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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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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8) 제목 : 연(緣)에 대한 몇 마디의 말. / 박순백 - 2002-03-05 15:53:59  조회 : 2994 

연(緣)에 대한 몇 마디의 말.

지연(智娟)이에 대한 제 글을 읽고 이런 구절이 담긴 편지를 보내 온 분이 있습니다.

"이런 놓치지 못할 사람들은,
평생 마음에 지녀야 한다는 생각."

이런 표현의 의미를 제가 잘 파악하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따뜻한 말씀에서 큰 위안이 느껴집니다. 그래서 기쁩니다.

그렇지요. 세상엔 인연이란 게 있습니다. 전엔 제 딸아이와 저의 관계를 굳이 인연이라고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부녀는 인연이란 흔한 단어로 표현할 필요도 없는, 그보다 훨씬 진한 그런 연(connection)으로만, 더 귀한 의미로만 묶여질 수 있고, 또 이미 그렇게 묶인 것이라고 생각했으니까요.

그런데 아이를 잃고 나니 '아, 그 애와 나의 인연은 겨우 20년에 지나지 않았구나. 짧다면 짧은 그 세월.'하는 생각.

그리고 그 애의 동생, 살아남은(?) 그 놈을 보면서 '이 녀석이 그래도 지연이보다는 우리와 더 긴 인연으로 묶인 녀석이구나.'하는 또 다른 생각.

이렇게, 전 인연이란 천한(?) 표현 이상의 고차원적인 관계라고만 생각했던 그런 연(緣)도 그처럼 허망하게 끊길 수 있다는 걸 알고, 인간의 유한함과 인생의 허무함과 피조물의 보잘것없음에 망연자실했던 겁니다. 이미 오래 전에 그런 유치한 생각에서는 졸업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직도 그 애와 했던 얘기 하나가 마음 한 구석에 지켜지지 못할 약속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경희대에 있던 시절 저는 총장님과 많은 해외여행을 했습니다. 공무로 나가는 것이니 식구들과 함께 가 아니라, 혼자 해외에 나가는 일이 너무 많았었지요. 특히 아이들이 한참 크던 시절에 무려 15년간이나 여름방학, 겨울방학이 되면 전 총장님과 해외에 나가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그동안의 여름은 아이들과 휴가조차 변변히 가지 못 했습니다. 그런 미안함에서 집사람과 지연이와 현근이 세 식구에게 많은 해외 여행의 기회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그 여행들은 항상 제가 빠진 여행이었습니다. 심지어는 처가집에 가는 해외여행마저도... 여행의 경험이 많은 제가 함께 갔다면 그들이 얼마나 편하고도 안심되는 여행을 했을까요?

지연이가 부모인 우리를 앞서 떠나기 겨우 사흘전, 저는 그 애와 둘이서 멀리 드라이빙을 했습니다. 영종도 신공항에 가서 아침을 먹고, 페리에 차를 싣고 영종도 부근의 세 섬을 돌고 왔습니다. 공항에서 아침을 먹으며 "아빠가 그간 바빠서 너희들과 해외에 가지 못 했으니 올핸 꼭 함께 가마. 엄마가 올핸 바쁜 일이 있다고 하는데 엄마가 끝내 안 된다면 내 너만이라도 데리고 가마. 어딜 갈래?" 이런 물음에 "미국에 못 가 봤으니 미국에 가야지."하고 지연이가 대답했습니다. 미국엔 이모가 살고 있는데도 거기만 못 갔었지요. 아프리카를 제외한 다른 대륙들을 거의 다 다녀 본 앤데도, 오히려 남들이 제일 많이 가는 미국엘 못 가 본 겁니다. "그래 미국에 가자. 유니버셜 스튜디오의 워터 월드 쇼를 보러 가자. 그게 영화는 엉망인데 쇼는 그게 최고지. 그걸 네게 보여주고 싶었다. 아직 그 영화도 안 봤다고 했지? 그래서 내가 그 비디오까지 집에 사 놓은 거니까 여행가기 전에 그 영화를 꼭 봐둬라. 테마 파크에 갈 땐 관련 영화를 봐야 그 쇼가 이해되거든... 거기도 가고, 라스 베가스도 가자. 아빤 거기 갈 때마다 네게도 거기 구경을 시켜줘야겠다고 생각했는데... 이번 여름에 꼭 가자."

