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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성애의 Naver 블로그 "디카로 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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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사지를 다녀와서..^^



1. 답사 여행지를 미륵사지로 정하게 된 이유…^^
아마도 중 1때로 기억한다. 국어책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에서 인용한 미륵사에 다녀온 기행문이 있었다. 그 때 처음 미륵사에 관해 알았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석탑이고 가장 오래된 석탑이라는데 정말 그 모습이 궁금했었다. 그 때부터 미륵사에 가보는 것이 하나의 소원이라면 소원이랄까? 사진으론 많이 봐왔지만 실제로 미륵사지석탑을 보고 싶었다.그러던 차에 문화유산을 답사하라는 과제가 주어졌고,덕분에 나는 정말 가보고 싶었던 미륵사지에 드디어 가보게 되었다. 그리고 문제의 탑도 볼 수 있게 되었다.

2. 가는길…
미륵사에 가는 길은 그렇게 어렵지 않았다. 우선 미륵사에 관한 자료를 모았다.그리고 주위의 여러 사람들에게 물어봐서 익산까지의 교통,여관비(^^ㆀ) 여러가지 현지 사정등을 알았다.그리고 드디어 기차표를 끊는순간 정말 기뻤다.그렇게 원하던 미륵사지석탑을 볼 수 있다는 것이..!!
4월 14일 금요일 아침 10시 드디어 익산행 무궁화호 열차에 올랐다. 정말 오랜만에 타보는 기차가 넘 신기(?)했다.하지만..풍경구경은커녕..아침이라 피곤해서인지 자면서 가버렸다..12시 30분 드디어 익산역에 도착하였다. 익산은 좀 더웠다.그래서 긴팔을 벗고 반팔을 입었는데,거기 사람들은 우리가 보기에도 더운 그런 옷을 입고 있었다.(반팔은 우리밖에 없었다.) 남쪽 사람들은 추위를 많이 타나..? 이건 아니겠지..아마도 따뜻한 고장에 살다보니 더위에 익숙해진게 아닐까? 그리고..또 이곳과 틀린점이 있다면,차들이 정말 느리게 다닌다는 것이다. 버스도 그렇고 승용차,택시 모두 거의 60k/s 이하로 달리는 것 같았다. 사람들 맘이 느긋한 것일까? 덕분에 무단횡단도 쉬웠다.(앗..^^ㆀ) 서울에선 절 대 볼수 없는 풍경이었다.
익산역에서 버스정류장으로 가서 41번 버스를 타고 미륵사로 향했다. 익산 시내를 거쳐서 끝없이 펼쳐진 논을 지나 한참을 가니 미륵사지가 나왔다. 예전 국어책에서 읽었던 여정내용과 똑같았다. 단지 다른 점은..끝없이 펼쳐진 황금들판이 아직 녹색이 덜 밴 논이었던 것을 빼곤..^^가을에 왔다면 정말 멋있었을 것 같았다. 내가 갔을떈…황금들판은커녕..거름냄새밖에 안났다..—ㆀ



3. 미륵사지에 대하여

1) 창건 배경

먼저 정치적인 배경을 들 수 있다.
무왕은 서울의 남쪽 연못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무왕의 탄생지에 대해서는 익산지역의 금마면 서고도리 연동마을에 있는 마룡지(馬龍池)라는 주장이 있다. 당시 익산지역이 왜 서울로 불렸는지는 알 수 없으나 마룡지(馬龍池)에는 서동(薯童:무왕의 어려서 이름)의 어머니가 용과 관계를 맺었다는 전설과 아울러 용샘, 오금산(五金山) 등 서동과 관련된 지명이 많아 탄생지로서 가능성이 충분하다. 여기에서 용(龍)은 백제의 왕인 것으로 생각되며, 전하는 여러 역사책에서 서동이 백제의 왕자로 기록되어 이러한 사실이 확인된다.
익산에서 태어나고 성장하여 왕위에 오른 무왕(武王)이 익산을 중심으로 정책을 실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왕위에 오른 무왕은 즉위 3년(602)에 성왕(聖王, 523∼554년)의 관산성(管山城)의 패전을 설욕하고자 즉위초에 신라를 대대적으로 공격하였으나 아막산성(阿莫山城) 전투에서 대패를 하여 백제 내부에 커다란 위기의식과 혼란을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이 전투의 패배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무왕은 권력강화의 기회로 이용하였으며, 이러한 과정에서 무왕과 관련된 곳이 익산지역에 대한 경영에 박차를 가하였을 것이다.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에 제동을 걸고자 한 것이 무왕이었다. 무왕은 몰락왕족으로서 마를 캐며 살다가 실권귀족들의 정략적 타산에 의해 왕위에 오르게 되었지만 왕이 된 이후에는 왕권을 회복하기 위해 일련의 개혁정책을 추진하였다. 그 과정에서 나온 것이 선화공주(善花公主)와의 결혼을 통한 신라와의 유대강화, 미륵사(彌勒寺)의 창건, 전륜성왕(轉輪聖王)의 자처, 익산으로 천도하기  위한 익산경영 등이었다.
그것의 하나가 미륵사지(彌勒寺址)의 창건이었다.

