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상

2015 그랑폰도 휘슬러 이야기

by 정우찬 posted Sep 21, 2017
?

단축키

Prev이전 문서

Next다음 문서

ESC닫기

크게 작게 위로 아래로 댓글로 가기 인쇄

"앜~ 제발"

 

비명을 지르며 길가에 자전거를 세우고 쓰러졌다. 극심한 통증이다. 

내 생에 쥐가 나서 이처럼 극도의 고통을 느낀 것도 처음이고, 그 고통을 두 시간 가까이 끊임없이 참아야 했던 것도 처음이다. 극도의 가뭄을 만난 땅이 바짝 마르고 갈라져 사막으로 변하는 것처럼 엉덩이 아래 하반신의 모든 혈관이 바짝 말라버린 느낌이다. 

 

내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졌지만 나는 내 다리의 근육이 더욱 인상을 쓰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힘껏 주먹으로 허벅지 근육을 두드린다. 통즌은 아주 서서히 줄어든다. 죽지 않을 정도로 사람을 괴롭혀 육신과 정신을 피폐하게 만드는 고문기술자처럼 온통 근육을 쥐어짜던 고통은 잔인한 미소를 남기며 스물스물 그렇게 서서히 멀어져 간다. 비명을 멈추고 다문 이 사이로 낮은 신음을 내뱉으며 숨을 내쉰다. 

 

고통이 잦아들면 잠깐 동안은 자전거를 끌며 걷는다. 잠시라도 페달을 밟을 때와는 다른 근육을 쓰고 싶어서이다. 아니 어차피 같은 근육이라면 다른 방향으로 움직여 보기 위해서다. 근육이 좀 진정된 느낌이 오면 다시 안장위에 올라서 페달을 밟기 시작한다. 힘없이 페달을 밟으며 움직이는 허벅지 근육을 보았다. 그 근육들이 탱탱하고 힘차게 뛰놀던 예전의 느낌은 온데 간데 없다. 그 마르게 느껴지는 근육은 온통 뒤틀리고 갈라져 나중엔 고사목처럼 변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일었다.

 

race_1500_photo_25324370.jpg

고통에 겨워 고개를 숙이다

 

 

 

탈착식 고글은 이미 벗어 제낀지 오래다. 해가 떠올라 대기의 온도는 점차 올라가지만 몸에선 땀도 나지 않는다. 페달은 느리디 느려 마치 밧데리가 거의 다 된 자동인형처럼 느리게 움직인다. 힘이 들지는 않는다. 산책하는 할머니의 심박처럼 심박은 천천히 뛴다.

 

물론 나도 달리고 싶다. 심장이 터지도록 가뿐 숨을 몰아 쉬면서, 울퉁불퉁 조각처럼 갈라진 다리 근육을 뽐내며 페달을 부서져라 밟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다. 또다시 근육이 뒤틀어지는 고통을 경험할 것을 알기에...

온 몸의 신경을 최대한 집중해 다리 근육의 구석구석을 스캔해 본다. 

 

'이번엔 왼쪽 허벅지 안쪽인가?' 어느 한 쪽 다리의 근육이 약간이라도 굳어지는 느낌이 나면 최대한 빨리 쉬어주면서 반대편 다리를 이용해 페달을 밟아야 한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힘이 과하게 주어지거나 박자가 어그러지면 어김없이 반대편 다리로 근육의 긴장감은 옮겨간다. 대칭을 이룬 저울 위에서 추를 이러저리 옮기며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춰가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근육과의 팽팽한 줄다리기도 평지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경사가 조금이라도 있는 오르막을 만나면 어김이 없다. 왼쪽이냐 오른쪽이냐, 안쪽이냐 바깥쪽이냐의 차이만 있을 뿐이다. 어김없이 근육은 아우성치고 뒤틀린다. 나 또한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서서 한동안 두드리고 주무르고... 그러다 고통이 사그라들면 다시 걷고... 페달을 밟고. 긴 오르막에선 차라리 내처 걷는 것이 편하다. 다행히 걸을 땐 쥐가 나지 않는다. 그나마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돌이켜 더듬어 보면, 처음 쥐가 난 곳은 스콰미쉬를 지나 시작되는 10km 이상의 긴 오르막을 거의 다 올라섰을 때다. 휘슬러까지의 긴 오르막 중 가장 길고 급한 오르막이어서 최대의 고비라 여겼던 곳이다. 이 언덕을 거의 다 올라설 때까지 레이스는 꽤나 순조로웠다. 아주...

