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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동, 하남 지리지(地理志)가 되어 버린 듯한 글 하나 - 원래는 제 추석 관련 페이스북 포스팅에 옛 추억을 적어주신 제 고교 선배님(이해동)의 댓글에 대한 답으로 쓰여진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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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해동 형님의 캐리커처.

 

다른 분들은 재미가 없겠지만, 강동이나 하남에 거주하시는 분, 혹은 이 지역에 관한 관심을 가진 분들에게는 일독도 괜찮을(?) 글이라 생각합니다.^^

 


 

해동 형님,

 

제 추석 관련 포스팅( https://www.drspark.net/sp_freewriting/4124934 )에 써주신 댓글을 보니 지금까지 그 하남시 신장 부근의 동네에 관해서 형님처럼 많은 걸 알고 계신 분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초딩 1년 한 학기까지 그 부근에서 산 제가 아는 걸 여기 덧붙여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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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맨 위는 겸재 정선의 그림이다. 현재의 천호동 쪽에서 바라본 광진교 건너편의 풍경이다. 저 앞산은 광장동 뒷산인 아차산으로 생각되고, 산 위의 건물들은 광진원으로서 조선시대 관리들의 숙소이면서 광진을 통해 들어오는 진상품 등을 보관하던 창고이기도 했다.

- 아래 왼편의 동아일보 사진은 1974년 광나루유원지(수영장)의 엄청난 인파를 보여준다. 그 오른편의 사진은 앞서 사진의 반대편(암사동쪽) 하늘에서 바라보는 광나루유원지의 모습이다. 지금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강수욕 풍경이다.

- 맨 아래 왼편 사진은 1960년대의 구의동 하늘에서 광진교와 그 건너편 암사동 앞 한강변 삼각주 끝의 모래사장(광나루유원지)을 보여준다.

- 맨 아래 오른편 사진은 광나루유원지에서 1960년대에 찍은 사진으로 유람용 보트에 "광나루5"호라 쓰여 있다.

 

형님은 서울 시내에서 출발하셨는데, 전 광나루다리부터 얘기할게요.^^ 그 광나루는 너른나루의 너른이 넓다는 광(廣)으로 변한 나루(津)인데 그게 조선시대에는 잠실나루와 미음나루의 중간에 있는 가장 큰 나루로서 그 나루를 통해서 이천, 광주에서 키운 농산물이 서울로 반입되었습니다. 일정(日政) 시에 한강에는 한강철교와 제1한강교에 이어 세 번째 다리로 1936년에 광진교(廣津橋)가 생깁니다. 그게 바로 광나루다리죠. 그로 인해 너른나루는 사라지고 다리를 통해 차량이 다니게 된 겁니다. 물론 그 광나루가 있는 한강은 북한강과 남한강이 그 위쪽의 두물머리(그래서 양수리/兩水里란 이름)에서 만나 내려오는 곳이고요. 특히 남한강은 정선 아라리촌을 비롯한 강원도 먼 곳에서 수운판관이었던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가 강원도 특산물은 물론 분원의 도자기나 광주, 이천의 쌀을 마포나루까지 배로 실어오기도 했던 훌륭한 교통로였던 곳이지요.

 

광나루의 서울쪽인 광장동의 광장은 넓은 장입니다. 한강 동편의 모든 물자가 그 광나루를 통해 건너오니 거기 큰 장이 생기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지요. 실제로 겸재 정선의 광진 그림을 보면 천호동 쪽에서 바라본 강 건너 산(지금의 쉐라톤 워커힐과 워커힐 아파트 중간 정도)에 커다란 집들이 여러 채보입니다. 그게 광진원이라고 하여 조선시대에 관리의 숙소로도 쓰이고, 광주, 이천, 여주 등의 왕실 진상용 쌀을 우마차로 실어와서 보관하던 일종의 창고이기도 했던 곳이지요. 거긴 왼편에 형님이 말씀하신 서울 장안에 유명했던 음식점인 장어요리 전문점 “버드나무집”의 야외 초막이 그 수려한 (현재 천호대교와 올림픽대교 사이의) 한강을 내려다보고 있었습니다. 왜 버드나무집이란 이름이 붙었는가 하면 거기가 지금과는 달리 버드나무와 수양버들이 무성한 곳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광진은 버들 양(楊) 자를 써서 양진(楊津) 혹은 양나루로 까지 불렸던 것입니다.