또 다른 배경은 삼국유사에 나온다.
『삼국유사』 무왕조에는 미륵사지의 창건 연기설화가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어느날 무왕이 부인과 함께 사자사(獅子寺)에 가려고 용화산(龍華山=현재의 미륵산) 밑 큰 못가에 이르니 미륵삼존(彌勒三尊)이 못가운데서 나타나므로 수레를 멈추고 절을 했다.  부인이 왕에게 말하기를 모름지기 여기에 큰 절을 지어주십시오.  그것이 제 소원입니다.  왕이 말을 듣고 이를 허락하였다.  그리고, 곧 지명법사(知命法師)에게 가서 못을 메울 일을 물으니 신비스러운 힘으로 하루밤 사이에 산을 헐고 못을 메워 평지를 만들었다.  여기에 미륵삼존의 상을 만들고 회전(會殿)과 탑(塔)과 낭무(廊 )를 세곳에 세우고 절 이름을 미륵사(彌勒寺)라 했다.  진평왕이 여러 공인들을 보내 그 역사를 돕게 하니 그 절이 지금도 보존되어 있다."

이런 점으로 보아 미륵사의 창건 배경은 무왕과 선화공주의 설화만이 아니라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을 것이다. 즉 백제의 국력을 확장하기 위하여 마한 세력의 중심이었던 이 곳 금마에 미륵사를 세웠을 것이다. 그리고 백제 최대의 가람인 미륵사를 세우는 데에는 당시 백제의 건축과 공예 등 각종 문화적 역량이 최고도로 발휘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신라 진평왕이 백공을 보내 도와주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미륵사의 건축엔 당시 삼국의 기술이 집결되었을 것이다.


2) 미륵사의 가람배치
미륵사의 3탑 3금당(金堂) 3회랑(廻廊) 가람배치는 삼국시대에 다른 예가 없는 특이한 구조이다. 본래 백제의 사찰은 1탑 1금당 식이라고 해서 남북 일직선 축선상에 남문,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으로 이어지고 중문과 강당을 미음자로 잇는 회랑만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런 가람배치는 모두 일곱가지 집으로 구성됐다고 해서 칠당가람이라고 하는데 부여의 군수리 폐사지, 정림사지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고구려의 청암사지,정릉사지가 1탑 3금당 식으로 탑을 중심으로 디귿자로 돌려지고, 신라 황룡사지가 1탑3금당 식으로 탑 뒤로 금당 세 채가 나란히 늘어서는 것과는 달리 간결하고 군더더기가 없는 명쾌한 구도인 것이다.
미륵사는 말이 3탑 3금당이지 실제로는 1탑 1금당의 기본축을 포기하거나 파괴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이 존중했던 간결성의 미학은 그대로 살아있다.다만 여기에 동서로 별원(別院)을 붙여 규모를 확대한 것이다. 서양에서는 이럴 때 날개(Wing)를 달았다는 표현을 쓴다. 그렇게 함으로써 기본축을 존중하면서 장중하고 화려한 멋을 더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우리도 얼마든지 위엄있는 건물, 화려한 건물을 원할 수 있다. 그러나 딱딱하지 않게, 번잡스럽지 않게 그 미적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에 대한 최상의 묘책은 기본축을 지키는 것이라는 사실을 지금 미륵사 마스터플랜이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중심을 잃지 않는다는 말이 여기서도 어울린다. 그 다음, 별원은 본원(本院)과 차별성을 두어야 했다. 어떻게 할 것인가? 규모만 작게해서 차별성을 부여하는 것은 초급자의 발상이다. 백제의 거장들은 이 문제에서 석탑을 고안하게 된 것이다. 중앙 본원에는 높이 60m는 족히될 거대한 목조건축의 탑을 세우고, 동서의 별원에는 그 목조건축을 충실하게 모방한 석탑을 세웠다. 규모를 작게 하는 대신 돌로 쌓은 것이다. 따라서 미륵사지의 석탑은 수만 장의 돌로 짜맞춘 목탑형식이었다. 이것이 미륵사 가람배치의 특징이자 석탑 탄생의 기원이다.
미륵사의 3탑 3금당 3회랑 가람배치는, 미륵이 하생하여 용화3회(龍華三會)의 설법을 한다고 하는 미륵경전(彌勒經典)의 내용을 구상화 해 놓은 것이다.  즉 미륵의 이상세계를 잘 나타내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미륵사지 석탑
드디어 석탑에 대하여 쓰게 되었다. 미륵사지에는 탑이 3개가 있었다. 중앙의 가장 규모가 큰 목탑과 동서에 석탑이 하나씩 있었다. 지금 남아있는 것은 서탑으로 일제시대때 석탑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정말일까?) 콘크리트로 발라 놓은 보기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그리고 맞은 편에 아주 깔끔하게 복원되어 있는 동탑이 있다.

