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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상
2019.02.13 10:34

음식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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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 수 611 추천 수 4 댓글 5

퇴근해 집에 오니 아내가 김치찌개를 끓여 놓았다.  막상 저녁을 먹으려 보니 찌개에 남은 건 김치와 국물 뿐.  육식을 선호하지 않고 오히려 채식을 좋아하는 편이지만, 단백질은 꼬박 챙기려 하기에 난감한 상황이었다.  두부도 다 떨어졌고, 그나마 있는 계란, 새우, 페페로니, 베이컨 등등은 잘 어울리지도 않고 별로 당기지도 않아서 떨떠름하게 냉장고와 냉동고를 번갈아가며 여닫는 중, 마침 냉동굴 봉지를 발견했다.  결국 뚝딱 만들어 먹은 굴밥.  참기름 둘러 달군 팬에 냉동 상태 그대로 굴 투하후 잠시 후 김치와 찬밥, 그리고 들기름을 섞어 볶아준 후 불을 끄고 김조각으로 마무리.  보너스로 어제 만들어 둔 도라지 무침과 곤드레 나물을 약간 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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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와 아이들은 이미 저녁 식사를 마쳤기에 혼자 묵묵히 한 술 들다가 문득 처음 굴밥을 먹은 포항의 한 식당이 떠올랐다.  91년이나 92년 쯤이었을까. 죽도시장께 있던 중간 규모의 굴밥 전문식당에서 처음 접했고, 아마 포항을 떠난 94년 이후로 다른 곳에서는 먹어본 기억이 없다.  이렇게 가끔 직접 해먹는 것 이외에는. 꽤 맛있었고 가격도 아주 부담스럽진 않았기에 선후배, 동기들과 종종 찾아갔던 듯 하다.  그러나 이 식당에 대한 회상은 여기까지다.  

 

바로 이어서 포항 생활 4년 중 가장 인상 깊었던 식당으로 추억이 넘어갔다.  이름도 기억 안 나고, 아마도 후미진 곳에 있던 숨겨진 맛집.   4인용 테이블 두세 개 정도의 협소한 공간에서  젊은 부부 두 분이서 운영하는  작지만 푸짐한 한정식 스타일의 한 가지 메뉴만 내던 식당이다. 나오는 식단의 질과 단가는 물론 서울이나 전주의 몇 배 더 비싼 정식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돈 없는 학생들이 어쩌다 다양한 음식으로 호사하는 데는 이보다 나은 곳이 없었고,  포항의 음식들이 대부분 맵고 짜고 자극적인데 비해 이 곳은 담담하면서도 훌륭한 맛을 유지했기에 더욱 특별했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지금 그 시절을 떠올리게 한 굴밥과 관계없는 이 식당이 처음의 굴밥집 보다 더 강하게 와 닿는 이유는 주인 분들의 음식을 대접하는 마음때문일 것이다.  특별히 기억나는 에피소드나 이야깃거리가 있지는 않지만, 그곳에 갈 때마다 입 뿐 아니라 마음이 평안해졌던 것 만큼은 기억난다.  그 분들도 나름의 고단한 인생을 살아가기에 때로는 문을 열고 들어가며 편치 않은 표정을 본 적도 있지만, 그럴 때마저도 항상 우리들을 대하는 얼굴은 장사치의 가식적인 웃음이 아니라 어려움 속에서도 반가운 친척을 맞이하는 기쁨이었다.  당신들이 만들어서 대접하는 음식을 먹는 손님들이 행복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그 모습을 보며 스스로 기뻐하던 그 분들이 지금도 어딘가에서 여전히 그 기쁨을 누리고 있으면 좋겠다. 

 

여기서 내 걷잡을 수 없는 회상은 고등학교 말년 시절로 한 번 더 거슬러 올라간다. 독서실 정기권을 끊고 다니던  때다.  같이 공부 – 라고 쓰도 농땡이라고 읽어야 하지 않을까…-하던 친구들과 출출하면 주로 가던 오류 시장 내 제대로 된 칸막이도 없던 분식집.  대형 프로젝션 티비에 뮤직비디오나 NBA 경기를 틀어줘서 시간 죽이기에 좋은 곳이었지만 우리들은 곧 이 식당의 오무라이스에 중독되고 말았다.  바닥이 동그란 웍에 감자, 양파, 당근을 밥과 같이 볶다가 케첩과 다른 양념을 추가해 더 볶고, 바로 그 웍에 계란을 부쳐서 한 번에 감싸서 접시에 내어주는데, 그 이후로 그보다 맛있는 오무라이스는 맛볼 수 없었다.  가끔 집에서 그 흉내를 내서 아이들에게 해 주는데, 야채를 안 좋아하는 녀석들도 싹싹 비울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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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 곳도 맛도 맛이지만 지금도 기억하는 이유는 이 곳의 주인 아저씨 역시 음식을 만들어 손님을 대접하는 것에 대한 긍지와 기쁨을 항상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주변이 여러 모로 번잡한 시장 안에서 상대하는 손님들이 거친 경우가 많을 텐데도 항상 부드러움을 잃지 않고 특히 우리같은 어린 학생들을 정중하면서도 따뜻하게 대접하며, 우리가 맛있게 또 배부르게 먹기를 바라는 그 마음을 그 시절 어리숙한 영혼도 느낄 수 있었다.