 

그 버드나무집에서 강 건너로 제일 먼저 보이는 풍경은 지금은 다 물속에 잠겨 사라졌지만 하풍납리(下風納里)에 면한 벌말(“벌판에 있는 마을”의 의미)이란 동네로서 넓은 들에 수양버들과 갈대가 무성한 모래밭 위의 마을이었습니다.(1970년대 초반의 큰 홍수로 폐촌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상(上)풍납리로 들어가면서부터 삼국시대에 그곳에 세워진 풍납토성이 있었습니다. 아직 그게 백제의 하남위례성인가의 여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그게 유력하다고 하고, 그랬다면 광진은 그 때 교역의 중심이었을 것입니다. 그 풍납이란 것이 한자로 “바람이 들어온다.”는 의미이고, 실제로 조선시대로부터 1960년대까지의 옛이름으로는 "바람들이/바람드리"라고 불렸습니다. 실제로 강바람이 많이 부는 동네인 것인데, 여길 둥글게 감싸고 있는 성이 바로 풍납토성입니다. 실제로 광진/양진이 있던 자리는 현재의 한강호텔과 뮤직홀인 광장유니클로악스의 중간 정도라 합니다. 당시의 버드나무집은 지금의 그곳 풍경과는 다르게 현재 광진교 오른편의 한강호텔처럼 절벽 위에 있었습니다.(버드나무 집은 한강호텔 만큼 높은 절벽은 아니지만요.) 그러니 강상의 버드나무집이 있던 당시엔 멀리서 보면 토성 위에는 큰 나무들이 자라고 있어서 야산처럼 보였습니다. 버드나무집에 앉아서 내려다보는 한강과 그 건너의 갈대숲, 그 뒤의 풍납토성, 그리고 아주 멀리에 아스라이 보이는 남한산 남한산성의 스카이라인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런 선계와 같은 풍경이 어디에 또 있겠는지요???

 

그리고 그 버드나무 집 뒤로는 1970년대까지 대한제지가 자리하고 있었고, 그게 공해 산업으로 여겨지던 시절에 폐쇄되어 그 제지공장에서 지은 강변 아파트인 광장극동아파트니 현대파크빌 등으로 변해 지금에 이른 것이지요.(강변역이 그 아파트들 옆에 세워진 것입니다.) 너른나루와 미음나루의 중간 북쪽으로 온달장군이 싸우다 죽은 아차산성이 있습니다. 그 아차산은 제2회 대한민국 동계체전 스키대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고,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역사가 온전히 깃들어 있는 곳입니다. 실제로 그곳에서 그 삼국이 한강변의 옥토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였고, 그 삼국의 유적지가 다 남아있으니까요.

 

광나루 건너의 왼편에는 아주 드넓은 백사장이 있었는데 그게 60-70년대까지 동쪽의 강원도 동해의 해변이나 경기도 인천 등 서해의 해변까지 갈 여유가 없는 사람들이 해수욕장 대신 찾은 광나루유원지의 수영장으로 사용되었습니다.(당시에 거기서 수영하는 걸 해수욕 대신 "강수욕"이라 불렀습니다.) 이 수영장은 엄청나게 많은 텐트촌이 들어서 있었고, 신기사 등의 대단위 보트 계류장도 있어서 다양한 여름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곳이었지요. 이 유원지는 거기서 서울 쪽으로 멀지 않은 현재 성수동의 뚝섬유원지와 더불어 두 개의 대단위 위락시설이었던 겁니다. 당시만 해도 광진구, 강동구는 없던 시절이고 그 모두가 성동구에 속하던 시절이죠. 천호동은 그 직전인 60년대만 해도 경기도 광주군 구천면 곡교리란 주소를 가지고 있었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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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대의 현 성수동 한강변인 뚝섬유원지의 여름 풍경이다. 지금의 어느 바닷가에 온 것 같은 풍경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라 해변에 갈 수 없는 서울 및 서울 인근의 사람들이 이곳과 광나루유원지, 혹은 한강교 주변에서 여름을 즐겼다.