먼저 국보 제 11호 미륵사지석탑이다.(서탑.)

현재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건립시기 서기600년경 추정-국보 제11호) 탑이다. 이 탑의 특징은 중앙에 십자(十字) 모양의 통로가 있고 그 중심에는 단면이 바른 네모꼴의 심주가 있다. 옥개석이 평판상이며 네 모퉁이가 가볍게 치켜들고 있어 백제 건축양식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일제때 보수공사(?)로 발라놓은 시멘트 때문에 을씨년스럽기 까지 하지만 앞으로 돌아가 보면 그야말로 장중하면서도 상큼(?)하게 이루어낸 백제인의 빼어난 솜씨를 자랑한다. 지금은 6층까지 남아있지만 원래는 비례상으로 9층이었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탑이 앉은 자리는 한 변의 길이가 10m 되는 정사각형이고 높이는 남아있는 것만으로도 14.25m에 이르는데, 원래의 크기를 추정하면 상륜부까지 합쳐서 26m 가량되는 거대한 규모였다고 한다. 연못을 메우고 돌과 자갈과 흙을 다져 천년이 넘도록 이만한 규모와 이만한 무게의 탑이 서 있을 수 있도록 조성해낸 백제 사람들의 토목 기술이 요즘의 기술 수준에 비춰보더라도 참으로 놀랍다. 더구나 이 탑은 부재를 하나하나 따로 만들어 맞춰 세운 것으로, 바닥의 어느 부분이 조금이라도 어르러지면 곧 균형을 잃고 무너지게 되어 있는 것이다.
미륵사지 탑을 보고…탑이 불쌍하단 생각이 들었다. 말이 보수 공사이지..이건 우리나라의 귀한 문화재를 훼손한 것이 아닌가..!! 멀리 서 보면 탑의 성한 부분 보다 무시무시한 콘크리트 벽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금당지 쪽에서 보면 반은 탑이고 반은 시멘트벽인데 정말 모양이..기괴하다고 해야 하나..? 어느 초등학교교사가 학생들을 데리고 미륵사지석탑을 견학하는데 한 학생이 탑이 왜이렇게 생겼냐고 물어보자 “앞은 우리나라 탑 모양이고 뒤는 이집트의 피라미드 모양을 본 따서 이런것이라고 설명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이게 말이 되나..?) 얼마나 우리 문화재에 대한 사랑과 관심이 없었으면 이런 설명이 나왔을까? 미륵사 탑을 지금와서 콘크리트 부분을 부수고 다시 복원할 수도 없고… 우리 나라가 좀 더 일찍 우리 문화재에 대해 관심을 기울이고,미륵사지 석탑이 우리나라의 손에 의해서 복원이 되었다면 (물론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가 아닌..)더욱 좋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또 미륵사지 석탑을 보고 가슴아픈 점이 있다면, 석탑아래쪽에 창문같이 사람이 들어갈 공간이 있었는데, 그곳을 쇠창살을 박아 막아놓았다는 것이다.물론 사람들이 다칠까봐 그런 점은 이해가 가지만, 안그래도 콘크리트에 눌려 불쌍한 석탑에 쇠창살까지 박아야 했나 안타까웠다. 만일 그때 백제의 석공이 살아 나온다면 이런 석탑의 모습에 분노를 금하지 못할 것이다. 여기서 또 웃긴 일이 있었는데..그날 할머니 할아버지들께서 효도관광을 오셨었다.근데 그 쇠창살을 보고 모두들 “여기가 옛날에 일제시대때 감옥이었다는구만~”하시는 것이다..(웃겨 죽는줄 알았다..^^ㆀ)

둘째로, 동쪽에 있는 복원탑이다.

