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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17.09.07 12:03

스키의 고수란?

조회 수 1074 좋아요 14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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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역사상 최고의 검술 고수로 일컬어지는 미야모토 무사시가 활동하던 시대의 일이다.
어느 날 한 사람이 붐비는 인파 사이를 걸어가다가 그만 어떤 낭인 무사의 발을 밟고 말았다. 성격이 불같은 낭인은 펄펄 뛰며 결투를 신청했다. 생전 칼이라고는 들어 본 적이 없는 그는 고민 끝에 당대의 검호 미야모토 무사시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다.

"비굴하지 않게 죽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당신은 어떤 무술을 익혔소?"

"무술이라고는 아무것도 모릅니다."

"허나 이상한 일이오. 무술을 모른다는 사람 몸에서 기가 느껴지다니!"

미야모토 무사시는 의아한 생각이 들어 

"그럼 다른 기예는 익힌게 없소?"

"한 40년 다도(茶道)를 했습니다만……"

"그럼 어디 나한테도 차를 한 잔 따라 주겠소?"

미야모토 무사시는 그 다도 명인의 솜씨를 찬찬히 살펴 본 뒤 말했다.

"당신의 다도 솜씨에는 감동했소."

"곧이어 닥칠 죽음의 공포도 잊고 한 동작 한동작에 사력을 다해 몰두하는 자세!"

"당신은 이미 죽음에 대처하는 법을 알고 있소."

"이제 적과 맞서게 되면 바로 차를 대접할 때와 똑같은 자세, 똑같은 눈빛으로 칼을 치켜 드시오."

미야모토 무사시의 충고를 들은 다도 명인은 지정한 시간에 결투장소로 나가 낭인 무사를 만났다. 그는 칼을 치켜올린 채 마치 차를 따를 때처럼 온 정신을 집중한 채 단칼에 내려치리라는 일념으로 적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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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람의 파이터'의 한 장면>


낭인은 차츰 초조해지기 시작했다. 상대의 자세에는 한 점의 허가 없었으며 석양빛에 번쩍이는 그 칼날에는 이미 자신의 피가 묻어있는 것처럼 보였다. 

'저, 저 사람이야말로 검술의 대가인지도 모른다.'

두려운 마음이 생겨난 낭인은 마침내 무릎을 꿇었다.
이처럼 도(道)나 예(藝)나 그 궁극에 이르면 모두가 하나인 법이다. 

 

나는 어떤 분야든 그 궁극에 이르면 하나라는 말에 공감한다. 최선을 다해, 지극한 정성으로 어떤 일에 매진하는 사람은 범인과는 다른 깨달음이 있으리라고 본다. 그런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면 누구나 고수(高手)가 될 것이라는 믿음에서 이 글을 시작한다.


 

IMG_6479.JPG

 

 

 

스키라는 기예를 도의 경지로까지 끌어올려야 진정한 고수(高手)라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스키의 고수(高手)는 슬로프의 정상에 섰을 때의 자세에서부터 범인과 다른 확연한 차이를 보여주는 것이다.

자기만의 스키 철학을 가지고 빛나는 눈빛으로 슬로프의 정상에 서는 사람이 고수(高手)다. 

아무리 급경사의 슬로프 위에 서더라도 '여기를 어떤 기술로 내려갈까?'를 고민하는 사람은 고수(高手)라 말할 수 없다.

'어떤 그림을 그릴까? 어떤 시를 쓸까? 어떤 음악을 연주할까?'를 고민하는 사람이 진정한 고수(高手)다. 

누군가가 최선을 다해 스킹을 할 때 그의 스킹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이 떠오른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눈 덮인 아름다운 설원의 모습은 그 자체로서 한 폭의 그림이다.

그 그림 속에서 누군가가 스킹을 하는 모습이 오히려 그 그림을 돋보이게 한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백 마디, 천 마디의 말보다 단 한번의 몸짓과 스킹으로 모든 것을 표현할 수 있다면 그가 진정한 스키의 고수(高手)다.

그들은 자신이 가진 스키에 대한 애정, 태도와 생각들을 온통 쏟아 부어 슬로프 위에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연주한다. 