 

그 곡교리(曲橋里)란 게 일정시대에 "굽은 다리("고분다리"란 변형명으로도 불림)와 그 주변을 통합해서 한자명으로 곡교리라 칭하게 된 것입니다.(조선시대에 이 지역 마을을 잇는 다리가 굽어있어서 생긴 이름.) 구한말에서 일제강점기까지 천호동은 한강 이남에서 영등포 다음의 두 번째로 큰 마을이고, 서울 남동쪽의 교통 중심이었던 겁니다. 그래서 1960년대엔 서울에서 경기지역으로 나가는 시내버스가 달리는 제3번 국도가 이 광진교를 건너게 했고, 광진교를 지나 천호동에 종점을 두고 있었던 거구요.(그게 68번 시내버스인데, 그 종점 땅이 우리 아버님의 소유였고, 우리 집은 그 종점 안쪽 한 귀퉁이의 2층 양옥집이었습니다.^^ 지금 천호동 2001아웃렛과 킴스클럽이 있는 그 자리죠. 68번 버스가 사라진 후에는 아버님이 거기서 제재소를 운영하기도 하셨었습니다. 그 후에 아버지가 주도하여 그 자리와 주변 땅을 합쳐서 거기에 주상복합아파트를 지으신 거구요.)

 

천호동은 곡교리가 더 커져서 "천 개의 집이 있는 동네"가 될 것이란 예언에 힘입어 그 의미를 포함한 한자어 천호(千戶)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옆은 한강의 굽이가 돌아가는 높은 바위 산 위에 있는 아홉 개의 절인 구암사(九岩寺)에서 기인한 암사동이 있습니다. 그 암사 고개가 바로 지금 자전거 라이더들에 의해 "아이유 삼단(고음) 고개"라 불리는 암사령인 것입니다. 그 암사는 잘 아시다시피 당시에 한강의 너른 삼각주 평원을 내려다보고 있던 여러 개의 절입니다. 땅이 비옥하고 진흙 천지이던 곳이라 원시시대엔 거기 신석기 문화가 펼쳐져 한강에서 고기를 잡고, 그 평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움집 생활을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암사신석기유적지로 남아있지만요. 그 많은 진흙은 60-70년대의 한국 건설붐을 타고 암사동과 천호동 일대에 널려있던 이화산업을 위시한 수많은 벽돌공장과 기와공장들에 의해서 건축자재로 만들어졌고, 오늘 날 서울의 수많은 건축물들을 만들어 내는 재료가 됩니다.(나중엔 공해 산업이라 그 공장들이 모두 사라졌지만요.)

 

바람들이, 풍납토성의 건너편 동남쪽에 있던 것이 몽촌토성입니다. 그곳 역시 어렵게 살던 그 60-70년대 시절엔 역사 유적지가 아닌 작은, 비탈진 야산에 불과했었습니다. 풍납토성이 뒤늦게 발견된 것처럼 그 수많은 소나무가 바람에 파도치듯 서있던 야산이 서울올림픽을 위해 공사를 하던 중에 삼국시대의 토성 유적인 것으로 판명되지요.(전엔 그 토성 안, 현재 올림픽공원 중앙 부위에 마을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역사의 현장 역시 올림픽을 기념하는 공원으로 만들어집니다. 그 소나무가 많이 서 있던 야산 비탈(坡)이 바로 한자로 송파(松坡)란 한자명에 녹아들어있지요. 송파나루(송파진)는 나중에 잠실나루로 불리고 70년대 초까지 운영되었는데, 그 부근의 넓은 뽕밭에서 기른 누에 때문에 누에 "잠"자를 써서 잠실(蠶室)이란 동네가 생긴 것입니다. 그곳은 진짜 뽕나무밭, 상전(桑田)이 변해서 아파트의 바다가 된 것이니, 상전벽해(桑田碧海)란 사자성어가 100% 들어맞는 곳입니다.ㅋ