 

어쩌다 해 먹은 굴밥이 이토록 느닷없는 추억을 끄집어  내니, 음식의 힘은 매우 강하다.  어느 누구에게나 몇 가지 음식에 연관된 좋은 기억이 있을 것이다.  그 기억이 미쉐린 쓰리스타 식당의 가장 비싼 음식일 수도, 허름한 길거리 포장마차의 천 원짜리 한 장의 군것질 거리일 수도 있지만, 그 음식의 가격과 세간의 시선에 관계 없이, 그러한 좋은 추억은 음식을 준비한 이의 마음도 같이 전달되어 있을 것이다.  좋은 추억이 앞으로도 더 만들어지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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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omment '5'
  • profile
    박순백 2019.02.14 15:02

    글을 잘 쓰십니다.^^ 글을 더 자주 쓰셔야겠습니다.

    제가 이 홈페이지에 올라오는 많은 글들을 상당수를 읽습니다만 그중에서도 발군으로 글을 잘 쓰시는 분입니다.^^

     

    그리고 제가 수많은 글들을 읽고 거기 맞춤법과 띄어쓰기의 문제를 발견하는데 그 때마다 그걸 참지 못 하고 시솝의 수정 권한으로 수정해 놓습니다.^^ 그런데 마크 리 님의 글은 제가 손 댈 데가 없을 만큼 잘 쓰시는 것도 매우 특별합니다.

     

    글 더 많이 쓰십시오.^^

  • profile
    MarkLee 2019.02.15 11:55
    격려 말씀 감사합니다. 미국 생활 20년 째인데, 요 근래 영어는 안 늘고 한국말 능력은 감퇴하는 것 같아서 답답한 참입니다. 영어야 원래 내 말이 아니니 문법을 실수하거나 발음이 이상해도 상관 없다고 무대뽀로 들이대서 여기까지 온 건데, 햇수가 늘고 짬이 되니 언어 구사 자체는 향상이 안 되어도 잘못을 인식할 정도 능력은 붙어서 괜히 더 버벅대는 듯 합니다. 한국어는 쓰는 범위가 한정돼 있으니 안 쓰는 어휘도 많고, 나이 들면서 머리가 굳어져서인지 어쩔 때는 하고싶은 말/글을 쓰려면 잠시 생각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그게 꼭 나쁘지만은 않은 게 한 번 접고 들어가면 내 뱉기 전에 실수를 바로 잡을 가능성이 더 큰 듯 하네요. 적응하면서 살아야죠 ^^;;
  • profile
    박순백 2019.02.15 12:13
    자꾸 글을 쓰시다보면 한국말의 어휘를 잊어버리는 일은 없으실 거고, 더 나은 표현을 위해 유의어를 찾다보면 오히려 어휘 실력이 더 늘어날 겁니다.^^ 그래서 자주 쓰셔야 합니다.
  • ?
    불꽃롸이더 2019.02.16 13:28
    어릴때 먹었던 추억의 음식을 맛보고 그시절의 기억이 회상되는 이런 현상은 후각과 관련이 있고 신경학자들은 후각기억(odor memory)이라고 부릅니다. 후각을 담당하는 후각구(olfactory bulb)가 기억의 회상을 담당하는 뇌의 한부분인 해마(hippocampus)바로 근처에 있기때문인데요. 길가다가 낯선 여인의 향수냄새를 맡으면서 첫사랑의 추억에 빠져들기도 하는 현상도 후각기억인데 이 회상력은 매우 강력해서 십대이전의 기억도 아주 생생하게 재현되기도 합니다. 어떤 신경학자는 이를 갓태어난 유아기부터 유지되는 생존본능이라고 보기도 합니다. 엄마의 젖냄새를 기억해서 생존에 유리하게끔 한다는 거지요. 더 복잡해지면 머리아프니 여기까지 ㅎㅎㅎ.
  • profile
    MarkLee 2019.02.16 23:46
    지나친 수치/정형화 없으면서도 납득할 수 있는 이런 논리적 해석 좋습니다. 그러고보니 제가 냄새에 많이 민감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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