미륵사터에서의 그 생경함 탓에 제일 먼저 눈에 튀어 들어오는 것은 1993년에 18억원이나 투입해 복원한 동석탑이다.(오~18억원이나!!) 그 덕에 자칫하면 그냥 지나치기도 쉬운 미륵사터를 찾는데는 얼마간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남아있는 서석탑과 발굴 조사때 발견된 상륜부 노반을 토대로 컴퓨터로 엄밀히 계산하여 복원해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끼 낀 세월의 흔적 같은 것이 없어서 그런지 서탑처럼 깊은 역사의 숨결이나 무게를 느끼기는 어렵다. 동쪽에 탑이 있었다는 고증을 바탕으로 두 탑이 동서로 100여m의 거리를 두고 마주 서 있는데 탑신부가 20m,상륜부가 7m로, 아래로 한변이 10.25m의 정방형의 기단 위에 서 있다. 중앙에 서서 동탑과 서탑을 번갈아 보면 서탑의 원래 모습이 동탑과 같으리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나라 다른 시대의 석탑같았다.아마도 그것은 1,300년 만큼의 비바람과 햇볕과 이끼 속에 버티면서, 우리나라의 역사를 묵묵히 지켜봐왔던 서탑의 역사의 무게가 아직은 그저 돌일 뿐인 동탑에는 실리지 않아서일까..? 그것 보다는 돌 하나하나,다듬는 손길 하나하나에 종교적 기원과 부처에 대한 공양을 했던 서탑과 달리 계산에 따라 기계로 돌을 두부 자르듯 잘라 맞춘 동탑은 정성부터가 틀려서가 아닐까 생각된다.

4) 석인상

미륵사탑 네 귀퉁이에는 석인상이 모두 네 분이 모셔져 있었다. 그런데 한 분은 없어졌고 두분은 마모됐고 오직 동남쪽 모퉁이 석인상만이 오롯이 남아 있다. 그나마도 얼굴의 형체는 비바람에 거의 분간되지 않으나 아담하고 공손한 느낌을 주는 몸덩어리와 가슴 앞에 모은 두 손으로 1,300년전에 부여받은 자신의 소임을 지금까지 충직하게 지키고 있는 듯 하다. 이 석인상은 장승의 원조로 볼 수 있다. 훗날 경주 분황사나 다보탑에서 보이듯 석탑의 둘레에는 네 마리 사자를 모시는 것이 불교미술의 원리인데 불교가 아직 토속 신앙을 흡수해가던 단계에서는 민간의 수호신앙을 그렇게 끌어 들였던 것이다. 이런 점에서 석인상은 우리민족 불교의 “흡합(吸合)현상”을 잘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5) 석등 받침

팔각 연화좌대의 맵시있는 귀꽃은 백제미술에서만 보이는 간결한 세련미를 보여주고 있으며 현재까지 알려진 가장 오래된 석등으로서 부드럽고 온유한 연꽃 받침은 언뜻 눈에 띄지 않는 미륵사터의 숨은 보물이다.

6) 당간지주-보물 제 236호

내가 앉아있는 바로 뒤에 기둥 같은 것이 사실은 당간지주이다. 굉장히 커보이지만,실제로 보면 정말 작다…사람키보다 조금 큰정도..?


미륵사지 남쪽에 있는 2개의 당간지주의 거리는 88.3m이다. 당간지주란 전에서 불문을 나타내는 문표, 그리고 불교 종풍을 드러내는 종파의 기와 같은 역할을 하였던 당을 걸었던 깃대의 지주를 말한다. 일반적으로 절 문 앞에 한기가 있지만 삼원일가람형식의 미륵사터에는 동서 두 석탑에서 남쪽으로 각각 64m되는 곳에 한 기씩, 두기가 있다. 당간지주간의 거리의 차로 미루었을 때 미륵사의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동.서 당간지주가 위치한 지점은 동.서탑이 위치한 것보다는 절터의 중심쪽으로 가깝게 자리하고 있어 하나의 가람배치 계획 속에서 조영된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당간지주의 모양을 보면, 높이가 모두 3.95m이고 양식과 구성 수법도 같다. 장대석을 맞추어 만든 기단의 네 면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다. 지주의 양쪽 바깥면에는 둘레를 따라 테두리 선을 도드라지게 하였고 가운데에도 한 줄의 선을 돋을새김 하였다. 지주 꼭대기 부분은 바깥쪽 각이 둥그스름하게 깎여 마무리되어 있기 때문에, 아래에서 보면 지주의 윗부분이 좁고 아래가 넓은 듯 보이지만 실제로는 폭의 차이가 별로 없다. 이 당간지주는 조형미가 아름다우며 김제 금산사의 당간지주와 비슷한 형태를 지니며, 양식 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중기 이후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7) 금당지
금당지는 중앙과 동서 양쪽의 금당지가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미륵사 창건에 얽힌 이야기를 보면 용화산(미륵산) 아래 큰 못이 있었고 그 못을 메우고 절을 지었다고 한다. 발굴 결과 절터 아래가 뻘흙이었고 층층이 돌고 흙을 아주 꼼꼼히 다졌으며 금당을 세울 때에도 땅과 금당마루 사이에 공간을 두어 습기를 예방하고 통풍이 잘 되도록 지었다고 한다.
세 금당은 모두 정면 칸,측면 칸으로 칸수는 같지만 중금당이 가장 크다.
조사 결과 동금당에서는 금동제 장식과 납유리가 출토되었는데,세 금당 가운데 가장 먼저 소실되었다. 서금당에서는 토제 나발(螺髮)과 문명기와와, 그것과 같은 시대에 만들어진 많은 수량의 암.수막새가 출토되어, 고려말까지 절이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암막새
수막새
문명기와
금동제판불
*****암막새, 수막새, 문명기와, 금동제판불******