 

천호동에서 조금(8km) 더 나가면 황산( 山) 검문소 자리가 나옵니다.(지금도 검문소가 있는지는 모르겠습니다만...) 거기가 해동 형님께서 삿갓 쓴 모양의 산이라고 한 바로 그 산, 황산이 있는 마을입니다. 지금은 황산이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는 경기도의 끝입니다. 제가 바로 그 마을에서 태어나서 국민(초등)학교 1학기까지만 다니고 서울로 온 겁니다. 그것도 한 때는 경기도였던 그 곡교리의 후신 천호동으로요.^^ 제가 어린 시절엔 그 산의 이름이 황산이 아니었습니다. 적어도 밀양 박씨 정승공파 집성촌인 그 마을사람들은 그리 부르지 않았습니다. 동네 이름은 황산으로 불렀지만, 정작 그 산의 이름은 "거칠메(뫼)"로 불렀습니다.(최근의 표기로는 "거칠뫼"가 맞습니다만, 당시 황산 사람들은 그걸 뫼가 아닌 메로 불렀습니다.) 거칠 황( 荒) 자에 뫼/메 산이니 그게 황산인데, 그건 일제가 우리 말을 버리게 하려고 만든 이름인 거죠. 그 거칠메의 숲은 암크렁, 수크렁 풀들이 가을 바람에 어울려 살랑대는 아주 아름다운 곳이었고, 우리 정승공파 박 씨의 묘역과 종중회관이 있던 곳이었습니다. 16세기에 저의 13대조 일옹공 박경응(朴慶應) 할아버님께서 인조(仁祖)로부터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받은 광주(廣州) 땅의 일부입니다. 인조 시절 왕의 외척(外戚)이었던 일옹공은 인조의 아들 효종의 보덕(도덕과 경제를 가르친 선생님)으로서 문관 품계의 정3품 통훈대부였는데, 1636년 병자호란 시에 인조를 모시고 남한산성으로 피난하신 분이지요. 인조는 1636년 12월 13일에 일옹공에게 호위대장격인 금오랑 벼슬을 제수했고,일옹공은 바로 그 다음날 신당동의 시구문(원 수구문)을 통해 347명의 대신들과 어가를 호종하여 남한산성으로의 피난길에 오르셨던 것입니다. 사패지지는 왕을 호위한 상으로 병자호란 직후에 받으신 것입니다.

 

거칠메 아래에 있는 그 동네, 황산. 나무도 없고 거친 산이라 오래 전부터 거칠메라 불리긴 했지만, 그 멋진 이름을 황량한 느낌의 황산이라 개명 당한 마을사람들은 그 명칭을 싫어했습니다. 그래서 동네 이름을 등록할 때는 황산이 아닌 풍산(豊山)이라 했습니다. 황산과는 반대로 모든 게 풍성하고도 풍부한 동네라고 역설적으로 쓴 거죠. 그래서 제가 어린 시절엔 거기가 경기도 광주군 동부면 풍산리(豊山里)였습니다. 그 동네는 원래 땅도 척박(瘠薄)한 곳이었는데, 우리 일가가 그 일대의 땅을 땀으로 일궈서 복토(福土)가 된 곳입니다. 하여간 그 부근이 얼마나 거칠었던지 그곳은 이스라엘 사막지대의 거친 땅 케이넌(Canaan)과 같은 곳이었습니다. 성경에서는 오히려 반대로 그려져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묘사된 바로 그 가나안과 같은 그런 땅이었던 것입니다. 우리 박씨 일가가 케이넌 같던 황산을 가나안 같은 풍산으로 만들었다고 하면 되겠지요.ㅋ

 

