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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와 함께 파주 화석정에 간 지연이
2001.07.11 19:22

집터가 안 좋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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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4) 제목 : 집터가 안 좋아서? / 박순백 - 2001-07-11 19:22:26  조회 : 2367 틈求?

집터가 안 좋아서???

불행한 일이 생기면 사람들은
집터에 그 핑계를 돌린다.

연이 엄만 천호동 집에 대해
작으나마 불만이 있었다.
터가 안 좋은 집이란 거다.
15년 넘겨 산 이문동 집에 대해선
좋은 감정을 가졌었는데...

새 집에 이사와선 좋은 일이 없었다며
뜬금 없이 집터 타령을 하곤 했다.
천호동으로 이사 온 후에
IMF의 와중에서 한컴이 부도 직전까지 갔고,
임원으로서 은행 빚 보증을 섰던
난 난감한 지경에 이르렀었다.
작은애가 인라인 하키로 무리한 게,
돌발성 난청에 이르러 버렸다.
군에도 못 갈 지경이라니 큰 불행이다.

큰애가 여고 3년생이니 이사를 가더라도
더 있다 가잔 얘기도 했었다.
하지만 나나, 지연이나, 현근이나
모두 천호동으로 가는 걸 좋아했다.

아버님이 아주 오래 사셨던 천호동 집.
나도 대학원 시절까지는 거기서 컸다.
지금 사는 아파트는 거의 모두
아버님의 땅이었던 곳에 세워진 거다.
우리의 아파트는 원래 우리 살던 집터,
바로 그 위에 세워진 것.
딱히 우리 집 있던 곳 위의 18층집,
그걸 아버님이 내게 주셨다.

고3이었던 형이 스케이트장 사고로 죽은 후,
전에 살던 집을 떠나 이사한 곳.
그 집터에서 좋은 일만 많았기에
그 터에서 장남이 살아야 한다고 하셨다.
나도 어린 시절에 살던 곳이 좋았고,
그런 아버님 말씀을 따르는 게 도리라 믿었다.

졸지에 지연이가 우리 곁을 떠나니
뒤늦게 집터 얘기에 귀 안 기울인 게 후회됐다.
'집터 때문이었나?'
보통 때면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했다.
그것도 아주 심각하게...
집사람의 말을 안 들은 걸 후회했다.

연이의 일을 겪자 연이 엄만 이사를 가자 했다.
아버님도 형님을 잃으시고,
전에 살던 집을 떠나셨는데...
그런 참혹한 일을 겪은 이들은
추억이 많은 집을 떠나 이사를 간댄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난 이사 정도가 아니라 이민을 가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님에 대한 도리로 그럴 순 없었다.
좋은 뜻으로 주신 집인데,
그렇게 생각하면 죄악이다.
하지만 연이가 간 게 얼마전이라
집안의 모든 게 연이를 연상케 한다.
무얼 보나 연이를 생각나게 하는 것들.
그걸 잊으려면 떠나는 게 나은 지도...

연이 엄만 아직 밤이 되는 걸 싫어한다.
연이 쓰던 방에선 항상 목사님의 말씀이...
할머니가 어릴 때 주신 간이 오디오 대신
난 대학생 딸을 위해 좋은 오디오를 줬었다.
야마하 앰프 세트, 티액 카세트, B&W 스피커.
그것은 연이가 간 후 지난주까지
계속 목사님의 설교와 찬송가를 울려 줬다.

연이 쓰던 방에 안 가려는 집사람 때문에
컴퓨터들을 모두 그 방으로 옮겼다.
어쩔 수 없이 거길 가도록 만들었다.
우린 그 방의 물건들을 정리하지 않았다.
언젠가는 정리해야겠지.
하지만, 아직은 못 하고 있다.
연이 쓰던 물건을 버리고 싶지 않다.

어쩌다 서랍이나 책꽂이에서 발견되는
연이 사진이나 추억 깃든 물건을 보면
우린 또 한동안 멍해지고 말면서도...

연이도 오고자 했던 천호동 집이다.
불행을 집터에 돌리는 건 미신이라 믿고,
연로하신 부모님 계신 동안이라도
눌러 살자고 다짐한다.

연이가 좋아했던 집이다.걔가 떠난 건 나쁜 집터 때문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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