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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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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 제목 : 떠나는 순서가 바뀌었지만... / 박순백 - 2001-07-27 10:32:43  조회 : 2007 聆求?

"내 삶, 나의 컴퓨터"란에 올렸던, 1989년(December 7, 1989)에 쓴 지연이에 관한 글.
그 시절이 그립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박순백(Spark)
December 7, 1989

아직 죽음은커녕
삶도 모르는 애에게
죽음을 얘기한다
남은 태반이 삶인
국민학생에게
다살고 나서의 얘길 한다
이해할 리 없고
이해 못하리라 믿으면서도
가끔 얘기한다
나조차 아직
죽음이 뭔지 모른다
단지 내가 사는 과정에서
알아낸 죽음에 관한 얘길 한다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진짜로 사는 것임을 알았기에
국교생 딸에게 주는 책에
죽은 후의 우리의 만남에 대해
심각한 마음으로 쓴다
아빠 죽은 후 이 글을 보면
아빠와 살던 시절을 기억하리란
조금은 슬픔 섞인 말을
조금은 희망적인 얘길 쓴다
언젠가 네가 크다가
그걸 보겠지
그게 무슨 말인지 몰라
받은 책에 쓰인 글을 읽고
단지 날 올려 보며
살며시 웃던 네 모습을 기억한다
그걸 이해 못한 자신을 깨달으며
아빠에 대한 미안함으로 웃던...
미안할 것 하나 없다
미래를 사는 네게 쓴 것이지
지금의 네게 쓴 게 아니다
크면서 괜한 슬픔으로
그걸 읽겠지
그걸 읽으며
조금 아빠의 말을 알게 되겠지
그 땐 아빠가 살아있을테니
함께 얘기하자 그 때 설명해 주지
정말 내가 죽고
네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서재를 청소하다
아빠의 책을 보고
죽은 아빠의 책을 보고
그걸 들추다
내 몇 줄의 글을 발견하리라
내 아이니 그걸 보고 울리라
난 떨어지는 네 눈물 속에
살아 반짝 빛나리라
그리고 그 뒤로는 영원히
"살아남은 나"인 "너"의 맘속에
죽은 내가 살아
함께 하리라
그 게 아빠의 욕심이지
일주일이 한 패킷으로
한 달이 몇 개의 블록으로
가던 때도 있었는데
이번 주에는
일주일 같은 하루를
억지로 세 번 보내 이제 목요일
진눈깨비를 맞으며 걸어와
글자판을 두드린다
손가락 끝에서
내 삶이 정리되고 있다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

Spark, December 7, 1989

가끔 내가 죽은 후를 생각해 볼 때가 있다.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고 생각된다. 어
릴 때는 무작정 죽음이 두려웠지만 이제는 막연한 두려움보다는 '이 삶을 어떻게 잘 마무리
할 수 있을까, 혹은 잘 마무리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나?'하는 보다 실제적인(?) 두려움에 잠
기게 된다. 죽음의 미학이란 말의 의미를 이제 조금씩 알아 가고 있는 것이다.
아이들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문득 그 아이들이 엄청나게 커졌다는 것을 깨달으면
서 그로부터 내가 늙음을 느끼게 된다. 아이들이 생기고 나서부터는 이제 내 자신의 삶을
사는 것이라기보다는 그들을 위해 산다는 느낌이 더 많이 들곤 한다. 나의 생명이 나로부터
나를 빼어 닮은 그들에게로 옮겨진 것이라는 신비감에 사로잡힐 때가 많다. 특히 날 닮은
딸에 대한 아비로서의 나의 감정은 특별하다. 아들 녀석에 대한 우정 같은 것을 느낄 때도
있지만 그보다는 날 닮은 딸에 대한 사랑의 깊이가 훨씬 깊다는 것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물론 그같은 사랑은 그 놈이 큰놈이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철모르는(?) 아빠, 엄마와 함께
고생하면서 큰 녀석이기 때문에 그런 것 같기도 하다.
이 아이와 언젠가 헤어진다는 것이 내게는 무척이나 가슴아프다. 분명 언젠가 우린
헤어진다. 그런 심정을 가끔 그 아이에게 얘기하고 싶어지나 국민학교 3년생인 그녀가 그
마음을 이해해 줄 리 없다. 아직 그 애는 죽음은커녕 삶이 뭔지도 모른다. 몇 년 살아보지
못한 아이가 아닌가? 그 앤 이 세상에 온지 겨우 10년도 채 못되는 짧은 생을 경험하고 있
을뿐이다. 물론 삶에 대해서는 그보다 네 배 가량 살아본 나도 크게 할 말이 없다. 하지만
살아온 세월만큼 죽음에 대해 이해할 수 있으니, 어쩌면 삶보다도 훨씬 더 중요한 죽음에
대하여 그 아이에게 말하고 싶은 것인지 모른다.
컴퓨터에 대한 여섯권째의 책을 낸 날이다. 내 아이는 아빠가 책을 내면 무척이나
좋아한다. 그 아인 아직 아빠가 쓴 책을 이해할 만큼 크지 못했다. 책이라는 것이 뭣인지도
잘 모르면서 단지 그 책 앞에 아빠의 이름이 적힌 것을 보면 즐겁고, 자랑스럽다고 한다. 참
으로 고마운 말이다. 책이 나올 때마다 그 안에 몇 마디의 말을 함께 적어 주곤 했다. 주책
맞은 이 아빠는 새로 나온 책갈피에 -- 지금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 "지연인 아빠
의 책받는 걸 좋아해서 아빤 책이 나오면 네 생각부터 한다. 이 책은 이 담에 아빠가 죽고
나면, 아빠와 함께 살던 때를 기억나게 해주겠지. 열심히 살아라"라고 적은 종이를 풀로 붙
여 주었다.
조금은 슬프지만 꼭 슬픈 것만은 아닌, 아니 그보다는 훨씬 희망적인 얘길 쓴 것이
다. 그 걸 읽어본 아이가 날 올려다보며 약간 어색하게 살며시 웃었다. 뭔지 모를 언어들에
대한 의아함, 아니 아는 언어임에도 의미가 와 닿지 않는 그 언어들을 보면서 내게 미안해
하는 모습이었다. 물론 그 말들은 어린아이가 이해하기에는 너무나도 어려운 것이리라. 고등
학교에 다닐 정도만 해도 그 걸 이해하게 될 것이다. 그 땐 아마도 내가 죽기 전일 것이니
그 때 기회가 되면 얘길해 보련다.
정말 내가 죽어 이 세상에 없고, 그녀가 내 정도의 나이가 되었을 때 그 책갈피에
적힌 내 글을 다시 보았을 때 그 앤 슬퍼할 것이다. 나로부터 삶을 받아 태어난 아이이니,
그리고 나와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추억을 돌이키며 슬픔을 느낄 것이다. 하지만 그 애가
내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니 꼭 슬퍼할 것만은 아니다. 난 그 애의 마음속에 살아 있는
것이니... 난 아빠로서 그런 욕심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어떤 때는 세월이 어찌나 빨리 가는지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일주일이 하루
처럼 뭉터기로 지나는 느낌도 있었고, 한 달도 그렇게 지나곤 했다. 그런데 이번 주는 하루
를 보내기도 어찌나 힘이 들었는지 몇 달이나 산 것처럼 사흘을 보내고 이제 겨우(?) 목요
일이다. 사는 것이 힘들다고 느껴질 때 난 글을 쓴다. 내 삶은 손끝에서 조금씩 정리되어 간
다. 키보드를 두드릴 때마다 내가 살아온 역정들이 하나씩 정리되고, 난 그로부터 홀가분해
지는 것이다. 삶이 짐으로 여겨질 때나, 삶의 환희가 나를 감싸게 되면, 특히 겨울로 가는
길목, 늦가을이면 난 뒤를 돌아보기도 하고, 현재와 다가올 많은 날들을 미리 살아보는 것이
다.