그런 비유처럼 당시 못 살던 우리나라를 잘 사는 농촌으로 만들자는 운동이 있었지요. 그 운동의 모태가 된 것이 가나안농군학교입니다. 거기 가나안교회란 작은 개척교회가 있었고, 그걸 세운 김용기 장로는 그 교회를 세우면서 옆에 작은 학교 모양의 농군양성소를 짓습니다. 젊고 패기있는 젊은이들을 모아 군대식 교육을 통해서 현대적인 농법을 가르치는 농군사관학교로서의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것입니다. 그 교육 정신과 방식은 나중에 박정희 대통령에 의해 새마을운동의 모태가 되고, 가나안농군학교 교정에서 아침마다 하던 체조는 경희대 체육대학 유근림 교수에 의해 새롭게 국민체조로 태어납니다. 가나안 같은 거친 땅을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꾸자던 김용기 장로의 생각이 요원의 불길처럼 전국으로 퍼져나가 우리가 잘 살게 되는 모태가 된 것이지요. 그러므로 뒤늦게(?) 가나안농군학교를 세운 김용기 장로에게 우리 박씨 집성촌 황산 사람들이 준 영감의 의미는 꽤 크다고 해도 되겠지요.(황산 주변 마을의 많은 분들이 그 개척교회의 신자였습니다.)

 

그리고 황산은 원래 나무가 잘 안 자라는 산이었습니다. 저 어릴 적에는 이미 사방공사며 산림녹화 운동을 통해서 많은 나무를 심은 상태였지만, 우리 한 세대 전만해도 나무조차 심기 어려운 척박한 땅이었고, 의외로 이 산이 암산(巖山)이라 나무를 심을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말 어법에도 맞지 않는 "절대녹화"란 구호가 이산 저산에 걸렸던 60년대에 어쩔 수 없이 산림녹화를 한 티를 내려니 그 산에 흙을 덮어 나무를 키운 것이지요. 그 산이 돌투성이 암산인데 그 산에서 흐르는 물은 쇳녹이 많은 물이라 물이 고여도 그걸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쇳녹이 많이 섞인 이유는 그 산을 이룬 바위가 밀도가 상당히 낮은 철광석이었던 때문입니다. 그래서 60년대 당시에 철광으로의 개발 여부를 결정하기 위해서 한 광산회사에서 정상 부근 세 군데를 시추했고, 그 다이너마이트 시추공으로 인해 생긴 연못에는 여름이면 물이 가득 고여 있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엔 그게 경제성이 없어서 철광산이 되질 못 했지요. 그래서 오히려 다행스럽게도 보존이 될 수 있었던 산입니다.ㅋ 현재는 제 고향 황산이 미사지구 아파트 단지의 일부가 되고, 거칠메는 지역주민들이 아침 운동을 하는 공원으로 변했습니다. 가끔 인터넷 정보에 보면 "홍수가 나면 많은 토사가 내려와 이곳에 거칠게 쌓여 만들어진 산이라고 하여 "거칠뫼"라 부르게 되었고 한자로 표기하여 황산이라고 하게 되었다."는 개소리(!!!)가 나오는데, 그 돌산이 홍수의 토사가 산을 이룬 거라고요? 지나가는 개가 웃을 얘깁니다.ㅋ

 

황산에서 동북쪽에 미사리(올림픽 조정경기장이 있는 곳)가 있고, 동쪽으로는 형님이 말씀하신 방아다리가 있습니다. 미사리는 지금 하남시 미사동(渼沙洞)이 되었는데, 그게 "아름다운 모래"인 줄 아는 사람들이 많지만, 실은 그건 물놀이, 즉 파문을 가리키는 미(渼) 자입니다. 지금은 미사동 위쪽에 팔당대교와 팔당댐이 있는데, 고대의 미사리는 현재와 같이 연육(連陸)이 되어 있지 않은 한강 상류의 섬이었다가 지금처럼 육지에 붙어있게 된 것이지요. 역시 이곳도 땅이 기름져서 역시 암사리처럼 신석기에서 청동기에 걸쳐 사람이 살았고, 지금은 신석기와 청동기유적지로 남아있는 곳이지요. 그 섬의 좌우로 흐르는 빠른 물살의 파문과 모래만으로 이루어진 섬 동네이기에 미사리인 것입니다.(지금도 미사리는 작은 샛강이 있습니다만...) 그래서 저 어릴 적만 해도 미사리는 물빠짐이 잘 되는 고운 모래땅에서 잘 자라는 땅콩을 많이 심어서 땅콩밭이 지천이던 곳입니다. 거기 올림픽조정경기장이 생기고, 그 부근에 미사리 카페 거리가 생기면서 생긴 변화 역시 잠실처럼 상전벽해와 같은 것입니다.(지금은 그 앞동네에 신세계의 스타필드 하남이 서 있습니다.) 그 지역이 한강의 물굽이가 많은 곳이라서 거기서 조금 더 내려가면 또다른 벌말이란 동네의 끝부분인 옛이름 가래울이 되는데, 그게 "갈래가 지는 동네"의 의미로서 현재는 “가래여울”이라 불립니다. 한강 줄기가 그렇게 갈래가 진 곳인 거죠. 그렇게 보면 오래 전의 미사리도 가래울이었다고 하겠지요.