 

 

race_1500_photo_25324369.jpg

고통안에서 내 자신의 깊은 내면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던 시간

 

 

밴쿠버 스탠리 파크에서 휘슬러를 잇는 하이웨이 99은 '바다에서 하늘로(SEA TO SKY)'라는 멋진 별칭을 가진 아름다운 해안 고속도로이다. 항상 차로 다니며 이 곳을 자전거로 탄다면 얼마나 멋질까? 상상했었던 곳이기에 기분은  정말 그 이름 그대로 하늘로 오르는 것 같았다. 날씨도 6회째를 맞이하는 휘슬러 폰도 대회 중 가장 좋은 날씨여서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상.

 

07시에 출발신호가 울리고 사천여명에 이르는 자전거의 대행진이 시작되었다. 워낙 많은 사람들때문에 스탠리 파크를 빠져나오기까지 꽤 긴 거리를 느리게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라이온스 게이트를 넘어서면서 부터 대열은 조금씩 여유가 생기기 시작했고 경사 급한 테일러웨이를 벗어나 하이웨이로 진입하면서부터는 사람들때문에 속도를 내지 못하는 상황은 없어졌다.  

 

속도가 비슷한 대열을 만나면 후미에 붙어 드래프팅을 하고 그러다 추월해가는 그룹을 만나면 또 그 후미에 붙어서 따라갔다. 휘슬러 사이클링 클럽에서 탈 때는 로테이션으로 리딩을 하기때문에 한 그룹하고 계속 라이딩을 하는데 이렇게 인원이 많은 대회에 나오니 속도와 컨디션에 맞춰 그룹을 옮겨 타면서 라이딩하는 것은 나름 신선한 재미였다. 물론 이런 방식이 오버 페이스를 가져올 수도 있겠지만 말이다.

 

신나게 하이웨이를 타고 달리다 보니 어느덧 스콰미쉬에 가까워 온다. 탄광박물관이 있는 갈릴리오 커피샾 앞에 보급소가 보인다. 2차 보급소다. 1차 보급소를 지나쳤기에 한 통뿐인 물통은 이미 바닥이다. 체력이 힘든 것은 아니었지만 에너지젤과 물을 보급하기 위해 멈췄다. 에너지젤과 물을 보급받고 긴 오르막의 언덕을 넘어서니 스콰미쉬가 보인다.  

스콰미쉬 초입을 지나치는데 수많은 환호속에서도 누군가의 외침이 귀를 찔러온다.  

 

"Go, Shifu~!"

 

젱이다. 젱은 내가 스키를 가르치는 중국인 제자로 현재 CSIA 레벨3이며 레벨4를 목표로 트레이닝 중이다. 중국인 최초의 레벨4가 되어 중국스키강사협회를 이끌어갈 멋진 친구다. 이 시간이 9시 04분. 스타트 지점에서 07시 정각에 출발신호가 떨어지고 긴 대열이 빠져 나가기까지 십 분에 가까운 시간이 걸린 걸 생각하면 타이머가 돌아가기 시작한 것이 7시 10분경. 그렇다면 평속 33km 정도로 빠른 질주를 해 온 셈이다.

 

3차 보급소인 엘리스 레이크에서는 멈추지 않고 달리면서 약간의 에너지젤을 보급하였다. 그리고 넘치는 에너지로 10km에 이르는 긴 오르막을 치고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 오르막의 끝이 보이는 순간 허벅지 근육이 당기는 느낌을 받았다. 페달을 밟던 힘을 조금은 늦추고 조심스럽게 페달을 이어갔다. 근육이 경직되는 느낌이 왔지만 통증은 악화되지 않았기에 안도의 숨을 내쉬며 언덕을 넘어갔다.

 

언덕을 넘어서면 잠깐 동안 내리막과 오르막이 이어지고 그 다음엔 휘슬러까지 거의 내리막없이 오르막만 이어진다. 근육이 굳어짐을 느낀 순간 이미 늦었다. 물을 아무리 많이 마시고 에너지젤을 쏟아부어도 밑빠진 독에 물붓기였다. 달래가면서 탄다고는 하지만 조금만 힘이 들어가면 근육이 굳어지고 오르막에선 어김없이 비명을 지르며 멈춰서야 했다.

 

지나가는 일본친구가 근육경련에 좋다며 '아미노 바이탈'을 여러알 주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배 고프기 전에 먹고, 목 마르기 전에 마셔야 하는 장거리 유산소 운동에선 이미 바닥이 나면 돌이킬 수 없는 상태에 이른 것이다. 체력은 쌩쌩했지만 근육경련의 빈도와 아픔은 반대로 더해져만 갔다.

 

시간과의 싸움은 이미 의미가 없었다. 완주를 하느냐의 문제였다. 그러자 마음은 편해졌다. 언덕이 나오고 첫 경련이 시작되면 내려서 자전거를 끌며 걸었다. 내리막과 평지에선 최대한 페달을 약하게 밟으며 달렸고, 아주 완만한 오르막에선 다리근육을 쓰지 않기 위해 쌩쌩한 팔로 다리를 눌러 페달을 저었다.

