 하고 있는데 사랑채는 남향을 하고 있습니다. 본래는 사랑채와 안채 사이에 중문이 곁들인 행랑채와 곳간채가 더 있었는데 복원되지 못해, 결국 사랑채와 안채가 붙어 있는 형상이 되어 부자연스럽게 느껴집니다. 1977년도에 집을 복원할 당시, 대문채와 사당채도 다시 세운 것이라 합니다. 추사의 직계 손이 끊어져서 다른 사람에게 넘어갔던 사이에 헐렸기 때문에 변형이 심하게 되었었다고 합니다. 깨끗이 수리한 후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 43호로 지정되었습니다.



- 대문채를 들어서며 오른 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사랑채이고, 그 뒤쪽으로 보이는 건물이 안채입니다.


사랑채(안내문)

바깥 솟을대문을 들어선 마당에 자리잡은 ㄱ자형 집이다. 원래 사랑채는 안채와 엄격히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 조선시대의 가옥 관념이었는데 그것은 유교적 윤리 관념에 근거한 것이었다. 이 사랑채는
남쪽에 한 칸의 온돌방, 동쪽에 두 칸의 온돌방이 있고 나머지는 모두 대청과 툇마루로 되어 있다. 이렇게 큰 마루 공간이 있는 것은 주인공의 사회적 활동이나 예술적 활동을 하는데 요긴한 공간이었을 것이다.



사랑 마루(안내문)

ㄱ자 모양으로 꺾인 사랑채의 동쪽 두칸반에 남향한 툇마루이다. 이 마루의 오른쪽 방문 위벽에는 추사선생의 글씨 유대복(有大福), 무량수(無量壽) 두 현판이 붙어있다.


안채(안내문)

여섯칸 대청과 두칸의 안방, 두칸의 건너방, 그리고 안방 부엌, 안대문, 협문, 광 등을 갖춘 ㅁ자형 집이다. 안방과 건너방 밖에는 각각 툇마루가 있고 부엌 천장은 다락이다. 애청 대들보에는 추사 선생의 필적으로 짐작되는 글씨가 붙어 있었다. 육간 대청은 그리 흔하지 않은 큰 마루이다. 이러한 규모가 큰 ㅁ자형 가옥은 주로 중부 지방과 영남 지방에 분포되어 있는 이른바 대가집 형이다.


사랑채 화단에 있는, 그림자의 길이로 시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한 일종의 해시계인 입석에'석년(石年)'이라고 새겨놓은 것은 추사가 쓴 당시의 유물이니 특히 눈여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 사랑채의 툇마루. 오른 쪽 벽 위에 추사의 친필인 '농상실'(충남 문화재자료 44)이 걸려 있습니다.

사랑채는 큰방과 건너방으로 구성되어 있고, 대청 쪽으로 난 문짝들은 모두 들어 올려 열 수 있도록(들어 열개 형식) 하였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개방과 폐쇄를 자유로이 조절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문짝을 내렸을 때의 보온과 폐쇄를 위해서는 문이 두꺼운 맹장지를 달았다고 합니다.(맹(盲)장지는 벽지를 안팎으로 두껍게 발라 어둡게 만든 문이나 창이다. 밝은 빛이 들어오도록 만든 창은 명(明)장지라고 한다.) 그러면서도 문짝은 빛이 통하도록 중간에 창을 내어 창호지를 바른 불발기창을 냈습니다. 사랑채의 큰방에는 세한도 복제본이 걸려 있습니다. 액자의 유리가 많이 반사되어 애석하게 사진을 찍지 못했습니다.



- 남쪽에서 바라본 사랑채의 모습입니다. 반가에서는 주로 팔작 지붕을 사용했는데, 이것은 지붕의 모양에도 위계질서가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 사랑채. 꺾이는 부분에 대청을 두고 동쪽으로는 큰방을, 서쪽으로는 건넌방을 두었습니다.



- 사랑채의 큰방입니다. 사랑채 건넌방에서 바라본 모습입니다. 대청 문을 모두 열면 사랑채 전체가 한 칸이 되어 확 트이게 됩니다. 왼쪽 문짝을 자세히 보세요. 아래위의 여섯 칸으로 나눈 부분말고 중앙의 문살 무늬가 빛이 들어오게 하는 불발기창입니다. 방 한쪽 면에 놓인 병풍은 반가의 필수 불가결한 물건입니다. 부엌에는 사기그릇보다 놋그릇 위주의 부엌 세간들이 놓여 있지요.