누군가가 강렬한 원색의 유화를 그려 놓으면 누군가는 여백의 미를 살린 수묵담채화를 그린다. 

누군가의 스킹에서는 광적인 헤비메탈이 들리고, 누군가의 스킹에서는 우아한 클래식 음악이 들린다.

힘이 느껴지는 락이 있는가 하면 리듬이 느껴지는 왈츠도 있다.

그러므로 나는 스키를 사랑한다.
스포츠로서가 아니라 예술로서 사랑한다.

그러므로 나의 스킹을 비난하거나 욕하지 말라.
그것은 완성을 향한 나의 구도의 몸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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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콤의 파우더 범프 위를 자유롭게 날다.>

 

스키어라고 할 때 스키장을 일 년에 한 번 연중행사로 생각하는 사람부터 시작해 스키 시즌이 되면 스키장에 들어가 겨울 시즌 세달 가량을 스키만 타면서 보내는 스키어들까지 다양하게 분포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스키장에 가는 횟수를 떠나서 스키라는 운동이 정말 재미있다라고 생각하고, 어떻게 하면 스키를 좀 더 잘 탈 수 있을까를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이런 경험이 있을 것입니다.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슬로프를 내려오는 스키어들을 주의 깊게 바라봅니다. 그리고는 어떤 스키어가 눈에 띄어 그 스키어의 스킹을 넋놓고 바라보다 목이 돌아가고 나중엔 온 몸이 리프트 뒤로 돌아가 목이 아프도록 그의 스킹을 뚫어져라 바라본 경험 말입니다.

 

저에겐 아직까지도 사진처럼 뇌리에 남겨진 멋진 영상이 있습니다. 
제가 스키에 빠져 숏턴을 해볼려고 무지하게 애를 쓰던 시절이었죠. 왠만한 중상급사면에선 어느정도 숏턴을 만들 수 있었지만 소위 최상급사면에선 속도조절이 안돼 숏턴인지 지랄턴인지 모를 턴을 하며 좌절에 빠져 있었더랍니다. 그러던 어느 날 휘닉스파크의 정상으로 올라가는 리프트에서 멍하니 앉아 있는데 휘닉스파크의 최상급 코스인 디지(잘못타면 D진다고 알려진...ㅋㅋ)코스로 한 사람이 내려오는 것이 눈에 띄었습니다.

무릎까지 내려오는 빨간색 롱코트를 입고 귀여운 털모자를 쓴 중학생 정도 되어보이는 귀여운 꼬마 아가씨가 그 무서운 디지코스를 바람에 하늘하늘 떨어지는 낙엽처럼 힘하나 안들이고 숏턴을 하며 내려오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입을 엌~ 하고 벌리고 고개가 돌아가고 나중엔 몸이 돌아갈때까지 내내 쳐다보고만 있었죠. 

 

'아니 저 꼬마는 뭐지? 외계인인가? 누구나 벌벌 떠는 최상급 직벽코스를 저렇게 여유있게 탈 수가 있지?'

디지코스를 보면 대개의 스키어들이 엉거주춤한 자세로 스키에 끌려다니며 겨우 내려오고 있고, 가끔 스키의 고수들이 나타나 엄청나게 공격적인 자세로 강한 에지를 사용하며 내려오는 두 종류의 스키어들만 존재했었는데 갑자기 나타난 그 꼬마 아가씨의 등장은 제 생각의 흐름을 한 동안 끊어 놓았습니다.

 

'잘 타든 못 타든 다들 죽을 힘을 다해 타는데...  저렇게 여유있게 타도 되는거야? 저건 무슨 종류의 스킹이지? 남은 의식하지 않고 혼자 신나서 춤추듯 여유있게 타다니... 뭐 저런 스킹이 다 있어?'

 

그 당시엔 그녀의 스킹기술을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 아가씨는 미국이나 캐나다에서 스킹을 배운 것이 아닌가 추리해 봅니다. 왜냐하면 여기선 대개의 스키어들이 그런 자세로 타고 있으니까요. 제 아이들이나 조카들을 봐도 그렇구요.

그럼 그 꼬마 아가씨의 테크닉은 다른 사람들과 무엇이 다를까요? 

 

먼저, 자세는 편안하게 선채로 탑니다.