 

race_1500_photo_25343927.jpg

팔로 다리를 눌러 페달을 밟다

 

 

race_1500_photo_25343876.jpg

결승선이 보이자 그나마 안도의 미소가...

 

 

그렇게 고통스런 비명과 느린 페달질과 걷기를 되풀이하며 스스로에게 얘기하였다.

'미안하다. 나의 근육들아. 오빠가 앞으론 더욱 열심히 노력할께. 너희들 힘들지 않도록.'

 

몸은 참 정직하다. 정말 속일 수가 없다. 대회를 앞두고 9월초에 감기로 몸 상태가 극도로 나빠졌었다. 그 후 회복을 위해 최대한 휴식을 취하며 몸을 아꼈다. 비록 컨디션이 바닥을 찍고 다시 회복하기 시작했지만 대회를 앞둔 2주간은 운동을 거의 하지 못하였다.물론 테이퍼링이라하여 큰 대회를 앞두고는 훈련량을 줄여 체력을 축적하는 것이 필요하다. 하지만 체력을 축적하는 것과 완전 바닥난 체력을 끌어올리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몸의 컨디션을 최대한 조절하여 감기에 걸리지 않도록 하는 것도 트레이닝이자 내 육신을 사랑하는 방법인 것이다.

 

또 하나의 실수는 적절하게 수분과 미네랄 섭취를 하지 못한 것이다. 일반적인 트레이닝 상황과 달리 레이스 상황에서는 몸이 긴장하면서 대단히 큰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여기에 필요한 충분한 수분과 영양분이 공급되지 못하면 몸은 과다하게 에너지를 사용한 후유증으로 순식간에 회복불가능 상태로 떨어져 버린다. 목이 마르지 않더라도 초반부터 꾸준하게 수분을 섭취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한 것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바이크 레이스에는 처음 참가하는 것인데 너무 경험이 부족한 티가 났다. 그래서 스스로에게 미안하다고 끊임없이 속삭일 수 밖에 없었다. 미안하다...

 

나의 몸만큼이나 더디게 시간은 흘러갔다. 거북이처럼 움직이는 나에 비해 사람들은 신나게 페달을 밟으며 지나갔다. 나는 오히려 많이 무심해졌다. 고통이 오지 않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다. 어느덧 나도 휘슬러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집 앞을 지날 때는 그냥 포기하고 집으로 들어가 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가족들은 모두 결승선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 달콤한 유혹을 털어버리고 부드러운 페달링에만 집중했다.

 

근육의 통증은 위태위태하게 경계선을 넘나들고 있었다. 참을만한 통증은 이제 오히려 편하게 느껴졌다. 가끔 불쑥 덮쳐오는 극통이 오면 자전거를 멈추고 근육을 푸는데만 집중해야 했다. 그나마 휘슬러 내에선 그리 큰 언덕이 없어서 다행이다. 시간은 문제가 아니다. 남들이 지나치는 것은 무신경해졌다. 나는 온 신경을 집중해 아슬아슬한 경계선을 넘지 않도록 조심스런 페달질을 이어갔다.

 

드디어 빌리지의 한 복판을 지나 결승선이 보인다. 결승선을 지날 때의 환호도 어디선가에서 지켜보고 있을 가족들의 시선도 그리 신경쓰이지 않는다. 무성영화처럼 내 감각기관에서 멀리떨어진 일로만 느껴진다. 그것은 아마도 난 아직 자전거 위에 있고, 언제라도 뛰쳐나올지 모르는 '쥐'가 날 노려보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race_1500_photo_25336922.jpg

언제 자전거에서 내리지? 결승선을 지난 직후 내릴 곳만 찾다

 

결승선을 통과한 뒤 자전거에서 내려 두 발을 땅에 디디자 감각은 서서히 나에게 돌아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의 기뻐하는 모습이 보이고 축하의 인삿말들이 들려왓다. 무서운 '쥐'의 공포에서 벗어난 것이다. '휴우~ 살았다.' 아쉬움이 많았지만 포기하지 않고 결승선을 통과했다는 것에 만족했다. 그나마 아직 들어오지 않은 사람들이 들어온 사람보다 많은 것을 알고는 내 다리를 툭 치며 인사할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고생했다.' 

 

12004881_10207626092479265_2119247613625361966_n.jpg

메달을 깨물며 완주 축하 세레모니

 

 

첫 로드바이크 레이스에서 죽도록 고생한게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은 대회. 몸은 정직하다는 걸 다시한번 깨달았다.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꾸준하고 성실한 훈련과 무리하지 않는 마음의 자세를 유지하여야 한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아래 동영상을 보니 다시한번 달리고 싶네~^^ 

 

 

♥ 이 글을 추천한 회원 ♥
  하송  

Articles

1 2 3 4 5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