- 사랑채 벽에 걸려 있는 죽로지실. 30x133.7cm, 현 호암미술관 소장

안채는 ㅁ자형 집인데 충청도 서해안에서는 보기 힘든 구조입니다. 정면에 넓은 대청이 있고 오른 쪽에는 안방과 부엌이, 왼쪽으로는 안사랑과 작은 부엌이 마주하고 있습니다. 대청이 아주 넓은 모양인데 6칸이니 '육간 대청'이니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듯 싶습니다. 기후적 영향으로 마루가 잘 발달된 것을 살펴볼 수 있습니다.



- 안채 중문인데, 문 왼편에도 현판이 걸려 있습니다. 추사 선생이 어찌나 글 쓴 것이 많은 지 걸 자리가 없어서 못 걸고 있었습니다. Taken by Spark.

대청 뒤쪽은 칸마다 문짝과 창이 달렸는데 중앙간의 네 쪽으로 된 긴 창살문(분합문)을 열면 사당으로 통하는 계단이 이어집니다. 돌층계와 대밭이 어우러진 멋진 길입니다. 작은 부엌에는 쪽문이 달려 있어 바깥마당으로 통하며 바로 밖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 안채의 안사랑에 딸린 작은 부엌의 넉살문(왼쪽의 창호지 붙인 문)은 채광과 통풍을 위한 것이라 합니다. 대청에서 남쪽으로 이어진 안사랑에는 부엌이 한 칸 딸려 있고 우물로 나갈 수 있는 쪽문(오른 쪽)이 나 있습니다. Taken by Spark.



- 안채 뒤켠에서 추사의 영정이 있는 추사 영실로 올라가는 길입니다. Taken by Spark.



- 안채 중문으로 들어서자마자 정면으로 바라보이는 모습입니다.

전통 가옥은 대개 사랑채와 안채가 분리되어 있습니다. 이는 남녀간의 구별을 강조했던 유교 사상에 기인하지요. 추사 고택은 안채와 사랑채간의 분리가 아주 뚜렷한 집입니다. 건물이 아예 분리되어 있고 분리된 건물간의 성격이 아주 대조적이기 때문입니다. 'ㅁ'자로 둘러쳐져 있는 안채는 폐쇄적입니다. 반면 사랑채는 주변에 열려 있어 개방적이며 더불어 그 영역이 주변으로 널리 확대되어 나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 안채 뒤쪽에 있는 돌로 쌓아 만든 굴뚝입니다. 안채와 연결해 땅 속으로 굴뚝의 통로를 만든 지혜가 돋보입니다. Taken by Spark.

곳곳에서 생활의 편의를 위한 세심한 배려를 한 점을 찾을 수 있는데, 이 집을 지을 때 서울에서 경공장(한양에서 나라의 건축을 맡아 하는 목수)을 불러다 했다고 합니다. 비용은 충청도 53개 고을에서 한 칸씩 부조하여 53칸짜리 저택을 지었다고 하니 당시 추사 집안의 권세가 어떠했는가를 시사해 주는 바 큽니다.

기둥마다 붙인 주련(柱聯/기둥이나 벽에 세로로 써서 붙이는 글씨로 기둥(柱)에 시구를 연하여 걸었다는 뜻에서 그렇게 부른다.)은 본래 있었던 것이 아니라 보수하면서 추사의 글씨들을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합니다.

아래의 춘풍대아(春風大雅)는 중국의 등석여의 글씨를 추사가 쓴 유명한 것이다. 29 x 130.5cm x 2. 간송미술관.


봄바람처럼 고운 마음은
만물의 모든 것을 용납하고,
가을 물 같이 맑은 문장은
티끌에 물들지 않는구나.











아래의 대팽두부(大烹豆腐)는 고농에게 적어 준 시구(詩句)인데, 욕심없는 순구한 멋이 한껏 풍기고 협서(夾書)로 쓴 글 내용이 이 글씨의 정신을 더욱 높여 줍니다.

- 金正喜 / 大烹高會·31.9×129.5cm×2 (1856년 작)





최고가는 좋은 반찬은
두부와 오이와 생강과 나물,
최고가는 훌륭한 모임은
부부와 아들, 딸, 손자의 모임이라.