"그래요."라고 희망에 차 답하던 지연이.

지킬 수 있었던 약속. 꼭 지키려고 했던 약속. 하지만 이젠 영원히 지켜질 수 없는 그 약속에 가끔 가슴이 아파 옵니다. 좋은 아빠가 될 수 있었는데... 우리의 인연이 겨우 거기까지 였다니... 인연 이상의 그 어떤 끊어질 수 없는, 불가침의 연이라 생각하던 것이었는데, 그것도 제 생각의 범위에는 없던 "그 애의 죽음" 앞에서는 허망한 것에 지나지 않았던 겁니다.

오히려 그런 아픈 기억이 이젠 어떤 작은 인연이라도 더 소중히 해야 한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합니다. 친절한 분들의 따뜻한 글로 위안을 받고, 답장을 하며 이게 그 작은 인연의 영원한 시작이 될 것임을 생각하게 됩니다.

가족의 일원이 다른 가족들을 두고 먼저 떠나는 것은 반칙입니다. 결코 어겨서는 안 되는 것을 어긴, 그런 심한 반칙입니다. 착하고 여린 그 애가 설마 그런 반칙을 할 줄이야 몰랐지만, 그러고 싶어 그런 게 아니란 생각에 더 가슴이 아프지요. 다시 만날 것을 믿어야 하는데, 혹시 이 한 번의 생이 저라는 존재에게 주어진 유일한 것이 아닌가하는 그런 회의가 들기도 합니다.(자꾸 듭니다.) 떠나 보내기 전, 그 애의 마지막 모습이 내가 그 애와 함께 숨쉬며, 말할 수 있었던 마지막의 기회가 아니었던가 하는 그런 불안감이 제 가슴속에 존재합니다. 부디 한 번 더 그 애와 얘기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켜지지 못한 약속들이 지켜질 수 있는 그런 기회가 다시 한 번 제게 주어져야만 합니다.

그 애가 없이 보낸 우리 가족의 계절, 겨울을 처음으로 맞는 게 정말 두려웠는데, 이제 저나 집사람이나 01-02 시즌의 스킹을 접었으니 그 계절을 무사히 보낸 겁니다. 적어도 바깥으로 보이기에는...

다시 봄을 맞아 아름다운 꽃들을 보면 그걸 함께 볼 내 아이 하나가 없다는 게 서럽긴 하겠지만, 그래도 열심히 살아야죠. 잠깐이면 지날 인생인데... 그 앤 조금 먼저 갔을 뿐인데... 제가 살면서 '다시 만날 것이다.'란 확신을 가지게 되길 빌 뿐입니다. 막상 제가 이 생을 떠난 후에 그게 다른 만남의 시작이 아니라 제 존재의 영원한 끝이라 할지라도 전 지금 살아있는 동안엔 그런 확신을 가져야만 합니다. 그런 믿음만이 절 살게 할 테니까요.

짧게 쓰려던 것인데, 아직도 가끔, 마음속 깊은 곳의 아픔이 샘물처럼 조금씩 흘러나오다 오늘처럼 분출되기도 합니다. 이런 아픔의 샘물을 흔히 눈물이라지요. 그런 눈물이 없다면 속이 까맣게 타고 말겠지요. 이미 까맣게 타버렸을 듯한 가슴속에 그런 눈물이 존재하고 있기에 살 수 있는지도 모릅니다.

"이런 놓치지 못할 사람들은,
평생 마음에 지녀야 한다는 생각."

그 몇 마디의 말이, 제게 이런 글을 쓰게 한 것입니다. 일부는 털어놨었고, 일부는 털어놓지 못 해 가슴속에 담아 뒀던 얘기들... 지연이로 인해 새로운 작은 인연이 마련된 분들을 제가 살아 생전에 어디서라도 꼭 만나 뵙게 되길 빕니다. 그리고 위안을 주신 것에 대해 깊이 감사할 기회가 있기를 바랍니다. 그 땐 이렇게 털어놓아 더 깊은 곳으로 침잠한 슬픔들을 짐짓 잊은양, 즐거운 얘기만 하게 되기를...

그리고 제가 이 세상을 먼저 살아온 경우라면 제게 위로를 주신 분들을 위한 먼발치의 등불 노릇이라도 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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