 

형님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가셨다는 방아다리는 황산에서 동쪽이고, 왼편으로 있습니다. 황산에 오르면 바로 건너다보이는 구릉지대가 방아다리였고, 황산 사람들이 부르는 진등의 일부였습니다. 방아다리는 그 부근 덕풍리의 방앗간(정미소)과 관련이 되어있는 이름입니다. 황산에는 우리 큰집에서 경영하던 방앗간이 있었고, 그런 큰 방앗간은 신장에도 하나, 그리고 가나안농군학교보다 더 들어간 벌말에도 하나가 있어서 그것들이 신장과 가까운 지역에서 유명한 네 개의 방아간이었습니다. 방아다리는 바로 그 덕풍리 방앗간 앞에 있던 다리입니다.

 

근데 황산 사람들은 방아다리를 다른 두 개의 이름으로 불렀습니다. 하나는 진등이고, 하나는 드너물이었습니다. 그 진등은 실은 방아다리보다 더 왼쪽의 국도변으로 가는 곳입니다. 거기 현재의 진등부락이 있지요. 어찌 보면 이 부락은 방아다리 옆동네인 셈인데... 미사리 강가 샛강에 있던 나루가 위치적으로 높기에 오를 등(登) 자를 써서 생긴 이름이고, 한자로도 진등(津登)입니다. 근데 그건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바뀐 이름이고, 마을사람들이 아는 진등은 말하자면 긴 등(긴 산등성이)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긴등"이 동네 노친네들이 발음하기 편한 "진등"이 된 것이지요. 이건 아마도 파주 장파리의 마을 이름이 긴 산등성이가 연속되었다고 하여 장마루라고 했던 걸 언덕을 의미하는 한자어 파(坡)를 더 추가해서 일제가 한자명으로 바꾼 것과 비슷한 일일 겁니다.

 

그 긴 산허리의 앞 진등은 농사를 짓다보면 논바닥에서 뜨거운 물이 올라왔고, 마을에서 우물을 파면 역시 뜨거운 물이 올라오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래서 황산이나 아랫말(황산 아래 마을, 가나안농군학교 부근의 작은 마을), 벌말 등에서는 진등을 "드너물" 혹은 "더너물"이라 불렀는데, 그건 "더운 물" 혹은 "더운 우물(溫泉)"의 우리말입니다. 드너물 역시 한 때는 거길 온천으로 개발하려는 회사들이 있어서 몇 번의 시추를 한 일이 있으나 성사되지 못 했습니다.

 

형님이 말씀하신 신장(新長)은 형님 말씀 대로 부근 주민들이 석바대, 혹은 석바다로 부르던 곳입니다. 그 동네도 돌이 많기는 하지만 돌이 많아서 석밭이나 석바다가 된 것이 아니고, 거기가 팔당 지역이어서 생긴 이름입니다. 원래는 석바뎅이에요. “바뎅이”란 말이 원래 신장이 있는 팔당 지역을 가리키는 경기도 사투리입니다. 그래서 윗 팔당을 윗바뎅이, 아래 팔당을 아랫바뎅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돌 많은 현 신장의 평지를 석바뎅이로 부른 거죠.