두부와 오이, 생강, 푸성귀 숭숭 썰어 넣고 푸짐하게 끓여서 내외와 아들, 손자, 며느리 둘러앉아 먹으니… 추사 선생은 이 서폭에 협서하기를 "이것은 촌 늙은이의 제일가는 즐거움이다. 비록 허리춤에 말[斗]처럼 큰 황금 인장을 차고 밥상 앞에 시첩이 수백 명 있다 하더라도 능히 이런 맛을 누릴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此爲村夫子 第一樂上樂 雖腰間斗大黃金印 食前方丈侍妾數百 能享有此味者 幾人]"라고 하였습니다.


















Taken by Spark.


Taken by Spark.

조선시대 상류층 가옥에는 일반적으로 사당이 있습니다. 사당에는 보통 4대 선조인 고조부까지의 위패를 모시는데 이는 혼이 완전히 흩어지는데 걸리는 시간 개념과 같은 맥으로 이해할수 있습니다. 비록 몸은 없으나 죽은 조상들의 혼이 남아 있으니 이들이 아직 존재하고 있는 것으로 여겼던 것이지요. 그래서 산 사람이 사는 구조와 유사한 집에 그들을 모셨고 일정기간 그들을 산 사람 대하 듯 했던 것입니다.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조상의 혼령이 대접받았습니다.

사당 앞에서는 매일 아침 문안을 올리고, 음식을 차려 올리며 섬기기도 했지요. 이웃에서 가져온 특별한 음식들도 사당에 먼저 올리기도 했습니다. 집을 떠날 때나 돌아와서는 먼저 사당에 인사를 올리고, 관례 등의 집안 대소사를 사당 앞에서 치르기도 했고요. 가문의 명예에 먹칠을 한 죄를 지은 후손들을 집안 큰 어른 앞에서 치죄 하듯이 사당 앞에서 그 죄를 묻고 다스렸습니다.



- 추사의 영정이 걸려 있는 ㅡ자형 사당입니다. Taken by Spark.



- 우물의 주위를 돌로 원형으로 쌓고, 맨 위의 돌을 우물 정(#) 자로 마감한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 추사 고택에서 추사의 묘소로 가는 길의 중간에 있는 관리 관사인데, 이것 역시 세월의 흔적이 묻어 납니다.

고택 왼쪽에는 추사의 묘소가 있는데, 봉분도 높지 않고 석물 치장도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묘소 앞에는 반송(盤松/옆으로 쭉쭉 뻗는 소나무로, 줄기 밑부분에서 많은 줄기가 갈라져 우산모양으로 자란다.) 한 그루가 운치 있게 드리워져 있어서 눈길을 끌고,  주변은 넓직하게 잔디를 깔았고, 고택 동구 밖의 들판 풍경은 눈을 시원하게 해 줍니다.



- 추사의 소박하고도 정갈한 묘입니다. Taken by Spark.



- 묘소 앞에 서서 그윽한 운치를 자랑하는 반송 한 그루입니다. 뒷산에 올라가 보면 추사 고택 앞에 펼쳐진 예당 평야가 한 눈에 들어옵니다. 평야 저 편으로는 삽교천과 무한천이 만나 아산만으로 빠져나가는 물길이 있습니다.


지상의 소나무는 하늘로 뻗어 가고
하늘의 소나무는 지상으로 뻗어 와서
서로 얼싸안고 하나를 이루는 곳
그윽한 향기 인다 신묘한 소리난다

-박희진의 '지상의 소나무는'에서


소나무의 우리 이름 '솔'은 '으뜸'이라는 뜻이지요. 조선시대에는 특히 소나무를 귀히 여겼던 모양입니다.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나무였으니까요. 왕가의 능 주위에는 반드시 소나무를 심었던 것도 바로 그런 의미에서 였던 것입니다.




- 추사 고택의 지도입니다.