--------

- 아래는 엠팔 게시판의 ticoco(박진희/찌니) 양이 언젠가 한 번 읽었던 글을 다시 읽고 싶
다고 하여, "겨울로 가는 길목에서"를 전송해 주고 나서 PS로 붙인 글.

어땠어?(Hi) 모든 아빠들은 다 딸을 더 사랑하게 되어 있다고...... 왠지 모르게 성(sex)이 다
른 아이를 내가 낳을 수 있다는 사실이 신비스러운데 그 걸 글로 표현키는 아주 어려워서
못하고...... 하여간 아들에게 느끼는 정과는 다른 그런 사랑을 딸에게는 느끼게 되지. 오죽하
면 그 애와 헤어질 날을 벌써 고민했겠나?
하여간 그 해(1989) 가을은 참 견디기 힘든 날들이었고, 그 초겨울(난 초겨울 남자)엔 더했
었지. 그 때 쓴 위의 글. 그 게 어떤 책에 끼여들어 가리라곤 생각을 했었지만 그 책의 제목
이 "내 삶, 나의 컴퓨터"가 되리라곤 생각지 못하고 있었지.
이제 내 딸 아이. 지연이는 분명 내가 죽은 어느 날, 문득 오래 전에 죽은 아빠를 생각하면
서 그 시집을 책장에서 꺼낼 테고 눈물을 흘릴 거라고...... 그 아일 울리려고 벌써부터 작정을
한 거니까.(Hi) 이 못된 아빠는 말이야. 어제 그 책을 지연이에게 주었지. 벌써 그 글의 의
미를 조금 더 많이 이해하고 있었어. 중학생이 되면 더욱 더...... 감수성 예민한 고등학생이
되면 더 그럴 거야. 그리고 찌니 같은 대학생이 되면, 결혼하고 아이 엄마가 되면, 그리고
나처럼 나이가 들어 그 어린아이에게 그녀와 같은 나이의 아빠가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해서
생각해 보겠지. 그리고 더 나아가 지금의 나보다도 더 나이가 들어서 자신보다 어린 나이였
던 아빠가 그 오래 전의 자기에게 하고 싶었던 말에 대해서 그 어린(?) 아빠의 마음을 더
나이 든 여자로서 생각해 볼 거라고......
난 내 큰형을 가끔 생각하곤 하지. 내가 국교 6년이었을 때 죽은 고 3이었던 형. 아직도 내
마음속엔 형으로 남아 있지만, 실은 그는 겨우(?) 고등학교 3학년의 모습 이상으로 크지 못
하고 있다구. 그래도 나에게 그가 주었던 모든 사랑, 미움, 그리고 삶의 편린들이 아직도 진
하게 내 맘에 남아 날 울리는 때가 있단 말이야. 살붙이로 함께 태어난 형제에게서 느끼는
것이 그토록 진한데 내 생명을 받아 이 세상에 나온 아이와 나와의 관계는 그 것 이상이 아
니겠나?
- 하여간 오늘은 이상하게 그런 생각을 많이 하게 되는 Spark
199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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