 

그리고 신장의 이름에 관한 얘기는 두어 가지가 있죠. 원래 황산 마을 어른들이 신장(당시 석바대)으로 가는 먼지 날리던 3번 국도를 “새로 만든 길”이라는 의미로 신작로(新作路)라고 불렀어요. 그게 발음을 하면 신장로에요. 그래서 신장 가는 길의 신장로로도 불렀지만 석바대가 커진 건 거기 장이 서기 시작하면서부터에요. 석바대에 면한 큰 장터마을이 생긴 거죠. 원래 석바대의 옛 이름이 따로 있는데, 그게 장예마을이었지요. 그걸 쉽게 장예말(長禮村)이라고 불렀는데, 거기 부농들이 많았죠. 왜냐하면 그 부근 덕풍리에 일정말기에 저수지(덕풍천보)가 생기면서 전 같으면 하늘만 바라보며 비오기를 기다려 농사를 짓는 천수답에서 그 물을 소위 수리안전답 방식으로 수로를 내어 인근 농토에 공급하기 시작한 거죠. 그래서 덕풍리나 석바대, 황산 등은 농산물이 넘쳐났고, 방앗간들도 많이 생겼던 겁니다.

 

그러다 보니 장예마을 사람들이 전에 없던 새로운 제도를 하나 만듭니다. 그게 바로 장리쌀이라는 겁니다. 인근의 못 사는 사람들이 먹을 게 없으니까 부농들을 찾아서 쌀을 장기 저리로 꾸어다 먹는 겁니다. 그게 장리(長利)쌀이란 제도입니다. 미리 꾸어다 먹고, 그 해 가을에 이자를 붙여서 되갚는 거죠. 그게 경기도에서, 그것도 장예말에서 시작된 겁니다. 그래서 신장의 장은 석바대장의 장터를 의미하는 장(場) 자가 아니고, 그 장예말과 장리쌀에서 사용하는 긴 장(長) 자를 쓴 새로운 마을, 신장(新長)으로 태어난 겁니다.

 

검단산(黔丹山)은 남한산(南漢山)의 한 줄기로서 전엔 광주시에 속했지만 지금은 신장이 커져 신설된 하남시와 광주시에 걸쳐 있는 산입니다. 600여 미터의 산 정상에서는 동쪽으로 양수리는 물론 양평까지 보이고, 서쪽으로는 워커힐호텔이 있는 광장동이 보이며, 아름다운 덕소의 강변과 미음나루까지도 잘 보입니다. 사방의 전경이 열리는 멋진 곳입니다. 백제 때 검단선사(黔丹禪師)가 이곳에 은거하였다 하여 검단산으로 불리게 되었다고하지만 그건 개소리(!)인 것 같고, 인근 마을 사람들은 다 거길 검둥산이라 불렀습니다. 실제로 검단산의 검(黔) 자가 먹 묵(墨)을 포함하고 있는 검다는 뜻이고, 그게 금으로 읽힐 때는 크거나 신성하다는 의미입니다. 검정색의 큰 산이니 그런 단어를 포함하게 된 것이겠지요. 시골동네에서 올려다보기엔 이 657미터의 가파른 산이 위압적이고, 나무가 빽빽하여 검푸르게 보이니 검둥산이었을 겁니다. 그리고 삼국시대엔 이 산이 일대의 진산(鎭山)이어서 여기서 하늘에 제사(천제)를 지내기도 했답니다. 이 부근의 마을 중에 거문다리가 있습니다. 한자로는 현교(玄橋), 혹은 현동으로 불리는데 그 이유가 높은 검단산의 깃대봉 그늘에 가려서 동이 늦게 트니 어둡다고 해서 어두운 동네란 의미의 한자어로 그렇게 불린 것이지요. 검둥산의 위력은 그렇게 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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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이진혁 / 검단상 정상에서 본 팔당댐과 팔당호.  왼편 멀리 북한강철교와 양수대교가 보이고, 그 다리 건너가 양수리(두물머리)이다. 사진의 중간 왼편은 북한강이고, 오른편 중간은 남한강인데, 이 강은 멀리 강원도의 정선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형님이 말씀하신 그 임현대 씨는 옛 남한고등학교(지금은 그 학교가 농고 비슷한 다른 고등학교로 변한 것 같은데...) 출신으로 석바대의 유지였습니다. 이분이 한국일보를 창간한 고 장기영 씨와의 친분으로 한국일보지국을 그곳에 낸 것이고, 또 그 인연으로 장기영(우리가 잘 아는 장강재 회장의 부친) 씨 댁의 묘역을 현재의 하남애니메이션고등학교 주변의 땅에 조성하게 된 것입니다. 한국일보에서는 거길 검단산묘역이라고 부르는데, 실제로 그곳은 신장동이 아닌 창우동에 속합니다. 그리고 그 창우동엔 현대 정주영 회장의 선영이 있어서 그 묘역에 정 회장님은 물론 그 모친과 동생들이 잠들어있기도 합니다. 지금도 신장동에서 검단산에 오르려면 애니메이션고등학교 옆의 큰 수입품상으로 유명한 쉬즈찜머 샵 옆길로 올라갑니다. 그래서 그 부근엔 K2니 뭐니하는 아웃도어샵들이 즐비하지요.