** 찾아 가는 길

* 서울->서해안고속도로->서해대교->송악I·C->국도32호선(신암)->군도5호선(2㎞)->
군도7호선(2㎞)->추사고택  

* 서울->경부고속도로->천안 I.C->국도21호선(35㎞)->예산(신례원)->국도 21·32분기점-> 국도32호선(당진방향 3㎞)->군도5호선(2㎞)->군도7호선(2㎞)

* 천안 I.C - 예산 - 21번국도 - 32번국도(합덕방면) - 고택주유소 - 추사고택



고택 주변에는 볼거리가 풍성합니다. 추사의 옛집에서 2백m쯤 떨어진 곳에는 추사의 증조 할머니가 되는 화순 옹주(영조의 장녀)묘가 있습니다. 무덤에 이르기 전에 있는 집은 그 묘막으로서 열녀문(정려문, 홍문(紅門))이 대문 앞에 있습니다. 추사의 증조부 김한신이 38살로 세상을 뜨자 부인인 화순 옹주는 식음을 전폐하고 굶어 남편의 뒤를 따랐습니다. 화순 옹주는 곱추여서 아버지인 영조의 사랑이 유난히 애틋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영조는 자신의 만류를 무릅쓰고 남편을 따른 딸의 행동을 못내 서운해했습니다. 영조는 화순옹주의 정절을 기리면서도 부왕의 뜻을 저버린 데 대한 아쉬움으로 열녀문을 내리지 않았습니다. 훗날 정조가 내린 이 열녀문은 왕실 사람에게 내린 것으로는 조선 시대를 통틀어 오직 하나 뿐이라고 합니다.



- 추사 선생의 글씨를 새겨 놓았습니다. 아래 부분에 세한도가 보입니다.

고택에서 멀지 않은 추사의 고조부 김흥경의 묘소 앞에는 추사가 아버지를 따라 중국을 다녀오면서 가져와 심은 백송(白松/나무 껍질이 회백색)이 있습니다. 이 백송은 중국의 희귀한 수종으로, 추사(24세 때)가 청나라에 갔던 1809년에 연경에서 돌아올 때 붓대 속에 종자를 숨겨 가지고 와서 고조부 묘소 앞에 심은 것이라 합니다. 천연기념물 제 106호인데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서 인지, 나이가 200살이 채 안 되는 이 백송의 가지는 그리 무성하지 못합니다.



- 소나무 껍질이 벗겨지며 새하얀 속살이 드러나는 백송입니다.

추사 고택에서 등성이 건너편의 앵무봉에 자리잡은 화암사(華巖寺/걸어서 30분 정도 걸린다.)는 추사가 어려서부터 공부하며 지냈던 곳입니다. 화암사에는 추사가 쓴 무량수각(無量壽閣)과 시경루(詩境樓) 현판이 있고, 오석산 암벽에는 소봉래(小逢萊)가 새겨져 있습니다. 법당을 돌아 뒷마당으로 가면 바위면에 예서체의 시경(詩境/추사가 북경에서 선물로 받아온 육방옹(陸放翁)의 글씨를 새겨 놓은 것)과 해서체의 천축고선생댁(天竺古先生宅)이 새겨져 있습니다. '천축고선생댁'의 천축은 부처님이 계시는 곳을 말하고, '고선생'이란 부처를 옛 선생이라 이른 말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부처님이 계시는 집'이라는 뜻인데 불가에의 친근함을 드러내 주며, 추사의 재치가 돋보이는 글이라 하겠습니다.

비운의 지식인이자 뛰어난 예술가였던 추사는 자기 집 현판에 '첫째는 독서요, 둘째는 여자요, 셋째는 술'이라 썼습니다.(^.^) 역시 독서가 그에겐 이 세상 그 무엇보다도 으뜸이었던 것이지요. 추사는 친구 권돈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내 글씨는 아직 말하기 부족함이 있지만 70평생에 벼루는 10개가 밑창이 드러났고, 붓은 일천 자루가 몽당 붓이 되었다네."라고 썼습니다. 나이 70을 넘기고도 책을 찾았고 죽기 3일 전에도 붓을 들었다는 분!

고택의 주련들 중 한 시귀입니다.

천하에 제일 가는 사람은
나라에 충성하고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요,
세상에서 두 가지 큰 일이 있다면
밭갈고 독서하는 일이다.


파란 많았던 추사는 지금, 용궁리 옛집 곁의 포근히 감싸주는 산자락으로 다시 돌아와 누워 있습니다. 추사의 숨결이 그대로 살아 있는 듯이 느껴지는 이 곳, 훗날 다시 찾아와 여유롭게 찬찬히 둘러 봐야 될 것 같습니다. 집안 곳곳에 걸려 있는 주련들과 사랑채에 걸려 있는 국보 180호인 세한도에 대해서는 새로운 지면상에서 글을 써 보려 합니다.

아래의 글은 동행했던 Spark가 Dr. Spark's Columns에 쓴 글입니다.

'휴가는 못 가고, 안면도까지의 드라이빙(추사고택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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