8) 배수로

배수로는 미륵사터가 예전에 연못이었고, 미륵사가 연못을 메워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증명해주는 귀중한 자료로 남아있다..실제로, 미륵사 주변으로 배수로가 둘러져있으며, 미륵사는 매우 발달된 배수시설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4. 미륵사지를 다녀와서….(나의 소감)

미륵사지를 처음 갔을때의 나의 느낌은..`어 이게 아닌데…?’였다. 뭐랄까…내가 기대한 미륵사지는…한참을 산을 올라가야만 있을 것 같은 그런 이미지였고, 남아있는 것은 반은 허물어진 탑 뿐이라고 생각했었는데..막상 가보니, 정말 미륵사는 크고 넓은 절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고 할까..? 보존도 잘 되어 있었고, 동쪽엔 복원탑까지 서 있었다. <삼국유사>에 미륵사 창건 설화가 있다. 거기에 사자사라는 것이 나오는데,가서 보니 미륵사에서 멀지 않은 곳에 사자사가 있었다.
정말 역사라는 것은 세월이 지나도 속일수 없고, 존재한다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전설로만 알고 있던 미륵사와 사자사가 실제 존재한다는 것은 <삼국유사>가 실증적이라는 것을 뒷받침해 준다. 그렇다면 삼국유사에 실린 단군의 이야기나 삼국의 건국이야기 또한 말짱한 거짓은 아니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기분이 좋았다. 우리나라엔 고대에 관한 역사서가 별로 많지 않은데, <삼국유사>가 “잘”쓰여진 역사서라는 것에 기분이 좋아졌다.
미륵사 터를 한바퀴 돌아보고, 가장 눈에 띄는 서쪽탑 앞에 서 보았다.멀리 서 보는것과 달리 가까이서 보니 참 부드러운 인상의 탑이란 생각이 들었다. 부드러운 인상이란..뭐랄까..? 모진 세월을 겪어 오면서 달관의 자세를 익힌 노인처럼, 당당하게 서 있었다.단지 정말 아쉬운 점은…왜 우리나라의 귀중한 유산이 저렇게 아픈 모습을 하고 서 있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정말 귀중하게 생각 했다면, 저렇게 해놓지는 않았을 거란 생각이 든다.
미륵사는 무왕의 익산 천도 계획의 일부였다고 한다. 아마도 무왕이 당시의 민심을 익산으로 모으려는 의도가 아니었을까?? 미륵신앙에는 미륵 상생신앙과 미륵 하생신앙이 있다고 한다. 미륵 상생신앙은 살아서 열심히 도를 닦으면 도솔천으로 간다는 것으로 귀족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반면에 미륵 하생신앙은 먼 미래에 미륵불이 내려와 용화 3회의 설법을 한다는 것으로 서민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 미륵사의 3금당 가람 배치는 이런 미륵 하생신앙에 기초하고 있다. 당시 귀족들의 힘이 강한 부여에서 이런 하생신앙을 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제 2의 수도로 꿈꿔온 익산에 이런 절을 세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까지 황룡사터나 다른 많은 절들을 가봤지만, 이번 만큼 많은 것을 알고 온 적은 없었다. 물론 미리 조사를 하고 간 덕도 있었겠지만… 이번 여행이 나에겐 우리 역사를 좀 더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우리 문화재를 보더라도 겉 표면만 보는 것이 아니라 숨겨진 진실을 찾아내는 것..그것이 문화유산 답사의 참된 의미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나의 문화재를 보는 눈이 한 층 더 높아졌다고 해야하나?(^^) 정말 뜻깊고, 즐거운 답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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