 

제 모친의 고향이 황산에서 멀지 않은 벌말인데 지금은 거기도 미사강변아파트 단지의 일부가 되었지요. 그리고 고모님이 시집가신 곳이 역시 황산에서 멀지 않은 산곡(山谷)입니다. 신장에서 그 유명한 100년 역사의 한식당인 마방(馬房)집 앞길을 거쳐 가는 하산곡(下山谷)의, 예전 산곡미군미사일기지 부근의 동네입니다.(조선시대로 보면 비공식적인 역/驛에 해당하는 게 이 마방집이랄 수 있는데, 이게 아마 현존하는 주막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 중 하나일 겁니다. 그리고 이 집은 실제로는 천현동에 속합니다만...) 그 산곡은 예전 지명이 산골입니다. 그런 이름이 붙은 이유는 그게 검단산(山) 골짜기(谷)에 있기 때문이며, 그래서 “산골“인 것입니다. 아주 단순명쾌하지요.^^

 

형님이 옛 얘기를 해주시는 바람에 저도 머리속에 있던 내용들을 모처럼 다 정리해 봤습니다. 이건 현지인의 입장에서 본 얘기들이 종합된 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저도 어린 시절에 미사리 강변으로 친구들과 함께 미역 감으러 갔던 추억이 있습니다. 지금은 모두 사라져버린 엄청나게 큰 미루나무들이 강변에 그득했던 그 옛 풍경이 그립습니다.

 

관련 글: 박순백 - www.facebook.com/…/224507116886…/comment_id/22496342117442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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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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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배 2018.10.01 16:58

    이 글을 보면서 다시 한 번 느낍니다. 박사님은 역시 박사님이시네요.ㅎㅎ
    저의 고향도 하일동(지금은 강일동)입니다.
    어렸을 때 황산에서 작은 마이크로 버스 타고 가나안 농군학교, 벽돌공장 거쳐서 하일동 들어왔던 기억들이 어렴풋이 기억이 나네요.
    광나루 유원지-사진을 보니까 그런 백사장이었네요.
    그 시절에 바닷가로 바캉스 갈 수 있었나요. 광나루 유원지, 뚝섬유원지죠. 광나루 유원지에서 미역감던 기억 저도 납니다.^

  • profile
    Dr.Spark 2018.10.01 17:12
    아, 하일동(강일동)이요?
    제가 우리 어머니의 고향이 벌말이라고 했는데, 그 벌말이 바로 하일동의 옛 이름입니다.^^
    상일동, 하일동이 상하로 짝을 이룬 그 동네 이름 하일동은 60년대에 그렇게 바뀐 것이지요.
    "벌판에 있는 마을"(벌말)이 바로 그 하일동인데, 거기가 1960년대에 서울시의 판자집 철거
    운동에 따라 강제로 쫒겨난 시민들이 하일동에 천막촌을 이루고 살면서 커진 것입니다.(그
    다음으로 쫒겨난 피난민들은 성남시가 만들어질 때 그리로 갔고요.)
    하일동이 외가집이어서 제가 천호동으로 이사간 초등학교 이후, 중학교 때까지 방학이면
    열심히 갔었지요.
    반갑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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