공격적인 낮은 자세? 그런거 없습니다. 휘슬러에서 그런 자세로 타다간 다리풀려서 오래 탈 수 없습니다. 신체의 관절을 많이 구부리면 몸의 중심점이 낮아져 스킹에 안정감을 더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만큼 근육을 많이 써야 합니다. 반면에 자세가 높아지면 인체의 뼈대(bone structure or skeletal structure)가 주로 쓰여 근육의 사용이 줄어듭니다. 하루종일 길고 긴 슬로프를 스킹하여도 별로 피곤한줄 모릅니다.

 

둘째, 강력한 에지로 컨트롤하기 보다는 부드러운 피봇팅과 동글동글한 회전호로 컨트롤합니다.

파워풀하고 다이내믹한 스킹은 아니지만 어린아이부터 90세 노인까지 남녀노소 누구나 사용 가능한 테크닉입니다. Breakthrough on Skis로 한국에서도 유명한 Lito 의 스킹을 보시면 바로 이해하실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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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to Tejada-Flores>

 

제가 이렇게 장황하게 그 꼬마 아가씨의 스킹을 분석한 이유는 그런 스킹이 좋으니 그렇게 스킹하자고 주장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은 신정사회와 왕정사회를 거쳐 민주공화국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그 발전의 의미는 각 개개인의 그 자체로서의 목적성, 다양성과 개별성을 인정한다는 것이죠. 스킹의 기술도 어느 하나의 진리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스키를 직업으로 하는 스키선수 혹은 풀타임 스키강사와 달리 일반 아마추어 스키어들에게 스키는 삶을 재충전하는 레크리에이션(recreation)입니다. 이렇게 타든 저렇게 타든 본인이나 타인에게 안전하고 즐거운 스킹이라면 어떠한 문제도 없습니다. 

간혹 한국에서 오신 분들이 첫 날 스키장을 둘러 보시곤 

"캐나다 사람들은 왜 이리 스키를 못타요? 다들 빠딱 서서 후경으로 몸턴을 하네요?" 

이런 질문을 하시곤 합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그렇게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이 사실이니까요. 하지만 며칠 지나고 나면 질문이 바뀝니다. 

"아니, 여기 사람들은 저렇게 대충 타는 자세로 어디서나 잘 내려가네요? 참 희한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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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콤 백컨트리의 파우더에서 스킹하는 모습>

 

 

휘슬러와 같은 빅마운틴을 제대로 경험하시게 되면 처음엔 그 엄청난 자연환경에 충격을 받고, 곧이어 스키를 즐기는 그들의 태도에 문화적 충격을 받습니다. 이들에게 스키는 남과의 경쟁이 아닙니다. 본인 혹은 가족이 즐겁자고 타는 것이고 행복하자고 타는 것입니다. 남과의 상대비교는 적절한 정도일 때는 동기부여가 되니 좋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원래의 목적을 잊게 됩니다. '스키타면 즐겁다~~~!'란 것을 이들은 활기찬 행동과 입가에 가득한 미소로 보여줍니다.

 

그래서 조금만 생각을 바꾸면 스키의 고수란 '누가 레벨2를 땄느니 못땄느니'의 혹은 '누가 카빙을 잘하느니 못하느니'라는 어느 하나의 평가기준으로만 구분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스킹의 상급기술이 에징기술 하나로 정리될 수 없고, 피봇팅 기술 하나로만 이루어질 수 없듯이 다양한 여러 기술들이 조화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기술들이 조화롭게 균형을 이룬 스키어는 사면의 경사도와 상관없이, 정지사면이냐 부정지사면이냐에 관계없이, 강설이냐 파우더냐를 따짐없이 스키장의 모든 사면을 100% 즐길 수 있습니다. 이런 올마운틴 스키어가 가장 행복하고, 가장 안전하게 스킹을 즐기는 진정한 스키의 고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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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月白雪白 2018.01.02 22:42
    멋있는 글입니다 ^^
  • ?
    엉터리농부 2019.02.17 10:32
    공감하는 내용의 글 잘 읽었습니다.
  • ?
    김씨아저씨 2020.08.11 12:04
    내가원하는 스키에 방향 인데...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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